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55
454 꺼어억!(3)
퍼퍼퍼펑, 꽈아앙!
제자들과 악살의 격돌은 격렬했다. 만만치 않은 파문이 청명산을 거칠게 흔들었다.
멀리 떨어져서 구슬프게 울고 있는 집주인들의 울음소리까지 더해졌다. 이해는 간다.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집에서 쫓겨났는데, 터전이 박살 나고 있으니 화가 날 수밖에.
뎅강!
무진은 바위 터의 윗부분을 수강으로 잘라내고, 앉아서 제자들과 악살의 혈전을 관전했다.
“너도 이리 와서 앉아.”
“안 도와줘도 돼요?”
“난 제자들을 약하게 키우지 않아.”
“너무 험하게 키우는 거 같은데요.”
“전쟁이란 원래 다 저래. 자력이 아닌 조력을 기대하다 보면 살아남기 힘들어.”
“저러다 진짜로 죽을 수도 있어요!”
무진의 무사태평에 구양옥설은 안절부절못했다. 철호는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격전의 중심에 선 서문호의 위태로움이 안쓰러웠다.
“칠살 중 천살 다음으로 강하다더니 제법이긴 해.”
“강한 건 둘째 치고, 살기가 너무 짙어요!”
구양옥설은 악살의 살의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한에 사무친 절절한 살의였다. 이해는 되었다. 무진의 주둥이에 털렸으며, 각고의 노력이 허무하게 뒤틀렸다. 누구라도 열이 받고, 분노할 일이긴 했다. 특히 무진의 여유로움이 굉장히 거슬릴 것이다.
‘제자들을 사지에 밀어 넣고 이래도 되나?’
자긴 안 죽는다 이건가?
구양옥설은 분노를 폭발시키는 악살의 살의에서 서문호만은 다치지 않고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분노해도, 평온한 철호보다는 보살이었다.
‘그나저나 대단해!’
저 가공할 악의와 극렬한 혈기로 똘똘 뭉친 악살과 정면 승부를 하는데도 두 사람은 밀리지 않았다. 철호와 서문호가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칠살을 몰아붙일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래도 이 인간에 비하면.’
상리를 벗어난 무진과 비교하자 구양옥설은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전력이든, 아니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버지도 이 인간에게 얼마나 처맞았던가. 악살의 악에 받친 살의와 분노가 허망하게 다가왔다.
꽈득!
구양옥설의 평가대로 악살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천운권의 제자들을 사로잡아 혈불과 교환할 요량이었거늘. 사로잡기는커녕 밀리고 있었다.
꽈아아앙!
악살의 수강인 혈옥수를 피하지도 않고 주먹으로 맞상대한 철호였다. 둘 사이의 파문이 사방으로 번지면서 우열을 가리려고 하지만, 팽팽한 줄다리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스왁!
철호와의 일대일로도 악살은 우위를 확실히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 서문호의 예측에 의한 검격을 막아 내기는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강과 쾌.
서로 어울리지 않는 영역이지만, 철호와 서문호의 합격은 완전무결에 다가섰다. 의식하지 않고서도 호흡마저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악살로서는 그 호흡을 흐트러뜨려야 하는데 파고들 여지가 많지 않았다.
‘……강하잖아.’
인정하기 싫은 현실과 마주한 악살은 치를 떨어야 했다. 천운권도 아니고, 그 제자들 때문에 발을 묶일 줄이야.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손해를 보고 있었다.
‘이놈이 나와 동급이라고?’
얼굴만큼이나 철호의 강인함은 위협적이었다. 강기로 무장한 혈옥수와 부딪칠 때마다 뼈를 울렸다. 더욱이 철호보다 파괴력이 부족할 뿐, 서문호의 검은 일체의 군더더기 없이 정교했다. 마치 자신의 다음 수를 읽어 내는 것 같았다.
‘소문이 과장된 줄 알았거늘!’
예로부터 소문이 시끄러울수록 실제의 반도 되지 않는 것이 강호의 불문율이었다. 무공을 숨기는 진짜 고수와 달리 허세로 가득 찬 천운권과 그 제자들이라면 부풀리는 짓도 서슴없이 할 줄 알았다.
‘소문보다 더해!’
악살의 분노가 차갑게 식어 갔다. 천운권의 변죽에 분노하여 작금의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했다.
“부술까, 말까?”
움찔!
이 빌어먹을 놈이!
천운권의 목소리가 들리자, 악살은 억누른 분노가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천운권은 주둥이를 한시도 쉬지 않고, 염장을 지르고 있었다.
