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7
046 남궁세가(1)
“자네, 그 소문은 들었나?”
“소문? 소룡대회는 시작하지 않았잖아.”
“역시 내 생각대로 느리군. 제갈세가의 현악검 알지?”
“제갈세가를 대표하는 오검이잖아.”
“현악검이 단 두 수 만에 깨졌다더군.”
“진짜? 상대는 누군데?”
사람이 모인 자리가 있으면 제갈세가의 현악검이 거론되었다. 절정의 벽을 허물고 초절정의 초입에 이르렀다고 알려진 현악검이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으니, 입이 가벼운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먹잇감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호사가도 바보는 아니다. 적당한 얘깃거리로 사용할 뿐, 제갈세가가 나설 명분은 만들지 않았다. 적절한 선에서 이득을 챙겼다.
“일승일패가 대체 뭐야?”
“그거 말인가? 허어, 이런! 슬슬 목이 타는구먼.”
“내가 쏨세. 됐나?”
“그자도 소룡대회 출신이더군. 그건 다들 알지만, 난 좀 다르지. 그날의 대결을 내가 봤거든.”
“봤다고?”
“내가 여기 토박이잖아. 소룡대회 한두 번 보나. 당시에 한동안 회자됐었지.”
“실력이 월등했어?”
“아니, 그 반대야. 일차전에서 탈락했어. 이뿐이면 그냥 탈락한 무지렁이인데, 비무 대회에서 질질 짜며 살려 달라고 빌었거든.”
“그런 자가 현악검을 이겼다는 거야?”
“그러니까 대단한 사건이지. 얼마나 분하고 억울하고 창피했으면 그 오랜 세월 동안 무공을 갈고닦았겠어. 자네, 그게 쉬운 일일 것 같나?”
“어렵지. 난 못 해. 원한이 뼈에 사무쳤나 보네.”
“당당하게 갚아 주고 싶었던 거지.”
무진의 평가가 올라가는 계기가 되었다.
현악검을 이겼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의도치 않게 처절했다. 무인에게 있어 자존심은 목숨보다 중요하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수십 년의 적공을 쌓아 반전을 이룩했다.
인간 승리의 표본, 미담으로 평가받기에 그럴듯했다. 사람들은 잘나가는 무인의 잘난 행보보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는 삼류무인의 성장을 더 선호한다.
“멋지긴 하지만, 제갈세가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 같은데?”
“명색이 오대세가의 한 축인 제갈세가에서 정정당당한 대결에 수를 쓸까? 만약 그리하면 천하의 비웃음을 감당해야 할 거야.”
“모르는 소리 말게. 무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래도 대놓고는 못 하지. 설령 뒤에서 구린 짓을 해도 제갈세가는 힐난의 대상이 될 걸세.”
무진은 하루아침에 남궁세가 인근에서 유명인이 되었고, 덩달아 아들까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초절정고수를 아버지로 두고 있으니, 그 실력이 범상치 않으리란 기대가 있었다. 고착된 무림에서 삼류무인의 반전을 원하는 분위기였다.
기분이 한껏 달아올랐던 무진은 객잔에서 술판을 벌였고, 방에 들어와서도 자정이 넘을 때까지 퍼마셨다. 다음 날 보기로 했던 황보장성을 저녁때 만나서 함께했다.
내가 술을 마시는지, 술이 나를 마시는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 술판이 끝났다. 말술이라며 잔뜩 호기를 부렸던 황보장성은 뻗어서 일어나질 못했다.
이른 아침 태진, 철호, 황보진운은 함께 남궁세가로 가서 배첩을 내어 주고 신분을 확인받았다.
소룡대회는 삼일 후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
“몰라보네.”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얼굴 알리기가 쉬운 줄 아세요. 그리고 대부분 이름은 알아도 얼굴은 잘 몰라요.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물어보세요. 얼굴로 별호나 이름을 맞힐 수 있는지.”
딴엔 인기를 실감하려고 했거늘, 무진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가자 소문만 무성한 쭉정이가 된 기분이었다. 발 없는 말도 천 리를 간다고 하는데, 다들 소식통이 느렸다.
개방이나 하오문은 뭘 하고 있는지 원.
게을러터졌다.
‘한때는 어딜 가도 알아봤는데.’
