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78
477 전쟁의 목적(1)
“사태가 요상하게 흘러가는군.”
“우리에게는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천운권의 행보가 꺼림칙하긴 합니다.”
혈마장은 명암의 보고에 미간을 찌푸렸다. 대륙의 혼란을 유도해야 하는 이때, 녹수연맹과 송호문의 전쟁은 희소식에 가까웠다. 그러나 여태 천운권과 연관이 되어서 잘되는 꼴을 못 봤다.
“검제의 포기가 지나치게 빠른 것 같은데.”
“우리 쪽에서 반대하니 명분상 개입하기는 어렵습니다.”
“천운권을 버릴 때가 됐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군. 검제의 주변을 면밀히 감시해 봐.”
“당장은 어렵습니다. 내부의 접선자를 제외하고, 하오문과의 연계를 고려하면 정보 수집이 여의치 않습니다.”
천운권이 녹수연맹의 개파대전을 망치면서 하오문을 이용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하오문주가 녹수연맹에 가입한 후 내부 정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하오문에 포섭한 자와 연결 고리를 만든다면, 의심을 사기 십상이었다.
“답답하군. 이럴 거면 하오문주를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
“서두르다간 녹림왕의 의심을 살 겁니다. 본교와 연관이 있다는 걸 알지는 못해도, 하오문 자체를 버리는 패로 쓸 수도 있습니다.”
하오문주를 처리하려면 일단 무능함을 드러내야 했다. 그런 다음에 내부적으로 차기 문주를 선정할 명분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무턱대고 하오문주를 죽인다면, 하오문을 통제하기도 어렵다.
밑바닥 인생들의 군집이긴 한데, 요상한 자존심이 있었다. 열등감과 저열함이 뭉쳐진 인간 군상들의 신뢰였다. 배신을 밥 먹듯이 할 것 같은 천한 놈들이 말이다.
“여러모로 귀찮게 하는구나. 차라리 판을 좀 더 키우는 것은 어떻겠어?”
“적정한 선에서 중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림대회가 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정보의 수집과 관리가 이전과 같기만 했어도, 중간에서 야료를 부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정보력으로 장난을 치다가는 개방과 하오문에 걸려들 수가 있었다. 가뜩이나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이때에는.
“결국, 손을 쓸 수도 없단 거잖아.”
“현재로선 그렇습니다.”
어느 것 하나 시원하지 않은 정황에 혈마장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본교의 지원은 현재 무림대회에 집중되었다. 인원을 따로 빼기도 어려워 이 좋은 기회조차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혈마장은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그 얄미운 놈을 처단할 기회는 흔치 않기에 더더욱.
“젠장, 방법이 없나? 그 새끼만이라도.”
“그러시다면 낭인을 쓰는 것이 어떻습니까?”
“판이 커지면 위험하다며?”
“천운권만 처리하면 됩니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일인데도, 혈마장의 얼굴엔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돈이 중요하긴 해도, 이번에는 원한을 갚아야 했다. 더욱이 놈에게 원한을 산 놈들도 꽤 많았다.
“그렇게 해.”
“존명.”
***
녹수연맹이 결전을 벌일 시일을 선포했다.
자고로 예고 없는 전쟁은 무도한 행위로 매도하나, 역사는 승자를 기억할 뿐이다. 그런데도 녹수연맹이 기습이 아닌 시일을 정한 것은 송호문과의 전쟁에 끼어들지 말라는 엄포였다.
태풍이 불어오기 직전의 고요함이 감돌았다.
시일과 시간까지 정해진 상태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파랗다. 태양이 중천에 이르면 녹수연맹이 공격을 해 올 것이다.
약 한 시진의 여유가 있었다.
송호문 인근은 긴장감이 흘렀다. 그새 일천이 더 불어, 육천에 육박하는 녹수연맹이 송호문을 포위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숨 막히는 철통같은 기세였다.
송호문은 날이 밝자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으로 들어갔다. 정면 대결이 아닌 농성을 펼쳐 시간을 끌겠다는 의도를 비쳤다. 송호문주의 대범한 선포와 대조적인 선택이기는 한데, 현실적으로 보이긴 했다.
