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533
532 발작(1)
태양신군이 검제를 찾아왔다. 어제 타협을 한 줄 알고 있었는데, 하루 만에 뒤통수를 맞았으니 당연했다. 천하의 검제가 면전에서 한 입으로 두말을 할 줄 누가 알았으랴. 한편으로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밝은 태양만 보고 산 것 같았던 태양신군도 초반부터 말투가 거셌다.
“나를 가지고 논 것인가!”
“자자, 흥분은 가라앉히고 대화로 풀자고.”
“이번에도 말로 때우려고 한다면 각오해야 할 거다!”
“나도 사정이 있었다니까.”
태양신군은 극렬한 열기를 발산하며 압박했으나, 검제는 개의치 않았다. 의지의 검으로 활화산처럼 번지는 열양지기를 끊어 냈다.
음!
태양신군은 신주이십일강 간의 서열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마음만 먹으면 검제를 꺾을 자신이 있었다. 일부라고는 하나, 검제의 진면모를 확인하자 그간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것도 아닐 시에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랬으면 나도 좋겠군.”
한시라도 빨리 물러나고 싶은 검제로서는 불감청 고소원이기는 했다. 그 녀석 때문에 내색하지도 못하고,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따라오게.”
검제는 무림맹의 지하실로 태양신군과 함께 내려갔다. 어떤 단체든 항상 올곧게만 처리하기는 힘들다. 외부에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처리하려면 은밀한 공간은 필수다.
지하로 이어진 통로를 따라 들어갔다. 지하의 여러 문 중 하나를 열자, 퀴퀴하고 역한 냄새가 풍긴다.
취선이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끙, 결국 말했군.”
“숨긴다고 될 일도 아니지 않나.”
태양신군은 공동에 모아 놓은 포대 안에 시체가 있음을, 비릿하고 역한 피 냄새로 알아봤다.
“이곳을 보여 준 연유가 무엇이오?”
“이걸 보게.”
시체를 가려 놓은 천을 벗기자 태양신군은 눈살을 찌푸렸다. 시체의 상태를 보아 적지 않은 기간이 흐른 듯했다.
“어젯밤일세.”
“그건 또 무슨 뜻이지?”
“죽은 시각을 말하는 것이네.”
“그럴 리가.”
시체의 부패로 보아 족히 한 달은 더 되어 보였다. 그런데 불과 몇 시진 만에 이런 상태가 되다니, 판단하기 어려운 기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단전을 살펴보게.”
“이건, 설마?”
시신의 부패 상태와 단전에서 사이하고도 불안전한 기운을 확인한 태양신군은 심각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밤중에 벌인 짓을 따지려고 했지만,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시체에 남아 있는 마기가 그 증거였다.
“이들 전부 다?”
“전부는 아닐세. 그랬다면 눈치를 챘겠지.”
“마공을 사용했다 하나,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사람들을 잡아 놓을 수는 없지 않나!”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그리했네. 대회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잡아 둘 필요는 있겠지.”
수상하다고 하여 무조건 잡아들인 검제의 폭거를 지적하려던 태양신군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약점을 잡고 물고 늘어지기에는 심각한 사태였다.
‘곤란하군.’
당장은 사실을 알려도 문제다. 무림대회가 끝나 가는 마당이라, 자칫하면 그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 버린다. 최소한 대회가 끝난 후에 살펴볼 일이다.
‘대체 어떻게 알고?’
그건 그거고, 태양신군으로선 검제의 정보력에 의문이 들었다. 개방과 맹의 정보각을 통했다면 자신도 알고 있어야 했다. 무림맹도 모르는 정보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섣불리 움직이는 행위는 위험했다.
“대회가 끝나는 대로 시시비비를 명확히 밝혀야 할 것이오!”
“자네한테 책임지라고 하진 않겠네.”
