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510
509 개수작(2)
성주란 성내의 모든 관료와 백성을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로, 황명을 따르기는 해도 독립적인 형태를 지녔다. 성내의 행정, 군사, 형법을 다스리는 포정사사, 도지휘사사, 안찰사사를 관리했다.
대륙이 쪼개졌던 시기에 성주는 왕으로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국이 건국되면서 황명을 따르는 관료가 되긴 했어도,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해서 성주는 성내의 토착 세력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이 맡아 왔었다.
끄응!
산서성 태원 성도의 성주, 장사성은 구겨지는 미간을 겨우 붙잡고 있었다. 인내심의 한계를 넘으려고 할 때마다 미간을 꾹꾹 눌러야 했다.
“그 표정 뭐야? 혹시 반란이라도 일으키려고?”
“……그 무슨 황망한 소리요!”
“북친왕이 너하고 친하다는 말이 있어서. 이거 아주 고급 정보거든. 하지만 편하게 말해도 돼.”
고급 정보든, 말든.
그딴 말을 어떻게 편하게 하냐고!
“나는 북친왕을 본 적도 없소!”
“왜 이래, 조사하면 다 나와.”
장사성은 끓어오르는 생경한 분노를 느꼈다. 살면서 처음 겪어 보는 기이한 분노였다. 언제 자신이 이런 경험을 해 보았던가. 비록 강호의 무뢰배라고 할지라도, 성주인 자신을 앞에 두고 이처럼 무례한 이는 처음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성주의 권한으로 군사를 일으켜 무례에 대한 보답을 해야 했으나, 놈이 내민 패를 상기하자 한숨만 흘러나왔다.
‘황룡패라니, 어쩌자고 황상께서는 이런 놈에게!’
산서성의 주인도 황명 앞에서는 부질없는 관직에 불가했다. 일반적인 어사패였다면 어사대부로서 대우하면 그만이나, 황룡패는 황상의 뜻을 전한다. 감히 그 앞에서 화를 낼 수도, 내서도 안 되었다. 그 자체로 역모로 몰릴 수 있었다.
“북친왕과 연관이 없음은 이미 명명백백하게 밝혀졌소. 괜한 트집은 황상의 은혜에 폐를 끼치는 일이오.”
“황상께서 내게 괜히 이 패를 넘겼겠어? 천하 만민의 평화와 구제를 위해서 주신 거라고. 그 뜻을 어찌 감히 소홀히 대할 수 있겠어.”
그런 놈이 며칠 동안 온갖 산해진미를 대령하라고 난리를 치느냐! 조금만 늦게 나와도 대접이 어쩌니? 내가 누군지 알아? 고래고래 소리를 쳤었다.
내 집처럼 지내라고 했던 말을 후회했다. 자기 집 아니라고 막살고 있었다. 게다가 황룡패의 주인이라고 해도, 자신은 산서성의 성주였다. 최소한 상호 존중을 해야 했다. 첫 대면부터 말을 까고 지랄…… (빠직)!
‘대체 왜?’
장사성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관과 무림은 뜻이 다르기에 소식이 어둡기는 하나, 이놈만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천하망종이었다. 관과 무림을 떠나 모두를 경악하게 한 최악에게 어째서 황룡패를. 머리를 싸매 가며 고민을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반역의 충격으로 황제가 미쳤나? 그런 황망한 생각도 들었다.
“많이 궁금한 모양이야?”
“……아니오.”
“궁금하잖아. 싫으면 말고.”
“궁금하오!”
“호오, 황상 폐하를 의심하시겠다.”
“……하나도 안 궁금하오!”
이 새끼가!
장사성은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각고의 인내심으로 참아 냈다. 관리로서 참을성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덕목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가지고 노는 이 망할 놈의 화법에는 참기가 어려웠다.
“농담이야, 말해 줄게.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고. 조만간 내 제자와 천란 공주께서 혼약을 맺을 거야.”