때마침 무림맹에 있는 신검마협이 협조를 구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비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떻게든 검제를 움직여 무림맹의 개입을 유도하려는 의도였다.
어쩌면 녹수연맹을 압박해서 전쟁을 길게 끌어가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나, 애초에 이 전쟁이 길게 이어질 것 같진 않았다. 녹림왕과 녹림구걸은 물론, 오천의 맹도를 이끌고 온 이상 길어지는 시간만큼이나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송호문은 담벼락을 사이로 외부와 내부의 흐름이 달라져 있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진법을 발동했다. 평소 방문하는 자들을 전부 내보낸 연유가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전투는 송호문의 차후 전투 향방을 판단할 잣대가 될 것이다. 실력의 삼할을 숨기라는 말은, 무인에게만 해당하지 않았다. 문파의 주 전력과 전투 방식을 공개하지 않는 편이 이득이었다.
진법을 가동한 후, 송호문의 무력대는 전략대로 대기 중이었다. 무진은 용무길, 황보세령과 함께 있었다. 전투의 방향과 진법의 효력을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비쳤다.
“아버님, 소녀가 황궁으로 한 번은 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황궁은 진이가 알아서 하기로 했잖아.”
“고 잔망한 년이 감히 가가 옆에 붙어서 요망을 떨고 있더라고요. 자기 주제를 알려 줄 필요가 있지 않겠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버님도 아시면서. 저 이러면 서운할지 몰라요.”
“그새 정보 조직을 따로 만들었구나.”
신산묘녀가 태진이를 곱게 보내 줄 때부터 예견된 일이기는 했다. 용병술의 대가인 황보세령이 집에서 놀고 있는 요암과 요영을 내버려 둘 리 없지. 금제를 어느 정도 벗어났기에 그들의 능력을 파악하여 정보 단체의 조직원으로 중용했다. 마신교 예하의 배신자이기에 적의 의도를 파악하는 용도였다.
현재 요암과 요영 1호는 개과천선의 앞 글자를 따서 개송과 천송으로 불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성의가 없는 작명임에도, 개송과 천송은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실상, 지금까지 살려준 것만 해도 황송해야 마땅했다.
“하지 말란다고 안 할 것 같지는 않고, 앞으로 어쩌려고?”
“가가의 옆에 잡년들이 붙는 걸 용납할 순 없지요. 저는 아버님처럼 일편단심이거든요.”
“피치 못할 사정은 안 통하겠지.”
“그런 사정 따윈 소녀가 알 바 아니에요.”
어쩜 이렇게 매정할 수가.
무진은 며늘아기의 단호함에 혀를 내둘렀다. 강호를 주유하다 보면 음독과 미혼독은 흔한 설정이었다. 영웅의 발자취만 봐도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한 운우지락은 기본이거늘.
많은 세력을 포용하려면 혈연관계는 필요했다. 그렇다고 영웅이 되어서 호색한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다 그럴 만한 핑계…… 사정이 있어야 했다.
며느리는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곤란한 사정까지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것이다.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아들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제가 이상한 건가요?”
“전혀. 사람은 원래 다 똑같아.”
“아버님이라면 절 이해해 주실 줄 알았어요. 우린 닮았으니까요. 호호호호!”
“말이 왜 그렇게…… 닮았구나.”
새침한 며늘아기의 표정에 무진은 납득하고 말았다.
황보세령의 군사적인 운영과 용병술은 차후 마신교와의 전쟁에서 반드시 필요했다. 아들의 강요된 순애보를 탓할 수는 없었다. 혼인하면 아들은 출가외인이라고 했으니…… 맞나?
‘차차 나아지겠지.’
-지금도 이런데 혼인하고 나면 네 아들은 숨 막혀서 죽을 거다.
‘내 아들이라면 소소한 즐거움이라도 찾을 거다.’
-네 아들만 아니면 삼처 사첩도 어렵지 않았을 텐데, 불쌍한 녀석!
‘이 자식이, 내 아들을 호색한으로 만들 셈이야?’
-네 동생은?
‘강호의 평화와 안녕을 위한 대승적인 판단이다.’
