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84
083 평화주의자(2)
곡지상은 그제야 황우철이 어디서 그런 거금을 얻었는지 알게 되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일이 꼬이고 있었다. 저자가 준 돈이니, 관계가 없다고 하기에도 모호했다.
그러나 이젠 인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증거가 있나?”
“난 말이야. 만약을 위해서 항상 내 돈에 증표를 해 놓거든. 일종의 표식이지. 내 손에 있는 송진 가루를 묻혀 보면 색이 변해. 증거 좋아하지? 자, 검증을 해 보자고.”
무진이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자, 곡지상의 인상이 한없이 구겨졌다. 저 말대로라면 빠져나가기 힘들었다. 확인하는 즉시 천수문의 명예는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다.
“우리도 표식을 해 놓는다.”
“색깔?”
“뭐?”
“어떤 색깔로 변하는지 모르잖아. 알아?”
순간 다급했던 곡지상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저 인간의 수작에 걸려 넘어가 버리고 만 것이다. 이쯤 되니 억지를 부리기도 힘들어졌다.
“네놈은 누구냐?”
“알 거 없고, 수인이나 찍고 얌전히 사라져.”
돈 받고 안 받았다고 하는 짓은 거지새끼들도 하지 않는 저급한 짓이었다. 최소한의 거래 원칙마저 어긴 행위였다. 그러면서 아닌 척 끝까지 위선을 떠는 꼴을 보자니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예전부터 정파 놈들이 맘에 안 드는 이유가 있었다. 위선을 떨려면 끝까지 유지해야지, 꼭 마지막에 가서는 성격을 드러내곤 했다.
지금처럼.
“본문의 행사를 방해하고 무사할 성싶으냐!”
“도대체 무슨 방해를 했다는 거지? 좋아. 정 그러면 관아에 가서 타협점을 찾아보자고. 어때?”
곡지상은 더는 참지 않았다. 저놈의 말대로 해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면 문파의 명예에 먹칠하게 된다. 절대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되는 일이었다.
“기어이 화를 자초하는구나.”
“적당히 하고 꺼지지 않으면 피똥 싼다.”
곡지상이 눈짓하자, 표자성을 필두로 공병위, 염필호가 무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벽호당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실력을 갖춘 당원이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들을 이끌고 다니는 이유가 있었다.
파앗!
천수문의 당원에게 하사한 백호권(白虎拳)의 절수호격의 수로 무진을 노렸었다.
무진은 다가오는 셋의 수법을 받아 주지 않았다. 철호를 단련시키기 위해 지니고 있던 나무로 된 몽둥이가 휘둘러졌다.
머리, 가슴, 허리.
대가리를 처맞은 표자성의 눈깔이 돌아갔고, 가슴을 요격당한 공병위는 숨이 막혔고, 허리를 방어하지 못한 염필호는 척추가 꺾였다.
그럼에도 하나같이 같은 곳을 붙잡고 거품을 물었다.
바둥바둥, 크아아아악!
사내라면 응당 고통을 공감하는 부위.
단숨에 고자곤법의 음경난타의 수가 펼쳐진 것이다. 사내 전용, 무진이 개발한 극악수법 중 하나다. 여자도 세게 맞으면 아프겠지만. 때리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강도는 천차만별인 법이다.
발로 하면 고자각법이고.
“이놈!”
수하들이 순식간에 당하자 곡지상은 재빨리 움직였다. 멍하니 서 있다가 당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천수문을 밝혔음에도 물러서지 않는 걸 보며 한 수 재간이 있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성명절기 파혼조법의 혈혼분쇄를 펼쳤다.
손끝의 기류가 만들어 내는 날카로운 조기가 공간을 잡아채며 흔들었다. 다섯 가닥으로 나뉘었다가 한 점에 집중되었다.
쇄애애액!
공격 후 방심하는 틈을 노린 곡지상은 성공을 자신했다. 조법에 관해서는 문주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죽어랏.”
그런다고 무진이 죽겠나.
