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509
508 개수작(1)
황궁의 세대교체가 이제 겨우 끝이 났다. 북친왕과 동조했던 자들이 갈려 나가면서 대폭의 물갈이가 이루어진 효과였다. 당장은 완벽하진 않아도, 썩은 내 나는 고인 물을 갈 때가 되기는 했었다.
황궁 내부의 실권도 교체가 되었다.
동창, 서창, 금의위로 삼분되던 감찰 조직을 밀천이 맡으면서 서열이 새롭게 정립되었다. 사대천주가 그들의 수장이 되어 관리하게 된 것이다.
한 가지 이채로운 것은 병환으로 누워 있던 황자들이 회복되었음에도, 천란 공주의 지위를 유지했다는 점이었다. 일황자가 건재하기에 새로운 분란의 씨앗이 될 수 있었다.
북친왕의 반역을 돌이켜 보면 좋지 않은 선례였다. 황태자에 올릴 황자가 없다면 또 모를까, 공주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것을 원치는 않는 분위기였다.
그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천란 공주가 전면에 나서서 내정을 관리하면서 조금씩은 인식이 바뀌고 있었다. 여인이라 의문이 들었지만, 실제로 마주한 천란 공주는 굳건했으며 현명했다.
이제 막 내정을 살핀 것치고는 수월한 편이었다. 간혹 드러나는 살벌한 기세는 군주의 위엄으로 치부했다.
“이게 다 제 덕입니다.”
“또 얼마를 달라고?”
“말투가 변하셨는데요.”
“이리된 건 모두 그대 탓이다!”
심신이 회복되고 있는 대신, 황제는 품위를 잃어 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이놈을 만나면서부터 생각이 고스란히 입으로 나오게 되었다. 알면 알수록 이상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황제 알기를 뭐로 아는 건지, 원.
“인간적이고 참 좋습니다.”
“황제는 천자이니라.”
“누가 아니래요.”
“네놈…… 신소리는 그만하고. 떠날 셈이냐?”
“가야죠, 이 망할 놈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발 뻗고 편히 못 자니까요.”
행실은 마음에 안 들어도, 황제는 은혜를 잊지는 않았다. 적지 않은 출혈과 혜택을 내어주기는 했어도.
생각하니까, 또 열이 받는군.
“가거라.”
“……?”
무진은 순간 당황했다. 이렇게 시원하게 보내 줄 줄은 미처 몰랐다. 이러면 얘기가 이상해지는데, 오늘 가더라도 몇 번은 붙잡아야 했다.
“안 붙잡습니까?”
“또 뭘 뜯어내려고!”
“이러면 보통 황실을 대신하는 감사패나, 그에 따르는 금은보화를 주던데요.”
“누가?”
황제는 으레 아닌 척하면서 어사패 같은 걸 수여해서 권위를 세워 주곤 했었다. 역사에 그리 나오지 않는가. 역사와 소설의 기본적인 필연성이었다.
“그렇게 성급하게 결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조금 더 기다리겠습니다.”
“빨리 가라.”
“내심은 아닌 거 압니다. 폐하께선 그럴 분이 아니시지요.”
“시간이 많나 보군.”
이 빌어먹을 황제 놈이!
무진은 순간 감추고 있던 성깔이 고스란히 나올 뻔했다. 그런데 황제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러다 한 대 치겠군.”
“제가요! 감히 그럴 리가요!”
화들짝 놀란 무진의 황망한 몸짓에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겁을 먹지도 않았으면서, 어설픈 연기를 대놓고 하고 있었다. 최소한 황제 앞에서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한편으로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자네는 얼마나 강한가?”
“전에도 물어보시더니, 그때 한 말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한 손이 열 손을 막기는 힘들더군요.”
“황위라도 노리나?”
“그런 귀찮은 걸 제가 왜요?”
황상마저 귀찮다고 하다니, 보통은 위선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이놈이 그런 말을 하니 황좌가 대단치 않게 느껴졌다. 여러모로 겪어 보지 못한 희한한 녀석이었다.
“받거라.”
“이게 무엇입니까?”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은 아랫사람의 덕목이었다. 이때 아니면 황제께서 언제 감히 자신 앞에서 우쭐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까지 배려한 무진은 뿌듯했다.
황제는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심정으로.
“네가 원하는 어사패다. 대신, 한 놈은 남기고 가라. 알고는 있겠지?”
“호오, 좋습니다.”
황제가 내준 패는 단순 어사패로 규정하기에는 꽤 어폐가 있기는 했다. 금으로 두껍게 도금된 그것에 황실을 상징하는 용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름 하여 황룡패로 각 성의 성주와 군대를 움직일 막강한 권한을 지녔다. 제국이 세워지고 무수한 세월이 흘렀어도, 황제가 친히 황룡패를 내어 준 사례는 한 차례뿐이었다.
“가 보겠습니다.”
“가라.”
“노잣돈이라도 줄 줄 알았습니다.”
“없다.”
이놈이 황실의 기둥뿌리를 뽑으려고 작정했나!