“우릴 두고 한눈을 파시는군.”
“천하의 악살에겐 우리가 하찮은가 봅니다.”
찰나간을 파고 들어오는 철호와 서문호였다. 악살에게 추호(秋毫)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파괴력을 집중하여 극대화한 무쌍일점포가 뻗어 나갔다.
“건방진 놈들이!”
악살은 혈기흡마공을 극한으로 끄집어내야 했다. 붉은 혈기가 악귀처럼 형태를 갖추었다.
혈옥수의 혈옥만천으로 대응했다.
어둠을 피로 물들인 혈옥만천과 극점극도의 중첩을 이룬 무쌍일점포가 허공에서 격돌한다.
푸아아아앙!
둘 사이의 공간이 살얼음판이 부서지듯 파편이 되어 천지 사방으로 퍼진다. 어중간한 무위로는 버티기도 힘든 거력의 파문이었다.
스륵!
충돌한 직후를 노리고 들어오는 서문호의 검극이 예리한 궤적을 그렸다. 왼쪽 허리 아래에서 오른쪽 어깻죽지까지 붉은 선이 그어졌다.
촤아아!
악살의 혈기는 호신강기가 되어 육신을 갑옷처럼 덮었다. 그러나 호신강기로도 온전히 서문호의 검을 막아 내지는 못했다. 혈흡강기를 베어 내며 육신에 검흔을 새겼다.
악살의 상반신이 사선으로 갈라지며 핏물이 무복을 적셨다.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충격이 있었다.
큭!
악살은 기맥을 건드리는 검경에도 서문호를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애송이에게 치명상을 허용할 뻔했으니 이성을 상실할 지경이었다.
“죽여 버리겠어!”
핏빛의 혈기를 활화산처럼 뿜어내며 미친 듯이 달려드는 악살의 광기는 실로 대단했다. 어설픈 마음가짐으로는 대적하기 어려운 극한의 공포였다. 흡사 너 죽고, 나 죽자는 동귀어진을 방불케 했다.
채채채챙, 타아앙!
혈옥수와 청룡검이 어둠 속에서 혈광을 번뜩였다. 밀리는 와중에도 서문호는 흔들리지 않았다. 악살의 광기는 분명 심혼을 흔들어 댔지만.
‘이 정도쯤이야.’
사부의 평소 인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렇다고 악살을 경시하진 않았다. 검신을 타고 전달되는 혈기는 위협적이었다. 확실히 정상적인 쌍년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혼자였다면 도망쳤을지도 모르지.’
서문호에게는 인간 같지 않은 사부와 사형이 있었다. 이 정도 위기쯤이야. 공간을 차분히 검기로 도배하여 검막을 완성했다.
한 겹, 두 겹!
꽈아아앙!
청룡검막이 혈흡강기에 유리잔처럼 부서진다. 하나, 예측한 범위였다. 시간을 끌며 배후를 뒤쫓아 오는 사형의 주먹이 용서치 않을 테니.
슈웅, 꽈아앙!
악살에게 권을 내지른 철호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혈흡강기와의 충돌 후 전해진 반진력이 미묘했다. 찰나간 악살이 상식의 궤를 달리하는 보신을 펼친 것이다.
혈영종 극행 혈영이분.
극에 이른 보신은 이형환위와 비슷하지만, 위력은 천양지차였다. 서문호와 철호조차도 보법의 궤적을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절체절명의 순간 악살은 기척을 죽이고, 속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죽어랏!”
철호의 권공을 피해 내고, 서문호의 사각을 점한 악살의 소매에서 서른여섯 개의 유엽비도가 쏘아져 나갔다.
슈슈슈슉!
손가락보다 작은 유엽비도의 끝은 예리했으며, 산공독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상대를 죽일 때 결코 편히 죽이지 않았다. 그러한 성향이 전투에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타타타타탕!
유엽비도가 권공에 휩쓸리고, 철벽에 닿은 듯 불꽃이 튀었다. 기회를 잡았다고 여긴 악살의 얼굴에서 불신이 생겼다.
“……네놈이 어떻게?”
“좋은 공부가 되었다.”
악살의 혈영종을 본 철호는 단공보의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그렇기에 쉬이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보고 배운다는 개념 자체를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동물적인 감각과 천재성이 결합하여 완성된 경이로운 합작품이었다.
부르르르!
수십 년의 세월을 고생하여 완성한 보신을 한순간에 따라잡힌 악살의 안면에 흉신이 새겨졌다.