거리를 두고 선 철호와 나릉은 지루한 듯 하품을 하며 지켜보았다. 긴장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까놓고 말해서 저 인간을 죽이려면 어지간한 대문파로도 불가능하다. 신주이십일강을 전부 끌고 와야 할지도.
빠각!
예상대로.
무진의 방망이가 무섭게 쇄도했던 곡지상의 조법을 으깨 버렸다. 조법이 파훼 된 곡지상은 오른손을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섰다.
크으윽!
손가락이 마디마디로 부서졌으니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무진은 잡것의 사정 따윈 봐주지 않고 오른손만 노렸다.
빠아악!
으악!
고통에 겨운 곡지상이 몸을 빼기 위해 발을 썼지만, 무진은 대충 퉁겨 냈다. 노리는 목표가 한결같았다. 막고 싶으면 막아도 되는 아주 단순한 수법이었다.
빠가각!
단순한데도 막지 못했다. 작정하고 오른손만 노리는데, 막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남은 손과 발을 이리저리 쳐 낸 후 오른손을 불구로 자작자작 으깼다.
쿠웩!
다친 손을 또 다치고, 계속 다쳤다.
곡지상은 살면서 처음으로 황당, 분노, 고통의 삼박자를 경험했다. 저 개놈의 자식이 강하다는 건 증명되었다. 그런데 집요하게 오른손만 노리고 있었다. 막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괜히 다른 손과 발만 충격이 쌓였다.
오른손만 노리니, 포기하고 내어 주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자기 오른손이 불구가 되어 가는 걸 지켜볼 사람은 없다.
“잠깐…… 크악!”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지.”
“제발…… 크아악!”
“빌지 마, 그런다고 봐줄 사람 아니야. 알잖아.”
무진은 기어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우직한 사람이었다. 오른손을 완전히 으깨서 형체를 남겨 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관철했다.
부르르르!
차라리 오른손을 떼어 버리고 싶은 곡지상이었다. 도망치려는 몸부림도 무의미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다. 놈의 몽둥이질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럴수록 몸만 축났다.
털썩!
회복 불능, 오른손을 잃은 곡지상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무진을 노려보았다.
“문주께서 네놈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복수하게?”
“이런 짓을 벌이고 무사할 것 같으냐!”
“그딴 말을 하면 놔줄 수가 없잖아.”
사람들이 참 병신 같아. 협박을 왜 지금 해? 도망친 다음에 해도 되잖아.
무진이 살의를 품자, 곡지상의 안색이 차갑게 식어 버렸다. 설마 하는 심정인데,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잠깐! 이쯤에서 멈추면 없던 일로 해 주마!”
“정말?”
“그렇다!”
“표정은 아닌데. 웃어야지.”
……이런 개 같은 놈을 봤나!
남의 손을 작살내 놓고 웃으라니!
“어서 신뢰를.”
불신을 신뢰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무진의 억지였다.
곡지상으로서는 주력인 오른손을 잃은 것도 분한데, 살기 위해서 웃기까지 해야 하니 열불이 터졌다. 차라리 무인답게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갈등이 생겼다.
“무인이라면 장렬히 죽어야지.”
“없던 일로 하겠다!”
“반말?”
“……(이 개새)!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웃어야지, 호탕하게.”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하하하하하하!”
무진이 방망이를 내리자, 곡지상은 기운이 빠졌는지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했다. 저 악마 같은 놈이 혹시라도 맘이 바뀌면 재차 위험해질 수 있다.
“어딜 가?”
“살려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수인은 해야지. 자, 오른손 내밀어 봐.”
“……?”
오른손을 뭉개 놓았으면서 할 소리냐고!
화가 나지만 곡지상은 왼손을 내밀어 문서에 수인을 찍어야 했다. 적힌 내용은 어렵지 않았다. 돈을 갚았으니 다시 거론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만약 다시 이를 거론할 시 본인은 개새끼고, 문파는 개쌍놈들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각서였다.
“이제 됐지요!”
“아니.”
“차라리 날!”
“죽게?”
