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541
540 내가 언제?(1)
“……이길 수 없어!”
“……도망쳐!”
“……이러려고 온 게 아니라고!”
절반이 넘는 무인이 죽었다. 무림맹과 치고받다가 죽었다면 무인으로서 당당하기라도 하지. 작금의 죽음은 그야말로 개죽음일 뿐이다. 한 명의 무인에게 일방적으로 도살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러다가 궤멸당하겠다 싶은 무인들은 살기 위해 도망쳤다. 태생이 그렇듯, 정파와 달리 명분에 연연하진 않았다.
더욱이 저 괴물은 그 많은 무인을 죽이고도 숨 하나 헐떡이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흔들린다면 모를까, 성주를 비롯한 사도십이세의 주인들도 한주먹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천운권은 천하를 농락하고, 세상을 비웃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인간으로선 감히 그 속내를 파악할 수 없다.
꽈아앙!
도망치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깨닫자 서둘렀다. 동료의 시신을 버려둔 채 중구난방으로 도주했다.
우르르르, 후다다다닥!
살기 위한 도주답게 빠르고 민첩했다. 자기 목숨은 자기가 챙기라는 무림의 격언처럼 동료를 제물로 삼았다.
쯧쯧쯧!
무진은 도망치는 놈들을 추격하는 대신 한심한 듯 혀를 찼다.
“좀 죽었다고 쫄기는.”
진짜 전장을 겪어 보지 않기는 정파와 사파나 다르지 않았다. 죽더라도 상대의 전력을 깎아 놓았어야 했다. 정면 대결을 고집하는 것부터가 글렀다.
이럴 거면 사방으로 흩어져서 무림맹을 쳤어야 했다. 혹시 알아, 인질이라도 잡으면 효과가 있을지. 이거저거 따지는 것부터가 무인으로서 글렀다.
-그런다고 달라질까?
‘아니.’
물론, 결과론적인 말에 불과했다.
무진은 널브러진 주검을 뒤로하고, 단천경, 사도십이세의 주인들, 제법 괜찮은 무인들을 챙겼다. 전장에선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였다.
두둥실.
허공섭물로 들어 올렸다.
무진이 맹으로 들어오자 검제가 물었다.
“저들을 어쩌려는 게냐?”
“강시로 만들까, 생강시로 만들까, 고민이네요.”
“……?”
“편하기는 강시겠죠.”
“……?”
태연히 말해서 장난치는 줄 알았지만, 다가오려던 자들 전부 헉! 하고 뒷걸음을 쳤다. 저런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부터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농담이 과하구나.”
“그렇죠, 제가 설마 강시로 만들겠어요. 적당히 금제해서 제 집에 안전하게 모셔 놓을 겁니다.”
상전이 따로 없다고 하는데, 상전이 언제부터 남의 집을 지켰냐고?
“……다행이구나.”
“개과천선할 기회잖아요.”
단천경의 의사는 묻지 않았다. 억울하면 어쩌라고? 무진은 전부 금제해서 송호문의 경비대로 삼을 것이다. 자기들이 한 짓이 있으니 겸허히 받아들여야 했다.
‘싫다면 강시로 만들어야겠지만.’
-지독한 놈.
개개인의 사정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서 강시로 제조하면 그만이었다. 태양신군과 같이 정사연합 경비대로서 최선을 다해 주어야 했다.
“저들이 돌아가면 일을 벌이지 않을까, 걱정이구나.”
“북해, 사막, 남만, 녹림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 괜찮을 거예요.”
검제는 무진의 수완에 재차 놀랐다.
흑룡성이 쳐들어온 이상, 공백이 생길 테고. 허점을 역으로 찌르기 위해 북해, 남만, 사막, 녹림을 최적의 거리에 위치시켜 놓았다.
“무서운 녀석.”
“척박한 땅에 살았으니, 이제는 기름진 땅에서도 살아봐야죠.”