“네깟 놈이 감히!”
“두 번은 쓰기 힘들겠어.”
단숨에 모든 능력치를 폭발적으로 상승시키는 과정에서 오는 반발력이 엄청났다. 방금 철호는 단공보를 기존보다 배로 가속했었다. 그 여파가 고스란히 몸에 남아 있었다. 일순간 달아오른 육체는 화염에 달군 쇠처럼 뜨거웠다.
“나를 그딴 눈으로 바라보다니, 눈알을 파 주마!”
악살의 혈기흡마공이 극의를 넘어서 초월했다. 분노가 이성을 지배하자 본성이 경지를 넘어선 것이다.
화르르르!
악살의 타오르는 혈기가 반경을 넓혔다.
철호와 서문호도 가만있진 않았다. 전력을 다한 강기를 발산해 혈기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악살의 혈기흡마공이 변화를 하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불태우듯 격렬하게 타올랐다. 악의와 혈기가 육신을 뒤덮어 신형이 흐릿하게 보일 지경이다.
“애들아.”
무진의 심드렁한 부름에.
철호와 서문호는 즉각 움찔했다. 눈앞에서 악살이 살기를 미친 듯이 발산하며 달려들지만, 사부의 목소리는 언제나 뚜렷하게 들렸다.
“일각 안에 끝내겠습니다!”
“아니, 반각 안에 끝내겠습니다!”
미친년이 광기를 불태우고 있는데도 철호와 서문호는 사부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광기에 완전히 물들어도, 평소의 사부보다는 정상이니.
크흠.
무진은 헛기침으로 머쓱함을 달랬다.
‘조심하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평소에 잘 해 줬어야지.
마왕의 핀잔에 무진은 반성했다. 애들이 설마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다만,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은 맘에 들었다. 누가 더 지독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나를 우롱해!”
이쯤에서 종지부를 찍겠다는 철호와 서문호의 호언에 악살이 발작하며 더욱 광분했다. 실상,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혈기흡마공이 극한에 이르면 주변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었다. 진득한 혈기가 장막처럼 펼쳐졌으니, 싸울수록 내외력의 손실이 클 것이다. 그런데도 더 빨리 끝내겠다고 전의를 불태우다니.
‘기특하네.’
-뭐라는 거야? 저러다 실수하면 어쩌려고?
‘상이라도 줘야겠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악살을 혼자도 아니고, 둘이서 상대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시련도 극복하지 못하면 마신교와의 본격적인 싸움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더욱이 마신교는 악살처럼 무공만이 아니라, 사공과 사술에도 능했다.
‘칠살 따위에 쩔쩔매면 곤란해.’
달빛 아래 광기의 돌풍이 천지 사방을 휘몰아치는 중에도 무진은 느긋한 편이었다. 제자들의 결의와 각오를 믿고 기다렸다. 냉혈무정의 철왕과 독검의 본모습을 기대하며.
“정말, 안 도와줘도 돼요?”
“괜히 끼어들지 마라, 방해다.”
무진은 기대치 없는 구양옥설의 개입을 철저히 차단했다. 인질로 사로잡히면 귀찮았다. 전왕 시절 무진은 그 어떤 협상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까.
-넌 인질까지 쳐 죽인 놈이었지.
‘생판 모르는 연놈들을 위해서 죽어 줄 순 없잖아.’
당시에는 무림맹이 좋아하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으로 치부해 버렸었다. 그리고 그것이 효과가 좋았다. 인질로 위협하려던 마신교를 당황하게 해 역으로 공략했으니까. 그래서일까? 무진은 인질 교환이나 구출 작전에는 동원된 적이 별로 없었다.
‘내가 가겠다는데도 극구 말리더라고.’
-다 쳐 죽이는데, 너 같으면 보내고 싶겠냐.
대문파의 선남선녀가 사로잡히는 안타까운 상황이었지만, 무진에겐 마신교를 처단할 절호의 기회에 불과했었다. 이것이 바로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장점이었다. 나중에 숭고한 희생으로 포장해 주면 금상첨화고.
-지금도 그럴 수 있냐?
‘못 하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난 못 한다.
아후, 잔인해.
가족을 어떻게 죽여.
무진은 상관하지 않았다. 너무 자기 가족만 생각한다고 욕해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고무친일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까. 사람은 다 자기 상황에 맞춰 살아가기 마련이다. 당연하게도 나와 내 가족이 아니니 객관적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