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71
470 차도살인지계(3)
대로를 지나 번화가로 들어섰다.
번화가를 지나자 홍등가가 나왔다. 서신에 적힌 건물의 지하로 들어갔다. 빛이 들지 않는, 낮과 밤을 모르는 인생 막장들이 모인 음산한 장소였다.
제자들에게 임무를 맡기고, 무진과 철양진인은 자리에 앉아 도박을 즐겼다. 판을 돌릴 때마다 쌓여 있던 돈이 빠져나갔다.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은자로 이천 냥을 잃었다.
‘어젯밤에 돼지꿈을 꿨더니 재신이 왔구나!’
도박패를 돌리는 탈혼도수(奪魂賭手) 채탁은 기꺼웠다. 적당히 잃어 주면 신나서 배로 거는, 그야말로 완벽한 호구였다. 자기들이 호군 줄도 모르고, 도박의 고수인 줄 착각하는 멍청한 놈들이었다.
“강 제, 육 같은데?”
“삼입니다.”
채탁이 패를 까자 육이 나왔다. 안타깝다는 미소를 지으며, 이쯤에서 그만하라고 했다.
“그만하긴 뭘 그만해, 어서 돌려.”
“미안해서 그렇지요.”
“도패 새끼가 누굴 동정해!”
“죄송합니다. 손님!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봐주십시오.”
욕을 먹었음에도 배가 부른 채탁은 히죽였다. 이런 놈들의 특성은 거의 다 비슷하다. 자존심을 조금만 긁어 주면 알아서 개털을 자처했다.
순식간에 삼천 냥을 더 잃었다. 적지 않은 액수로 하루에 벌어들이는 금액을 월등히 넘어섰다.
채탁은 마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한 냥을 돌려주었다.
“가지고 가서 목이라도 축이시죠.”
“이게 누굴 거지로 아나.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어떻게 반 시진도 안 돼서 오천 냥을 따. 이거 다 사기잖아.”
“어허, 손님! 영업장에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곤란하긴 뭐가 곤란해. 어서 돈 돌려주지 않으면 가만 안 둔다!”
“이런, 이런! 이봐, 여기 손님들이 돈을 돌려 달라고 억지를 부리는데 정중히 타일러서 보내 드려.”
채탁이 신호하자, 덩치들이 나타나 무진과 철양진인을 둘러쌌다. 도화지도 아니고 얼굴을 칼로 그어 놓은 자들이 인상을 찌푸리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손님, 그만 나가시지요.”
“이 새끼들이 내가 누군지 몰라!”
“누군뎁쇼?”
“천권 대협이시다.”
“아아, 대단한 분이시군요. 그런 분한테 대접이 박할 순 없지요. 애들아, 조져!”
채탁은 애들한테 맡기고 일어섰다. 주제 파악 못 하는 진상들은 한 번 제대로 터져 봐야 정신을 차렸다. 말로 해서 알아들을 거면, 도박에 중독되지 않았지. 흠씬 두들겨 맞고, 팔다리가 하나쯤 잘려도 다시 찾아오는 놈들이 허다했다.
쿠다다당, 크아아악!
부서지고, 비명이 들렸다.
채탁은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서다 망연자실했다.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일어서서 돌아선 지 얼마나 됐다고, 일곱이나 되는 애들이 전부 나가떨어져 골골거리고 있었다.
“……무인이구나!”
“내가 분명 천권 대협이라고 했다.”
“그런 허무맹랑한 별호…… 설마?”
“어때, 이제 좀 감이 오시나.”
채탁은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 알아봤다. 사실 못 알아본 자신이 병신이기는 했다. 현 무림을 떠들썩하게 한 천하망종을 어떻게 몰라볼 수 있었을까? 그래도 무한에는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다.
“여길 누가 운영하는 줄 알고 온 것이오?”
“누군데?”
“녹수연맹의 맹주이신 녹림왕이십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어서 내 돈 내놔.”