북해, 사막, 남만이 무림에 정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기도 했다. 마냥 자신을 따르라고 강요하진 않았다. 어떤 일을 하든 상응하는 대가를 주어야 했다. 그것이 단체와 단체의 공정한 거래였다.
‘포위 진형을 갖추었으니, 이젠 해 볼 만하겠지.’
-역으로 치자 이거군.
어떤 전쟁이든 선제적인 공격이야말로 최선의 방어였다.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선제공격이 필요했다.
그러려고 지금까지 준비한 것이다.
“맹주께선 어떠세요?”
“자책하시더구나.”
“몰랐다고 끝나는 문제는 아니니까요.”
“그렇긴 하지.”
사공에 당했다고 하나, 책임이 없다고 할 순 없다. 그가 일개 양민이었다면 모를까, 정파무림의 태두인 무림맹주이기에 책임이 무거웠다. 맹주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는 말은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수고했다.”
“별말씀을요, 맹주님.”
“하아, 앞으로의 삶이 고달프겠구나.”
맹주의 취임식은 열리지 않았지만, 이제부터 무림맹주는 검제였다. 태양신군이 배신자인 이상 토를 다는 이들은 없었다.
***
무림맹으로선 소문을 감추려고 해도 워낙 피해가 컸다. 무인과 양민이 뒤섞여서 전부를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그 이후의 사건은 최대한 노출을 제한했다.
이로써 무림은 마신교의 위험을 인지하게 되었다. 더는 암중 세력이 아닌, 당장 해결해야 할 사안으로 거듭났다.
반면, 천운권에 관한 소문은 의외였다.
본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민심을 납득시키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운권이 그날 벌인 일들을 나열하면 현실성을 아득히 초월했다.
특히 흑룡성의 대대적인 습격을 홀로 막아 냈다는 소문은 불신을 키웠다. 혼자서 수천의 무인을 도륙하고, 흑천무제를 병기로 썼다는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지가 장판교의 장비라도 되나!
무림맹에서 목격한 사람들이 소문을 열심히 나르는데도 여의치는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음에도 거짓말쟁이로 낙인이 찍혀 공분을 샀다. 본 사람이 많은데도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때마침 흑룡성이 와해되었다.
대막혈궁, 북해빙궁, 야수궁, 녹수연맹이 무림맹을 공략했던 사도십이세를 멸문하고, 주요 거점을 먹어 치운 것이다.
당연히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막, 북해, 남만은 중원이 아닌 이방의 오랑캐였다. 그들이 이 틈에 대륙에 뿌리를 내리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이에 대해서 대막혈궁, 북해빙궁, 야수궁은 마신교를 거론했다. 마신교로 인해 자신들도 피해를 봤으며, 그들을 토벌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했다.
한 손이 아쉬운 상황이라 마냥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새외연합을 결성한 이상, 적이 된다면 마신교와 같은 적을 두게 되는 것이다. 당장은 새외연합과 협상을 해야 했다.
무림맹은 차츰 안정을 찾았다.
검제는 무림맹의 체질을 개선했다. 태양신군을 따르던 세력은 고의 여부를 떠나 일선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세작들을 걸러 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했다.
체제가 정비되자 검제는 대회합 회의를 열었다. 문제가 있다곤 해도, 회합을 통해서 화합을 모색할 필요는 있었다.
대회합에는 각 문파의 수장과 최고 장로가 모였다. 이번 회합의 목적은 단순하지 않았다. 마신교의 위험을 인지한 이상, 반드시 처리해야 했다. 놈들을 내버려 둔다면 장차 무림의 존속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그 전에 저것 좀 어떻게 했으면 했다.
맹주의 옆자리는 아무나 앉지 못한다. 무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자리인 만큼 그에 합당한 연륜과 배분이 있어야 했다.
그 자리에 천운권이 버젓이 앉아 있었다.
무공은 거론의 여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이제껏 해 왔던 행위들이 용납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협을 근간으로 두는 무림맹이기에 천운권을 검증해야 했다.
