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74
473 상명하복(3)
송호문의 평화를 위해서 무진이 밖으로 싸돌아다니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것이야말로 노년의 평온을 가져올 유일한 해법이었다.
우린 뒷방의 늙은이로 살고 싶단다.
‘제발, 정사대전이라도…… 응?’
말도 안 되는 상념에 장로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서로의 눈빛에 믿어지지 않는 표정들이었다. 오랜 세월 함께했더니 이심전심공이 극의에 도달했다. 무진조차도 도달하지 못했기에 감탄이 흘러나왔다.
강천명도 혀를 찼다.
‘어떻게 이런 놈이 본 문에서 나왔을꼬!’
상리를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났다. 하지만 탓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무진의 등장으로 송호문은 역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문파의 명성과 규모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돌아가신 선조들을 뵐 면목이 생겼다.
‘그런데 안구에 눈물이!’
예전의 정이 가득하고 화목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문파의 규모는 커졌지만, 각박해지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피도 눈물도 없는 형님의 손자 놈 때문에 말년이 순탄치 않았다. 한창 젊었을 적 문파를 일으켜 보겠다고 아등바등했던 시절이 안타까웠다.
‘내 아들이지만 정말 대단하구나!’
한순간에 집무실의 분위기를 경직시켜 버리는, 가공할 존재감이었다. 강우경은 어떻게 이런 녀석이 나에게서 태어났을까, 매일 의문에 휩싸였다.
“문주, 알고 있었으면 언질이라도 주지 그랬어.”
“사소한 문제는 나중에 푸시고요. 제 아들이 돌아온 좋은 날이 아닙니까?”
빌어먹을, 무진 만능설을 쓰다니!
공세를 펼치려던 강천명은 따져 묻지도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여기서 물고 늘어지면 답도 안 나오는 사면초가에 몰릴 것이다.
“……그렇군.”
“첫째가 돌아온 좋은 날입니다. 풍악이라도 울려야겠습니다. 허허허허!”
돌아온 지가 언젠데!
장로들은 생각했다.
이놈도 똑같은 놈이구나! 하긴 피는 물보다 진했으니, 이 장로와 전 장로는 강 장로와도 거리를 두었다. 이 집구석의 본성이 어떤지를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겉으로는 대범한 척하지만, 언제든 뒤통수를 후리고도 남았다.
아버지의 뻔히 보이는 수작질에도 무진은 겸허히 받아들였다. 효를 중시하는 가문으로서 소홀함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이리 환대를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제가 좋은 분을 소개해 드릴까요?”
“그건 됐고, 어쩐 일이냐?”
“별건 아니고. 얼마 후에 녹수연맹에서 쳐들어올 거예요.”
“……!”
별거 아니긴 어디가?
생각지도 못한 폭탄 발언에 얼어붙었다. 한편으로 녹림왕이 이해가 되기는 했다. 무진이 녹수연맹에 한 짓을 고려하면 여태 조용한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너희들 싸웠냐?”
“피를 나눈 형제도 아니잖아요.”
그러면 같은 피를 타고 나온 네 동생은 왜 그렇게 쥐 잡듯이 잡냐! 그 말이 목구멍에 맴돌았지만, 강우경은 아들의 속내를 되짚어 봐야 했다.
녹림왕과 호형호제한다고 들었거늘. 어째서 녹수연맹이 쳐들어온다는 건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형제간의 의리도 중요하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요.”
“이 문제는 공과 사를 넘어서지 않느냐?”
“실전 경험도 쌓고, 이보다 좋은 일도 드물죠.”
“자칫 적지 않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하면 안전한 장소에서 훈련만 하겠다는 건가요? 태생적으로 무인은 피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처음부터 칼을 들지 말았어야지요.”