“제자라니? 혹시 천기자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천기자 말고 내 제자가 어디 있겠어. 민심은 천심이라고, 천의가 내게 있다는 뜻이지. 근래에 이재민들이 나 때문에 먹고산다는 말도 있잖아.”
“……그렇구려!”
장사성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천란 공주는 황상의 총애를 받는 분이다. 차기 황제로 거론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천란 공주의 부마가 된다면 무소불위의 권력은 필연적이었다.
‘천기자의 스승이 천운권이었다고?’
묘하게 비슷하기는 했다. 하늘의 뜻을 아는 자와 하늘의 운을 얻은 자. 전혀 일맥상통하지 않아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무림에 정통했다면 알 수도 있었겠으나, 염산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다. 장원급제 하여 한림학사로 임관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감찰관이 되었으니 알려지지 않을 수밖에.
‘염치도 없군!’
자기 때문에 이재민이 살아 있다니! 이렇게 대놓고 공치사를 하는 놈이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관료 사이에서도 보기 힘든 망종이 분명했다.
‘하지만 운은!’
천운권이란 별호가 지금처럼 어울릴 수도 있나 싶었다. 괴행을 한시도 쉬지 않고 일삼는 괴마의 운이 하늘에 닿아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다.
‘결국, 호가호위였나!’
제자를 등에 업고 황제의 총애를 얻었다. 부러운 일일 수도 있으나, 황룡패를 얻자마자 행패를 부리고 다니는 걸 황상께서 알고는 계실까?
“내가 황상 폐하와 사돈이기 이전에 형, 동생을 하기로 했거든. 형님 폐하께서 아우를 어찌나 신뢰하시는지.”
“부디 선의를 베푸시지요.”
“그래서 하는 말이야. 선의를 베풀면 돌아오는 맛이 있어야지. 맨땅에 계속 퍼부을 수도 없지 않겠어. 누군 땅 파서 장사하나?”
“……내 마련해 보겠소.”
“오해는 하지 마. 절대 강요하는 거 아냐. 난 살면서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자발적이면 모를까?”
“내 자그마한 성의로 여겨주시오.”
“작지만 큰 성의겠지.”
이 개새끼가!
들고 다니기 편하게 작아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달라는 의미였다. 이재민한테 생색은 지가 내고, 돈은 자신한테 뽑아먹겠다는 심보였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데도, 장사성은 두말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상 폐하의 천란 공주에 대한 총애를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적당히 하는 편이 좋을 거야.”
“무슨 말이시오?”
“뭐긴 뭐야, 지금과 같은 시기에 세율을 인상하는 건 옳지 않잖아.”
“세율은 성주의 고유 권한이오. 아무리 그대라도 참견은 허락할 수 없소이다.”
“관부의 땅을 헐값에 팔았네. 이거 뒷돈으로 좀 받았으려나?”
“그걸…… 그런 일 없소.”
“조사하면 다 나온다고 했다. 아직은 허용 범위 내라서 말로 하는 거야.”
처음과 같은 표정의 무진이었지만, 장사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눈앞에 있는 자가 과연 좀 전과 같은 사람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마치 육신을 흉기로 두른 거악의 악마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까딱 잘못 말하면 내일이 없을 것 같았다.
“다 드리겠소.”
“좋은 일에 쓸게. 다만, 나를 정의감 넘치는 사람으로만 보면 곤란해.”
무진의 손가락이 허공을 그었다. 장원의 정원에 세워 놓은 멋들어진 거대한 암반이 사선으로 그어지더니 미끄러져 내려갔다.
꿀꺽!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강호의 이름 높은 무인은 손가락 하나로 백의 병사를 죽인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보이지도 않는,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일수에 암반을 갈라 버리다니. 장사성에게는 신기에 가까운 수였다.
“뭘 또 놀라긴, 화경에 오르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대단하시오!”
장사성은 그간 무인을 잘못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했다. 관과 무림의 불문율로 인해 건드리지 않을 뿐, 적이 되었을 땐 가장 무서운 살수였다.
“내 제자들도 화경에 올랐어.”
“청출어람을 축하드리오.”