더 나올 구석이 사라지자 무진은 미련을 두지 않고 돌아섰다. 황제는 한참을 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어떤 면으론 대단한 녀석이군.’
이상한 놈이라서 그렇지.
하늘이 어쩌자고 저런 황망한 녀석을 내려보냈을까?
그만큼 적들이 강하다는 의미일 터. 황궁삼보의 일보인 황룡패를 내어 준 연유였다. 녀석의 호언대로 끝이 났으면 좋겠지만, 그리되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선정만이 답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황제는 무능해선 안 되었다. 온화함으론 난세를 헤쳐 나가지 못했다.
아!
황궁에 남겨졌다.
같이 돌아가리라 학수고대했던 염산호는 입맛이 썼다. 자신만 남겨 두고 가면 어쩌란 것인지.
‘진이라도 두고 가시지!’
이 넓은 황궁에 혼자가 되니까,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다만, 마지막까지 남고 싶어 했던 태진을 상기하면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도축장에 끌려가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문제는 자신도 태진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황궁에서 할 일은 다 했다고 했다. 굳이 관직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미련을 두지 않으려고 했거늘.
“가긴 어딜 가요, 낭군님.”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다니까요.”
“아버지도 허락했거든. 곧 공표할 거야.”
“왜요?”
“죽을래?”
사부가 나를 팔았다. 뭘 받았는지는 몰라도, 사부님의 표정을 봐서는 가볍지 않았다. 가치의 올바른 평가라고 자축하기에는 삶이 순탄치 않을 듯싶다.
공주와의 혼약이 성사된 이상, 다른 여자는 쳐다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거늘.
얼굴, 무공, 학식, 어디 하나 빠질 데가 없는 산호로선 많은 여인…… 사람과 넓은 세상을 견식해 보고 싶었다. 한곳에 머무르기에는 아직은 청춘이었다.
‘이러면 진이와 다를 게 없잖아!’
태진을 데려가는 연유는 황보세령과 관련이 있었다. 밖으로 싸돌아다니지 말라는 황보세령의 경고였다. 황제가 관직을 올려 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다.
“눈깔 굴리지 마세요, 낭군님.”
“저를 잡고 사실 요량입니까?”
“한눈팔면 가만둘 수 없잖아요.”
“폐하께선 후궁이 많…… 아닙니다.”
“들키지만 마세요.”
걸리면 황실의 모든 권력을 동원해서 반드시 사생결단 내겠다는 강예의 엄포에 산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병상에서 일어나 세상에 나오자마자 아주 제대로 걸렸다.
“이제 밀천의 후계자도 되셨는데, 매우 바쁘시겠습니다.”
“내가 바쁘면 뭐 하려고?”
“저는 물심양면으로 집 안에서 내조하겠습니다.”
“내가 나가면 집에서 뭐 하려고?”
이건 좀.
산호는 사부가 원망스러웠다. 천하제일의 미녀도 아내가 되면 관점이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따지고 보면 일편단심인 사부님이 이상하긴 했다. 고금천하무적의 영웅이라면 삼처사첩은 기본이지 않나?
‘처음 만난 착한 미녀를 보고 싶었는데.’
삶이 참, 원하는 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안타까운 현실이나, 산호는 현재에 적응하기로 마음먹었다. 차후는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가슴은 항상 열어 놓기로 했다. 이 넓은 황도에 처음 본 참한 미녀가 한 명도 없을까.
“함께 잘해 보죠.”
“됐거든요.”
산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인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알려고 할수록 머리만 아팠다. 일단은 순리대로, 사부님의 명을 따르기로 했다.
“맡은 일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사부님이 돌아왔을 때 불호령이 떨어질 겁니다.”
“알고 있거든요.”
강예와 기희선은 물론, 사대천주도 흘려듣지 않았다. 무진의 맞춤형 훈련을 끝으로 신화마정갑을 입어 보았기에 더더욱. 두 번 다시 신화마정갑은 입고 싶지 않았다.
‘그건 요물이야!’
‘아니, 악마일지도!’
신화마정갑에 통제되어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는 경험은 끔찍했다. 그대로 승천할지도 모르는 불안감과 공포의 연속이었다.
그런 마물을 평소에 입고 다니는 무진이 인간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 했다. 만일 실패하는 날엔 마신교보다 무진을 두려워해야 할지도.
***
-들었냐?
-뭘?
-이재민들을 위해서 천운권이 십만 냥을 내놓았대.
-거짓말, 그게 말이 돼!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야!
-나도 처음에는 개수작인 줄 알았는데,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진짜인 것 같아.
-오호통재라. 그 인간이 좋은 일을 할 리가 없잖아. 다른 의도가 분명히 있어!
-내 생각도 그래. 이제 개방이나 하오문이 나서야 할 때가 아닐까?
-천운권은 본인한테 이득이 되지 않는 일에 선뜻 나설 위인이 아니야. 분명 숨겨진 거대한 음모가 있을 거야!
-음모라고 할 건 없지 않나? 너무 나간 것 같은데.
