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75
474 풀무질(1)
퍼억!
선수를 양보한다기에 냅다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난 또 막을 줄 알았는데, 일격에 바닥을 굴렀다. 당연히 쓰러진 상대를 발로 찼다. 상대는 단 이격에 부르르! 떨다가 기절하고 말았다. 허무한 결말에 희비가 교차했다.
가죽을 덧대어서 검게 물들인 무복에 금빛 수실이 멋스럽게 치장이 된 사내들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들로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결과였다. 동료의 복수를 하고, 그 앞에서 멋진 일장연설로 끝맺음을 했어야 했다.
“……두고 보자!”
“두고 보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을 못 봤는데.”
“네놈이 감히!”
“어, 지금 직급으로 하자는 거지? 금의위의 상명하복이 요즘 들어 해이해졌다고 하더니. 지휘사께서는 이 사실을 아시려나.”
“……실례를 범했소.”
금의위의 영반들은 식겁하며 급히 말을 돌렸다. 따지고 보면 관직으론 장원급제 한 산호가 일품이 높았다. 세월이 흐르면 금의위도 관직이 오르기는 해도, 현재의 위치를 고려하면 함부로 대해선 안 되었다. 문과 무로 나뉘어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관례가 있기는 하나, 한림학사를 대놓고 무시하진 못했다.
“그러게 그만하자고 했잖소.”
“대결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이다.”
패자의 버릇과도 같은 말을 남기고 금의위의 영반과 위사들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를 지켜본 학자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문을 중시하는 학자로서 무공을 천시하는 편이긴 해도, 금의위를 경시하진 않았다.
문무겸비는 학사의 당연한 소양이나, 실제로 그러기는 어려웠다. 하물며 전 대륙에서 날고뛰는 무의 천재들을 모은 금의위를 때려눕히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 어려운 일을 해냈으니, 시선과 대접이 달라질 수밖에. 승상과 병부상서가 걸리긴 해도, 부마가 된다면 관직에 날개를 다는 격이다. 황제 폐하의 눈에만 들어도 부귀영화는 떼 놓은 당상이었다.
“염 학사, 진정 대단하오!”
“과찬이십니다. 선배님.”
“나중에 잘되면 우릴 이끌어 주시오.”
“제가 할 말입니다.”
염산호는 학자로서 겸양을 떨어 주었다. 딱히 해 주고 싶진 않지만,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필요는 있었다. 승상과 병부상서를 적으로 두게 된 이상, 한림원의 학사들은 반드시 우군으로 두어야 했다.
한림원이 정치와 병권에서 실제적인 힘은 크지 않아도, 수많은 학자와 서생을 뒷배로 두었다. 그들이 들고 일어설 때의 파급력을 고려하면 승상과 병부상서도 함부로 경거망동하진 못할 것이다. 그들은 일종의 방패막이였다.
염산호는 한림원에서 일과를 마치고 퇴근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태진이 서 있었다. 혹시라도 있을 불미스러운 사태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미쳐서 날뛰지 않는다고 장담할 순 없다.
어떤 일이든 확신은 금물, 최선의 방비는 중요했다. 적이 그릇된 행동을 한다고 하여, 자신의 탓이 아니기를 바란다면 세상을 온전히 살아가기는 힘들었다.
완벽한 태평성대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그처럼 완벽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자가 있다면 당장 목을 베야 했다. 현실을 호도하고, 혹세무민의 선동가일 테니.
“오늘도냐?”
“대충 정리가 됐으니 북진무사급이 나오지 않는 이상은 괜찮겠지.”
“금의위 따위에 쩔쩔매면 아버지가 가만두지 않을걸.”
“할 말이 없네.”
금의위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당장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진 않을 망언이었다. 그만큼 사부와 그 아들이 괴물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문무를 병행하기가 수월치 않았어도, 무력 수위가 더 벌어진 것 같았다.
“종일 수련만 하는 거야?”
“철호 형을 이기려면 별수 없잖아. 아버지랑 같이 다닌 이상, 얼마나 강해졌을지 예측 불허야.”
“둘 다 그만하면 됐지 않나.”
“안분지족 좋지, 어디 아버지한테 말해 봐.”
염산호는 부자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팔이 안으로 굽지는 않는 것 같긴 한데, 사부의 성향을 단정하진 않았다.
집에 도착하니 우연히, 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길을 잘 아는 여인이 남의 집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강예 공주였다.
호위무사인 기희선은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태진을 볼 때 살짝 흔들렸었다. 둘이서 밖으로 나가는 걸 보면 확실히 무언가 있다. 들어올 때 기희선의 복색이 달라지긴 했지만.
“이젠 대놓고 찾아오시네요.”
“우리가 못 볼 사이도 아니잖아요. 곧 합방할 수도 있는데.”
“승상께서 참 듬직한 아들을 두시…… 아닙니다.”
