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53
052 압도(3)
“이번에는 다를 거예요.”
“시작하겠습니다.”
자세를 잡은 무진이 발뒤축에 힘을 주려고 하자, 남궁연화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잠깐만요! 왜 이렇게 성급해요. 누가 잡아먹는데요!”
“전혀 성급하지 않습니다.”
어디가 성급하다는 거야. 비무하자고 해서,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있는데.
“궁금하지도 않아요?”
“궁금할 게 뭐가 있습니까?”
이토록 직설적으로 물어 올 줄은 몰랐는지, 남궁연화는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대로 궁금하지 않다면, 물어볼 말이 있을 리 없다. 지극히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그러한 무관심이 남궁연화의 속을 긁었다.
“무공을 겨루어 향상을 이루려면 오고 가는 게 있어야 하지 않나요?”
“오고 가는 것이라. 전 딱히 필요하지 않습니다.”
와락, 빠직!
남궁연화의 인상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저 인간이 하는 말은 알아듣기 쉬웠다. 너한테 배울 게 없는 데 왜 나한테 묻고 지랄이냐는 뜻이 너무나 분명해서 돌려 해석하지 않아도 되었다. 예의를 갖추고는 있지만, 자신을 전혀 배려해 주지 않았다.
처음의 패배 후 다섯 번이나 도전했다. 그리고 오전 오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얻었다. 이쯤 되면 궁금해서라도 언질을 해 줄 텐데. 붙자고 하면 바로 시작하고, 매타작했다.
배우기는커녕 일방적으로 처맞고, 한참 후에 바닥에서 깼다. 이런 냉바닥에서 자다가 입 돌아갈 수도 있는데.
후우우!
남궁연화는 익숙지 않은 인내심을 발휘했다. 울화가 치미는데 화를 내기도 어려웠다. 무진은 비무를 흔쾌히 받아 주었고, 흔쾌히 팼을 뿐이다. 어떤 요구도, 제안도 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구타…… 비무만 했다.
“다섯 번이나 일방적인 결과가 나오면 비무랄 수가 없잖아요.”
“지도 대련을 원하는 겁니까?”
그렇지! 아예 눈치가 없지는 않구나.
화색이 돈 남궁연화는 기대를 품고 부탁했다.
“해 줄 수 있나요?”
“제가 왜요?”
비무는 금방 끝나지만, 지도 대련은 일일이 받아 주면서 공력과 초식의 운용을 살펴 주어야 한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지금도 무진은 대충 몸 풀고, 빨리 끝낼 요량이었다. 그런 모습이 남궁연화의 눈에 고스란히 비쳤다. 숨기려고 하지도 않으니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다.
“진짜 너무하네!”
“자주 볼 사이도 아니고, 무리한 부탁은 하지 말지.”
남궁연화가 가식을 버리고 감추었던 성격을 드러내자, 무진도 예의 차리지 않고 말을 놨다.
“사내가 돼서 쫌생이처럼 이럴 거야!”
“부탁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놓아야지. 거저먹으면 대머리 된다.”
“이 치사하고 더러운 새끼!”
“욕하면 더 세게 맞는다.”
투득!
무진이 주먹 관절의 마디를 누르자, 남궁연화는 움찔하며 물러섰다. 다른 건 몰라도, 농담은 하지 않는 유형임을 모르지 않았다. 남궁세가 안에서 자신을 개 패듯 패는 인간이 주변 눈치를 볼 리도 없고.
무진이 짝다리를 짚은 채 주먹을 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뒷골목 왈짜패의 향기가 엄습했다.
“원하는 게 대체 뭐야?”
“검제를 뵙고 싶어.”
“……뭐?”
“못 들은 척하지 말고. 검제를 보고 싶다고.”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 줄 알아?”
“아니면 말고.”
빠르게 포기하는 무진의 태도에 남궁연화는 열불이 터졌다. 이 인간이, 말을 꺼냈으면 흥정이라도 해야지, 안 된다고 하니까 바로 알았다고 하면 내가 뭐가 되냐고!
“시작하자.”
“야! 내 말 아직 안 끝났다고!”
“안 된다며.”
“그래도 노력은 해 봐야지.”
“귀찮아.”
그렇게까지 간절히 검제가 보고 싶지는 않았다. 포기가 빠른 무진의 태도에 남궁연화는 자존심이 상했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한다. 무공의 끝자락에 도달한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천금을 주어도 얻지 못할 기연이었다. 무인에게 기연은 운이 하늘에 닿아야 주어지는 기회였다.
당연히 절박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했다. 한데, 저 건방진 인간은 할아버지의 심득을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도 못한 취급을 했다.
보면 보고, 말면 말고.
‘나보다 못한 인간을 굳이 볼 필욘 없지.’