-소문이 이렇게 빨리 퍼지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돼? 자고로 선행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고 하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 너도 왼손 모르게 해라.
-뭔 소리야?
보통 선행을 베풀면 공감을 하기 마련이나, 천운권의 갑작스러운 선행에 갑론을박이 피 터지게 벌어졌다. 이재민들을 만나 식량과 약재를 주는 광경을 봤다는 사람이 나왔음에도, 일단 믿지 않았다. 순순히 믿기에는 천운권이 그간 보여 준 행실이 걸렸다. 능히, 장막에 가려 보이지 않는 어떠한 꿍꿍이가 있으리라.
진실 공방전이 뜨겁게 펼쳐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막이 더욱더 알려지게 되었다.
소식은 개방이 주도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나 천운권의 선행은 사실로 밝혀졌다.
-당최 이해할 수가 없기에 모든 수단을 활용하는 중이다.
-의도가 있다고 봤으나, 보름 가까이 선행이 이어지고 있다.
-납득할 수 없는 선행에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으리라 예상한다.
-본방은 최선을 다해 천운권의 숨겨진 꿍꿍이를 알아내겠다.
각 성의 개방도가 천운권의 행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수시로 강호 무림에 알렸다.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뭄의 단비겠지만.
개방에서 전한 원치 않은 소식에 사람들은 입맛이 떨어지고 있었다. 속도 안 좋아서 대변도 시원하지 않았다. 하늘이 망가졌나? 의구심이 들었다.
-천운권이 미쳤나?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무섭게?
-어쩌면 그간의 행실도 선행을 베풀기 위한 큰 그림이 아니었을까?
-개소리 작작 해라. 그러다 지옥 간다!
-하긴, 내가 봐도 그래. 그런 짓을 제정신으로 할 사람이 어딨겠어!
-불치병에 걸려서 그러는 걸지도.
-그렇다면 이해는 되겠지만, 난 개방이 더 이해가 안 간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개방이 그리 할 일이 없나. 아무리 우리가 궁금해한다고 해도 개방의 정보력을 총동원해서 천운권을 살필 필요가 있냐고. 천운권이 뭔데?
-그것도 그러네.
-이 와중에 하오문도 나서려는 것 같더라.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먼.
분명 천운권의 행보는 의문투성이였다. 이제까지의 행실을 고려하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간이었다. 자기 목숨이 걸리지 않고서는 절대 내뱉지 않거늘. 거지에게 적선한 돈을 빼앗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천운권의 이해하기 힘든 행보에 의문이 드는 건 인지상정이긴 한데, 강호 최대의 정보 단체인 개방과 하오문이 전력을 기울이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할 일이 그렇게 없나?
마신교를 찾아내기도 바쁜 와중에!
-잠깐! 이거 천운권 이 새끼, 마신교랑 한패 아냐?
-그건 아니다. 여태 천운권과 엮여서 마신교가 잘된 경우가 있냐?
-응? 그것도 그러네.
-물론, 엮인 모든 세력이 다 안 되기는 했지만. 만약 천운권이 깽판 치지 않았다면 마신교가 드러나지도 않았을걸.
-이쯤 되면 마신교도 건드리기 짜증 나겠다.
-그래서 지금 아무도 안 건드리잖아. 괜히 찔러봤자 손해만 볼 뿐이니까.
-그래도 조심할 필요는 있으니, 개방이 나선 거겠지.
-마신교가 불쌍하게 보이도록 천운권이 도와준 거야!
-어, 그럴 수도 있겠네!
-일리가 있어. 나도 방금 마신교가 불쌍하다고 생각했거든.
-누가 누굴 불쌍하다고 해!
과도한 의심이 분명했다. 천운권이 얄밉기는 해도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개방은 천운권의 행보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어쩌면 천운권을 이용해서 또다시 마신교를 비롯한 암중 세력을 찾아내려는 의도일지도.
그렇게 생각하자, 개방의 과도한 처사가 이해가 되었다.
-개방이 날로 먹으려고 하는 거야. 하오문도 꼽사리 끼려고 하고.
-마신교도 바보가 아닌 이상, 천운권의 주변엔 얼씬도 하지 않겠지.
-천운권을 너무 우려먹는 거 아닌가. 사골도 이쯤 되면 맹물만 나오겠다.
-그러게 인심을 얻었어야지. 자기가 자처한 것을 어쩌겠어.
-소식이 지나치게 한 방향이라서 재미는 없다.
-아무리 그래도 사고가 터지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
-그래서 지금처럼 심심하길 바라냐?
-하긴, 천운권이 사고 칠 때가 재밌기는 하지.
-우리의 평생 안줏거리이기도 하고. 오늘은 술맛 안 난다.
천운권의 행보가 낱낱이 밝혀질수록, 관심은 초반과는 달리 시들해지고 있었다. 선행은 미담이 되겠지만, 흥미나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했다. 하물며 천운권의 선행은 지나치게 작위적이었다. 마치 그간의 행실을 미담으로 뒤덮기 위한 치적 쌓기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