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72
471 상명하복(1)
가문의 주인은 허상에 불과했다. 대외적인 위상은 추락한 지 오래였고, 실권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목소리를 낼 때마다 질타의 연속이라 자신감도 추락했다.
“빌어먹을!!”
가문의 위상을 되돌리고, 내실을 다지기 위해 분골쇄신했었다. 그러나 자신을 따르는 수족들이 하나둘 바뀌더니, 더는 명령을 듣지 않았다. 차라리 가문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으면 명분이라도 있을 텐데, 현재로선 최선이었다.
가문을 다스릴 경험의 부족과 역량의 차이를 뼈저리게 체감했다. 총관은 아주 교묘하고 지능적인 자였다. 절대 본인을 내세우진 않는다. 자신이 하는 걸 두고 본 후, 보란 듯이 실력을 드러냈다.
하아!
가문의 직계혈족조차 총관의 말을 따르기 시작하면서 소외되고, 고립되었다. 명백한 주객전도에도 총관을 나무랄 수도 없는 처지였다. 최선의 결과를 찾아내지 못한 이상, 무능함만 드러낼 따름이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과 가문의 쇠락이 가져온 파급력은 오롯이 자신을 압박했다. 주인으로서 통솔과 결단을 보여 주기에는 늦었다. 현재의 구도를 되돌리기는커녕 굳어져 갔다.
“가문의 녹을 먹는 자가 감히!”
반기를 들거나, 이득을 챙기려고 했다면 반전을 모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영악한 총관은 주관을 드러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자신조차도 진면모를 확신하지 못했다.
“무공만 완성하면 돼.”
권모술수로는 도저히 총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당장의 변화가 불가능하기에 폐관수련을 단행했다. 미완의 대기로 남겨진 광혈공을 대성하기 위해서. 하나, 가문의 누구도 대성은커녕 오성조차 넘지 못했다
천재로 불렸던 아버지도 실패한 무공이다. 부족한 자신이 과연 광혈공의 광기를 제어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해야 했다.
이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가문은 총관의 수중에 넘어가게 된다.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광혈공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했다.
이겨 내지 못한 갈등이 못마땅했을까.
“언제까지 뜸을 들일 셈이냐?”
망설임이 길어지자 뜻하지 않은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출수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을 쓰는 즉시, 육체가 갈가리 찢기는 광경이 뇌리를 스쳤다.
“……어떻게?”
“여긴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그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폐관수련장은 직계에게만 허락된 장소였다. 폐관수련장으로 들어오려면 출입구와 가주에게만 전해진 비밀 통로뿐이었다. 아버지에게 직접 들었기에 자신을 제외하면 누구도 알지 못하거늘.
‘변하지 않았다고?’
침입자는 가문의 비사를 알고 있는 자였다. 대체 누구기에? 조심스럽게 돌아섰다.
헉!
심혼을 관통하는 벼락같은 암광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버티려고 했으나, 스며드는 광기의 어둠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실 끊어져 버린 인형처럼 쓰러졌다.
“기뻐하거라, 원하는 대로 해 주마. 후후후.”
주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싶다면 그리해 줄 수 있었다.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껍질을 벗겨도 시원찮을 미친 새끼들이!”
수더분한 인상의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의 입에서 험한 욕이 튀어나왔다. 한데, 목소리는 노인치고는 젊었다. 하도 화가 나다 보니 목소리의 변조를 잊은 것이다.
크흠.
노파의 앞에는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남녀가 있었다. 수염이 갈기처럼 난 중년인, 분내가 진동하는 중년 미부, 눈매가 날카로우면서 호리호리한 청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동네 마실 나온 노인까지.
그들은 문주의 욕설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문주에게도 이번 사태는 화가 날 만한 일이긴 했다.
“그 새끼들이 또 우리 구역에서 난장을 깠다는 거잖아.”
“그렇습니다.”
“이 새끼들이 왜 우리한테만 지랄이야!”
“그게……!”
그들은 말을 하려다 말았다. 너무나 뻔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무림의 잔혹한 현실을 외면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실제로 가장 만만해 보이니 이러는 거다. 정보를 취급하는 중요한 집단이나, 태생적으로 도박장, 기루, 사채, 도둑, 소매치기, 점소이 등 각종 더러운 일들을 해 왔다. 그러니 저들이 우릴 어떻게 보겠는가.
그래도 억울하긴 했다.
무림의 관례가 있거늘,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찾아내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하루가 멀다 하고 행패를 부렸다. 엄포와 협박은 다반사로 이루어져 문파의 운영에도 지장을 주었다.
“무식한 도적 새끼들이!”
“차라리 명분을 중시하는 놈들이 낫지, 워낙 무식해서 탈입니다. 이놈들은 내일이 없이 행동합니다!”