“그런데 내가 화경이라니까.”
“……?”
그래서 뭐 어쩌라고?
입맛을 다시는 무진을 보자, 장사성은 깨달았다. 돈만 달라는 게 아니라, 영약도 있으면 내놓으라는 의미였다. 아까부터 ‘킁킁!’거리면서 벽면을 쳐다보고 있더라니.
‘이런 개코같은 새끼가!’
나이가 들면 기력이 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명색이 성주로서 애첩이 셋이나 있었다. 양의 기운이 모이는 날을 정해서 먹으려고 숨겨 놓은 영약이었다. 소진된 양기를 보충해 줄 천양단을 얻으려고 고생한 걸 상기하면 속이 쓰릴 지경이다.
“쓸데도 없으면서.”
“……쓸데가 없기는 누가!”
“성주라곤 안 했는데, 왜 제 발 저려 하지?”
“크흠, 줄 테니까, 어서 꺼…… 가시오!”
이 인간하고 오래 있다가는 화병으로 단명할 것 같다. 더는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곧 후회가 밀려왔다. 괜히 심술을 부리고 말았다. 이 쪼잔한 작자가 황상께 입을 잘못 놀리기라도 하는 날엔 성주의 자리가 날아갈 수도 있었다.
이상은 높으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실언을 했소.”
“괜찮아. 난 관대하니까.”
이 쳐 죽일 새끼가!
장사성은 하루라도 빨리 이놈을 내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하는 꼴을 보니 평생 눌러살 것 같아서 불안하다. 괜한 말을 할 때마다 기일이 늘어날 것 같아서 나불거리지도 못하겠다.
“아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무공 좀 봐 줄까?”
“학문에 정진하고 있소만.”
“알잖아, 내 제자가 천기자야.”
“스스로 하도록 놔두고 싶소.”
중용과 논어를 혼동하는 녀석에게 배우라는 건가? 아까 보니까 천자문도 틀렸다. 그런 녀석에게 아들을 맡기라니, 누구 인생 망칠 일 있나? 혹시나 천기자와 같은 학문의 대가가 나올 수도 있으나, 모험을 걸기에는 자식의 인생이 걸려 있었다.
“내가 공짜나 대가 없는 선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 걱정 하지 말고, 편히 쉬시다 가시게.”
“갈 데가 있어야지, 어디 또 여기 같은 데가 있으려나? 난 환경이 바뀌면 잠을 못 자는데.”
눕기만 하면 자는 새끼가!
화를 내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서안의 성주도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차고 넘치는 사람일세.”
“얼마나?”
“나보다 적지 않겠지요.”
“그런 청백리 한 관료가 있다면 만나 봐야지.”
장사성의 미소에 무진의 입꼬리도 호선을 그렸다. 서로의 꿍꿍이가 이제야 맞았다. 사람이란 원래 다 그렇기 때문이다. 혼자서 안고 가는 인간을 보기 힘든, 빡빡한 세상이었다.
-도가 텄군.
‘네 덕이야.’
-……닥쳤!
‘내가 누굴 보고 배우겠어.’
자기는 아무 죄가 없는 순수한 사람이라는 무진의 뻔뻔함에 마왕은 없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노곤하다.
선행을 베풀었으니, 푹 쉬면서 놀고먹는 건 당연한 권리였다. 무진은 아들과 제자들에게는 따로 움직이라고 말해 놓았다. 육칠이 동선을 파악하는 대로 연락을 할 것이다.
***
-또 천운권이냐.
-너도 촉이 왔구나. 하긴, 우리가 기대한 대로야.
-무슨 꿍꿍인데?
-이게 참 애매해. 분명 선행은 맞아. 다만, 우리의 예상대로 마냥 손해만 보는 건 아니라는 거야.
-친구야, 사설이 길다!
-개방에서 그러는데, 관리들을 협박하고 다니나 봐.
-천운권이 그러는 거 한두 번이야!
-성주도 건드렸는데.
-완전 미친놈일세. 아무리 그래도 성주를! 그래서 뭘 어떻게 했기에 그리 비밀스럽게 얘기하냐?