죽고 싶으면 얼마든지 죽여 줄 수 있는 무진이었다. 사람 하나 죽이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죽을 놈은 반드시 죽이고, 재수 없는 놈도 재수 없이 죽일 수 있었다. 강호 무림이 그렇잖아. 성향과 달리 재수 없으면 뒈지는 일이 빈번하고. 맘 곱게 쓴다고 뒈지지 않는 것도 아니고.
“데려가야지. 매정한 놈일세.”
무진은 손수 쓰러진 놈들을 튼튼한 줄로 묶어 곡지상에게 내밀었다.
바들바들!
곡지상은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저놈은 그것조차도 꼬투리를 잡아 괴롭힐 게 분명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쪼잔한 인간임을, 짧은 시간 안에 뼈저리게 경험했다.
질질질!
곡지상은 무진이 시킨 대로 놈들을 끌고 황가철방에서 사라졌다.
일을 마친 무진은 돌아섰다.
무진이 일언반구도 없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하자, 황우철이 다급하게 불렀다.
“은혜를 갚게 해 주십시오!”
“보기보다 감이 좋네.”
무진의 환한 미소에 황우철은 허탈함을 느꼈다. 가타부타 말하지 않아도 의도가 뻔히 읽혔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천수문에서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해 올 테고. 원한을 산 대상이 사라졌다면 원흉인 황가철방에 마수를 뻗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기 힘들다.
“명색이 정파인데.”
“제가 무슨 말을 하길 바라는 겁니까?”
정파, 일말의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최소한 사파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본 정파는 위선자들이었다. 알려지지 않는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도 정파에 적을 두고 있어.”
“그래도 저들보다는 낫겠지요!”
“오해하면 안 되는데! 저들이 저렇게 나올 줄 알았거든. 그래서 당신이 궁지에 몰릴 때까지 기다렸고. 그런데도 나를 따를 마음이 있어?”
“그래서 더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무진은 숨기지 않았다. 천수문이 빌미를 마련해 줬고,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기회를 노렸다고. 누가 봐도 약점을 찌른 저급한 행동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제를 돌이켜 보면 어떨까? 천수문이 정파다운 행동을 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이분밖에는.’
황우철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천수문이 저렇다면, 혈라문이라고 다를까. 사파의 악독함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무엇보다 저 사람은 진실을 숨기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게다가 비상해.’
마치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예측했다. 범상치 않은 머리와 무력까지 갖추었다. 천수문의 앙갚음을 감당하려면 이 사람과 손을 잡아야 했다.
“송호문으로 가서 내 이름을 대면 될 거야. 가는 길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운상단에서 길잡이를 해 줄 테니까.”
“하오면 공께선?”
“무한에 왔는데 열간면은 먹어 봐야지.”
황우철은 내심 감격했다. 그가 남아 있으면 천수문의 이목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쏠린다. 송호문까지 안전하게 가도록 남아서 시선을 끌어 주려 하다니, 의도치 않게 생계 터전을 떠나야 함에도 안심이 되었다.
“이 황 모, 주군의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옥체를 보중하십시오!”
“아버님의 치료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무진은 사건의 전말에 관해선 사실대로 말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말해 주지 않았다. 실상 말을 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일이기도 하고.
-날로 먹는군.
황우철은 제법 실력이 뛰어난 야장 정도로 자신을 알고 있지만, 그는 미래의 신병이기를 만들어 낼 천병자라 불리는 대륙 최고의 야장이었다.
무림맹이 마지막에 일발 역전할 수 있었던 기회를 만들었던 요인 중 하나가 무기 제조에 있었다. 그의 손을 거치면 평범한 철검도 명검의 반열에 오른다고 알려졌다.
천병자를 얻는 자, 능히 십만대군을 얻은 것과 다름없으리라.
물론, 기존 병기 제조를 담당했던 사천당문으로서는 껄끄러운 대상이기는 했다. 후일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강제로 당가의 데릴사위가 되지 않았을까?
천하제일의 야장을 무진은 단돈 열 냥으로 꿀꺽했다. 후일을 알고 있다면 말도 안 되는 후려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