검제가 모든 책임을 본인이 안고 가겠다고 하자, 태양신군도 더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했다. 어제의 일로 미심쩍기는 해도, 몰아붙일 명분이 현재로선 없었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당신들은 실수한 걸지도 모른다.’
대의명분을 잃은 태양신군은 공동을 서둘러 나갔다. 시체와 오래 있고 싶지 않은 것도 있지만, 무림대회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했다.
공동이 조용해지자, 그제야 취선이 투덜거렸다.
“일을 이렇게까지 크게 만들면 대체 어쩌자는 게야! 너는 그런데도 잠이 오냐?”
“저 어제 한숨도 못 잤습니다.”
시체들과 나란히 누워 있던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덮어 놓은 천이 산처럼 일어서더니 바닥으로 내려간다. 보통은 심장마비 걸릴 일이긴 하나, 알고 있으니 안타까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게 누가 이런 짓을 하래!”
“제가 아니면 누가 또 합니까.”
마치 자기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냐며 대의를 위하는 척하지만, 정작 본인은 지옥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고는 지가 치고 개고생은 남이 하는 개떡 같은 현실이었다.
“너는 분명 지옥 갈 거다.”
“말씀이 심하시네요. 저 혼자 살겠다고 한 일도 아닌데.”
“그러면 사전에 언질이라도 주고 시작하든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습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도 속여야 하는 절묘한 계책이긴 한데, 자부심을 만끽하는 무진의 거만한 태도에 취선과 검제는 울화가 치밀었다. 어떤 행위를 하면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했다. 그런데 나중에 잘못돼도 이놈은 빠져나갈 구석이 많았다.
천운권의 악명이 무진의 실체를 가렸다. 무림맹이 천운권의 손에 좌지우지되고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자기는 안 걸린다 이거지.”
“순리대로 가야지요. 맹주는 아무나 합니까?”
“누가 시켜 달라고 했느냐!”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사람들 천집니다. 태양신군도 그렇고요.”
일을 저질러도 이번에는 대규모였다. 시체가 여기만 있지 않았다. 다른 방에 숨겨 놓은 시체까지 더하면 족히 백여 구나 되었다. 하룻밤에 이백이나 죽이고서 태연히 떠드는 것만 봐도 이놈은 정상이 아니다.
그것만이면 말을 하지 않는다. 연관된 증거도 없는데, 산동악가를 비롯한 여러 문파의 무인들을 추포했다.
“이제 어쩔 것이냐?”
“반응을 보고 싶긴 한데. 아마 발작할 겁니다.”
“발작이라니, 놈들이 극단적인 수를 쓸 거란 말이냐?”
“이대로 끝나는 건 아쉽잖아요.”
“이 미친놈이!”
마신교로서도 예상치 못한 뒤통수일 것이다. 왜냐고? 전혀 연관성이 없는 자들을 솎아냈다. 대다수는 모르겠지만, 아는 사람들로서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을 걸려 세운 계획이 하루아침에 망가져 버린다면 어떻겠는가?
무진으로선 아주 효율적인 작전이었다. 그럼에도 망설였던 것은 희생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최소한으로 막으려고 해도, 무림대회에 모인 사람이 너무 많았다. 무림과 연관되지 않은 무고한 양민이 피해를 볼 수 있었다.
“불가피한 일은 될수록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니까요. 그러나 이놈들의 목적은 알아야 했습니다.”
“의도가 따로 있다고 보는 거냐?”
“단순히 무림을 장악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무림 제패가 아니라고?”
“차라리 군림을 위한 일이라면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파멸을 언급하진 않았다. 제정신이라면 그런 극단적인 짓은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쯤에서 물러날 수도 있다. 아니면, 최소한의 발작으로 끝날지도.
‘아닐 것 같단 말이야.’
종교에 미친 사이비 교도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재단해선 안 되었다. 그래서 종교가 무서운 것이다. 마교의 발호를 막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던 역사가 증명한다. 신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초개처럼 던지는 광신도들의 무서움을.
‘마신을 섬기는 것부터가 정상은 아니지.’
