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08)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08화(108/199)
망나니와 소방관 (4)
* * *
“추억이구만, 추억이야.”
남자 스탭이 감개무량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저만치서 회의 중인 감독과 촬감, 박건을 보면서다. 옆에서 보조광(Fill Light) 위치를 조정하던 여자 스탭이 물었다.
“뭐가?”
“저 샷 까먹었냐? 나 PD님이랑 박 배우님 저렇게 서 있는 거. 김 감독님까지 그대로네.”
“아, 그치.”
여자 스탭의 얼굴에 멋쩍은 미소가 떠오른다. 나종모 PD는 손발 맞춘 식구들에게 의리를 지키기로 유명하다.
이들 역시 ‘서울의 개’ 시절 박건의 오디션 현장을 지켜본 멤버들이다.
“그때 내가 잘하라고 기도했잖아. 그래서 건이 오빠가 대박 난 거였나, 흐흫.”
“얼씨구, 오빠? 배우도 아닌 길거리캐스팅이라고 무시했던 사람이 누구더라.”
“와··· 자긴 은 작가님 무명 픽하는 건 걸러야 된다며!”
“거, 사설들이 길다.”
옥신각신하던 두 스탭은 흠칫 놀라며 뒤쪽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조명감독이 텅스텐라이트처럼 희번득대는 눈을 부라리고 있다.
“누군 박 배우랑 작업 안 했어? 수다 떨 짬 있으면 전선이나 한 번 더 점검해, 이번 작품은 대박 안 낼 거야?”
“네, 넵!”
튀는 침을 피해, 스탭들이 재빨리 흩어진다. 일 년이 지나도 졸병은 졸병이다.
*
오늘 촬영의 첫 씬, 처음으로 뜨는 삽은 실제로 극의 1회 분량에 속한다.
20년이 지난 뒤··· 선화그룹이 몰락하고 은한섬이 회귀하기 직전의 상황이다.
나종모 PD의 작업 방식은 ‘서울의 개’를 찍을 때도 비슷하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극의 진행과 촬영 순서를 맞춘다.
“박건 씨 스탠바이는 아직인가?”
“글쎄, 슬슬 끝날 때 됐는데··· 세 시간 전부터 들어가 있잖아.”
그때, 분장팀 천막의 입구가 걷혔다. 동시에 나 PD가 낀 이어링에서 무전이 터진다.
-박건 배우님, 지금 스탠바이 끝났습니다!
명배우의 등장은 늘 주변 사람들의 숨을 멎게 한다. 시선을 모조리 빨아들여 일시적인 진공 상태를 만드는 것처럼.
거지꼴을 한 사내가 휘적휘적 걸어나온다.
‘서울의 개’ 때는 품이 큰 수트를 걸쳐 인간백정 최승으로 변신했던 박건이다.
‘흑의사제’ 때는 검은 수단(사제복)으로, ‘회색도시 팀장님’에서는 풀 수트와 안경으로 압도적인 비주얼을 자아냈다.
이번의 테마는 늙음, 즉 노화다.
“······.”
조로(早老)한 청년이 이러할까. 분장팀은 심혈을 기울여 청년의 시간을 앞당겼다.
노역분장(老役紛裝). 청년이 노인의 역할을 하기 위해 뒤집어쓰는 탈이다.
날이 선 턱과 매끄럽던 피부는 검버섯이며 주름살에 덮였다. 박건이 수십 년간 고난에 시달린다면 저러한 모습이 될까.
완연한 중년··· 얼핏 봐선 노년을 방불케 하는 모습에, 감탄사가 연이어 터져나온다.
“요즘 노역분장은 분장이 아냐. 장난 아니게 리얼한데?”
“저것 때문에 특수분장 아티스트까지 다 불렀다잖아, 첫방 퀄리티 제대로 뽑겠다고.”
지켜보던 배우들도 혀를 내두른다. 최필립이 자기 매니저에게 말했다.
“언럭키 박건이네. 한 40년쯤? 다른 세계에서 고생하다 온 느낌이야.”
그때, 박건이 문득 이쪽을 돌아보았다. 주름살로 덮인 얼굴에 뜻 모를 표정이 스친다.
“철왕국······?”
“예? 그게 뭐예요?”
“아닙니다. 시작하죠.”
*
S#1. 국밥집(안)
평범한 순댓국밥집 안.
문이 열리고 거지꼴을 한 사내가 들어온다. 사오십 대쯤 됐을까. 눈빛이 탁한 걸인은 구석에 앉아 국밥과 소주를 주문한다.
국밥집 사장 : (카운터에서 인상을 쓰며) 장사 끝날 때도 안 됐는데, 재수가 없으려니까······.
곧 순대국밥이 나오고, 걸인은 게걸스럽게 퍼먹기 시작한다.
