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9
048 남궁세가(3)
무진은 대범한 척 위선 떨고 싶지도 않았다. 속에서 울화통이 터지는데 화를 왜 참아. 인생을 참고만 살다 보면 속병이 들어 썩어 문드러진다. 사는 동안 앙금을 남기지 않고 살기로 다짐했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천검도 아니고 검패라. 확실히 이 중에서 가장 강하긴 해. 어째서 난 몰랐지?’
-그 당시 남궁세가는 가주와 신망을 잃었다. 전력 대부분이 사라진 상태였다.
‘오대세가 간에 알력 다툼이라도 있었나?’
-넌 대체 아는 게 뭐냐?
‘그래서 뭐냐고?’
-출관하기 전 일이다. 그런 사소한 사건까지 알고 있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마신교와의 결전에서 남궁세가의 활약은 미미했다. 전력 자체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기억에도 흐릿하지.
‘간단히 죽을 녀석은 아닌데.’
-겨뤄 봐야 알겠지만, 벽을 넘기 전일 듯싶다.
무공은 상대적인 관점에서 봐야 한다. 강력한 무공도, 상성이 존재할 수 있었다. 약점이 노출되었다면 고수도 중수에게 목숨을 잃는다. 참고로, 하수는 약점을 알아도 고수를 못 죽인다. 만약은 존재하나, 희박하다. 최소 일정 수준은 되어야 결과가 나온다.
‘짚이는 점도 없어?’
-하나는 있다. 남궁세가의 쇠락으로 오대세가는 구심점을 잃고 힘을 모으지 못했다.
‘마신교가 분열 정책을 쓴 거 같네…… 어? 느낌 쎄한데.’
에이, 설마!
일단 부정했지만, 의심은 갔다. 마신교가 본격적으로 대륙 진출을 할 때 무림은 지나치게 속수무책이었다. 무림맹의 결속력은 유리잔보다 연약했었다. 단체를 이끌어 갈 확실한 세력이 없었던 것이다. 서로의 이권에 눈이 멀어 대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탓도 컸다.
-신주이십일강 중 아홉 명만 남았지.
‘현명한 놈들일세.’
전면에 나선 마신교는 철저히 힘의 논리를 앞세웠었다. 워낙 파죽지세로 무림을 몰아붙여 응당 그런 줄 알았는데, 수면 위의 오리처럼 굉장히 전략적이었다. 무림의 힘을 대부분 빼 놓아 무주공산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전 준비를 하고 있었단 말이지.’
-준비 없이 전쟁을 치를 바보는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한 거야? 암수를 썼다면 대외적으로 드러났을 텐데.’
-나는 마왕이다.
하긴 마왕이 지나간 사건들을 일일이 다 살폈을 리 없지. 이럴 줄 알았으면 무림 연대기라도 사서 읽고 뒈질 걸 그랬나. 그랬으면 뭔가 짚이는 바라도 있을 텐데. 마왕이나 나나 개뿔, 역사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지금 당장 알려 줄 수도 없잖아.’
-말한다고 들을 놈들도 아니지.
남궁세가의 미래에 암울한 일이 벌어질 테니 대비하라고 하면, 과연 남궁세가가 순순히 따라 줄까? 가문을 모욕한다면서 달려들 테고. 그럼 남궁세가는 내 손으로 멸문시키는 꼴이 된다. 자기들이 뭐라도 되는 양 깝치면, 내 성격상 솔직히 못 참는다.
‘제기랄, 설마 다 찾아다녀야 하는 거 아냐? 그럼 내 사생활은?’
-천하가 망하면 사생활도 없을걸.
무진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쭉정이들 몇 명 더 구한다고 결과가 달라지진 않는다. 살면서 느낀 거지만, 믿을 건 오로지 내 주먹뿐이다.
‘안 되면 검패를 패면 되지 않을까?’
-그 전에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겠지.
말 안 듣는다고 패면, 저 강단 있게 생긴 놈이 고분고분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남궁세가에서 검패라는 별호가 붙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지간한 수로는 굽히지 않을 거다.
