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28)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28화(128/199)
저마다의 행성에서 (2)
* * *
숨소리가 들린다.
숙소인가? 잠결에 생각한 순간, 옆의 빈 침대가 만져졌다.
이곳은 ‘포 퀸즈’의 숙소가 아니다. 그녀만을 믿고 따르던 동생들 또한 곁에 없다.
당시 소속사, 그리고 대표에게서 진지유 자신이 도망쳤기에.
―지유야.
동시에 목소리가 들린다. 부드럽지만 불안한, 공작새가 날아갈까 두려워하는 음성이.
···진지유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발목을 얽맨 핏줄의 사슬로부터.
―일어나야지?
순식간에 호흡이 가빠진다. 불쑥불쑥 찾아오던 공황장애의 증상. 물에 빠진 것처럼 헐떡이며 목을 부여잡자 막힌 숨이 터져나왔다.
“하아, 허억······.”
누운 채, 진지유는 숨을 내뱉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지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개새끼들.”
그들의 연락이 온 날, 또는 직접 찾아온 날이면 늘 비슷한 증상을 겪는다.
흡사 비 오기 전 몸이 쑤시는 것처럼. 뻣뻣한 관절이 노화의 증거라면 그녀의 트라우마는 심신 모두에 찍힌 낙인이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다시 연락이 온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더니, 그녀가 받자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유야, 잘 지내니?
누구의 목소리인지 인지하자마자 반사적으로 소름이 끼쳤다. 끊어버리고 번호를 차단하자 더 이상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바로 어제, ‘망회돌’ 쫑파티를 갈지 말지 고민할 때였다.
모자를 눌러쓰고 집 앞 편의점을 다녀오는데 누군가 이름을 불렀다.
‘지유야, 잠깐만.’
돌아보니 엄마와 언니가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지만 아빠와 남동생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뺨이 움푹 들어간 엄마가 애원하듯 말했다.
‘넌 애가 정도 없지, 전화를 그렇게 끊어버리니? 목소리 들었으면 인사는 좀 주고받아도 되잖아, 꼭 매정해야 되겠어?’
몰골은 수척해도,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말투며 사고는 변함이 없다.
진지유는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접근금지가처분신청, 아직 유효해. 엄마도 언니도 나한테 연락하면 안 되는 거 몰라?’
‘무슨 소리니? 가족끼리 연락을 왜 하면 안 돼? 그거 다 너희 대표가 판사들한테 뒷돈 먹여서 받아낸······.’
‘엄마는 가만있어. 지유도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겠어, 사기꾼 같은 사람들한테 속아서.’
엄마를 뒤로 물린 언니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둘둘 감던 명품들은 다 어디 가고, 딱 하나 남은 링 귀걸이가 천박하게 번쩍였다.
‘지유야, 그러지 말고 잠깐 얘기 좀 하자. 엄마가 말은 저렇게 해도 얼마나 걱정했는데, 요즘엔 몸이 허해져서 한의원까지 다니신다니까.’
‘···됐고, 난 할 말 없어.’
‘그게 무슨······.’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전화도 걸지 마, 또 오면 위법접근으로 신고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물러섰을 때였다. 언니의 만류도 물러나 있던 엄마의 참을성이 한계에 달했다.
‘얘, 그럼 얼마라도 입금해 줘! 이제 진짜 위험하단 말이야, 가족들 다 감옥 보낼 셈이니?’
‘몰라, 나도 모른다고! 가까이 오지 마!’
소리를 빽 지른 그녀는 곧장 아파트 단지로 뛰어들어갔다. 경비원 때문인지, 남의 눈이 무서워서인지 가족들은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하긴, 자기들 몸은 기막히게 챙기니까.”
접근금지가처분, 민사로 신청한 법령의 인용은 그리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애초에 나 몰라라 하고 전화를 걸고, 잊혀질 때쯤엔 찾아와 대는데 어쩔 것인가.
물론 그 기저엔, 둘째 딸이 모질게 벌금을 물리지 못하리란 계산이 깔려 있을 터다.
“······.”
진지유는 스마트폰을 찾았다. 몰래 숨겨둔 사진첩 가장 안쪽, 한 장의 가족사진이 공허한 눈동자에 비친다.
아직 어린 삼남매와 젊은 부부가 함께 찍은, 행복해 보이는 스튜디오 스냅샷이.
―혹시 조금만 더 보내 줄 수 있니? 너희 아빠가 요즘 골프선수 누구랑 같이 라운딩을 다닌다는데, 글쎄 거기 드는 돈이······.
―누나, 이번엔 기필코 성공할게. 한 번만 더 믿어 줘, 진짜라니까.
―지유야, 이게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거야. 연예인 천년만년 할 것도 아니고, 지후가 사업으로 성공하면 너도 좋잖아?
―뭐? 회사를 나가? 김 대표가 우리한테 해 준 게 얼만데, 그걸 왜 배신하려는 거니!
