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10)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10화(110/199)
망나니와 소방관 (6)
* * *
세월은 취향을 깨닫는 과정이라던가.
중견에서 원로로,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드는 배우들에게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연예인 밴을 싫어하고, 젊은 매니저를 불편해하며, 꼭 정해진 식당만 가는 등등의.
손자뻘 직원들을 머슴처럼 부리는 이들도 있으나··· 대체로 비슷한 연배를 원한다.
석필호 역시 다르지 않다.
“형님, 고생 많으셨어요.”
선팅된 고급 SUV.
핸들에 손을 올린 채, 중년 로드매니저가 뒤쪽을 향해 말한다.
뒷자리엔 오늘 열연을 펼친 원로배우가 있다. 은기학 선화그룹 총회장을 완벽하게 재현한 석필호이건만, 어쩐지 낯빛이 어둡다.
“으흠······.”
석필호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침음이 샌다. 이상한 기색을 감지한 로드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었어요?”
“있긴 있었지. 세트장에서 죽을 뻔 했다.”
“예? 그게 무슨······.”
석필호는 진담을 농담처럼 하는 편이다. 본래가 유쾌한 성품이라지만, 정말로 현장에서 사고가 났다면 큰일이다.
“진욱아, 혹시 살해협박을 받았던 적이 있냐? 전화든 서면이든 상관없이 말이야.”
“···그런 걸 제가 왜 받습니까. 형님, 현장에서 누구랑 싸우셨어요?”
“싸운 건 아닌데.”
석필호는 턱을 매만졌다. 구레나룻부터 턱을 따라 이어진, 희게 센 수염이 거칠하다.
“삼십 년 전쯤에, 미아리 포차에서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거든? 젊은 혈기에 언성을 높이다가 한 놈을 밀쳤었어. 그런데 그놈 일행이 갑자기 회칼을 꺼내든 거야.”
“예, 벌써 수십 번을 들었습니다. 백장협 형님이랑 술 마실 때도 하셨잖아요.”
“그 기분이 또 들더라니까, 우리 막내손주 녀석한테.”
“······?”
로드매니저가 눈만 뒤룩뒤룩 굴린다.
한조타워에서 첫 씬을 찍을 때, 저놈은 현장에 없으니 모를 만도 하다. 아니, 설령 지켜봤다 한들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살기··· 이놈을 죽일지 말지 고민하는, 소름끼치는 감각은 온전히 석필호에게만 집중됐기에.
‘다들 모르는 눈치였지. 옆에서 잡던 촬영감독 이외에는.’
주름진 입가가 올라간다. 감정을 허투루 퍼뜨리지 않고, 한 점에 모아 찌르는 기예다.
나머지 두 후배도 썩 훌륭했지만 백장협이 극찬한 젊은 녀석에겐 못 미쳤다. 전날까지 들었던 자랑이 아직도 귀에 선하다.
‘첫 촬영이 내일이라고? 천하의 석가도 기겁할 일만 남았군.’
‘이 친구야, 호들갑 좀 그만 떨어. 연기 잘하는 배우는 많다니까.’
‘그런 문제가 아닐세. 자네도 합을 맞춰 보면 알 거야. 감정부터 호흡까지 제 마음대로 휘두르는데, 찍힌 촬영본을 볼 때까지 감독도 몰라. 현장에서도 캐치 못 한 내면을 카메라로 투영해 낸다는 게 말이 되나?’
이제 석필호도 이해한다.
수십 년을 극 속에서 살아오며, 멍청하고 덜 떨어진 연기들을 얼마나 많이 봤던가. 살갗이 오싹해지는 ‘진짜배기’는 귀하디귀하다.
거기다 박건은 고작 데뷔 2년차다. 사실상 신인이, 감정을 무슨 조명처럼 자유자재로 껐다 켰다 한다는 것은······.
“박건, 그 친구가 지금까지 몇 작품을 했지?”
“어··· 드라마가 두세 개, 영화가 하나니 다섯 개가 안 될 겁니다. 저는 딸애가 워낙 극성팬이라 같이 좀 봤었죠.”