세상에 안전한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갖추어진 틀에서만 싸우기를 바란다면 무인으로서 자격상실이었다. 힘없는 평화는 없다. 평화를 이루려면 힘부터 갖추어야 했다. 암만 말로써 인본주의를 떠들어 대도, 현실이 어디 그런가. 하물며 무림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 봤자, 힘이 곧 정의였다.
“본 문의 힘을 대외적으로 알릴 셈이구나.”
“잘난 동생과 주변의 도움이 없다면 본 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보는 이들이 대다숩니다. 그러니 이제는 보여 줄 때가 됐습니다.”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앞서는구나.”
“산동세가와 제갈세가로 만족할 때는 지났습니다. 알다시피 그들은 전부 이빨이 빠진 호랑이도 되지 않았습니다.”
전력이 무너진 두 세가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순순히 무릎을 꿇었다. 하나, 아들이 강제로 차린 밥상에 수저를 올린 결과물에 지나지 않았다.
“알겠다, 준비하마.”
“태만도 문제지만, 심려가 지나치면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전면에는 나서지 않을 셈이구나.”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성의 없는 대답이긴 한데, 강우경은 아들을 믿었다. 송호문엔 아들이 가장 중히 여기는 존재가 무려 넷이나 있었다.
“아버지를 위한 특훈을 준비해도 되겠습니까?”
셋인가?
강우경은 소외당하는 손자가 안타까웠다. 황궁에서 또 어떤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질지.
“오빠는?”
“하늘!”
“여동생은?”
“땅!”
사상교육이 확실하게 잡혀 있었다. 얼마나 군기가 셌으면 나릉, 강철, 방몽이 눈을 희번덕거릴 때마다 사예와 하영은 바짝 얼었다. 천지 분간 못 하며 사내를 발아래 두려고 했던 사예와 하영으로선 임자 제대로 만났다.
‘이 새끼들이 사람이냐고!’
‘우리는 사람이라고!’
누가 여자로서 대접을 해 달래!
사람으로나 대접받고 싶었지만, 항변은 목구멍에서만 맴돌았다. 조금이라도 반항하거나, 저항의 기미가 보이면 구도의 방으로 끌려갔다. 말이 좋아 구도의 방이지, 들어가는 순간 겁천지옥이었다.
‘우린 여자도 아닌 거야?’
‘이 미모에, 이 몸매에!’
솔직히 자존심도 상했다. 이놈들이 사내로서 관심이라도 드러냈다면 억울하지나 않지. 음욕은 존재하지 않았다. 상명하복이 철저하다 못해 복장이 터질 지경이다.
어째서 사람들이 군대를 그토록 싫어하는지를 체감했다. 짜증 나고 억울해도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억울하면 송호문에 먼저 들어왔어야 했다. 아니면 먼저 간택을 받거나.
‘하필, 고자 새끼들한테 걸려서는!’
‘얘들도 이상하잖아!’
오대야객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았다. 강호의 야밤을 활보하며 이슬을 맞기도 부족한 시간이거늘. 널리고 널린 대륙의 보물들이 자신들을 부르고 있었다. 이 귀중한 시간에 얽매여 있다니 인력 낭비였다.
‘대접이라도 좋으면 말이라도 안 하지!’
‘문파의 식객에 불과하면서 견마지로는 너무하잖아!’
현 무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송호문이긴 해도, 오대야객을 잡아 두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대체 뭐 뜯어먹을 게 있다고 충견을 자처하는 거냐고?
그녀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당장은 뭉쳐야 했다. 서로 싸워서는 답도 안 나왔다. 그러나 온전히 믿기가 어려웠다. 둘 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기에 배신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고자 새끼들의 이간질이 분명한데도, 신뢰를 구축하기에는 불신의 골이 깊었다. 태생적으로 야객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언제부터 우리가 사람을 믿고 살았다고!
냥!
군기가 바짝 든 사예와 하영은 못마땅한 기색의 살찐 고양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온한 눈빛이 매우 거슬렸다. 이놈의 문파는 사람도 아니고 고양이까지 자신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냥!
