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521
520 가다 주웠다(2)
“하겠습니다!”
“수결해.”
이건 또 언제?
무진이 꺼낸 계약서에 금철심은 아득해졌다. 수인하는 순간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등을 따갑게 하는 살기를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마지못해 수결을 하고 말았다.
“넌 뒤로 빠져 있어. 뒈지기 싫으면.”
“……감사합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기다렸던 생사철협 산중은 현실을 자각하자 인상을 구겼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의도치 않게 손속에 사정을 두고 말았다. 누가 감히 자신을 앞에 두고 저딴 식의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감내할 인내는 벗어난 지 오래다.
‘하나, 나 산중은 방심하지 않는다.’
애송이의 안절부절못하는 태도와 놈의 여유가 거슬렸다. 자기 입으로 천권이라고 떠벌린 이상 보통 놈은 아닐 것이다.
“강호를 살아가려면 남의 일엔 상관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 많이 참고 있는 것이니 이쯤에서 물러서라.”
“애들이 실수할 수도 있지. 너도 이 나이 때 완벽하진 않았잖아. 어른으로서 아량을 베풀라고.”
“서푼의 명성을 얻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정녕 경을 쳐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위선 떨기는, 너도 그냥 배알이 꼴렸던 거잖아. 실수했다고 다 죽이면 세상에 남아나는 사람이 있을까. 나처럼 좀 모범적으로 베풀면서 살라고.”
천운권의 명성을 안다면 산중의 반응이 이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저 망종이 저딴 말을 한다는 것 자체를 개소리로 받아들였을 테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산중은 이제 막 십 년 폐관을 마치고 나왔다. 천운권의 악명을 듣지 못했다.
‘누가 누굴 가르쳐!’
‘뚫린 입이라고!’
어쨌든 기사회생한(?) 금철심과 양예원은 멀리 떨어져서 듣다가 혀를 깨물 뻔했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하나, 천운권에게 그런 인간적인 바람은 사치였다. 자길 모른다고 아무렇게나 내뱉고 있어서 한바탕 쏘아붙이고 싶을 지경이다.
초면에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선을 지키려던 산중의 기세가 급변했다. 말로 타이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와 말을 섞는 것 자체가 아량이고, 도의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것이다.”
“제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마. 이건 충고야. 강호에서 나를 아는 자들은 하나같이 개처럼 떨면서 오줌을 지렸어. 너도 그 꼴 날걸.”
기가 막힌 산중은 혀를 찼다. 세상이 많이 변하긴 한 모양이다.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설치고 다니는 걸 보면.
“하하하하, 정말 재밌는 놈이구나!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아니면 네 목숨을 내놔야 할 것이다!”
“쩝, 안 되겠네. 애들아, 조져라.”
“이놈!”
이제까지 이빨을 까고선 뒤로 쏙 빠지자, 산중은 격노했다. 명색이 천권이란 놈이! 자기 명성에 누가 되는 짓은 하지 않을 줄 알았기에 분노가 들끓었다.
“비켜랏!”
“미안합니다.”
태진이 정중히 사과하며 검을 뻗었다. 말투만 봐서는 예의를 차릴 것 같았지만, 급습에 가까웠다. 말보다 검이 빨랐고, 산중의 요혈을 노렸다.
카아앙!
달구어진 쇠를 망치로 두드린 듯 불꽃이 튀며 격렬한 파문이 번진다. 가볍게 쳐 내고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려고 했거늘. 산중은 가볍지 않은 검격에 경악했다.
‘……뭐지?’
의문을 해소하기 전 시선을 끄는 흉면이 있었다. 권과 검이 격돌한 직후를 노리고 들어왔다.
꽈아아앙, 쩌르르르르!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반응조차 하기 힘든 기습적인 일권이었으나, 육성의 일인답게 사명철권의 번뇌존망으로 응수했다.
너의 생사를 판가름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휘청, 쿨럭!
산중의 대응은 적절했다. 위기를 틈타 파고든 반진력을 권폭에 담았으니 신묘한 절초였다. 그러나 철호의 권공은 그런 식의 임기응변으로 막아 낼 성질의 것이 애초에 아니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면 모를까.
기혈이 역류한 산중은 핏물을 토했다.
어?
이게 아닌데!