대외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무진에겐 고금 천하무적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마왕도 내 상대가 아니고.
-동수였다.
천경이 반발에도, 무진은 신주이십일강을 특별 취급하진 않았다. 그들 대부분이 전란의 시절 전에 뒈지는 바람에 전황이 이상하게 돌아갔었다.
그저 검제의 부재가 궁금해서 상태라도 살펴보려고 했을 뿐. 검제를 보기 위해 남궁연화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든, 꿀리고 들어가면 손해다. 내가 아쉽다는 걸 상대가 모르는 편이 협상에 이롭다.
무진은 태평했다.
“빨리 끝내고 술이나 마셔야겠다.”
“야, 인마!”
성깔 나오네.
화끈한 여자였다. 나중에 누가 데리고 살진 몰라도, 나만 아니면 되지 뭐.
“사람은 확실히 말로 해선 알아듣지 못하는군.”
“……잠깐! 만나게 해 줄 수도 있다고.”
무진이 기다리지 않겠다는 의사를 주먹으로 보여 주려고 하자, 남궁연화는 다급해졌다. 이대로는 배움은커녕,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후 또다시 찬 바닥에 패대기쳐질 게 분명하다. 이 자식은 남녀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리 바라던 일인데, 짜증은 피하지 못했다.
“확실해?”
“확신은 못 해.”
“빨리 끝내자.”
“내가 노력은 해 볼게! 나, 대연화야!”
“안 해도 돼.”
“한다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불확실하잖아.”
“할아버지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인 줄 알아? 세가엔 법도와 절차가 있다고.”
“그래?”
무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허락하자, 남궁연화는 안도하면서도 기분이 더러웠다. 저 자식한테 사정해 가면서까지 지도 대련을 받아야 하나, 후회가 밀려왔다.
“수지 안 맞는 일인데, 운 좋은 줄 알아.”
“내가 할 말이거든!”
“어? 지도 대련이라고 아프지 않은 게 아닌데.”
“협박하는 거야?”
“너 하는 거 봐서.”
막말을!
남궁연화는 어이가 없어서 화도 안 났다. 남궁세가에서 자신을 협박하는 인간이라니,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었다.
부릅!
무진의 기세가 바뀌자, 남궁연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멍하니 벌렸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기세였다.
“지도 대련이라고!”
“알아. 너한테 부족한 걸 채워 주지.”
“……오지 마!”
“알려 줄게, 이리 온.”
남궁연화의 부족함, 그건 바로 처절함이었다. 가문 내에서 안락하게만 살아온 그녀였기에 생사의 기로와 절박함은 느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다섯 번의 대련을 하면서 무진은 그녀의 가장 부족한 부분을 파악했다. 무공에 대한 순순한 열망과 투지는 높이 샀다. 그러나 단순히 좋아해서 강해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미래의 권후는 처절함 속에서 피어난 한 줄기 전장의 꽃이었다. 얼굴에 자상을 남기는 쪽이 최선인데, 싫다고 하니 방법을 달리했다.
‘수라의 장을 보여 줄게.’
무진이 겪어 왔던 전장, 그때의 살의와 기세를 드러냈다. 보이는 족족 다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잠자고 일어나서 죽이고, 밥 먹다 말고 죽이고. 계속 죽이다 보니 익숙해졌지만, 몸에 밴 살의는 최악을 달렸다.
화아악!
남궁연화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안 할걸!’
괜히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포기는 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악마가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겁이 나서 물러선다면 무인의 그릇이 아니다.
“망할 새끼!”
“욕하면 안 될 텐데.”
더 맞고 싶다면야.
내 몸도 아니고.
***
태진과 철호의 돌풍은 십육강에서도 이어졌다.
제갈세가의 제갈묵과 문천림의 소정현도 희생양이 되었다. 십육강부터는 그래도 접전이 되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태진과 철호의 약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제갈묵의 패배는 오대세가의 첫 패배를 장식했다. 제갈묵은 아버지의 패배를 갚기 위해 투지를 불태웠지만, 맥이 풀리는 결과만 낳았다. 타오르는 투지만큼 흥분한 제갈묵의 빈틈을 태진은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팔강.
흩어졌다 모인 오대세가의 후기지수가 윤곽을 드러내며 태진과 철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태진의 팔강 대전 상대는 공교롭게도 제갈세가의 마지막 보루, 소천검(小天劍) 제갈민이었다. 제갈민은 제갈묵의 패배로 물러설 수 없는 벼랑에 몰렸다.
태진과 제갈민이 비무대에 올라 서로를 보았다.
이전과 다르지 않은 태진의 기세에 제갈민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태진의 평온함이 맘에 들지 않았다. 팔강에 압도적으로 올라왔다고 해도, 자신은 이제까지 상대한 자들과 달랐다.