“근무 중 이상무!”
냥!
절도 있게 앞발을 내리는 소였다.
이제 쉬라는 건가?
사예와 하영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들이 본 광경이 사실인지 되물어야 했다.
이게 무슨 묘(猫)족보야!
고자 새끼들이 우릴 놀리려고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왜 이렇게 진지하냐고!
군기가 어마어마했다.
빤히!
살에 파묻힌 고양이가 눈을 부라렸다. 너무 귀여워서 순간 가슴이 철렁 가라앉는 줄 알았다.
여동생들의 머뭇거림에 방몽이 서슬이 실린 예기를 발산했다.
“형님께 이 무슨 무례야! 어서 빨리 예의를 갖추지 못해! 구도의 방으로 가고 싶어!”
“……아닙니다!”
“여기가 안이지 밖이야!”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방몽은 자기도 가 보지 않은 군대의 맛을 보여 주었다. 원래 군역을 해 보지 않은 사내들이 군대를 더 잘 알기 마련이다.
고양이 앞에서 재롱을 부려야 했던 그녀들은 마치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들었다.
‘이 미친 새끼들아!’
‘너희들 대체 왜 이래!’
그녀들이 어떤 심정이든, 나릉이 간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소에게 손을 비벼 댔다. 어찌나 잘 비비는지 손에 주름이 사라진 지 오래다. 이 똥파리 같은 새끼들!
“이 무지몽매한 녀석들에게 소 형님의 위대함을 보여 주신다면 평생의 영광일 겁니다.”
냥!
소는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간 동생들의 부탁을 들어주려는 듯 그녀들을 향해 앞발을 까딱거렸다.
“어허, 형님께서 모처럼 상대해 주시겠다지 않느냐! 어서 감사의 예를 보이지 않고 뭐해!”
“……감사합니다!”
“끝은 항상 냥으로.”
“감사합니다냥!”
이것들이 맛 들렸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사예와 하영은 쌓인 게 많았다. 전력을 다하라고 했으니, 후회해도 우린 모른다. 우리가 언제까지 너희들의 장난질에 넘어갈 것 같아!
‘우릴 대체 어떻게 보고서!’
‘이딴 고양이쯤이야!’
말귀를 알아듣는 영특한 녀석이나, 고양이에 불과했다. 훈련을 받아 특별한 줄 알겠지만, 한낱 미물 따위가 감히 인간의 위에 서려고 하다니. 그 못된 버릇을 반드시 고쳐 주리라!
두둥!
크어어어엉!
그 주인에 그 영물이라고 했던가.
현신했다.
무진의 가르침을 받은 소였다. 인간의 건방진 태도를 단숨에 짓뭉개 주었다.
부지불식간 포효에 장악된 사예와 하영은 오줌을 지렸다. 저 무식한 앞발에 차이면 얼굴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백호!”
“……백…… 오라버니!”
소의 앞발이 가차 없이 휘둘러졌다. 너희 같은 동생 둔 적이 없다는 앞발질이었다.
‘우리만 당할 순 없지.’
‘역시 소 형님!’
‘위계질서는 중요해.’
내리사랑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할 시간이었다. 사람은 실제로 겪어 보지 않으면 체감하지 못하는 악습이 있었다. 그 못된 근성을 뜯어고칠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당장은 괴롭지만, 후일에는 고맙다고 할 것이다.
크아아앙!
쿠다다당!
사예와 하영은 구르고 또 굴렀다.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저 무시무시한 앞발에 걸리는 족족 나가떨어졌다. 발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갈기갈기 찢긴 고깃덩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보기 좋구나.”
자나 깨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정신이 번쩍 든 나릉, 강철, 방몽이었다. 주인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기에 긴장했다. 무조건 잘못한 일이 없나 살폈다. 마치 뭘 잘못했냐고 묻는 오랜 연인 같은 습성이었다.