-아주 단서가 없는 건 아니다. 수를 썼다면 흔적은 남을 테니까.
‘네가 알아볼 수 있어야 할 텐데.’
마신교의 수작질이라면 천경이 알아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모든 수를 꿰뚫어 보긴 불가능하다.
예로부터 공격보다 방어가 몇 배는 더 힘들다고 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식으로 공격해 올지 예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설령 알고 있어도, 방어하려면 최소 세 배의 노력이 필요했다.
무진은 일단 고민을 뒤로 접어 두었다. 현재로선 확실하지도 않은 사안이었다. 미리 걱정한다고 답이 나오진 않는다.
“다음 대진표가 나왔습니다. 출전할 소룡은 미리 확인하길 바랍니다. 순번이 밀리면 출전 기회를 잃습니다.”
주어진 번호대로 큰 나무판에 대진표가 적혔다. 대진표를 확인한 출전자들의 얼굴엔 희비가 교차했다.
아~!
운보다는 실력이 중요하다, 아주 정석적인 말이다. 그러나 인생에선 능력이 성공을 대변하진 않는다. 진인사대천명, 운칠기삼. 결국, 운빨도 무시 못 했다. 그렇지 않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속담 같은 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강자끼리 붙게 되면 설령 이겨도 다음 대결에서 승리하기 힘들다. 힘겨운 사투 후 소모된 전력을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대세가를 떨어뜨려 놨네.’
-제법 공정하군.
출전하는 오대세가를 각 조에서 떨어뜨려 미리 붙지 않도록 했다. 이대로 진행이 되면 십육강 이전엔 붙지 않을 것이다. 중소무문으로선 대진표 조작이 맘에 들지 않겠으나, 강자끼리 붙는 일은 최대한 피해야 했다.
대진표에서 운이 좋은 자도, 초반부터 오대세가와 붙어서 떨어지는 자도 있을 것이다.
스윽!
무진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물러섰다. 좌우로 공간이 열리며 허여멀건 샌님 같은 녀석이 다가왔다. 청색 무복을 보니 상대가 누군지 파악이 되었다. 샌님 뒤로 편치 않은 얼굴을 한 낯익은 사내가 있었다.
“숙부께서 신세를 졌습니다.”
“갚아 주게?”
“공정한 대결이라 들었습니다. 후일,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그려, 언제든 찾아와라.”
현악검의 패배를 우연으로 치부하진 않았다. 그리고 본인의 실력을 정확히 보았다. 그러면서도 후일을 도모하는 인내심을 갖추었다.
이길 확률이 있을 때 붙겠다 이거지.
‘대단치는 않아 보이는데, 숙부가 방심했다고 봐야 하나?’
제갈민은 숙부의 패배로 제갈세가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숙부가 아니었다면 매섭게 따져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숙부가 방심했다곤 하나, 단 두 수 만에 패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었다.
‘고거 참, 맹랑한 녀석일세.’
이리 재고, 저리 재고, 다시 재고.
제갈세가의 음흉한 성향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세가의 패배를 되돌려 주고는 싶지만, 현실을 냉철하게 판단했다. 그것이 제갈세가의 강점이자 약점이었다. 너무 재다 보니, 무인으로서의 투혼이 부족했다.
무진은 대진표를 훑었다.
그리고 제갈민을 보며.
“현실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을 거다.”
“말씀, 뼈에 새기지요.”
무진은 제갈민이 새겨들었을 거라고 보진 않았다. 나이에 비해 심계가 깊기는 하나, 아직은 어렸다. 닳고 닳은 제갈세가의 노련한 자들과 비교하면 부족함이 있었다. 아마 곧 닥칠 불행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찌릿, 찌릿!
냉막한 표정의 제갈군이 무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무진은 피식 웃으며.
“패배는 병가지상사라고 하잖아.”
“이 빚은 빠른 시일 내로 갚아 주지.”
“세상일이 어디 맘처럼 되겠어.”
“지금을 즐겨라, 곧 후회하게 해 주마.”
제갈군의 흉흉한 기세와 달리 다툼은 없었다. 그로선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또다시 패배한다면 세가 내에서 입지가 흔들릴 수 있었다.