하오문도 내일이 없기는 마찬가지긴 해도, 녹수연맹과 척을 지기에는 부담이 컸다. 정파나 사파와 달리 이놈들은 정말 무법자들이었다. 연맹을 자처하기에 어느 정도는 선을 지킬 줄 알았거늘, 근본은 어디 가지 않았다.
“이게 다 그 천운권 때문이잖아! 그 새끼는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리고 튀면 다냐고!”
하오문의 문주, 부약빙은 치가 떨리고, 이가 갈렸다. 녹수연맹의 협박은 천운권의 행패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데, 사고는 천운권이 치고, 날벼락은 하오문이 맞았다.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왜 우리한테 지랄하는 거냐고! 자다가도 억장이 무너져서 벌떡벌떡 섰다. 이 요망한 개새끼를 족치지 않고서는 분이 풀리지가 않을 것 같다.
“그 새끼는 지금 어디 있는데?”
“종적이 묘연한 데다가 개방에서 방해하는 바람에 여의치가 않습니다. 자칫 무림맹이 개입할 수도 있습니다.”
무림맹과 녹수연맹의 압박에 하오문의 등만 터지고 있었다. 천하망종 천운권과 엮이면 어떻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그 빌어먹을 놈의 난장판으로 인해 하오문의 기둥뿌리가 뽑히게 생겼다.
“대체 얼마나 해 먹은 거야?”
“족히 삼백만 냥은 되는 듯합니다.”
“확실해?”
“절반은 될 겁니다!”
산적 새끼들답게 배로 부풀리긴 했어도, 절반이어도 적지 않은 액수였다. 천운권은 녹수연맹이 운영하는 곳은 남김없이 털었다.
한데, 마냥 아무 이유가 없다고 단정하기도 힘들었다. 천운권은 녹수연맹 이전 수라도가 운영했던 장강채만을 노렸다. 서로 간의 악연은 중원의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천운권의 뒤끝이 장난이 아니었다.
수라도와의 악연을 이런 식으로 풀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죽어 버린 수라도는 편히 눈을 감기도 글렀다.
이쯤에서 끝이 났으면 손해를 감수할 수도 있겠으나.
-하오문은 마신교의 끄나풀이다.
설상가상으로 천운권은 하오문을 마신교의 연락책이라고 모함했다. 증좌가 있냐고 하니까, 내가 무림맹 감찰관이란다.
애초에 이유나 증거 따윈 없다는 의미가 되었다. 수라도에게 정보를 건넨 하오문을 엮여서 한꺼번에 손보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그러다 증거라도 나오면 대놓고 압박할 수 있고, 설령 없다고 해도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딴 개소리를 듣고, 우릴 노리진 않겠지?”
“상식으론 그렇지만, 개방이 의심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다른 건 몰라도, 천운권의 감은 믿는 것 같습니다. 알다시피 엮이면 이상하게 말려 들어가지 않습니까.”
천운권의 재앙과도 같은 악운이었다.
개방에겐 하오문이 눈엣가시라는 점도 작용했다. 천운권이 알아서 앓던 이를 빼 주겠다는데, 마다할 개방이 아니지 않는가. 내 손을 빌리지 않고, 적을 죽이는 것만큼 효율적인 방법도 드물고. 욕은 천운권이 다 먹고, 실리는 개방이 챙겼다.
빠드득!
부약빙으로선 이도 저도 하지 못하는 답답한 형국이었다. 녹수연맹의 말을 따르기도 그렇고, 마냥 무림맹의 뜻을 무시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증거라도 있다면 모를까, 심증만으로 이래도 되냐고.
그래서 복장이 더 터진다.
없는데 어떻게 아니라고 하냐고!
‘어쩌지?’
차라리 마신교와 아무 연관이 없다면 모를까, 정보의 이동을 살피면 단정하기 어려웠다. 내부적으로 선이 닿아 있을 수도 있다. 하오문주임에도 문파를 완벽히 통제하지 못한 결과였다. 이 중 누군가라면, 더더욱 골치가 아프다.
부약빙은 호흡을 가라앉힌 후, 마지못해 결단을 내렸다. 시간을 끌어 봤자 좋지 않았다.
“녹수연맹에 협조하겠다고 해.”
“하오나, 후일 독립하기가 만만치 않을 겁니다. 저들이 놔줄지도 의문이고요.”
“그런 걸 따질 만큼 본 문의 형편이 좋다고 보는 거야?”
“아닙니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녹수연맹도 천운권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압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오문에 의뢰하여 찾으라고 하는 것은 협박이었다.
상황도 좋지 않았다.
무림맹과는 협상이 될 턱이 없고, 흑룡성도 적극적으로 나서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하오문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곤란한데.’