후룩··· 쩝, 후루룩. 걸신들린 듯 쩝쩝대는 소리와 더불어 밥알들이 튄다.
지켜보던 사장, 결국 비닐장갑을 벗으며 걸인이 앉은 테이블로 간다.
국밥집 사장 :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저기, 손님. 먼저 계산 좀 해 주세요.
그 말을 들은 걸인, 먹던 숟가락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밥과 다대기가 뒤섞인 뚝배기 안은 참혹한 전쟁터처럼 검붉다.
이내 쉰 목소리가 묻는다.
“왜, 돈 안 내고 도망칠까 봐?”
“그건 아닌데······.”
“내가 남의 밥은 빌어먹을지언정 도둑질은 안 해. 그룹이 박살났다고 국밥 한 그릇 못 살까.”
···미친놈인가? 주인이 경찰을 부를까 고민할 때, 알 수 없는 소릴 중얼거리던 걸인이 허리에 차고 있던 복대를 끄른다.
“다 가져가쇼, 잔돈은 됐으니까.”
걸인의 이가 누렇게 번득인 순간, 복대에서 무수한 동전들이 쩔렁대며 쏟아진다.
.
.
.
씬은 바뀌어, 외진 골목.
소주병을 든 걸인··· 아니, 선화그룹 은기학 회장의 셋째 손자 은한섬이 비틀대며 걷고 있다.
“우웩, 우웨에엑!”
하수구에 토사물을 게운 은한섬은 오물 묻은 입가를 아무렇게나 닦는다.
최소한의 인간다움마저 잃은 저 모습이, 한때 재벌집 도련님이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으리라.
선화그룹.
사훈이 ‘사람끼리 아끼고 서로 화합하는’ 것이었던 거대한 기업.
1950년대 창립된 조선화약 주식회사를 모체로 대한민국 정계 최정상을 다투던 공룡은, 사람의 손에 불타 사라졌다.
“빌어먹을 작자들, 무슨 놈의 화합이냐. 핏줄부터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데.”
이제 선화그룹은 없다. 옛 슬로건은 호사가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인화(人和)가 아닌 업화(業火)에 휘말려 사라졌다고.
조부와 아들들, 죽은 딸과 그 손자들.
삼대에 걸친 해묵은 싸움과 승계를 위한 정쟁이 기어이 선화를 무너뜨린 것이다.
늙은 청년의 입가가 웃는 것처럼 일그러진다.
“경사는 없고 조사만 있군. 우리 늙은이가 살아 있었으면 통탄했을 일이야.”
첫째는 수배범, 둘째는 행방불명. 망나니였던 셋째는 거렁뱅이가 되어 거리를 떠돈다.
“도라지, 도라지, 심심산천의 백도라지, 한두 뿌리면 캐어도 대바구니가 넘쳐 뒈지겠구나, 씨팔 것의 인생사······.”
비감에 젖은 민요를 흥얼대며, 골목을 비틀비틀 걷는 은한섬을 카메라가 따라간다.
지근거리에서 배우를 잡던 김정남 촬영감독은 내심 경악을 삼킨다.
‘얼굴근육 위에 유토랑 실리콘이 잔뜩 붙었을 텐데, 어떻게 표정을 저만큼 자유자재로······.’
본래는 따로 장년 배우를 섭외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특수분장에 시간도 걸릴뿐더러 연기를 살리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전미팅 때 직접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쿨럭, 쿨럭쿨럭!”
돌연, 걷던 은한섬이 격렬한 기침을 토한다. 이번에는 음식물이 아니라 핏덩이다.
그의 몸은 이미 망가졌다. 담배와 마약, 각종 항정신성 약물에 찌든 장기들은 한창 때의 사십 대를 육십 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어쩌면··· 조로증(早老症)의 원흉은 몸이 아닌 마음일지도 모를 일이다.
털썩, 힘 풀린 무릎이 땅을 친다. 하늘을 노려본 망나니는 이윽고 모로 쓰러진다.
한 많은 삶을 살았던,
재벌가 막내손자의 최후다.
“···컷! 나이스, 다음으로 갑시다.”
‘서울의 개’ 때 예방접종을 맞은 탓일까.
정확한 타이밍에 나종모 PD의 컷이 나오며 씬이 끝났다.
“박건 씨한텐 분장이 문제가 아니었네. 여기서 봤는데도 소름이 쭈뼛 돋아요.”
박건이 배우들 쪽으로 다가가자, 최필립이 박수를 쳤다. 옆에 서 있던 구신승도 거들었다.
“역시 동생이다. 연기가 아주 칼날 같았어, 곧 회귀할 선화의 막내답다.”
저놈의 컨셉질은 촬영장에서도 계속된다. 최필립은 싹 무시하고 대본을 펼쳤다.
