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78
077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느냐?(2)
우웅!
철검에서 곧게 뻗어 나온 유형의 기운이 완곡한 형태를 이루었다. 웅후한 기운이 집중되어 기세를 발산했다. 길이는 족히 석 자는 되었다.
“갑니다, 아버지.”
“……잠깐!”
화들짝 놀란 강우경이었다.
눈을 의심해서 몇 번이고 비벼 보았다. 아들의 검에서 청백색의 기운이 피어 나와 완전한 검의 형태를 띠었다.
“그거 혹시 검강이냐?”
“그런데요.”
아버지도 보는 눈은 있으셨다. 여태 보여 주지 않았다고 해도, 눈치가 있으면 대충 알아야 하지 않나. 아버지가 되어서 아들을 모른다면 그것도 이상하잖아. 따로 떨어져서 사는 것도 아니고, 한집에 사는데.
“이제 가도 되죠?”
“검강이면 초절정?”
“쩨쩨하시네, 좀 더 쓰세요.”
“……화경?”
많이 놀라셨어요?
별것도 아닌데, 좀 더 쓰라고 하면 경기를 일으킬지 몰라 이쯤에서 수위를 조절했다. 전적으로 아버지를 위한 효심이었고, 나중에 정확히 말씀드릴 것이다. 가족끼리 속이면 안 되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그러나 혼자 독박 쓰진 않는다. 감격한 아버지의 모습에서 갈등이 비쳤다. 귀찮아질 우려가 있으니 밑밥을 깔았다. 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행한 일이었다.
‘나도 계획이 있다고.’
-소 뒷걸음에 쥐들이 멸종당하겠구나.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착착 천운이 따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둘러대기에 이만한 수단도 없으니까. 미리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무호도 화경이에요.”
허!
두 아들을 둔 강우경의 일생에서 가장 놀라는 날이 언제냐 묻는다면, 두말하지 않고 오늘이다. 경사스러운 날이 분명한데, 위기감을 느꼈다.
“갑니다!”
“아들아!”
“왜요?”
“됐다.”
아버지는 번개처럼 착검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어서 안 따라오냐고 벌써 손짓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이렇게나 빠른 아버지는 처음 보았다.
“처음부터 너를 믿고 있었단다. 하하하하.”
“그렇군요.”
아버지의 대범한 웃음소리가 왠지 모르게 공허하게 들렸다. 이로써 올바른 믿음이 생겨 다행이었다. 확실히 가족에겐 보이지 않아도 믿음을 주는 끈끈한 유대감이 있었다.
“대견하구나.”
“과찬이세요.”
강우경은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아들의 실력도 모르고 확인하려고 했으니, 간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그대로 했다면 망신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그런데 언제부터?’
초절정도 감지덕지거늘, 화경이라니.
강호에 족적을 남기고도 남을 무력이었다. 그만한 성취를 이루고도 여태 떠벌리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니, 내 아들이 맞나 싶었다.
“라고 할 줄 아셨죠? 되긴 뭐가 돼요?”
“엥?”
우리 아버지가 보기보다 순진하시네.
비장의 패 하나를 꺼내고, 이대로 끝내기엔 아쉬움이 컸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엔 아버지도 공범이었다.
“자고로 문파의 최강자는 문주여야 체면이 서죠. 그리고 송호문의 문주는 아버지고요.”
“……너 이 녀석, 무슨 짓을 하려고?”
“체면을 세워 드리죠. 저는 아직 아버지를 넘어서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괜찮다.”
“제가 안 괜찮아요.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고 생각하죠.”
그 말은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러거나 말거나 무진은 진화공과 송호오검의 화후를 점검해 주었다. 아버지의 수준에 최대한 맞춰 주기는 했지만, 간혹 의도치 않은 검이 나오기는 했다. 아버지의 반사 신경을 믿기에 가능한 훈련이었다.
쐐애액!
성난 호랑이의 어금니처럼, 날카로운 편린이 엇박자로 튕겼다. 검로에서 벗어난 궤적이 이마를 향해 날아왔다. 발끝에서 시작된 전율이 머리끝을 강타할 때 간발의 차이로 검기를 피했다.
꽈아아앙!
떨어져 나간 검기의 편린에 연무장의 벽면이 부스러졌다. 어지간한 수준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저걸 정통으로 맞으면 어떻게 됐을까?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들아!”
“우리 아버지 대단하시네, 피할 줄 알았어요.”