“건방을 떠는 것도 여기까지야.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려 주마.”
“최선을 다할게.”
태진은 말싸움으로 시간을 끌지 않았다. 담담히 받아들이고, 목검을 꺼내 들었다.
“건방진! 후회하게 해 주마!”
제갈민은 그런 태진의 담담함이 거슬렸다. 송호문은 제갈세가와 비교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내세울 것 없는 무문이고, 규모의 차이가 컸다. 저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여선 안 되었다. 그 반대가 되어야 했다.
“팔강전 대결을 시작하겠습니다!”
둥둥둥!
북이 울리자 태진과 제갈민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탐색전을 펼칠 거라는 예상과 다른 저돌적인 공세였다. 마주한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타다다다닥!
보법으로 탄력을 받은 육체는 빛살 같은 그림자를 자아내며 검속을 끌어 올린다. 눈으로 마주한 것보다, 소리가 더 많이 들렸다. 일검의 공방이 눈으로 본 걸 초월한다. 안목이 있는 자들만의 영역이었다.
치이익!
부딪침과 이어짐, 검의 맞물림이 교차했다.
태진과 제갈민의 검은 특별하진 않았다. 찌르고 베는 기본에서 벗어나진 않았다. 누가 더 빠르게 찌르고, 베는지에 따라서 흐름이 바뀌게 될 것이다.
슈웅!
정교하게 짜 놓은 듯 부딪치고 있는 화려한 검공의 향연 속, 제갈민의 감각을 당혹스럽게 하는 검이 날아왔다.
타앙!
예측을 벗어난 찌르기에 서둘러야 했던 제갈민의 흐름이 갑자기 흔들렸다.
비틀!
기회를 잡은 태진의 검이 찌르기에서 선회하여 베기로 전환되었다. 흔들렸던 지점에서 벗어나는 제갈민의 보법을 예측하여 베어 냈다.
크아아앙!
소나무에 숨어 먹이를 노리는 굶주린 호랑이의 포효처럼 공간을 물어뜯는다.
파팟!
위험을 인지하고 반사적으로 천기미리보를 펼친 제갈민은 송호질풍에서 벗어났지만, 승기를 잃었다.
태진은 한 수의 이득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송풍행을 밟아 천기미리보를 쫓았다. 예측된 범위, 천기를 읽어 내는 제갈세가의 보법을 숨 돌릴 틈 없이 몰아붙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찌르기, 송호일천이 하늘을 꿰뚫는다.
슈우웅!
막다른 길에 몰린 제갈민은 회피가 아닌 반격으로 전환했다. 불리하지만 공력의 우위를 믿었다.
대천성검법 육식, 성하운성(星河隕星).
완벽한 성취는 아니더라도, 제갈민은 검에 기운을 실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다.
꽈아아앙!
하늘의 기운을 받은 별의 낙하.
거친 파공성과 함께 깨진 나뭇가루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쿠다다당!
비무대 밖으로 떨어졌다. 바닥을 구르다 엎어져 버린 제갈민은 하늘을 망연하게 올려다봐야 했다.
“어떻게…….”
형세의 불리함을 상회할 공력의 우위를 믿었다. 그런데 결과는 허망했다. 덩그러니 남겨진 목검의 손잡이만이 처량한 현실을 증명해 주었다.
“……공력에서 밀리다니!”
제갈세가의 직계로서 벌모세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온갖 영약을 먹고 수련을 해 왔다. 제갈민으로서는 작금의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공력은 자신이 우위에 있어야 했다.
“송호문 강태진 승!”
와아아아아아!
대회장이 떠나갈 듯 함성이 울려 퍼졌다. 지금까지의 대결과는 한 차원 다른 격돌이었다. 서로의 역량이 절묘하게 맞물리고, 결과가 나왔다. 승패는 빨랐지만, 실력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유도하긴 했어도, 미련했지.’
아직도 얼떨떨한 제갈민이지만, 태진의 계획대로였다. 오대세가의 자본력이라면 공력에서 우위에 있어야 하나, 실제로 태진은 공력 부자였다.
아침, 점심, 저녁, 취침 전 야식까지 아버지가 가져온 말도 안 되는 영약을 마구 섭취했다. 공력만 놓고 본다면 자신을 따를 자가 많지 않음을 대회를 거듭할수록 체감했다. 명문 문파나 세가 부럽지 않았다.
‘아버지!’
승리한 태진은 아버지를 찾았다. 대회를 치르는 동안 아버지를 원망했던 마음을 반성했다.
“……?”
반성은 개뿔!
아무리 찾아도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소룡대회 팔강도 아버지의 눈엔 차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든가.
꺼르르르!
패배를 인정 못 하고 게거품을 무는 제갈민. 사정을 안다면 기절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게 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