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23)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23화(123/199)
부상하는 로켓들 (5)
* * *
정오를 막 넘은 시각,
동작구의 본가. 열린 창문에서 들어온 햇살이 방 안을 후끈하게 데운다.
구신승이 가르쳐 준 용어··· 무협지에서는 한서불침(寒暑不侵)이라 한다던가? 천장의 에어컨을 틀며, 건은 중얼거렸다.
“옛날엔 더위도 안 탔는데.”
오랜만에 한가한 날이다.
주연배우의 촬영 일정은 남들보다 빼곡하나, 수요일인 오늘은 스케줄이 적다.
어젯밤, 월화극인 ‘망회돌’이 시청률 고점을 또 한 번 갱신한 여파다. 나종모 PD는 극이 끝나자마자 연락해 왔다.
‘건이 씨, 또 올랐어! 이 기세면 다음 주에 30%도 무난하게 진입할 거야. 그간 작품들 옮겨 다니느라 고생도 많았는데, 내일은 촬영장 나오지 말고 푹 쉬어.’
‘괜찮습니다. 협찬이 될 때 새벽촬영 진도를 많이 빼놔야죠.’
‘아니, 정말 안 그래도 되는데······.’
‘어차피 가족들이랑 밥 먹고 나면 할 일도 없어서요. 저녁 먹고 가겠습니다.’
부지런한 주연, 넉넉한 제작비만큼 감독을 안심시키는 것도 없다. 나 PD는 이따 보자면서도 번 아웃을 조심하라며 연신 당부했다.
‘잘 쉬어야 돼. 못 논 것도 좀 놀고, 응? 건이 씨 멘탈 금강석인 거야 알지. 그래서 더 금 안 가게 조심해야 돼. 그게 롱런하는 비결이라고.’
그런 말을 들어도, 놀 줄 모르는 입장에선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건은 베개 밑 스마트폰을 찾아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만날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탑 스타의 여가시간은 어떠한가.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그는 보통 스마트폰으로 대부분의 취미생활을 대체한다.
우선 메신저.
휴대폰 타자 속도가 늘었다고는 하지만, 이전에 비해 오는 연락이 수십 배가 넘으니 답장하는 것도 일이다.
영화 쪽 멤버들 단톡을 확인하고, 배우 동료들에게 답장하고··· 동창들에게도 톡을 돌리면, 한 통씩은 꼭 전화가 온다.
오늘은 요 며칠 야근에 시달린다고 한탄하던 동창 검사, 배영호다.
-어, 건아. 오늘 쉬냐?
“응. 촬영이 저녁 이후로 잡혀서.
피로로 찌든 목소리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찬다.
-하필 평일이네. 나중에, 너 편할 때 셋이 얼굴 좀 보자. 서로 바빠서 송년회고 신년회고 다 못 하고 지나갔잖냐.
“난 아무 때나 괜찮은데. 말 나온 김에 점심이나 먹을까? 지검 근처로 갈 테니까.”
-···야, 아냐. 그건 안 되겠다. 주변에 싹 비밀로 하고 있단 말야. 괜히 너랑 같이 있는 거 보면 하이에나들 꼬인다.
연예인 친구를 팔아 덕을 보려는 사람도 많다던데, 공무원이라 그런지 관리가 철저하다.
동창의 자기절제에 감탄할 때, 헛기침을 한 배영호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그런데, 내가 너희 회사로 놀러 갈까? 서승아는 빼고. 이왕이면 진지유나 다른 배우들 있을 타이밍에 좀······.
···누구나 자신의 ‘최애’엔 진심이다. 적당히 전화를 끊고, 건은 새 알람들을 확인했다.
[은씨네 망나니들] [최필립] : 님들‘망회돌’의 세 주연들.
로만의 3인방 단톡방도 생겼다.
삼형제가 모여야 한다면서, 구신승이 양떼 몰아넣듯 강제로 만들어 버린 단톡방이다.
덕분에 촬영 현황 공유, 일과 재테크 얘기, 백하니 저격 등 다양한 한담을 나누며 회사 동료들과 더욱 가까워졌다.
‘저 두 사람도 잘 쉬는 게 중요하댔지.’
물론 전직 용사, 현직 철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소리다. 대본은 다 봤고··· 팬카페에 연재 중인 과거사도 생각나는 데까지 올렸다.
이른바 픽션을 가장한 팩션.
기억을 점검하는 용도로 쓰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아서 연재에 재미가 붙었다.
소설처럼 쓰다 보니 배우가 아닌 작가의 마음도 체험할 수 있달까. 박건이 아닌 ‘고드’에 몰입하는 팬들을 보며, 묘한 성취감은 덤이다.
‘아버지는 강의가 있으시댔고, 어머니는 가게로 가셨으려나?’
박열호와 한영주 역시, 요즘은 아들들보다 더 바쁘다.
아버지 쪽은 다큐 방영 이후 강의 요청이 폭발했고, 어머니는 새로 낸 꽃집 때문에 매일같이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시는 중이다.