“근데 난 왜 안 죽은 거야? 원래 둘째형은 카레이싱 하다가 사고사한 설정 아닌가?”
구신승은 그걸 왜 나한테 묻냐는 듯 으쓱였다.
“비서실에 물어라. 배역··· 임원들 보직이 바뀌는 게 하루 이틀 일이더냐?”
“컨셉을 잡을 거면 끝까지 잡든가. 애매하게 허술해서 더 킹받네.”
뭐라고 말하려던 구신승의 시선이 반대쪽에 머물렀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미 박건은 돌아서서 눈인사를 건네는 중이다.
“셋이 같이 있으니 조명이 필요 없구먼. 아주 밤무대처럼 번쩍번쩍해.”
올백으로 넘긴 백발을, 목 뒤에서 질끈 묶은 노인이 나타났다. 별 분장을 안 해도 스크린에서 보던 회장님의 포스가 넘쳐흐른다.
명배우 석필호가 빙그레 웃었다.
“어째, 우리 손주들은 준비가 되셨나?”
*
촬영 속도는 곧 극의 퀄리티와 직결된다.
빨리 찍는다고 좋은 작품이 나오느냐? 당연히 아니다. 이는 비축과 관련된 문제다.
‘첫방 전까지 4화, 딱 그쯤만 찍고 들어가면 한동안 여유로울 건데.’
나종모 PD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현장의 감독들도 사람이다. 시간에 쫓기면 마음이 바빠지고, 급한 촬영은 실수를 부른다.
“야, 야! 붐마이크 그림자 들어간다, 더 위로 올려서 잡아!”
조명과 촬영, 음향 쪽 스탭들이 바삐 움직이며 세팅을 재조율한다.
은한섬의 펜트하우스 컨셉.
침대며 소파 등, 가구들을 미리 비치한 세트장이지만 장비들이 들어오면서 이동이 생긴다.
“전 준비됐습니다.”
어느 새 분장을 지운 박건이 말한다. 허름한 옷도 귀티 나는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뒤다.
옛 데뷔작도 지금도, 이 주연 배우는 시간을 낭비하는 법이 없다. 얼굴을 덮던 실리콘 주름들을 뜯어내자마자 다음 씬이다.
“한 분은 이쪽에, 다른 분은 이쪽이요. 아니, 눕지 말고 자연스럽게 엎드려요. 팔은 소파 밑으로 늘어뜨리시고. ···저쪽은 그만 보시고.”
속옷에 가운, 혹은 담요만 두른 여자 모델들이 박건 쪽을 흘끔거리면서 김정남 촬영감독에게 디렉팅을 받는다.
이내 나종모 PD가 외쳤다.
“자··· 집중하시고, 스탠바이ㅡ 큐!”
S#.5 펜트하우스 내부(새벽)
호화로움의 극치인 펜트하우스 내부.
미술감독과 그 휘하 스탭들은 실제보다 더욱 진짜 같은 세트장을 만들었다.
갑판처럼 넓은 흰 침대 위, 여자들과 얽혀 잠들어 있던 청년의 눈이 불현듯 떠졌다.
“······헉!”
부릅뜬 동공이 어지러이 흔들린다. 시야에 비친 풍경들이 익숙한 탓이다.
샹들리에가 걸린 천장, 아치형으로 올라가는 계단, 온통 새까맣게 도배된 가구와 축 늘어진 미모의 모델들······.
선화그룹이 몰락하기 전, 은한섬이 거주하던 화려한 펜트하우스 내부다.
“으음, 음.”
입은 것보다 벗은 쪽에 가까운 여자가 뒤척이지만,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침대에서 내려와, 발걸음을 옮기던 은한섬의 몸이 우뚝 멈춘다. 고급스러운 대리석··· 반투명한 바닥에는 그의 얼굴이 비치고 있다.
늙고 병든 노인이 아니다.
한창 때의 탕아로 돌아온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 순간, 드넓은 거실 저편에서 중년 남성이 별안간 모습을 드러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무표정. 까마귀처럼 새까만 수트를 입었는데,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은기학 회장의 충직한 오른팔이자 그룹을 지키는 사냥개, 비서실장 우종식이다.
“···우 실장, 설마 당신도?”
은한섬이 묻지만, 우종식 실장은 무뚝뚝하게 반문한다.
“연락을 드렸는데, 받지 못하셨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냐. 내가 돌아왔다고, 20년 전으로!”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은한섬은 입을 다문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회귀한 이는 자신뿐인 모양이다.
저 충성스러운 사내, 우 실장 역시 그룹이 사분오열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기에.
고저 없는 목소리가 명령을 읊는다.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방산 부사장 발령 건으로, 세 분 도련님과 조찬을 하시겠답니다.”
돌아온 막내손자를, 할아버지가 부르고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