‘긴가민가할 땐 하지 않는 게 이롭지.’
무진은 제갈군이 순간적으로 고민했음을 모르지 않았다. 검을 잡으려고 했는지, 근육이 긴장했다. 그럼에도 기가 죽지 않은 걸 보면 전력을 다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래서 팰 때는 확실하게 패거나, 죽여 버려야 하는 건데.
“저자가 현악검을 이긴 사람이었어?”
“저렇게 생겼구나!”
“겉으론 강해 보이지 않는데!”
“송호문이 변수가 될지도.”
이래서 제갈세가 놈들이 음흉한 것이다. 여태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이 제갈세가의 관심 한 번으로 덩달아 우리 문파를 주목한다. 무인도 사람이다. 세간의 이목이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대회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할 목적이 다분했다.
특히.
남궁세가.
사천당가.
하북팽가.
오대세가에서 제갈세가는 무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제갈세가보다 강하다는 걸 보여 주어야 했다.
‘판을 깔아 준 보답을 해 줘야겠지.’
-아서라.
이러다가 황보세가를 제외한 사대세가의 표적이 되게 생겼다. 그러나 무진은 주변 눈치에 성깔을 죽이진 않는다. 도전해 온다면 보답을 해 주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대진 일정을 확인하고 아들과 철호가 돌아왔다.
대진표대로라면 오전 중에 대결이 있을 것이다. 무진은 대회장에 마련된 시설에 앉았다. 황보세가를 배려한 자리지만, 부담 없이 이용했다.
황보세가와의 연을 대놓고 보여 줌으로써 다른 세가의 관심을 확 끌어왔다.
“아버님, 차 드세요.”
“고맙구나.”
무진에게 차와 다과를 바치는 황보세령의 지극정성에 황보장성은 입맛이 썼다. 딸 키워 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뼈아픈 현실을 맛보았다.
저게 과연 내 딸이 맞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내 자식이지만, 여우가 따로 없군.’
꼬리만 달아 놓으면 구미호라고 불려야 마땅했다. 한편으로 저처럼 지극정성을 보일 만큼 가치가 있나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태진의 대결이 잡혔다.
“아들아.”
“예, 아버지.”
“비록 하찮은 애들 재롱잔치에 불과한 대회이긴 해도, 여기까지 온 이상 우승해야 한다. 참고로, 생채기라도 나는 날엔 훈련을 세 배로 늘릴 거다.”
“반드시 우승하겠습니다!”
응원이야, 협박이야?
후자가 분명하다. 태진은 참으로 아버지답다고 생각했다. 어딜 가든 성격은 그대로, 일관성이 있었다. 옆에서 다 듣고 있는데도 하고 싶은 말은 꼭 했다.
하!
무진의 아들을 향한 응원에 철호와 황보진운마저 맥이 빠져 버렸다. 저 인간이 이 대회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설령 하찮게 여긴다 치자고. 저게 막 출전한 아들에게 할 소리냐고. 진짜 맥락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눈치도 없다고 해야 하나?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주변에 관심이 없는 거다.
“이런 대회도 우승 못 하면 무인 때려치워야지. 안 그러냐, 아들아?”
“그럼요.”
아비는 오만하고, 태진은 무력하다. 주변의 이상한 시선에도 부자는 태연했다. 이런 일이 집에서는 빈번하게 있었다. 딱히 유별나지도 않았다.
아버지에게 일순위는 엄마, 그다음은 미주, 그다음은…… 나일까? 그래도 삼순위는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자네는 대회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안중에도 두지 않았군.”
“이딴 시답지 않은 대회까지 신경 쓰면서 살면 피곤하잖아요. 정마대전이라도 일어났다면 또 모를까?”
헉!
다들 입을 다물었다. 정마대전, 그게 할 소리야! 역대로 정마대전이 일어나고 피가 마를 날이 없다고 했었다. 무림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금지어였다.
“부모가 돼서 할 소린가?”
“현실은 직시해야지요.”
“자넨 일회전에서 탈락했다며!”
“부끄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