무진은 마왕의 투덜거림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아들과 며느리의 사적인 영역이었다. 무림의 천년대계가 아닌 이상, 며느리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했다.
화화화활!
무진은 황보세령보다 의욕을 불태우는 용무길이 걱정되었다. 낙방학사로 전전긍긍하던 용무길을 무림으로 끌어들인 책임이 있었다. 무림맹의 군사였던 미래도, 여러 갈래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부총관, 때론 쉬어 갈 때도 있어야지.”
“주군께서 맡기신 일입니다. 절대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하루살이보다 못한 것들에게 지옥이 현세에 있음을 알려 주겠습니다.”
용무길의 스산한 광기에 오싹한 한기를 느낀 주변의 무인들은 뒤로 물러섰다. 평소엔 파리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것 같은데, 실체를 알아 갈수록 음험한 광기를 풍겼다. 단연 송호문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날 충격이 너무 컸나?’
-숨겨진 본성은 어디 가지를 않는군. 주종 관계 하나는 확실하구나.
용무길을 보니 적당히 끝이 날 것 같지 않아 불안했다. 더욱이 지나치게 압도적이면 그것도 골치였다. 겉으로는 치열해 보일지라도, 이 전쟁은 모두가 승리자가 되어야만 했다.
아버지와 장로들이 뒤늦게 모습을 비쳤다.
“시작한 지가 한세월인데, 왜 이렇게 늦게 와요?”
“이놈이, 아비한테! 이젠 막가자는 게냐?”
“전쟁이 애들 장난입니까?”
“네 놀음에 놀아나고 있는 거 모를 줄 아느냐!”
“아직도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하죠.”
약속된 전쟁이기는 해도, 전쟁은 전쟁이었다. 문주와 핵심 수뇌부의 마음가짐은 중요했다. 더욱이 전쟁의 내막이나 자초지종은 될 수 있으면 모르는 편이 나았다.
“초전은 막 죽여도 됩니다.”
“내가 백정을 낳았구나.”
“소자가 두 눈 똑바로 뜨고 아버지를 주시하겠습니다. 생채기라도 나면 알아서 하세요. 전 어머니한테 욕먹기 싫습니다.”
“……말이 왜 그렇게 나가냐?”
“아버지를 위하는 소자의 효심을 헤아려 주십시오.”
“……그딴 효심 필요 없으니, 속에 챙겨 두거라.”
무진은 아버지와 장로님들의 의견을 싹 무시했다. 이 전쟁의 의도를 알고 있다고 해도, 해이해져선 안 되었다. 필도가 녹수연맹을 통제하곤 있지만, 세작이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마신교를 상대하는 이상, 조금의 방심도 위험했다.
곽운백과 장상붕이 무력대의 선두에 섰다. 이제 모든 전력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었다. 동생과 연관된 인연을 부른다면 전력은 훨씬 강해지겠지만, 지금은 송호문의 자체적인 무력으로 지켜야 했다. 마신교와 전쟁이 벌어지면, 문파를 지킬 최소한의 전력이기 때문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그거 하나만 기억해.”
“예, 대공자!”
무진은 무력대를 단속했다. 그간 무공이 진일보하면서 자신감이 붙었겠지만, 전투를 함부로 재단해선 안 되었다. 녹수연맹은 이제까지 상대했던 자들과는 달랐다. 사소한 방심이 화근이 될 수 있기에 기강을 세웠다.
“상공.”
“아빠!”
아내와 딸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미소가 떠나지 않겠지만, 한숨이 흘렀다. 미주의 설득에 아내가 넘어가면서 마지못해 허락하고 말았다. 그나마 자신의 눈앞이라 다행이었다.
하루속히 마신교를 처리해야 집에 콕! 있을 텐데.
“괜찮겠어?”
“상공의 가르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성과로 보여 줄게요.”
“전투는 생각한 것과 다를 거야. 굳이 지금부터 경험할 필욘 없어.”
“내일로 미루면, 또다시 의존하게 될 거예요. 저와 미주, 당신 생각만큼 약하지 않아요!”
“아빠, 딸을 믿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