“소, 이 녀석!”
냥!
현신을 푼 소가 발 구름을 하여 무진의 품에 사뿐히 안겼다.
주인을 기다렸던 영물로서 한껏 귀여움을 떨었다.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영물이라는 듯.
부르르!
바닥에 엎어진 채 숨을 헐떡거리던 사예와 하영에겐 가증스러운 마물 그 자체였다. 잔머리가 인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위계질서는 중요하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주군!”
항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나릉, 강철, 방몽의 태세에 무진은 흡족함을 감추지 않았다. 수하란 모름지기 주인의 의사를 무조건 반영해야 했다. 한 치의 거슬림도 용납할 수 없는 법이다.
“신입이구나.”
“많이 부족하지만, 본 문을 위해 분골쇄신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누가?
사예와 하영은 어떻게든 도망칠 궁리부터 했지만, 그들의 의사 따윈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다. 송호문의 특성상 한 번 들어오면 죽어서도 못 나간다. 영혼을 육체에 감금하여 저승으로도 도망칠 수 없다.
“주군의 성은을 기다리고 있었…… 헙!”
“내가 황제보다 대단하긴 해도, 단어 사용이 불손하잖아.”
일편단심은 중요했다. 일부다처제라는 시대의 반영은 의미가 없었다. 아내만으로도 무진에게는 벅찼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있다면 자신은 고금천하무적이었다. 도둑년들을 감히 아내와 같은 급으로 두려고 하다니 용납할 수 없지.
“시간 없으니까, 바로 가자.”
“……예?”
정신 못 차리는 사예와 하영을 설득하진 않았다. 하늘로 냅다 들어 올린 후, 속히 금제를 가했다. 도둑년에게 거창한 대의를 바라지도 않았고, 자잘한 일들을 처리해 줄 정도면 되었다. 따로 보물을 숨겨 놨다면 정상참작은 가능하다.
헉!
허공으로 솟구쳤다 극심한 통증에 사예와 하영은 기겁했다. 자신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람을 하늘로 던질 수는 있다. 그런데 구름까지는 너무하잖아.
‘……허공섭물이었다고?’
‘……인간이 어찌?’
신분이 바닥으로 추락했다고 여겼던 사예와 하영은 지하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기예는 신주이십일강이라도 하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범인이었다면 모를까, 무공을 익혔기에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알지, 내가 누군지?”
“……누구신지?”
“천권이다.”
“……천운권…… 헉!”
정체를 알아 버린 사예와 하영은 재차 기겁했다. 현재의 소문은 몰라도, 천운권의 악명은 강호 무림의 화제였다. 무공보다 성격적인 문제가 불거졌던 천운권이기에 작금의 현실을 올곧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 자식이 천운권이라고?’
-크크크크!
‘……?’
-크크크크!
마음의 소리를 확인한 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었다.
크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이 금제를 확인해 주었다.
나릉, 강철, 방몽은 그제야 사예와 하영을 여동생으로 받아들었다. 금제를 공유하지 않으면 진정한 남매가 될 수 없다. 이제 피보다 진한 상명하복으로서 송호문에 뼈를 묻을 각오로 살아가리라.
“쟤들 쓸 만하냐?”
“주군의 명이라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도록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너희들만큼만 해.”
“아무렴요.”
사예와 하영은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금제의 영향력은 무지막지했다. 기절을 거절하여 지옥의 고통을 중첩해 주었다. 송호문에 대악마가 있음을 알려야 하나, 자기 살기도 바빴다.
‘세상은 속고 있다고 진실을…… 크아아악!’
-크크크크!
금제는 제멋대로 판단했다. 주인의 성향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발전한 형태였다. 보통 금제를 걸면 특정 단어나 문장에 반응하게 되어 있는데, 무진의 금제는 지 꼴리는 대로 발동했다.
-크크크크크!
‘……왜?’
크아아아악!
의문도 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