판을 뒤집는 명백한 억지였다. 실상, 채탁은 수를 쓰지도 않았다. 순수 실력으로 호구를 벗겨 먹었을 뿐이다. 그건 둘째 치고, 이곳은 녹수연맹에서 운영하는 도박장이었다.
녹림왕은 분명히 만천하에 선포했다. 눈에 띄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무한에는 녹수연맹의 개파대전이 열리고 있었다. 남의 집 잔칫집에서 개진상을 떨 줄 누가 알았겠냐고.
‘어떡하지?’
채탁도 일류의 무공을 가지고 있기에 어중간한 놈이었으면 제압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천운권이라면 승산이 없었다.
“사기를 치면 안 되지.”
“저는 사기 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잃냐고!”
“그거야, 실력…… 흐억!”
“내 실력을 못 믿는 모양인데, 어디 다시 해 보자고. 그래도 네가 이기면 물러나마.”
“정말이십니까?”
“그래.”
간이 콩알만 해졌던 채탁은 쾌재를 불렀다. 다른 건 몰라도 도박으로 자신을 이길 사람은 현 중원에도 많지 않았다. 하물며 이따위 실력으로 도전을 하다니, 천 번을 해도 누워서 침 뱉기였다.
채탁은 투자를 흔들었다.
“난 대.”
“저는 소로 하겠습니다.”
“대가 나와야 할 거야.”
“……예?”
무시무시한 살기가 도박장 안에 감돌았다. 내 돈을 따면 네 목이 따인다는 협박이었다. 이미 도박장의 손님들은 천운권의 정체를 알기가 무섭게 내뺐다. 조용한 가운데, 채탁의 귀밑머리에서 땀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이런 개새끼!’
채탁은 분노가 치밀었지만, 내색하지도 못했다. 화를 내면 가만둘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나오는 법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이건 그냥 날강도였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지.”
무진은 가볍게 주먹을 내질렀다. 망설이던 채탁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살포시 고개를 돌렸을 때 뻥 뚫린 벽면이 참혹한 현실을 대변했다.
꿀꺽!
대중소(大中小)에서 중이 나오게 하여 시간을 끌려던 채탁은 곤두선 솜털이 진정되지 않았다. 여기서 대가 아닌 중이나 소가 나오면 그 즉시 대가리가 사라질 것이다.
“패 돌리는 사람이 어디 갔나. 나 바쁜 사람인데.”
“……대입니다!”
“이겼네, 받고 두 배로 가자. 참고로 난 계속 대야. 알다시피 매우 크거든.”
“……그런!”
무조건 두 배로 걸겠다니, 채탁은 살면서 처음 당해 보는 종류의 협박이었다. 이딴 식으로 돈을 뜯는 인간은 본 적이 없었다. 한편으로 이딴 짓을 하고 여태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우드드득!
크아아악!
무진은 무심히 채탁의 새끼손가락을 톡! 하고 부러뜨렸다. 기구를 돌리려다 망설였던 채탁은 기겁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내가 생각한 시간보다 느리면 알지? 네가 가진 스물한 개 중 몇 개나 남아 있으려나?”
“헙…… 돌립니다!”
채탁은 고통을 호소할 생각도 못 하고, 패를 돌렸다. 투자의 수는 무조건 대가 나왔다.
‘호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로다.’
철양진인은 무진의 행패에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살아생전 본 적이 없는 동냥아치였다. 옆에서 지켜본 사람도 화가 나는데, 당사자는 머리 뚜껑이 열렸을 것이다.
어느새 잃은 판돈의 네 배를 땄다. 그런데도 무진은 만족 못 하고, 채탁을 몰아갔다.
‘조금 너무하는군.’
‘고기 먹기 싫은가 보군요.’
‘조질 땐 확실하게 조져야지. 암암.’
‘고기는 사랑입니다.’