그들 중 누군가는 더더욱 편치 않았다.
***
주변의 여건만 되었다면 선물을 잔뜩 싣고 돌아왔을 텐데, 숨는 척은 해야 했다. 세간의 시선 때문에 아내와 딸에게 선물 하나 맘대로 사 주지 못하다니, 남편이자 아빠로서 미안했다.
이 더러운 세상.
금목걸이, 청옥지, 칠채보광, 태청단, 자소단 등 소소한 선물밖에는 해 주지 못했다. 그런데도 아내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며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맙단다. 이 넓은 땅덩어리에 이렇게 검소하고, 사랑스러운 아내가 또 있을까? 근검절약의 표본이었다.
아내와 있을 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멍하니 집에만 있었더니, 벌써 열흘이 흘렀다. 시일이 언제 그렇게 흘렀는지 원. 간간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찾아와 안부를 묻기는 했다.
집에 왔어도, 왔다고 말을 못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세상이 평온했다면 아버지의 체면을 살려 드렸을 텐데.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건너뛰었다. 하도 건너뛰었더니 날짜가 너무 빠르게 흘렀다.
“많이 못 해 줘서 미안해.”
“당신만 건강하면 우린 아무래도 괜찮아요.”
“아끼지만 말고, 사치도 부리고, 좋은 것도 먹고 그래.”
“당신 없을 때도 알아서 잘 챙겨 먹고 있어요.”
내용만 들어서는 아내가 굶고 산다고 착각할 수 있었다. 송호문의 총관으로서 유진은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문파가 커질수록 유진의 위상도 높아져만 갔다.
특히 용무길이 부총관을 담담하면서 유진의 명성도 자연스럽게 올랐다. 부총관이 그처럼 활약하니, 총관은 얼마나 대단한가? 용무길의 처세술이 놀라웠다.
유진이 입고 있는 옷과 손에 낀 장식도 족히 수천 냥은 가볍게 넘어갔다. 눈에 띄는 화려한 옷을 즐기지 않아서 그렇지. 안목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유진의 옷과 장식은 아무나 사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항상 같이 있어야 했어.”
“그건 그래요.”
우리 유진이도 무조건 양보하진 않았다. 간혹, 부리는 투정과 애교에 살살 녹는다. 하긴, 우리 유진이 앞에선 금강불괴도 무용지물이긴 하지.
“최대한 빨리 끝낼게.”
“절 위해서 무리하진 마세요. 건강이 최우선인 거 알죠?”
“물론이지. 나만 믿어.”
“상공만 믿어요.”
아내를 위해서라도, 마신교를 최대한 이른 시간 안에 끝장을 내고 싶었다. 그러나 성급한 행동은 후일 큰 화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조급해질수록 아내와 딸을 위해서라도, 확실하고 안전하게 마무리해야 했다.
열흘간 사랑을 만끽한 무진은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와 딸을 보다 보니 시야가 굉장히 편협해졌다. 주변이 보이지 않는 신기한 현상을 만끽했다.
행복을 만끽하던 그때 청현 분타에서 육칠이 소식을 들고 돌아왔다. 빠르긴 해도, 예측했던 범위라서 놀라진 않았다. 깔아 놓은 밑밥들이 회수되는 시기였다.
“녹림왕이 조만간 청현에 당도할 겁니다.”
“하오문이 항복했나 보구나.”
“애초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마신교와의 접점은?”
“하오문의 문도 수는 본 방에 필적합니다. 그들 전부를 완벽히 통제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철저히 점조직으로 되어 있는 데다, 태생적인 한계로 내부의 파벌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오문주는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겠네.”
“하오문주는 이번 일을 계기로 파벌을 정리하고, 단속하려는 것 같습니다.”
후일 하오문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파악이 되진 않았었다. 그들은 전쟁이 시작된 시점에서 뚜렷한 활동을 했다고 보기 힘들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을 되돌아보면 더더욱 음지에서 마신교의 손발이 되었을 공산이 컸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하오문의 문도 수가 개방과 비슷하다고 해도 전력에선 한참 뒤처졌다.
이는 무진이 바꿔 놓은 현재와 미래의 차이 때문이다. 마신교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개방은 취선을 비롯한 핵심 수뇌부가 여태 살아 있지 못했다.
‘이제야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군.’
-마치 알았다는 듯이 우쭐해하지 마라.
개방은 치명타를 입고, 하오문은 수면 위에서 활동하지 않았음에도 마신교의 정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었다. 흡사 만상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무림은 속절없이 잡아먹혔었다.
‘하나도 아니고, 욕심이 과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대체 왜 그렇게까지 완벽을 추구하려는 걸까?’
-나도 묻고 싶은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