최근 ‘백정장군’을 정주행한 매니저의 대답에, 석필호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내 주름진 손가락이 젊은이 못잖은 속도로 움직인다. 연결음이 가고, 몇 초 뒤 각 잡힌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옙, 회장님!
“오랜만일세, 장 실장.”
-저도 대표님도 선배님 연락만 오매불망 기다리는 거 아시잖습니까. 혹시 뭐, 촬영장에서 불편하신 점이라도······.
“별 건 아니고. 인터뷰 하나 잡아 줄 수 있나? 클릭 수 많이 나오는 곳으로.”
*
[‘망나니 회귀자가 돌아왔다’ 첫 촬영 후기··· 배우들 입을 모아 “대성공 예감”] [석필호 단독 인터뷰, “촬영 중 섬뜩한 기분 오랜만, 손자의 연기에 소름”] [‘망회돌’의 은 회장, 석필호를 경악시킨 박건의 회귀자 본능? 첫방까지 D-15]“석필호, 이 양반이 누굴 칭찬할 때도 있네. 박 배우님이 또 한 건 한 모양이야.”
기사를 훑던 공 팀장이 말하자, 홍보팀 직원들이 한 마디씩 보탠다.
“왜요? 원래 잘 안 해 주나?”
“어, 그러고 보니까 그렇네? 다른 배우들 립서비스 딸 때도 석필호는 못봤었어요.”
공 팀장이 대꾸했다.
“사람 착한 거랑 아무나 칭찬하는 거랑 같나. 석필호 데뷔가 서영이 태어나기도 전이야. 똥군기 그득하던 연극판 밑바닥부터 영화 드라마 다 겪었으니, 요즘 애들은 눈에 안 찰 만하지.”
홍보팀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다. 평소에도 애먼 놈들 다 칭찬하던 인간들보다, 묵직한 양반이 한 마디 던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태블릿 PC를 조작하던 여직원이 말했다.
“매번 회장님 역할만 해서 그렇지, 스탭들 말 들으면 성격은 좋다던데요. 아재 개그가 아니라 할배 개그 엄청 친다고.”
“어, 그럼 구신승이랑 잘 맞겠는데?”
“최필립도 은근 웃기고··· 거기다 박건 씨도 요즘 물이 올랐더라. 한번씩 치고 오는 게 완전 킬포야.”
박건의 웃음코드는 아는 사람들에게 더 인기가 많다. 뜬금없는 소릴 툭툭 던지는데 묘하게 일관성이 있어서 저항 없이 터진다.
윗선에서도 높이 사, 이성철 본부장이 조만간 예능 출연을 고심한다는 모양이었다.
“뭐, 박 배우 예능 나갈 때야 그쪽 동네 뒤집어지는 날이고······.”
띠링, 때마침 문자가 들어온다. 발신인을 확인한 공 팀장은 씩 웃었다.
“지금 대한민국 드라마 촬영장 중에, 저기가 제일 재밌을걸.”
*
‘망회돌’의 설정은 지극히도 비극적이다.
은한섬의 서사만 봐도 그렇다. 어딜 봐도 멀쩡한 구석이 없다.
은기학 총회장은 슬하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뒀는데, 그 딸이 정략결혼이 아닌 연애결혼을 선택하며 데릴사위를 데려왔다.
―어디 천한 놈의 피로 은씨 성을 덧칠한단 말이야! 세상 사람들이 낮잡아볼 일이다. 아이 성은 재영이 네 쪽을 따르거라!
아버지는 왕년의 인기 배우였지만, 굴지의 재벌 그룹에 비하면 댈 턱이 없다. 은한섬의 성이 모계 성씨를 따른 이유기도 하다.
―납치됐던 선화그룹 은기학 회장의 손자, 은한섬 군이 실종 28시간 만에 풀려났습니다. 범인은 몸값을 노린 2인조 전과자들로······.