이쯤 하고 끝내자고 했던 철양진인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고기와 술맛을 본 도인이 말코가 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말이 좋아 우화등선이지, 풀떼기만 먹고 하늘로 올라가는 일이 뭐가 좋다고.
“십만 냥이네. 내놔.”
“……제 권한이 아닙니다!”
“괜찮아, 애들 보냈어.”
“……그게 무슨?”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도박장의 벽면이 아예 박살이 나며 철호, 서문호, 육칠이 궤짝을 들고 나왔다.
“가지고 왔습니다.”
“십만 냥이겠지.”
채탁은 흉악한 놈이 들고 있는 궤짝을 보고 기겁했다. 저건 녹수연맹에 바치기 위해 모아 놓은 자금이었고, 액수는 족히 십오만 냥은 되었다.
저걸 다 가지고 가면 자신은 귀광에게 죽는다. 귀광(鬼狂)은 이 도박장의 주인이며, 돈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악독한 인간이었다.
“안 됩니…… 커억!”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딨어.”
무진은 사정하는 채탁을 냅다 발로 후려쳤다. 알아도 막지 못할 발길질에 차인 채탁은 벽면을 부딪치고 튕겨 나왔다. 피를 토하는데도, 기어 와서 사정했다.
“……가시면 저는 귀광에게 죽습니다!”
“귀광이 누군데?”
“이 도박장의 주인입니다.”
“어떻게 생겼어.”
“눈이 한 개라서 안대를 하고 있습니다.”
채탁이 인상착의를 설명하자, 철호가 대신 답을 해 주었다. 주먹에 묻은 피를 살짝 핥으면서.
“이승에서는 해코지하지 못할 거야.”
“그게 무슨…… 설마?”
“충성을 하겠다면 말리진 않아.”
“……아닙니다! 살펴 가십시오, 형님!”
철호의 대응에 무진이 흡족한 미소를 짓자, 철양진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콩 싶은 데 콩이 나는 순리를 거부하고 싶을 지경이다.
“가자, 오늘 안에 다 털려면 시간 없다.”
“예, 사부님!”
***
녹수연맹은 무한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찬물을 끼얹은 듯 살벌한 분위기였다. 개파를 축하하기 위해서 온 방문객들도 얼어붙은 공기에 숨을 죽여야 했다.
개파대전은 문파의 잔치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날에 천운권이 벌인 짓은 용납하기 어려운 만행이었다. 설령 서로 간에 감정이 쌓였다고 해도 최소한의 선이라는 게 있었다.
녹수연맹에 속한 도박장, 기루, 염왕채를 털어 버린 일은 단순히 협객행으로 포장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최소한 개파대전이 끝나고 나서 벌였다면 또 모를까.
천운권이 장부를 유포하여 녹수연맹의 치부를 드러냈음에도, 무림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천하망종이라더니, 선을 넘었군.”
“아무리 그래도 남의 집 잔칫날에 앞마당에서 똥을 싸다니, 미친놈이 아닌가.”
“녹수연맹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천운권 때문에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구나!”
녹수연맹의 개파대전에 초대를 받은 문파와 무인들은 천운권의 행위를 규탄했다. 비리 장부에 적힌 내용이 충격적이긴 해도, 천운권은 해선 안 될 짓을 하고 말았다. 녹수연맹이 이대로 넘어가지 않으리라 보았다.
다수의 예측대로 녹림왕은 녹림대전으로 채주들을 전부 소환했다. 개파대전 중이라, 채주들의 소집은 곧바로 이루어졌다.
녹림대전 안의 공기가 무거웠다.
천운권으로 인해 녹수연맹은 앞으로도 씻지 못할 치욕을 얻었다. 두고두고 이날을 기억하며 조롱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 새끼 어디 있는지 찾았어?”
“그것이…… 송구합니다!”
“누가 그딴 말 듣자고 했어! 어서 찾지 않고 뭐하는 거야!”
“이놈이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없어졌습니다!”