……칭찬하지 마, 새끼야!
아~! 하필 내 새끼네!
무진은 기꺼이 아버지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무럭무럭 성장하는 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뿌듯하다.
-감정이 많이 남은 거 같은데, 분명 실렸어.
‘어허, 모함은 하지 말자.’
호랑이가 연초를 피우던 시절 아버지에게 때마다 처맞은 기억이 남아 있기는 해도, 무진은 대범하게 넘겼다. 대체 언제 적 얘기를. 사람이란 망각의 동물이었다. 전혀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의 분발을 기대합니다.”
무진의 검에서 검풍이 일더니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공간을 한 땀 한 땀 가득 채웠다. 순식간에 허공에 새겨진 검기의 그물망이었다.
흐억!
강우경은 감탄보다 살기 위해 바둥거려야 했다. 저걸 정통으로 맞으면 답이 안 나왔다.
“송호오검의 질풍과 붕산을 연계하면 얼마든지 막아 낼 수 있습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대답하기도 전에 검기의 폭풍이 휩쓸었다. 찰나였다. 살기 위한 인간의 생존본능은 진정 위대했다. 이게 바로 아버지의 부정(父情)…… 부정(不正) 훈련 같은 거겠지만.
기적은 이루어졌다.
연환결에서 헤매고 있던 강우경은 극강의 생존본능을 발휘하며, 익히고 익혔던 검의 진의를 찾아 갔다.
“그 감각을 잊지 마세요.”
“이럴 수가!”
무식하게 때려 박는 훈련이 어째서 통하는 거야? 감각뿐만이 아니었다. 생사의 간극을 느낀 육체가 한 단계 진일보했다. 막연하게 무언가 가로막고 있다고 느꼈는데,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생사결!
강우경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아비를 죽일 셈이더냐!”
“살벌한 말씀은 거두세요. 제가 설마 패륜을 저지를 사람으로 보이세요.”
보인다, 이놈아!
활기 넘치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강우경은 울화통이 터졌다. 언제였을까? 무호가 힘에 겨워하던 적이 있었다. 그 표정이 어째? 지금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이제 어찌할 셈이더냐?”
“어쩌긴요, 이대로 있는 거죠.”
“그만한 성과를 묻겠다고?”
“문파에 비밀병기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후우우, 알려지면 골치 아플 수도 있겠구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문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아들의 의지에 강우경은 내심 감탄했다. 원래 이런 애가 아니라서 놀람은 배가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놀아나고 있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대놓고 놀겠다는 심보군.
‘눈치는 빠르네.’
비밀병기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나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긴 했다. 실제로 비밀병기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가문에 위험이 닥쳤을 때 은밀하게 움직이기 위해서 존재할 뿐.
‘나는 강해지기만 하면 돼.’
-하아, 이런 놈을 믿었다니.
사기당한 마왕의 입에선 한숨만 흘러나올 뿐이다.
***
허!
하도 어이가 없으면 화도 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무사 수행을 보내 놨더니 어처구니없는 선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눈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아들을 보고 있으려니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아들이 아니라 수하였다면 머리를 잘라 저잣거리에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다시 말해 보거라.”
“이건 놈의 함정입니…… 크악!”
분을 이기지 못한 이택상이 아들의 뺨을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입술이 찢어지며 핏물이 벽면에 튀었다.
“……아버지!”
“닥쳐랏,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함정을 운운해! 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
아들에게 단 한 번도 손찌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참기 힘들었다. 오냐오냐 키워 놨더니, 가문을 말아먹을 놈이 나오고 말았다.
당혹스러운 이기호가 인상을 찌푸리다 고개를 숙였다. 당장은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가.”
“아버지, 제발!”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이기호가 나가고 이택상은 혁무상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아들이야 강호 경험이 일천하여 실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혁무상은 이 더러운 강호에서 구르고 구른 노련한 자였다. 혹시라도 있을 불미스러운 사태를 막기 위해 보내 놨더니, 문파의 대계를 흔들어 놓았다.
“자네한테 실망이 커.”
“송구합니다.”
빈객인 혁무상은 이택상을 상전으로 대했다. 문파에 들어올 때부터 서열은 정해졌었다.
“자세히 빼지도 더하지도 말고.”
“예.”
혁무상은 누구보다 이택상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호인이지만, 그는 무서운 야심가였다.
“완벽하게 당했군.”