-그 난리를 쳤는데 못 알아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전왕이었을 땐 가는 곳마다 얼굴을 알아보는 자들투성이였다. 그래서일까, 조용히 식사를 못 했다. 유명인의 비애라고나 할까. 너무 유명해서, 너무 많이 죽일 수밖에 없는 비운의 운명이었다.
알아보면 귀찮은 일이 발생하니, 알아볼 수 없는 주검으로 만들어야 편했다.
대륙 전역으로 명성을 날려 본 무진이라 감흥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현시대의 정보력이 얼마나 되나 살펴봤을 뿐이다.
“뭘 또 그렇게 진지하게 설명을 해.”
“실망하지 마세요. 곧 대륙에 명성이 자자해질 거예요.”
무진은 황보세령의 오해를 굳이 해명하진 않았다. 세간의 평가에 연연해할 때는 지났다. 남들의 평가보다 내 아내와 딸의 평가가 중요했다.
그럼 아들은? 응?
우리 아들은 현재 소룡대회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고. 허울뿐인 평가에 연연해할 때가 아니라니까. 걸음마도 떼기 전에 겉멋 들면 위험했다.
“태진이 이 녀석은 또 어디 갔어?”
“접수하러 갔어요.”
“아, 그렇군.”
“관심이 없네요, 정말.”
“오해야.”
“예, 그러시겠죠. 아버님.”
아들을 노리는 황보세령의 비꼼에도 무진은 반박은커녕 헛기침만 나오고 말았다.
거! 시아버지가 될지도 모르는데 무안을 주냐.
눈치가 없는 거야, 안 보는 거야?
후자 같아서 서글프다.
나 때는 말이야, 이렇지 않았다고.
-유유상종이지.
‘닥쳐.’
-경각심을 좀 가질 필요가 있지 않나.
‘그건 하수들 얘기고.’
무진은 늦은 점심에 일어났다.
숙취는 없었다. 주신을 만나 뵈어야 할 음주에도 육체는 완벽함을 유지했다. 피곤해서 늦게 일어났다기보다는, 그냥 늦게 일어난 거다. 그럴 때가 있지 않나, 정신이 들었음에도 이불보에서 나오고 싶지 않을 때.
“사돈, 해장술 어떻습니까?”
“……날 죽이지 그러나!”
어제 사돈이 될지도 모르는 황보장성과 진지하게 대화의 장을 열었다.
죽엽청 열세 병부터 횡설수설하긴 했어도.
피부는 푸석푸석하고 눈이 퀭한 황보장성이었다. 어제 자정까지는 그래도 기억이 나는데, 이후는 영혼이 승천했다.
일어나 보니 침대였다.
‘술 귀신이 따로 없군.’
어제 그리 퍼마시고도 저 탄력 넘치는 피부와 생생한 두 눈은 마치 거짓말 같았다. 술을 공력으로 날려 버렸으면 또 몰라, 저 인간의 주량은 가히 무량(無量)의 극에 이르렀다.
‘무량수불!’
평소 술을 싫어하진 않지만, 공적인 자리에선 될수록 자제하는 편이었다. 소호에서 그 난리를 치고 얌전히 지내나 했더니, 오자마자 대형 사고를 쳤다.
간신히 소문 퍼지는 걸 막아 놨는데, 이 인간은 사고를 끊임없이 몰고 다녔다. 어떻게 된 게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그런 주제에 사돈이란다.
이러는데 술이 안 당기겠나? 어제 진짜 죽도록 마셨다. 이 인간이 죽나, 내가 죽나, 한번 해 볼 기세였다. 하지만 이 인간을 평범한 잣대로 재단해선 안 되었다. 뭘 해도 괴물 같은 인간이었다.
푸념 섞인 눈으로 무진을 보던 황보장성의 옆으로 객잔 주인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미소를 지었다. 왼손바닥을 오른 손바닥에 살포시 얹어 완벽한 형태를 갖추었다.
“다섯 냥입니다.”
“……?”
황보장성은 무진을 보았다.
무진은 왜 날 봐, 라는 표정을 짓더니 획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와 관계없으니 알아서 잘 해결하라는 의도가 명확했다.
하아,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술 내기를 하기는 한 것 같았다.
