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74
073 금의환향(3)
여운상은 소속 상인에게 이기호를 대함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고 지시를 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 후 대접은 예의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정중했다. 딱히 불편하진 않았다.
한데, 대접하는 사람에게도 격이란 게 있다.
저들은 여운상이 챙겼다. 그 대함이 상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특별히 차별을 받은 건 아니지만, 기분이 참 뭣 같았다.
‘황보세가가 왜?’
저놈들이 뭐냐고 따져 묻고 싶은데, 황보세가와 연이 있었다. 백전권 황보장성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니,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기도 어려웠다. 오성문이 강소성을 대표하는 문파라곤 해도, 오대세가에 속하는 황보세가와 비교하면 손색이 있다.
‘송호문이 대체 어디야?’
들어 보니 청양의 작은 문파란다.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송호문은 아무리 생각해도 황보세가와 격이 맞지 않았다. 최소한 본문과 연이 닿는다면 또 모를까?
“어째서 저딴 문파와.”
“자중해라.”
“숙부가 보기에도 말이 안 되잖아요.”
“세상일이란 게 모두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혁무상은 이기호의 호승지심을 말렸다. 상대가 보잘것없어 보여도, 황보세가와 연이 있다면 건드려선 안 되었다. 자칫 오해를 사기라도 한다면, 오성문에 큰 파문을 일으킬 것이다.
‘황보세가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기호는 황보세가를 인정하면서도, 오성문 또한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무사 수행을 통해 넓은 세상을 봤음에도, 시야가 좁아진 격이었다.
‘기회야 만들면 그만이지.’
무사 수행은 오성문에 도착해야 끝이 난다.
이번 기회에 정운상단에도 경고를 해 주어야 했다. 어려움이 있어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제 발로 걷어찬 대가를.
‘상단 따위가.’
무턱대고 받기만 하진 않았다.
고민이란 것도 가끔 했다.
무진은 정운상단의 융숭한 대접에 다른 의도가 있음을 이제야 간파했다. 물건을 사고, 운송까지 맡겼으니 적지 않은 금액일 테지만, 상단의 대행수가 친히 행차해서 수발을 든다는 건 상식적이지 않았다.
‘마왕아, 너도 느꼈지?’
-그걸 이제 느끼는 네가 무신경한 거다.
‘정운상단이 내게 바라는 게 있는 거고, 그게 돈일 확률이 높겠지.’
-돈을 물 쓰듯이 펑펑 써 댔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남궁세가와 적야루에서 번 정당한 보상금만 해도 족히 이십만 냥이 훌쩍 넘었다. 평생 놀고먹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이 년간은 풍족하게 지낼 수 있는 금액이었다. 사인 기준 한 달 평균 생활비가 다섯 냥인 걸 고려하면 사치의 끝판왕이나.
무진은 아끼면서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돈은 벌 수 있을 때 악착같이 벌겠지만, 쓰고 싶을 때는 또 펑펑 쓰고 살 것이다. 유산으로 남길 생각 따위 전혀 없다. 내가 못 쓰고 가는데, 재산은 남겨서 뭐해.
여하튼 정운상단의 규모를 고려하면 자금 부족은 이해하기 힘들다. 장인어른의 보문상단이 건실하긴 해도, 정운상단과는 규모에서 차이가 있었다.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현실인데 어쩌겠어. 차이를 인정해야 발전도 있는 거고.
‘왤까?’
-고민하지 마라.
마왕의 말에 무진은 갸웃했다.
‘무슨 뜻이냐?’
-해 봤자 답 안 나오잖아.
‘이 자식이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답이 안 나오긴 왜 안 나와!’
-네가 상업에 대해서 뭘 알아? 최소한이라도 알아야 방법을 찾지. 맨땅에 철두공을 시전하는 꼴도 아니고, 무작정 고민해서 답이 나오냐고.
마왕의 핀잔에 정곡이 찔린 무진은 입맛이 썼다. 인정하기 싫지만, 상업 쪽으로는 아는 바가 적었다.