연이어 산중의 예상과는 빗나가고 있었다. 반격 후 공간을 창출하려고 했으나, 섬뜩한 전율이 발끝에서 머리끝을 강타했다. 섬광처럼 뻗어 오는 검극이 하단의 사각에서 위로 승천하듯 뻗어 왔다.
스왁!
간발의 차이로 피해 낸 산중은 간격을 좁혀 온 애송이들을 볼 수 있었다. 외모로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긴 하나, 풍겨 오는 기운이 달랐다. 애송이로 치부해도 이상하지 않을 놈들인데, 무공은 자신과 비교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놀라고만 있어선 안 되었다.
철호, 서문호, 태진은 한 치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개개인의 실력이 비슷한데도 불구하고, 잡아 놓은 승기를 더욱 단단히 굳혀 갔다.
‘……이놈들 뭐야?’
세상이 바뀌었음을 산중은 몰랐다. 십 년 전에는 통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세대교체가 늦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십 년 폐관의 폐단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니, 자기 무공만 강해진 줄 알고 날뛴 것이다.
산중은 사명공을 십성까지 끌어 올려 강기를 발출했다. 그와 동시에 두 개의 검강과 한 개의 권강이 정면과 좌우를 노렸다.
강기의 선명함과 위압감에 산중은 대경실색했다.
“……화경!”
사기를 당한 기분이나, 산중에겐 변호할 틈도 없었다. 놀람으로 인한 파격마저도 이용했다.
“……잠깐!”
철호, 서문호, 태진은 유리한 고지를 단 한 차례도 빼앗기지 않았다. 몇 차례 지나지 않아 산중은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화경의 극을 넘어 절대경에 오르긴 했어도, 초반의 피해가 커서 전력 발휘가 불가능했다.
꽈아앙! 쿠아앙!
화르르르르!
이놈들은 아주 그냥 죽자고 달려들고 있었다. 산중은 숨도 못 쉬었다. 이기고 있으면 방심도 하고, 나이보다 월등히 강하면 우월감에 취해야 마땅했다. 저 멍청한 금철심처럼. 그런데 이놈들은 그런 거 없었다.
헙!
금철심과 양예원은 선 채로 굳어 있었다. 감히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그들이 감히 따르지 못할 천외천이었다. 어떤 자와 시비가 붙었는지 이제야 실감하게 되었다. 괜히 강호를 대표하는 육성이 아니었다.
꿀꺽!
저런 괴물을 상대로 도발하고도 여태 살아 있는 게 기적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괴물을 고작 셋이서 압도하고 있었다.
‘진짜로 죽을 뻔했구나!’
‘천운권의 제자가 저렇게나 강했다고?’
이만하면 강호에서 이름 좀 날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우물 안의 개구리보다 못한 하찮은 미물임을 실감했다. 무림대회에 나갈 의욕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문파로 돌아가서 뜨끈한 목욕물에 몸을 녹이고 싶을 뿐이다.
차곡, 차곡!
그러다 금철심은 보았다.
천운권이 쓰러져 있는 무인들을 한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제야 수하들을 챙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미처 의식하지 못한 일을 챙겨 준 천운권이 달리 보였다.
“개당 천 냥이다.”
“……?”
“설마 수하를 버리진 않겠지.”
“……예?”
아니라고 하는 즉시 저 살벌한 대치 구도 속으로 수하들을 던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강기가 폭사되는 공간에 던져지는 순간 골골거리는 것으로 끝나진 않을 터.
“대청천방의 소방주가 수하를 버리고 도망가다니, 참으로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로다. 개방에 연락해야겠다.”
앞 구절까지는 절절한 느낌이 나는데, 뒷말은 왜 이렇게 가볍냐고. 한데, 마지막 구절이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개방에 알려지는 즉시 청천방은 정도 무림의 대단위 지탄을 받게 될 것이다. 천운권의 소식통이라면 능히 그리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는 확실하게 증명된 현실이었다.
“괜찮아, 계약서에 적힌 내용이니까.”
“예?”
“그러게 꼼꼼하게 읽어 봤어야지.”
“너무 빼곡…… 아닙니다!”
그거 볼 시간이 어디 있었다고!
약관에 적힌 내용을 살피지 못한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체감한 금철심이었다. 차후로 계약서만 봐도 경기를 일으킬 훌륭한 교훈이 되었다.
“외상약이 있는데, 어떠냐?”
“……아닙니다, 절대!”