“끝까지 말리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누가 잘잘못을 따지자고 했어!”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지금 당장 쳐들어가게?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
황보세가와 혼약을 맺었고, 남궁세가에서 증표를 받았다. 두 세가가 송호문과 연관이 있었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타초경사를 범하는 꼴이었다.
더욱이 사태의 전말이 밝혀지면 지탄을 받을 대상은 본문이었다. 차라리 정파가 아니라면 모를까, 남궁세가와 황보세가의 지지를 받는 송호문의 편에 설 것이다.
“한상아, 어찌하면 좋겠냐.”
이택상이 총관에게 답을 구했다.
총관은 그의 동생인 이한상으로, 비슷하게 생겼지만 선이 조금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무공보다는 학문과 이문에 밝았다.
“이만 냥은 주어야 합니다.”
“어쩔 수 없단 말이구나.”
“황보세가와 남궁세가가 나서는 날엔 전말이 밝혀질 겁니다. 그리되면 돈은 돈대로 나가고, 그간 쌓은 명성마저 무너질 위험이 있습니다.”
“자금은 있고?”
“토지를 일부 처분해야 합니다.”
“빌어먹을!”
상기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일이 꼬이려고 하니까,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얽히고설켰다. 여유 자금을 운용해서 안휘 상계를 휘어잡으려고 했던 계획이 틀어졌다. 이러면 두 상단과의 거래에서 불리해진다.
“그래서 이대로 당하고 있자고?”
“우리가 나서기엔 명분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말고도 있지 않습니까, 명분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부류가.”
“호오, 역시 내 동생이구나.”
힘이 없는 문파에 막대한 부가 쌓이면, 노리는 자는 자연히 늘어나는 법이다.
“그들과 협상을 해 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안 돼.”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데다, 협상하려면 대등한 위치여야 했다.
***
소룡대회 우승으로 시끄러웠던 송호문이 잠잠해질 즈음, 정운상단이 찾아왔다.
“저게 다 뭐야?”
“정운상단이면 안휘 삼대상단이잖아.”
“보문상단도 아니고 저들이 왜?”
정운상단은 열 대의 마차와 인력, 호위를 대동하고 찾아왔다. 흔하지 않은 광경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송호문의 무인들도 호기심이 동했다.
어수선해서 나와 본 강 장로가 정문에 다다른 상단의 책임자에게 신분을 물었다.
“뉘시오?”
“정운상단의 대행수를 맡은 여운상이라고 합니다. 강천명 장로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문과 상단이 다른 영역이라고는 해도, 정운상단과 송호문을 비교하면 차이가 컸다. 그런데도 알아봐 주니 허를 찔린 것이다.
“크흠, 정운상단의 대행수께서 어쩐 일이시오?”
“강무진 대협께서 맡기신 물건을 운송해 왔습니다.”
“……?”
대협, 누가?
강 장로는 나이가 들어 귀가 잘못되었나 하여 다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협으로 불릴 만한 인재가 문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물며 동명이인은 대협은커녕, 소협도 어울리지 않는 민폐덩어리였다. 이제 겨우 문파에 도움이 되고는 있으나, 대협이라니 가당키나 한 소린가.
혹여 누가 들을까 겁이 났다.
“잘못 찾아온 듯하오. 그런 사람 없소이다.”
“송호문의 대공자이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제대로 찾아왔습니다.”
“그럴 리가. 혹시 무호를 찾아온 것은 아니오?”
“아닙니다.”
여운상의 단호함에 강 장로는 헛바람을 삼켰다. 고민을 해 봐도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러나 찾아온 사람을 문전박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안으로 들여야 했다.
안휘를 대표하는 상단과 연을 맺을 기회는 흔치 않은 일이기도 하고.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 것이냐?’
강 장로는 무진이 밖에서 사고나 치지 않았을까,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오 년 전 정신을 차렸다지만, 안타깝게도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
과거로 회귀하지 않는 이상.
문파의 안으로 들어온 여운상은 서두르지 않았다. 송호문의 문주와 안주인에게 인사를 한 후 무진을 찾았다.
여운상이 무진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전부 놀라서 ‘왜?’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진은 여운상과 독대했다. 방 주변으로 귀들이 모여 있지만, 거리를 두었다.
“보기 드문 잠룡이셨군요.”
“보기보다 유쾌한 분이군요.”
“때를 안다는 건 중요한 일이지요. 그 옛날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만난 것처럼요.”
“많이 거창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