진지유, 서희도, 변휘승··· 긴 손가락이 연락처를 휙휙 내린다. 웬만큼 친분 있는 배우들은 여름 스케줄로 바쁘고, 진지유는 빚을 진 게 많아서 갑자기 불러내기가 미안하다.
거실로 나가, 건은 [백하니]라고 적힌 이름 위에서 손을 멈췄다.
유준일 실장에게 듣기론, 이 사람도 작품이 없을 때는 한량 중 한량이라고 했다.
가족들 여름옷이며 ‘망회돌’ 종방 선물을 살 겸, 오랜만에 쇼핑이나 가자고 하면······.
그때 도어록 소리가 들렸다.
제 형의 군용 백팩에,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온 동생은 건을 보더니 반색했다.
“어, 형! 아직 있었네?”
“좀 이따 나가려고. 프로필 음악 바꿨더라?”
박선은 해맑게 제 스마트폰을 붕붕 흔들었다.
“응. 진지유 배우님 옛날 그룹, 포 퀸즈? 이쪽 분들 신곡이 나왔더라고. 우리 회사 아이돌도 좋은데··· 여기 곡이랑 컨셉이 진짜 장난 아냐.”
“나중에 실장급 이상 되면 아이돌 담당도 해 봐. 프로듀싱도 욕심 있었잖아.”
“에이··· 내가 그런 걸 어떻게 해. 우리 은한섬 부사장님처럼 회귀하는 능력이 있어야지, 아니면 진짜 미래를 보거나.”
회귀자의 바람처럼, ‘망회돌’은 드라마와 현실 양쪽에서 쭉쭉 나가고 있다.
특히 극중 스토리가 제대로 몰아친다.
최근 찍은 카체이싱, 폭주하는 웨어러블 로봇들과의 격투 씬은 ‘재발한 파괴본능’이라는 이름으로 팬카페 인기글에 올라왔다.
벤츠도 부수고 로봇도 부수고, 못된 그룹도 부수는 파괴신이라면서.
하이라이트는 정계의 노괴들을 족치는 장면이었는데, 석필호의 부탁으로 카메오를 출연한 원로배우들이 엄청난 열연을 선보였다.
“이제 이것도 끝나 가네. 2화 연장됐어도 다음 달이면 종영이래.”
박선이 회상에 잠긴 눈빛으로 말했다.
“이번 작품?”
“응. 작년에도 형이랑 둘이 얘기했잖아. 작품이 어떻게 될 것 같다, 시청률은 몇 퍼센트를 찍었으면 좋겠다면서.”
“그랬지. 대부분 예상보다 잘 됐고.”
예나 지금이나 형제의 우애는 여전하다. 드라마의 사이즈가 커지고 집이 더 커졌을 뿐,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 법이다.
“요즘 여 작가님 폼이 정말 무시무시해서··· 이 상승세면, 진짜 40%는 무난하게 노려도 될 것 같아. 최저로 쳐도 35%?”
“공 팀장님도 그렇게 얘기하더라. 최대한 노력해 봐야지.”
고고익선高高益善),
시청률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
CVN이야 개국공신이 됐지만, JNBC에서는 확실한 임팩트를 보여야 다른 작품들을 제치고 올해의 상들을 휩쓸어 올 수 있다.
“아, 그런데 형. 여기는 어때?”
박선은 제 머리를 건드리더니, 영 모양새가 이상했는지 얼른 말을 바꿨다.
“그러니까 기억! 잃어버렸다던 기억 말야.”
“나쁘지 않아. 느낌도 좋고.”
“아··· 진짜 다행이다. 이번 작품 들어가면서 좀 걱정했거든. 간이 오디션? 어쨌든 카메라 테스트 안 보고 바로 잡은 거였잖아.”
정확히는 볼 필요가 없었지. 알아듣지 못할 설명을 하는 대신, 건은 그냥 빙긋 웃었다.
“가끔 그런 시나리오도 있더라. 연기 안 해 봐도 느낌이 팍 오는 작품, 망회돌이 그랬어.”
“그치, 그치. 나도 읽고서 형이 좋아할 스타일이라고 생각했어.”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던 박선이 문득 물었다.
“아, 근데 그거. 팬카페에 쓰는 소설은 손 작가님한테 영감을 받은 거야?”
“소설? 철왕국 이야기?”
“응, 그거! 나도 어제 처음 읽고서 꼬박 밤 샜다니까. 주변 사람들이 다 난리야, 빨리 망회돌 끝내고 형한테 연재시켜 달라면서.”
진실은 거짓말보다 더 허무맹랑할 때도 있다. 건은 정수기로 걸어가면서 대꾸했다.
“그거 진짜 있었던 얘기야. 내 경험담.”
“에이, 거짓말!”
“진짠데. 나중에 말해 줄게.”
*
그날 밤, 구신승의 집.
저녁 스케줄이 있는 배우를 데리러, 매니저가 직접 왔다.
아직 시간 여유는 있다. 소파에서 아이패드를 들여다보는 구신승에게 양 팀장이 물었다.