“자꾸 이러면 아빠한테 이를 거야!”
황제와 공주의 긴밀한 관계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부녀 관계긴 해도 범인이 아닌, 황제와 공주였다. 저처럼 편하게 부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마신교에서 공주를 견제하는 연유를 알 것 같았다. 실상, 이렇게 몰래 나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나오는 거야?’
황실의 경비가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텐데. 태진이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들어갈 자신은 없다고 했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 통로가 있다는 의미였다.
산호는 찔러보기로 했다.
“제가 그렇게 좋습니까?”
“……닥쳐!”
얼굴이 붉어진 강예는 아니라고 단호하게 부정하진 못했다. 솔직히 염산호는 이제까지 봐 온 누구보다 잘생겼다. 얼굴 뜯어 먹고 살지 않는다고 해도, 잘생긴 사람하고 살고 싶었다. 더욱이 저 얄미운 면상과는 별개로 능력도 여타 사내들과 비교 불가였다.
“저도 공주님이 싫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공주님처럼 아름다운 분은 흔치 않으니까요.”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이럴 땐 어떤 대답을 해야 정답일까? 좋아할 법한 말을 해 줬더니, 말투에 가시가 있었다. 한데, 또 눈을 흘기고 있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말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로 가자.
애정은 차후의 문제였다. 후일, 사부님이 찾아오면 언제든 잘 차린 밥상이 걷어차일 테니. 그땐 황제라고 해서 답이 나오진 않을 것이다.
“차도는 있습니까?”
“전보다는 괜찮아지신 것 같지만 확실하진 않아요.”
“아주 좋습니다.”
“저는 분명 확실하지 않다고 했어요!”
“완벽하기를 바라선 안 됩니다. 자칫 두 분 다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아!
놈들은 최대한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 조금씩 황제의 성향을 변질시켰다. 특정한 사술로 일순간 변했다면 되레 치료가 쉬울 수도 있었다. 사술을 풀어 버리면 그만이니. 지금처럼 가랑비에 옷이 젖듯 스며들면 치료도 어렵지만, 완치가 안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 번에 치료가 된다면 상대는 눈치를 챌 테고, 어떤 짓을 할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상황을 놓고 보면 지금도 공주의 신상은 위험에 처해 있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발견되면 극단적인 방법을 쓸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러니까 놈들이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거네요.”
“공주님이 눈엣가시일 겁니다. 혼인을 빙자해서 폐하의 옆에서 하루라도 빨리 치워 버리려는 의도가 다분합니다.”
“그딴 말을 왜 웃으면서 해요!”
“사실을 말한 겁니다. 그리고 웃지 않았습니다.”
태연자약한 염산호를 보고 있자니, 강예는 괜히 울컥하는 감정에 휩싸였다. 자신은 하루하루가 바늘방석인데, 이 자식은 남의 일처럼 대하고 있으니 화가 치밀었다. 혼약을 맺기로 약속을 했으면서.
“화내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공주님은 저를 온전히 믿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데, 혼약을 맺자는 미친년이 어디 있어요!”
“그리 확고하시다면 비밀 통로부터 알려 주십시오. 나중에 몰래 들어가 보게.”
“비밀 통로라니요? 모를 말을 하시네요.”
“왜 이러실까요, 공주님! 이 밤중에 몰래 나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데. 저들이 어째서 공주님을 내보내려고 하겠습니까. 당연히 황실의 숨겨진 힘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공주님도 짐작은 하고 계시겠지요.”
강예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많지 않은 단서로 숨기고 있던 비밀을 거의 다 파악해 버렸다. 장원으로 급제한 천재긴 해도,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날카로운 통찰력이었다.
“누가 누군지 확실하지 않아요.”
“잘됐군요.”
“잘됐다고? 지금 그런 한가한 소리가 나와요! 당신 말대로면 황실 주변이 전부 놈들의 소굴이란 소리잖아요!”
“최악의 상황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걸 상기해 보세요. 제약이란 게 그리 멀리 있지 않은 겁니다. 또한,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되는, 최후의 보루라는 뜻도 되지요.”
일단 드러나면 되돌리기가 어렵다. 세월이 흐를수록 힘을 가지고 있으면 남용하게 된다. 제국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조직이라면 더더욱 제약이 강력하기 마련이다. 가정이긴 해도, 황실의 힘이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지켜보기만 한 거야?”
“서두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린 그저 저들이 원하는 흐름대로 가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겁니다.”
“빠져나가려는 꼼수는 아니겠지요?”
“존대하려면 하고, 하대하려면 하되, 반드시 하나만 해 주십시오. 많이 헷갈립니다.”
“내 맘이야.”
염산호는 공주의 직감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직감 하나는 날카로웠다. 조금만 방심해도 찌르고 들어오는데, 이건 배워서 납득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무공을 좀 더 가다듬어야 합니다.”