황보장성은 소매에서 전낭을 꺼내 주인에게 돈을 건넸다. 돈을 받은 주인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나?”
“은전이 아니라, 금전으로 다섯 냥입니다.”
“……?”
이 인간, 나 죽이고 대체 얼마나 처마신 거야? 술값으로 금전을 쓸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은전으로 따지면 자그마치 백 냥이나 되었다.
“대체 뭘 마신 겐가!”
“저희 집 특제 술과 요리를 쫌 많이 시켰습니다. 닷 냥도 재료비만 건질 셈으로 깎아 드린 겁니다.”
“……다 먹기는 하고?”
“그럼요, 저분처럼 식성이 좋은 분도 처음 봤습니다. 제가 특별히 공짜로 안주 몇 개를 더 드렸습니다.”
주인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황보장성도 더는 물어보질 못했다. 술과 음식을 남기고 바가지를 씌웠다면 따져 묻기라도 할 텐데, 다 처먹었단다.
계산이 끝나자, 언제 그랬는지 모를 만큼 화사한 미소를 짓는 무진이었다.
“도전은 언제든 받아들이죠.”
“평생 술값 안 내겠다는 말로 들리네만.”
무진은 뜨끔했다.
공명심과 자존심이 살아 있는 황보장성이 이토록 솔직하게 패배를 인정할 줄이야. 다섯 번은 더 긁어먹은 후를 기대했거늘. 시대가 생각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역사의 파격인가? 작은 변화가 쌓이고 쌓여 커다란 변혁을 일으키는. 혹, 마신교가 준동하지 않을지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군. 대체 뭘 했다고 변하기를 바라는 거야! 양심은 있나!
‘넌 왜 매사에 부정적이야! 긍정적이어야 안 되는 일도 잘 되는 거라고.’
-뭐라도 하고서 긍정적으로 보라고 하든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
‘나대지 말라며.’
-금분세수할 거면 아예 찍소리도 하지 말아야지. 가는 곳마다 사고란 사고는 다 치는 주제에.
사람이 어떻게 쥐 죽은 듯이 사나.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무림에서 금분세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 혼자 손 씻고 깨끗하게 끝낼 만큼 무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단 발을 담근 이상,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사지(死地)가 바로 무림이었다.
“현악검을 쓰러뜨린 이상, 도전하는 자들이 많이 생길 걸세.”
“공명심은 무인의 숙명이지 않습니까.”
“인지하고 있으니 다행이네만, 매사에 조심하게. 무공이 강하다 하여 그게 전부인 건 아니지 않나.”
“아무렴요.”
조심은 해야지.
무림이.
날 어설프게 건드린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기둥뿌리가 뽑히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점심은 제가 삽니다.”
“자넨 소룡대회에 관심이 없구먼.”
“관심이 없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등 떠밀린 건 아니고?”
이 양반, 돗자리를 펴도 되겠는걸.
무진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저녁도 제가 사겠습니다.”
황보장성은 알면서도 넘어가 주었다. 저 인간의 성향상, 인정을 받아 봤자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전에 분명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 부분만큼은 술자리의 가벼운 안줏거리가 되어선 안 되었다.
“일단 내 방으로 가지.”
“저는 밖에서도 괜찮습니다.”
“점심, 내가 사지.”
“저도 방이 더 좋습니다.”
이 철면피가!
무진은 의구심이 들어 물었다.
“전낭이 비었던데요.”
“지부에 말해 놓겠네. 자넨 날 뭐로 보는 건가!”
“전 사돈을 믿고 있습니다.”
“그만하고 들어가세.”
곳간이 들어차야 인심이 난다고 하더니, 오대세가의 명성은 부와 직결되어 있었다. 객잔 주인도 황보세가를 담보로 하니, 별말 없이 고분고분했다.
‘송호문을 대고 외상을 치르긴 어렵겠지?’
-민초들조차도 싫어한 이유가 있었군.
전왕의 별호를 대고 공짜로 마시긴 했지만, 무림맹에서 갚아 주겠다고 했었다. 자기들을 위해서 수고를 했으면, 그에 대한 대접은 해 주어야지.
주고받는 금전 속에 신뢰를 꽃피운다고 했어.
‘우리 아들이 우승할 테니, 얼마 안 남았어.’
-내 제자다, 그만 부려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