저 뻔뻔한 면상을 보고 있자니, 다들 속이 쓰렸다. 어떻게든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다.
흠.
하나, 누구도 쉬이 물어보질 못했다. 천운권의 신위를 목격한 자들과 증언이 있었다. 이제는 신주이십일강도 천운권 앞에 서지 못했다. 성격은 최악이나 무위만으론 능히 천하제일권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일권(一拳)의 위명이 너무 크다. 자칫 원한이라도 사는 날엔 끔찍한 결말이 기다렸다.
크흠.
침묵이 흐르자, 시선이 쏠렸다. 누구라도 먼저 말을 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검제와 천운권은 상부상조의 우호적인 관계였다.
그렇다면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이 나서야 했다. 태양신군이 사라진 이상 현 무림은 검제 일파의 세상이었다. 외곽으로 밀려난 세력들로선 소림사가 강하게 나서 주었으면 했다. 소림사도 이번 사태로 피해가 상당히 컸다. 만회하려면 무림맹 내의 입지를 강화할 필요성이 있었다.
마지못한 소림의 방장이 나섰다.
“본사는 강 시주를 지지합니다.”
“……?”
혜원대사는 따가운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천운권에게 대들었다가는 본사의 안위를 책임질 수 없었다.
공동, 형산, 종남, 청성, 점창의 소외연합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소림의 방장이란 작자가 줏대도 없이 고개부터 숙이다니 통탄할 일이었다.
그들은 구파일방으로 묶이고 있지만, 구파의 경우엔 세력 구도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 이번 일로 그들은 구파에 들어가기는커녕 중견 문파에도 들기 힘들었다.
당연히 어떻게 해서든 입지를 탄탄히 할 구실이 필요했다. 저 간악한 천운권 일파가 다 해 먹도록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승보고 죽으라는 거요?!’
본사의 안위는 둘째 치고, 천운권의 무위는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했다. 무력만이면 말도 안 한다. 자리만 봐도 권력의 정점이었다.
검제의 옆에 앉은 무당파의 도인은 스승과 친우인 철양진인이었다. 어릴 때 봤던 철양진인의 괴팍한 성격을 알기에 감히 입도 뻥긋 못 했다. 저 괴물이 등선이 아닌 반로환동을 한 상황이었다.
‘알아서 잘해라.’
철양진인의 전음에 혜원은 식겁했다. 입 잘못 놀렸다가는 방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소림도 내부적으로 세작이 나오면서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화라고는 내 본 적이 없었던 스승께서 그토록 대로한 것은 처음 보았다. 무림맹에 가서 똑바로 하지 않으면 친히 면벽 삼십 년을 때리겠다고 했다.
‘소승은 지금 회갑이란 말이오.’
삼십 년 지나면 구십 세를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보이지도 않느냐!’
그뿐인 줄 아나.
권왕, 독왕, 취선, 검후가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들도 입을 다물고 있는 자리였다. 감히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고요한 긴장감이 흘렀다.
침묵이 길어지자, 무진은 만만한 사람을 지목했다. 이제는 거리끼지도 않았다. 다 까발려졌으니 내숭 떨 이유가 없어졌다. 맘 같아서는 다리를 탁자에 올리고 싶은데, 예의 때문에 참았다.
“공동파는 불만이 많은가 봅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시오!”
간택을 당한 영금진인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며 핏기가 가셨다. 맘에 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홀로 주목을 받고 싶진 않았다.
“그럼 불만이 하나도 없는 겁니까?”
“……그건!”
무림대회를 기점으로 피해를 본 문파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공동파는 피해가 특히 컸다. 절반이 넘는 문도가 세작으로 낙인이 찍혔었다.
그러나 강압적인 방식이었고, 죽음의 과정이 석연치 않았다. 그저 권왕과 독왕의 주장에 의존할 뿐이다. 기실 무림대회 마지막 날 끌려간 자들 대부분이 돌아오지 못했었다.