-돈을 뜯어서 백성들에게 베풀었다고 하더라.
-뭐야, 그게? 아무것도 아니잖아. 이 새끼가 비싼 술 처먹고 신소리를 하고 지랄이야!
-들어 봐, 여기서부터 중요해.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
-천기자와 천란 공주께서 혼인을 하게 됐잖아. 그래서 황상께서 천기자의 사부인 천운권에게 뭔가를 준 거 같아.
-미친놈한테 함부로 뭘 주면 안 되는데!
-그래도 선행이긴 하니까. 아니면 황상께서 모든 책임을 천운권에게 돌리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지.
제자를 등에 업고 관리를 협박하고 다니는 천운권의 행태에 세상은 혀를 내둘렀다. 반면 천기자의 평판은 이미 하늘에 닿아 있었다. 하늘이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내린 선인으로 불렸다.
소문에는 헌헌장부에 무공까지 익힌 완벽한 사내라고 한다. 하지만 옥에 티가 있었다. 바로 그의 사부가 망할 천운권이었다.
하늘의 성긴 그물망이 얼마나 촘촘한지를 시험하고 있었다. 천기자의 명성도 천운권 앞에서는 풍전등화일 뿐이다.
전형적인 호가호위를 즐기는 천운권의 행보였지만, 이번에는 그리 질타를 받지 않았다. 관료들이 백성의 고혈을 빠는 경우가 꽤 많았다. 탐관오리에게 경종을 울렸다면, 과정이 어찌 되었든 통쾌할 수밖에.
그저 천운권이 했기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었다. 일전에 동생의 영웅지로를 따라 한 예가 있기에 섣불리 호응하지 못했다.
다만, 대체 황제가 천운권에게 뭘 줬는지는 알고 싶었다. 아니면 숨겨진 내막이 있던가.
“이 새끼는 왜 또 지랄이지?”
“천운권의 제자가 천기자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황제가 나설 일도 아니잖아.”
“제자가 부마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사부의 체면을 고려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로선 잘된 일이 아닙니까?”
천운권이 세간의 이목을 끌어 주는 바람에 돌아가는 흐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모로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혈마장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찜찜하단 말이야. 이놈 주변을 세밀하게 살필 수 있겠어?”
“어렵습니다. 천운권의 주변에 하오문도로 위장해서 접근하려고 해도, 개방도가 워낙 많습니다. 자칫 꼬리를 잡힐 여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는데도 정작 우린 살피지도 못한단 말이야!”
“송구합니다!”
천운권의 행보는 낱낱이 보고되고 있었다. 당장은 일거수일투족이 훤했다. 마치 내가 이렇게 하고 있다는 걸 널리 알리라고 의도한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다는 사실이 혈마장의 심기를 건드렸다.
최고의 정보력을 갖추었던 본교가 다른 이들보다 한 발 이상 늦어지고 있었다. 소문을 듣고 나서야 행보를 알고 있을 지경이니,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달았다. 이럴수록 정보의 부족을 깊이 체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미친놈이 우릴 놀리고 있는 것 같단 말이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알고서 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혈마장은 천운권이 싫었다. 낭왕을 동원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천운권에 대한 악감정이 크게 작용했다. 놈이 대세에 지장을 주든, 안 주든! 의도했든, 아니든! 본교의 행사에 방해가 된 건 사실이었다.
그런 놈이 사사건건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서 신경을 긁었다. 듣고 싶지 않은데도 들려와서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차라리 가만히나 있었으면 좋으련만.
“안 되겠어, 이번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해.”
“계획은 완벽합니다.”
혈마장은 고개를 저었다. 완벽함으론 만족할 수 없다. 더 완벽해야 했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다음을 기획하기 어렵다. 또한, 정보력의 부재를 실감한 이상,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대업의 성공이 불투명하다.
‘이딴 놈하고 우리가 뭐가 어째!’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과 같은 편으로 의심을 받고 있어서 더욱 기분이 나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