“뭘 그렇게 봐?”
“칸 영화제에 새로 뜬 기사들.”
“아, 이번에 흑의사제 초청받은 거?”
구신승이 돌아보지 않고 끄덕였다. 귀공자의 전형처럼 생긴 이목구비, 긴 속눈썹이 품위 있게 오르내린다.
“개봉할 때도 말들이 많더라니, 김률 감독이 기어이 사고를 냈더라. 장르영화가 비경쟁도 아니고 경쟁이라니. 그것도 오컬트인데.”
“그때 말했잖아. 저건 될 거라고.”
대수롭지 않은 말에, 양수연 팀장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구신승은 이 세계의 연예인들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유형이다.
처음 본 이들은 그를 착실한 귀공자로 안다.
조금 친해진 사람들은 촬영장의 분위기메이커로 생각한다.
오랫동안 지켜본 이들은 의문을 품는다.
‘대체 뭘 생각하는 인간이지?’
대중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 뒤에서는 벗어던지는 일차원적 변화가 아니다.
작품 속 캐릭터들을 따라하는 메소드 액팅··· 그것이 연기 연습도 취미생활도 아니라는 사실은 로만 수뇌부 몇 명과 양 팀장만 안다.
진지유와 백하니, 박건의 계약 전 뒷사정을 아는 이들이 드물듯이.
‘양수연, 신경 좀 써 줘. 네가 아니면 저 친구 도울 사람이 없어.’
입사 초기, 무려 노중만 대표가 그녀를 직접 불러 지시할 때만 하더라도 무슨 말인지 몰랐다.
이제는 차고 넘치도록 안다. 무려 5년이 넘게 구신승이라는 배우를 봐 온 지금은.
‘···왜 매니저들이 그렇게 도망가는지, 그때는 이해를 못 했었지.’
차라리 매사 시니컬한 최필립과, 한결같이 지랄맞지만 로드에겐 일절 터치 없는 백하니가 편할 정도다.
양수연과 호흡을 맞추기 전엔, 실장이고 팀장이고 필요 없다며 스케줄마다 대리를 부르던 괴짜가 구신승 아니던가.
‘그런 건 또 박건 씨랑 비슷한 느낌이네.’
남몰래 미소를 짓던 양수연이 물었다.
“근데, 이번 작품은 왜 은한섬 배역을 따려던 거야? 막내 역할은 끔찍이도 싫어하는 애가.”
“처음부터 박건 씨한테 맡길 생각이었어. 필립이 때문에 경쟁하는 척 한 거지.”
“···그럴 줄 알았다. 저 고집불통 구신승이 자기 배역을 양보했을 리가 없지.”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양수연의 단발머리가 위아래로 오르내린다.
“그러고 보면 신승이 너나 최 배우나, 다들 박건 씨를 참 좋아하네. 그 형제들이 사람이 좋아서 그런가.”
“귀인.”
“응?”
구신승이 툭 말했다.
“작년 봄에, 점을 쳤었거든. 거기서 그랬어. 게자리의 귀인이 나타날 거라고.”
그의 배우는 운세형 잡기에 능했다. 사주, 타로, 명리학, 온갖 걸 다 섞어서 자기 식으로 운수를 점치는데, 신기할 정도로 잘 들어맞아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양 팀장이 미간을 좁혔다.
“설마, 박건 씨가······.”
“물어봤더니 맞더라고. 게자리에 묘시(卯時), 두 형제 중 맏이, 오행 중에는 양금(陽金).”
“사주는 잘 모르겠고. 그래서 대표님 찾아간 거야? 박건 씨 궁합이 우리 쪽이랑 맞으니까 꼭 잡으라고?”
“노 대표님도 어차피 그럴 생각이셨던데. 본인만 다른 데로 가려고 안 하면.”
몇 달 전, 박건의 재계약 시즌에 구신승이 노중만 대표를 찾아갔다고 했다.
원래도 기행이 잦은 인간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자기 작품 얘기가 아니라 별 친분도 없던 소속사 동료를 추천하러 간 모양이었다.
“하긴, 박건 씨가 대체 불가능한 인재가 되긴 했지. 손대는 것마다 터뜨렸으니까······.”
중얼거리던 양 팀장이 물었다.
“아, 근데 박건 씨 카드는 뭐가 나왔어? 네가 하는 타로에선 매번 이상한 그림들 나오잖아.”
“카드?”
“응, 백하니 씨가 거꾸로 된 왕비··· 지유 씨가 사슬에 묶인 백합인가 장미인가였고.”
이른바 ‘나인즈 타로’라고 명명한, 그가 직접 만든 아홉 장의 카드는 점을 보는 사람과 기막힌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노중만 대표는 피투성이 백작··· 최필립은 무표정한 집시가 나왔는데, 둘 다 자기 카드들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구신승의 눈빛이 과거를 회상하듯 멀어졌다. 둘만 있을 때는 보기 힘든, 여간해선 웃지 않는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성검을 든 용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