거기에 유치원생 때 당했던 납치의 경험과, 중학생 때 어머니의 죽음을 거치며 뒤틀린 망나니로 자라나게 된다.
―다 꺼져, 빌어먹을 년들아! 내 앞에서 알짱대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아이고, 도련님······.
―누가 니들 도련님이야, 엄마한테 한 것처럼 내 등에 칼 꽂으려는 거 다 알아. 가서 할아버지더러 직접 오라고 해!
그렇게 은한섬이 성년이 된 뒤.
철혈의 왕좌에 앉은 할아버지와 무능력한 큰아버지들, 배다른 손자들의 갈등은 피투성이 정쟁(政爭)으로 격화된다.
은기학 회장의 죽음까지 겹치며, 한때 대한민국 경제를 떠받쳤던 선화그룹은 수차례 분열을 거듭하다 몰락의 길을 걷는다.
실제로 재벌가에서 펼쳐진 형제의 난, 인사 단행, 가문 제명 등을 실감나게 그려냈다는 호평을 받지만··· 촬영장 분위기는 정반대다.
“박건 씨, 점심 안 먹었으면 같이 콜? 우리 다음 촬영까지 여유 좀 있는데.”
“방금 구 선배랑 먹고 왔습니다만, 또 먹을 수 있습니다.”
로만 삼형제.
첫 촬영 이후, 스탭들이 ‘구박최’를 묶어 부르기 시작한 별명이다.
같은 회사 아티스트라고 꼭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다. 여돌과 남돌은 스캔들이라도 나지, 같은 성별에 연령대까지 겹치면 비교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이 셋은 조금 다르다.
“오늘 나 몇 시에 끝나더라?”
세트장 한쪽, 소파에 늘어져 있던 최필립이 묻자 구신승이 대꾸한다.
“전자가 중공업 퇴근을 어떻게 알겠냐. 네 비서한테 물어라.”
“영태 형 오늘 휴가 보냈어. 여자친구랑 500일이라던데, 배우란 인간들이 어떻게 매니저보다 연애를 더 못하냐.”
“최필립 씨는 19시가 마지막 촬영입니다. 아까 감독님 일촬표 보실 때 같이 봤습니다.”
“아, 고마워요. 저 컨셉충은 도움이 안 돼서.”
“컨셉충이라니, 할아버지가 들으셨으면 불벼락을 내릴 소리······.”
“박건 씨, 저 형 입 좀 막아 줘요. 요즘 운동해서 내가 힘으로는 안 돼.”
박건을 중심으로, 구신승과 최필립이 늘 붙어 다니며 만담을 주고받는다.
촬영장의 분위기메이커인 두 명이야 그렇다 치고, 평소 까칠하던 최필립도 의외로 박건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탓이다.
“자, 이십 분만 쉬었다 가겠습니다! 우리 로만 삼형제 분들, 새벽까지 조금만 더 힘냅시다!”
“···너무 졸린데요.”
“어어, 그건 은선인 사장 말투가 아닌데요? 누가 구 배우님한테 카페인 좀 수혈해 드려!”
촬영이 계속되던 중, 나종모 PD가 흐느적대는 구신승에게 농담을 던진다.
구신승의 과몰입은 일종의 연기 연습이다. 지치면 지칠수록 컨셉이 흐려지다가, 체력이 다 떨어지면 바로 ‘본캐’가 나온다.
‘가만 보고 있으면 좀 귀여워요. 특히 무협지 주인공 따라할 때, 몇 개는 쇼츠 찍어서 올려 주고 싶다니까요.’
구신승의 전담, 양수연 팀장은 피식피식 웃으면서 설명했다. 이쪽 배우와 매니저는 잔소리꾼 누나랑 말 안 듣는 남동생 느낌이다.
‘그래도 애는 착하니까··· 장난기가 너무 많아서 문제긴 한데, 연기 스트레스를 그렇게라도 푼다는데 어쩌겠어요.’
‘저도 동생한테 해 봐야겠습니다. 선이는 오히려 좋아할 수도 있겠네요.’