채주들은 녹림왕의 분노에 안절부절못했다. 대전을 가득 메우는 기세에 숨조차 마음대로 쉴 수 없었다. 사위를 제압하는 압도적인 기운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을, 내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다!”
분노한 호랑이가 이럴까, 채주들은 맹주가 어떤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녹림과 강제로 통합한 장강채의 채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아는 최강의 고수였던 수라도와도 격이 달랐다.
‘이젠 오왕의 말석이 아니다!’
‘천하를 호령할 주인이시다!’
채주들은 바짝 엎드렸다. 만일 저 분노가 자신들을 향한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한편으로 이제는 맹주를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했다. 실상, 이 구역은 장강채와 연관이 많았다. 그들을 위해서 이처럼 분노하는 모습에 감동했다.
“왜 대답을 못 해! 다들 꿀 먹은 벙어리들이야!”
“맹주님, 잠시 고정하십시오. 채주들이라고 해서 찾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소춘풍이 맹주를 만류하여 채주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피력했다. 그러자 채주들은 소춘풍을 달리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녹수연맹과는 어울리지 않아서 조금은 얕보고 있었던 것이다.
“본맹은 규모에서 무림맹이나 흑룡성에 뒤지진 않습니다. 그러나 정보력에서는 그들에 비해 많이 떨어집니다. 그로 인해 이번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정보력이 없어서 그 망할 새끼를 잡아 오지 못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천운권의 배후는 무림맹입니다. 당연히 개방에서 정보를 내어 주고 있을 테지요. 놈이 어디 있는지 찾아도, 우리가 움직일 때쯤엔 도망치고 없을 겁니다.”
“그래서 놔두자고?”
“당연히 아닙니다. 하오문을 이용한다면 천운권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못 찾아도 나쁘진 않습니다.”
“그러니까 천운권을 이용해서 하오문을 압박하고 흡수하자는 거구나.”
소춘풍의 암계에 채주들은 소름이 돋았다. 단순히 천운권을 잡아서 족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하오문을 먹어 치울 명분을 세웠다. 그렇게만 된다면 녹수연맹의 앞날은 탄탄대로였다.
‘겁 많은 먹물쟁이인 줄 알았더니, 무서운 놈이구나!’
‘앞으로 잘 보여야겠다.’
녹림왕과 군사가 함께하니 두렵지만, 또한 든든했다. 녹수연맹이 허울뿐인 연합체에서 끝나지 않을 거란 신뢰가 생겼다. 연맹의 설립이 무림맹과 흑룡성을 자극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조용한 가운데, 장필도가 채주들을 둘러봤다.
“뭐하냐, 너희들?”
“예?”
“들었잖아. 아니면 내가 다시 설명해 주랴?”
“당장 하오문으로 가겠습니다!”
채주들이 꼬리에 불이 붙은 듯 대전을 빠져나갔다. 한시라도 빨리 하오문을 압박해야 했다. 이번 일은 채주들에게도 맹주의 눈에 들 기회였다.
대전 안이 조용해졌다.
장필도는 형님의 계책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걸 두고 일석이조라고 해야 하나?”
“일석삼조입니다.”
무한의 도박장, 기루, 염왕채는 녹림이 아닌 장강채의 수라도가 운영했던 곳으로, 통합 이후에도 장강채의 채주들이 관리를 해 왔다. 수입이 짭짤한 편이나, 연맹을 세운 이상 쳐 낼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대놓고 쳐 냈다가는 기껏 통합한 장강채의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기에 내버려 두었었다.
형님의 난장판으로 인해 쳐 낼 명분도 쌓고, 하오문을 흡수할 수 있게 되었다. 설령, 흡수가 어렵다고 해도 녹수연맹엔 이득이었다.
“송호문을 쳐야겠지.”
“그렇습니다. 크크크!”
분란을 일으킬 요소를 없애는 데 이보다 좋은 방법도 드물었다. 형님에게 한 수, 아니 세 수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