-맞는 말이다.
현재와 미래를 돌아보면 이놈들은 무언가를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는 듯한 그림을 그렸다. 단순히 무림 정복으로 끝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정확한 목적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차후, 더 큰 피해를 보게 될 테고. 안일하게 대처했다간 감당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제 저는 꿀 바른 옥수수 알갱이를 튀겨서 먹겠습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이만큼 했으면 됐지, 또 뭘 해야 하냐고.
어제 종일 죽였더니 옛날 생각나고, 기분도 더러웠다. 피의 굴레를 씻어 낸 줄 알았지만, 영혼에 각인되었는지 마를 날이 없었다.
“너 혼자 빠져나가게 해 줄 성싶으냐!”
“제가 작정하고 도망치면 절대 못 잡아요. 참고로 송호문도 걸어 잠글 겁니다. 그러길 바랍니까?”
송호문에 펼쳐진 살상진을 경험한 취선은 말문이 막혔다. 그 안에서 작정하고 무진이 농성을 벌인다고 상상을 해 봐라.
“……이 양심도 없는 놈이!”
“저만큼 양심 있는 사람도 없답니다. 저 혼자 살자고 이러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너 때문에 제명에 못 산다!”
예전에 죽었을 사람을 살려 놨더니, 봇짐까지 내놓으라고 하시네. 망자가 될 팔자를 돌려놨으니, 살아 있을 때 고생은 당연했다. 자기들 때문에 무림이 얼마나 큰 피해를 봤는데.
-알고서 말하는 거냐?
‘난 모르고서도 말할 수 있어!’
지랄이 풍년이라, 마왕은 한숨을 쉬었다. 이놈한테는 기대를 하면 안 되었다. 항상 기대 이하의 민낯을 서슴없이 자랑했다.
무식이 자랑은 아니잖아.
***
무림대회 팔강의 개전에 환호성이 터졌다. 눈을 떼기 어려운 화려한 무공의 시현이었다.
열광하는 군중 속, 웃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빠드득!
이건 변수라는 차원의 문제로 볼 수가 없다. 있어야 할 자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그것도 하룻밤 만에. 이십 년 전에 무림맹에 심어 놓은 세작마저 실종되었다.
개방을 비롯한 정보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무림맹 일대를 감시하기에 명령을 하달하지 않았다. 어제 검제가 한 말이 결정적이기도 했고. 연결점을 찾지 못하도록 했거늘.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왔다. 사전에 연락을 주고받았다면 이토록 허무하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믿기 힘들었다.
‘어떻게?’
대계가 어그러졌다곤 해도, 이런 식으로 급변할 줄은 미처 몰랐다. 가장 큰 문제는 모른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찾아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남은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조차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이 정도였었나?’
검제는 단순히 야욕을 부렸다고 볼 수 없었다. 대의명분을 세우고, 본교를 견제할 방법을 찾은 것이다. 대회를 갑자기 앞당긴 것 역시도 지금을 위한 과정이었다. 태양신군에게 한 말도 안심시키기 위한 수작일지도.
한마디로 검제의 수작에 놀아난 것이다.
무엇보다 사라진 자들 중 신주이십일강도 쉬이 상대하기 어려운 교도가 있었다. 혼란을 수습하고 무림맹을 이끌어 가기 위한 자들이다. 숨겨진 교의 병기가 손을 써 보지도 못하고 당했다. 밤중의 소란을 누구도 감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대단하군.’
인정해야 했다.
검제는 어설픈 수로는 이길 수 없는 자였다. 적어도 두 수 이상을 내다보는 능력을 지녔다.
그러나 대회를 안정적으로 끝내려고 했다면 커다란 오판이다. 이로써 더는 물러설 수가 없게 되었다. 손발을 잘라 놨다고 안심했다면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이다.
‘녀석도 그렇겠지.’
무심한 사내의 눈빛에 광기가 일렁였다. 그 역시 교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