‘그래서 어쩌자고?’
-가끔 봐도 멍청하고, 오래 봐도 멍청하네. 해답이 있는데 왜 자꾸 멀리서 찾냐?
‘아, 신산…… 너무 어리지 않냐.’
-어려도 너보다는 똑똑해.
빈정은 상하지만, 무진은 고집을 피우지 않고 황보세령을 찾았다. 답을 구하는 데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배울 수 있다면 세 살배기한테도 배워야 한다.
황보세령의 전문 분야가 용병술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얼마나 아는지 시험 삼아 물었다.
“정운상단을 알고 있니? 몰라도 돼.”
“안휘 삼대상단으로, 곧 있을 상전을 위해 돌파구를 찾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아버님께 잘 보이려고 성의 표시를 하는 거고요.”
“상전?”
“강호로 따지면 무림대전 같은 거예요. 상단의 서열을 정하는 자리죠.”
각 성의 상단의 대표를 정하는 상단 간의 전쟁이었다. 그렇다고 무림처럼 칼부림으로 서열을 정하진 않는다. 상단의 규모, 자산, 성과를 위주로 평가했다.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이 정도는 기본이죠. 중요한 정보도 아니고요. 길 가던 상인한테 물어도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정보예요.”
무진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말로는 누구나 안다고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하고.
“계속해 보거라.”
“정운상단이 안휘 삼대상단이기는 한데, 청풍상단이나 백제상단에 밀리는 형국이에요. 그 이유는 미곡 유통을 중점으로 하기 때문이에요. 이 시기에는 자금 사정이 좋지 않고, 관에서 정하는 미곡 유통에 대한 분배가 있을 때마다 타격을 받고 있거든요. 그에 반해 다른 두 상단은 미곡 유통뿐만 아니라 여러 사업을 병행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충격이 작아요.”
정운상단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상전은 단순 서열 경쟁이 아닌, 상권의 구도를 흔드는 생존경쟁이었다.
“그래서?”
“대외적으론 숨기고 있는데, 광산 개발에 집중한다고 들었어요. 아무래도 현재의 불리한 여건을 개선하려면 금광의 개발만 한 사업이 없긴 하죠.”
금광?
무진은 순간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왜 그게 이제야 떠올랐는지. 아주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금광혈전.
마신교의 주요 자금줄 중 하나가 바로 금광이었다. 저들이 어떻게 금광을 발견했는지는 몰라도, 엄청난 양의 금광이 매장된 광산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왕 시절 마신교의 자금줄을 끊기 위해서 금광을 습격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신교는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금광의 개발이 당시에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하긴, 그만한 세력을 유지하려면 자금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어떤 식으로 자금을 유통했는지 실마리를 잡았다.
‘잠채를 해 왔구나.’
-이제야 알았느냐.
‘너도 몰랐잖아.’
-알고 있었다.
이놈, 더럽게 뻔뻔하네.
어쨌든 금광혈전이라 불릴 만큼 치열한 전쟁을 벌였었다. 기억력이 거지발싸개 수준이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아직 돌지 않았다. 설령 잠채를 하고 있다고 해도, 부숴 버리면 그만이었다.
더욱이 알고 있는 지역이 안휘성에 있었다.
‘역시나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인정하지 않겠다. 소 뒷걸음이 언제까지 통할 것 같아!
무진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일이 잘 풀리자 마왕의 진언에 짜증이 배어 나왔다.
실상, 무진이 정운상단을 선택한 이유는 별 뜻 없었다. 보문상단에 주문을 하면 깜짝 선물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놀란 아내가 감격에 겨워하는 모습을 보려고 한 준비거늘, 보문상단에 주문을 하면 눈치 빠른 아내가 모를 리 만무했다.
‘처제들이 입이 가볍지.’
겨우 보검 두 개와 검법 쪼가리를 내어 줬더니 간단히 포섭되었다. 공기처럼 가벼운 처제들의 입을 신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내와의 접점이 자신보다 밀접했다. 막말로, 비밀 보장에서 형부보단 아내였다.