“절 무시하면 큰코다칠 거예요.”
염산호는 마신교의 음모를 분쇄하는 데 중점을 두진 않았다. 자신의 역할은 현시점의 구도가 무너지지 않도록 현상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 그 이상을 바라기에는 위험하단 판단이 섰다. 최대한 마신교의 행보를 방해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다. 후일 사부님이 찾아올 때를 위한 교두보가 되거나, 파격을 이루기 전의 기반을 다지는 정도면 되었다.
“수호위께선 오늘도 열심히 하시는군요.”
“희선이 좀 그만 패! 저 미친 인간이!”
봐주지 말란다고, 진짜로 패는 인간이 어디 있냐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희선이가 얼마나 여린데. 대체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전신에 멍이 든 희선이를 볼 때마다 가슴이 쓰렸다.
“여자라서 손속에 사정을 두는 겁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제 친우의 아버지이자, 제 사부님을 보시면 이해가 될 겁니다.”
“흥, 그래 봤자 천운권이지!”
공주의 빈정거림을 서신에 고대로 적기로 한 염산호였다. 사부를 대면하고서도 똑같이 할 수 있다면 인정한다.
‘승상의 아들이 걸리기는 하는데.’
병부상서의 아들은 상대하기가 편했다. 속이 고스란히 드러나서 의도를 파악하기 수월했으니. 반면 승상의 아들은 과거를 봐서 관직에 올랐고, 능력을 검증받고 있었다. 아니면 진짜로 반듯한 아들일지도. 경계할 필요는 있다고 보았다.
‘슬슬 사부님의 말씀대로 할 때가 되기는 했어.’
공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문무겸비만으로 황제는 물론, 모두에게 인정을 받기란 여의치 않다. 공주의 말대로 황실이 놈들의 소굴이라면 더더욱. 누구나 인정할 만한 공을 세우고, 모함이나 이간질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사부님의 계획대로만 된다면야, 완벽하기는 한데.’
천재지변까지 일으키실 수 있었나? 사부의 인간적이지 않은 강함은 차치하더라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나, 제자라면 응당 사부를 믿고 따라야 했다.
‘안 되면 나라도 살아야지.’
염산호는 현실적인 면이 강했다. 일종의 자기애로, 병자로 오래 살았더니 남보다는 자신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
녹림왕이 수천의 맹도를 이끌고 청양현으로 진입하면서 송호문과의 대치가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렀다. 무림맹이 중재에 나설 수도 있었지만, 개입하기에는 명분이 약했다.
천운권이 녹수연맹의 개파대전에서 벌인 짓을 상기하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솔직히 누구라도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일전 송호문은 천운권을 내놓은 자식으로 취급했었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천운권과 알아서 하라는 방관자적 태도를 보였었다.
천운권이 한 짓을 고려하면 또 이해가 되는 일이긴 한데, 혈연관계를 그처럼 칼로 물을 베듯 끊어 낼 수 있겠는가. 하물며 천운권이 몰래 송호문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지배적이었다.
이건 대놓고 녹수연맹을 무시한 처사가 되었다. 안에 있으면서 없다고 했으니 녹림왕의 선전포고를 기만하는 행위였다. 이로 인해 무림맹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차기 무림맹주로 거론되는 검제로서도 이번에는 선뜻 송호문의 편을 들어 주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무림맹 소속 문파들의 송호문에 대한 견제가 아니냐는 말이 있었다. 송호문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는 문파가 적지 않았다. 청양현을 벗어나 안휘성의 지배력이 남궁세가와 견줄 규모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건 제쳐 두고서도 천운권이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걸 더는 두고 보지 않으려는 면도 있었다. 강호를 제집처럼 헤집고 다닐 때마다 적지 않은 원성이 쌓였다. 그런데도 결과만 놓고 보면 천운권은 잘나가고 있었다.
-왜 안 죽어?
-왜 잘나가?
-왜 더 강해져?
모난 돌이 정을 맞기 마련이거늘, 세상의 모든 운을 천운권이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불행한 자들의 불만이 커졌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되는 어이없는 현실이었다.
남의 연이은 성공과 현실의 자신을 대비하여 불행을 느끼는. 대인이나 협객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나, 사람의 감정이란 항상 일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문이 돌았다.
-대송호문은 혈육을 버리지 않는다.
아니라고 부정해도 부족할 판국에 송호문이 도리어 녹수연맹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적절한 선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닌 전쟁이 벌어질 수 있었다. 견제하려던 세력도 이쯤 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본 맹과 송호문의 일에 누구도 관여하지 마라. 청양현에 일보라도 내딛는 문파나 무인은 끝까지 추적해서 모조리 다 불살라 버리겠다.
녹수연맹도 물러설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개파대전에서 체면을 구긴 녹림왕은 반드시 설욕해야 했다. 이제 막 일어난 연맹으로서 힘을 과시할 필요성이 부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