‘이대로는 안 돼!’
영금진인으로선 선택의 기로였다. 이대로 암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하다가는 이도 저도 아닌 문파로 남게 된다. 공동, 형산, 종남, 청성, 점창을 비롯한 소외 문파들을 주도할 명분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검제가 밀고 있는 천운권을 어떻게든 끌어내리거나 흠집을 내야 한다.
‘할 수 있다!’
설마 공식 석상에서 주먹질하진 않겠지.
“뭉개 버리고 싶다.”
화들짝!
천운권의 중얼거림에 영금진인은 놀라서 오금이 저렸다. 자신에게 한 말인지 되물어야 했다. 보통은 하지 못해도, 천운권이라면 다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다.
“빈도에게 한 말이오?”
“혼잣말인데, 오해하셨군요. 방금은 마신교를 말한 겁니다. 걸리는 족족 뭉개 버려야지요.”
영금진인은 흘려듣지 못했다. 마신교를 처단하는 데 방해가 되면 주먹이 다른 방향을 향할 수도 있다는 협박처럼 들렸다.
‘여기서 물러설 순 없어!’
협박에 굴복해선 안 되었다. 천운권도 생각이 있으니, 직접 손을 쓰진 못할 테고. 소신 발언을 이어 나가기로 했다. 또 한 번 밀리면 답도 없었다.
“그간 강 감찰관의 행적은 무림맹의 위상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줬소이다. 일말의 책임감이라도 느낀다면 자제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다고 보네만.”
“그래서 공동파가 선봉에 서겠다고요.”
아니 왜 말이 그렇게 나가?
맥락 없는 대응인데, 무지막지했다. 자칫하다간 마신교 토벌에 선봉장이 될 판이다. 식겁한 영금진인으로선 어떻게든 이 사태를 무마해야 했다.
“그런 뜻이 아니지 않소. 하물며 그대가 무슨 자격으로 본문을 선봉에 세운다 만다 하는 것이오!”
“그래서 선봉에 서겠다는 거지요.”
“그대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지 않나.”
“공동파가 선봉에 서겠답니다, 맹주님.”
앞뒤가 꽉 막혔다.
무진이 검제에게 알랑방귀를 뀌며 ‘무조건 해 줘’라는 뜻을 담았다. 그런다고 해 주면 줏대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검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동파가 선봉에 서겠다면 그리하지.”
“본왕도 적절하다고 본다.”
“본후도 괜찮다고 본다.”
“본방도 반대하진 않겠다.”
검제가 수긍하자 신주이십일강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던 영금진인은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한통속이라도, 공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편애를 하다니. 최소한 여러 문파의 고견을 들어 보고 결정해야 했다.
“또 누가 선봉에 서고 싶습니까? 공을 세울 좋은 기회인데 말입니다.”
무진이 웃으면서 주변을 돌아보자, 마주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제야 다들 현실로 돌아왔다. 무림맹의 실세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마신교의 무서움을 겪어 봤기에 선봉의 위험성을 모르지 않았다. 재수 없으면 개죽음을 당하는 수가 있었다.
“없나요?”
공동, 형산, 종남, 청성, 점창의 소외연합의 협조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자기 살기도 바쁜 처지에 눈 밖에 나고 싶은 문파가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되니 영금진인은 홀로 고립되고 말았다. 모난 돌이 정을 제대로 맞고 있었다.
‘……빌어먹을 종자들, 기대한 내가 바보였구나!’
칼받이가 된 영금진인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야 했다. 재차 나대 봤자 동조해 줄 사람도 세력이 없다. 언제든 깨지기 쉬운 연합에 지나지 않았다. 저들과 함께 힘을 키우겠다고 생각했다니 어리석었다.
공동파가 침묵하자, 소외연합들도 조용히 물러섰다. 언제든 눈 밖에 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다른 문파를 위해 나설 만큼 유대가 끈끈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