“광산 개발이 잘되기는 하고?”
“그랬으면 진작 소문이 났겠죠. 청풍상단과 백제상단이 가만히 있는 것만 봐도 답 나오잖아요.”
“역시 우리 며느리, 대단하네.”
“과찬이세요, 아버님.”
광산 개발이란 게 따지고 보면 도박수였다. 사전에 금맥이 있나 조사를 해 보고 확률을 계산하지만, 실제로 파 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도박수가 통했다면 정운상단이 쪼들리지 않았을 테고, 청풍상단과 백제상단에는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격이다. 두 상단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는 건, 자금을 계속 쏟아붓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통찰력이 엄청나네.’
왜 신산, 신산 그러는지 이해가 되었다. 듣고 보면 진짜 별다를 게 없지만, 그것이 중요했다. 지적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밝혀졌을 때는 이미 희소성이 사라져 버린다. 정보란 시간에 의해서 가치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당연히 버려야죠. 가망이 없어요.”
알려지지 않았지만, 청풍상단과 백제상단이 연계했을 공산이 컸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운상단도 안휘를 대표하는 상단인데,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을 리 없었다. 둘이 짜고, 하나를 보내 버린 다음에 결정하자는 취지였다.
“전략 좋네.”
“기본 전술이죠.”
뒤통수를 치지 못하도록 선을 넘지는 않고 있었다. 서로를 견제하기에 정운상단이 버티는 것이다.
“광산이 개발되면?”
“그러면 최고의 상단을 얻는 거예요. 어려울 때 도와주면 외면하긴 어렵잖아요.”
“상인도 의리가 있다는 거냐?”
“능백환 상단주는 인망을 갖춘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왜 버리자고 했냐?”
“좋은 사람은 다들 망하더라고요.”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황보세령이었다. 왜 용병술로 이름을 떨쳤는지 저절로 수긍이 되었다. 용병술이란 냉혹해야 했다. 인정에 휘말리면 더 큰 피해를 양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군사의 책임이 크다.
‘다뤄지는 사람들에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겠지만.’
군사에게 인정을 바라선 위험하다. 그들이 항상 냉혹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지원해야 했다. 감정과 인맥에 연연한 결정을 내리면 더 큰 화를 초래할 수 있었다.
신산의 싹수는 완전 노랬다.
이대로 쑥쑥! 자라서 대송호문의 군사로서 책임을 다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바로 식을 올릴까?
열세 살이면 다 컸잖아.
-네 딸도 저 나이에 보내라.
‘닥쳐!’
내 사위가 되고 싶다면 무조건 십초식이다. 그것조차 버티지 못하면 사위 될 자격이 없지.
-노처녀로 늙어 죽겠군.
‘……찾아보면 있을 거다.’
마왕과의 영양가 없는 대화는 이쯤에서 차단했다.
여운상 대행수와 긴히 할 말이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무진은 삼매진화로 주전자의 물을 끓여 찻잎을 넣었다. 차는 정운상단이 내어 준 군산은침이었다. 차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대화를 하려면 필수였다.
“차부터 드시지요.”
“고맙습니다.”
여운상은 무진을 대접하는 동안에 어떤 용무도 꺼내지 않았다. 상단의 손님으로서 아낌없이 정성을 쏟았다.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친분을 쌓는 친화력이 있었다. 그런 점을 볼 때 상단의 대행수로서 그는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차를 마신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광산을 개발하고 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평소와 다른 물음에 당황할 법도 한데, 여운상은 여유롭게 대처했다.
“절박한가 봅니다.”
“상단의 운명이 걸려 있는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성과는 미진합니다.”
“솔직하군요.”
“숨겨서 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만 조사해 보면 알아낼 수 있는 정보였다. 여운상은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단 실익을 따졌다. 배에서 겪어 본바, 그는 가벼운 듯 보여도 단호했다. 어설프게 속이려고 했다간 역효과가 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