금창약을 바르거나 내상약을 먹는 즉시 얼마나 돈이 부풀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현재로서도 집에서 알면 자신을 가만두기나 할지 심히 유감이었다. 그나마 외동이라 살아남았다고 해야 하나, 어쩌면 아버지가 노력할지도 모르겠다.
“양가장과는 잘되기를 바란다.”
“……감사합니다.”
“원래 기쁨은 나누라고 있는 거잖아. 오늘같이 운수 좋은 날을 기리지 않으면 또 언제 그러겠어? 안 그래?”
“……그렇습니다!”
금철심과 양예원은 어째서 천운권이 천하망종의 서열 일위에 꼽히는지를 실감했다. 이 인간과 엮여서 잘되는 인간들이 없었다. 그것은 구명이든, 적으로 만나든 다르지 않았다. 목숨을 구원받았음에도 전혀 고맙지 않은 것만 봐도.
사실 구원을 받은 건지, 빚쟁이가 된 건지 당장은 체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싫다고 할 자신도 없었다. 저 앞에 산의 능선을 부수고 있는 인간들이 있었다.
육성의 일인을 걸레 조각으로 만들고 있는데, 그 대상이 자신과 가문이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뼈나 근맥은 상하지 않았네. 이 정도면 손속에 사정을 둔 거니까, 앙심은 품지 말도록 해.”
“아무렴요!”
“정운상단을 통해서 청천방으로 연락이 갈 거야.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도록, 알겠지?”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 순간 무진의 얼굴은 염라대왕도 울고 갈 만큼 무서웠다. 산천초목을 벌벌 떨게 할 만악의 근원이었다. 잔뜩 얼어 버린 금철심은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질 듯 딱딱해졌다.
스윽!
무진은 양예원에게도 경고했다.
“못 오를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마라. 아니면 양가장으로 찾아간다.”
“……죄송해욧!”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양예원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상식을 불허하는 절대고수에 대한 동경은 무가의 자손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넘보기에 저들은 상식적인 범위를 아득히 넘어섰다.
무진은 아들과 제자를 헐값에 팔 생각이 전혀……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돈이면 다 되냐!
마왕이 투덜거리지만, 일상적인 소소한 저항에 불과했다. 자기도 키운 값이 있다는 대가성이었다. 아마, 자기 몰래 팔면 영혼이 돼서도 쫓아올지…… 아, 이미 죽었지.
-나는 살아 있다!
가는 길이 어렵지 않도록 무진은 저들을 배려했다. 혹시, 의도치 않게 주둥이를 나불거리면 곤란에 처할 수도 있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는 법이야. 동병상련의 처지라면 서로를 이해하는 데도 빠를 테고.”
“절대 입도 뻥긋하지 않겠습니다!”
당차게 대답하는 금철심과 양예원이었다. 자신들만 당할 순 없었다. 같은 처지를 대량으로 생산해야만 했다. 이로써 강호의 도리는 살아 있었다.
퍽, 커억!
어기적거리며 내려간 후에도 소음은 있었다.
육성의 일인답게 반항이 제법이었다. 산속에 틀어박혀 세상 물정은 몰라도, 무위의 정진은 있었다. 다만, 나오자마자 좋지 않은 상대를 만났을 뿐이다.
허억, 허억!
숨넘어가기 직전의 산중은 허탈한 듯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제야 비로소 신주이십일강과 견줄 수 있다고 확신했었다. 그런데 이 꼴이 뭔가? 견주기는커녕 애송이들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다.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인 결과, 겨우 서 있을 뿐이었다.
‘이것들은 대체 뭐냐고?’
자신이 없는 사이에 강호가 변한 건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놈들이 이렇게나 강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십 년의 세월이 길다면 길겠지만, 강호의 서열이 바뀔 만큼 길진 않았다.
“……이거 안 놔!”
꼼짝없이 제압되었다. 산중은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혼자였다면 이렇게 당하지 않았다. 이놈들은 뭐냐고? 반로환동을 한 괴물들이 아니고서야!
“어른으로서 모범을 보여도 부족한 판국에, 쯧쯧쯧! 그러고서 어찌 대협의 길을 걸을 수 있겠어. 이쯤에서 대가리가 박살 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뭐?”
대결에는 끼지도 않은 무진이 남의 대가리를 부수니 마니 하니 산중으로선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애송이들이 사람을 몰라보고 주접을 부렸으니 대가를 치르는 것이 강호의 율법이었다.
“부수겠습니다, 사부님!”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