‘······예?’
연기에 대한 이야기도 도움이 된다. 하루 루틴, 작품 선택 기준, 남성 탑배우로서 주의할 점들을 듣다 보면 시간이 훅 간다.
‘함께 찍은 배우들은 많았지만······.’
서희도나 변휘승과는 또 다르다. 앞의 둘도 좋은 배우지만, 현 시점에서 영화판이고 드라마판이고 씹어먹는 탑스타들과는 비교가 어렵다.
“확실히, 박건 씨가 수트가 잘 받네.”
씬마다 바뀌는 재벌가 자제들의 옷차림 덕에 스타일리스트도 배우도 바쁘다.
의상만 하루에 몇 벌씩 갈아입는, 탈의실 용도로 만든 천막에서 최필립이 감탄했다.
“전 평범한 것 같은데요.”
“아니, 난 이 바닥 인간들처럼 마음에도 없는 칭찬 극혐하거든요. 근데 확실히 모델 같아요. 자르마니가 뽑은 이유가 있어.”
“필립 씨도 화보를 찍지 않으셨습니까?”
“많이 했죠. 명품이나 수트는 지겹고, 요즘은 좀 독특한 컨셉을 해 보고 싶네.”
눈을 감은 채, 스타일리스트에게 메이크업을 받던 구신승이 끼어들었다.
“아웃도어나 수트 광고, 단체 화보 느낌으로 셋이 찍어도 재밌겠다. 우리가 찍는다고 하면 광고주가 보따리 싸들고 달려올 거야.”
“저는 좋습니다. 화보 촬영은 잡지 인터뷰 말고 해 본 적이 없어서.”
박건의 반응은 긍정적이었으나, 최필립은 단칼에 거절했다.
“뭔 단체 화보야, 페이 줄어.”
“연연하지 마라. 용돈은 할아버님이 줄 게다.”
“형, 정신 좀 차려. 우리 할아버진 은기학 회장이 아니라 석필호 선생님이야.”
스타일리스트들이 웃음을 참는다. 현실과 극이 오락가락하는, 인지부조화를 유발하는 이 셋의 대화도 촬영장의 백미다.
최필립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맞아, 석 선배님 인터뷰도 떴더라고. 박건 씨가 선생님 마음에 쏙 들긴 했나 봐.”
“그만큼 연기가 좋았다는 소리지. 원래 칭찬에 인색하신 분 아니냐.”
“나도 은한섬 배역이었으면······.”
“넌 가위바위보부터 이기고 와라, 둘째야.”
“그건 사기였고!”
소리를 버럭 지른 최필립이 박건 쪽을 돌아봤다.
“박건 씨, 오늘 일찍 끝나죠?”
“예. 오후면 마무리됩니다.”
“그럼 한남동에서 저녁이나 어때요. 내 친구들이 첫방 파티 열어준다던데, 배우랑 아나운서들이 꽤 많이 올 거예요.”
‘망회돌’ 속, 선화그룹 삼형제의 각기 다른 성격은 수트의 색상에서도 나타난다.
보수적이며 엄격한 은선인은 검은색과 암회색, 욕망의 화신인 은선창은 화려한 원색, 주인공 은한섬은 진청색 계열을 주로 걸친다.
“초대는 감사합니다만, 오늘은 안 될 것 같습니다. 바로 아버지를 모시러 가야 해서요.”
어느새 변신을 마친 박건이 정중히 불참 사유를 전한다. 최필립은 입맛을 쩝 다셨다.
“어쩔 수 없죠. 가족식사가 먼저지.”
“아, 식사는 아니고··· 안성 쪽 촬영장에 가 봐야 합니다. EBC 분들이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촬영장? 거긴 왜요?”
처음 듣는 소식이다. 메이크업 중이던 구신승과 스타일리스트들의 시선도 쏠렸다.
여전히 무심한 표정 그대로, 답이 돌아왔다.
“이번에 다큐멘터리를 찍게 됐거든요. 아버지랑 공동 주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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