‘파이브 퀸즈’로 활동할 당시, 진지유의 별명은 소녀가장이었다.
실제로도 틀린 말은 아니다. 철모르던 십 대 때부터, 그녀가 벌어온 돈이 다섯 가족을 먹여 살렸으니까.
그리고 아역 모델로 활동하며 쌓은 부는 모두를 망가뜨리기 충분했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부모님과 언니, 누나를 응원한다던 남동생마저도.
“차라리 내가 없었다면······.”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바보 같은 자학임은 알지만, 오랫동안 썩어 온 자괴감은 그녀를 검은 수렁으로 몰아넣는다.
소속사의 혹사, 불합리한 계약, 가족들과 대표가 획책한 정산금 빼돌리기······.
그 모든 부조리를 이겨내 왔건만, 가족이란 이름 앞에서는 또다시 무너지고 만다. 긴 소송 끝에 접근금지가처분 판결을 받아낸 지금에도.
“···피곤해.”
휴대폰을 던져 버린 진지유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
다음날 아침. 로만 엔터테인먼트 사옥에, 조용한 소란이 번졌다.
진지유가 잠수를 탔다.
‘몸이 아파서 못 나가겠다’는 문자만 남기고, 갑자기 자취를 감춰 버렸다고 했다.
덕분에 스케줄 몇 개는 딜레이··· 미룰 수 없는 몇 개는 아예 취소되고 말았다.
“진지유가? 아니, 열이 37도가 넘어도 무대를 섰다던 사람이 왜?”
“그러니까. 데뷔 이래로 스케줄 펑크낸 건 처음이라는 것 같던데······.”
“대단하긴 하네. 너무 열심히 달려서 번아웃이 왔나?”
‘망회돌’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박건을 필두로 한 ‘흑의사제’의 칸 초청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랜만에 명단을 올린 경쟁부문 작품이라 기대가 쏠리는 상황. 최근 소속사 전체가 꽃길만 걷던 중이라 더 이목을 끈다.
미팅룸에서는 유준일 실장과 정일준 팀장, 공기형 홍보팀장에 진지유의 로드매니저까지 모여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유준일 실장의 물음에, 사실상 진지유를 케어하는 정일준 팀장이 앓는 소릴 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한테도 몸이 안 좋다, 스케줄 좀 미뤄 달라는 연락이 다였어서요.”
“종수는?”
근 1년쯤 진지유의 로드매니저를 맡아 온, 박종수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저도 팀장님이랑 비슷한 연락만 받아서··· 아, 근데 일주일쯤 전부터 지유 씨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긴 했습니다, 안색도 나빴고요.”
“이런 적은 처음이네. 백하니가 어디 가서 사고를 쳤으면 이해할 만해, 요즘 워낙 조용히 지냈으니까. 근데 지유라니··· 허, 참.”
미간을 좁힌 유 실장이 혀를 찼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진지유가 아닌가.
프로페셔널한 독종.
자타공인 천상 연예인.
재능과 노력의 집합체.
사실상 그녀가 있었기에 포 퀸즈··· 아니, 파이브 퀸즈가 3세대 걸그룹 최정상에 군림했던 것이다.
“뭐, 다른 일 있겠어요? 컨디션이 확 나빠지면 연예인이 며칠 쉴 수도 있지.”
듣고 있던 공 팀장이 거들었지만, 유준일 실장은 미심쩍다는 듯 턱을 문질렀다.
“내가 이 바닥 원투데인가, 느껴지는 분위기가 달라서 그래요. 대표님이랑 본부장님은 뭘 아시는 눈친데, 말씀하실 분들이 아니니 원······.”
“실장님도 몰라요? 회사 배우 일인데.”
“내가 홍보팀도 아니고 어떻게 배우 사생활을 다 알아요, 일정 잡고 계산기 두드리면서 방송국 노땅들 구워삶기 바쁘구만.”
사실이 그렇다. 로드가 담당 연예인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면, 팀장이 그다음이고 실장은 더 거리가 멀어진다.
연예인 멘탈 케어니, 스트레스 관리니 신경 써주기엔 회사 일만 처리하기에도 바쁜 탓이다.
뭔가를 알긴 아는지, 공 팀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박건 씨가 참 부러웠을걸요. 요즘 활동하는 걸 보면서.”
“음? 뭔 소리예요, 갑자기 박 배우가 왜 나와?”
공 팀장이 검지를 들어 위쪽을 가리켰다.
“아까 올라가더라고요. 대표실 가는 것 같던데.”
“대표실? 지유 때문에?”
“설마요. 드라마도 끝났고 곧 칸도 가니까··· 차후 행보 의논 겸?”
‘백정장군’과 ‘망회돌’을 찍으며 자주 본 탓일까. 방금 전과 달리, 유준일 실장의 목소리에 확신이 담긴다.
“아냐. 박건 씨는 시간을 허투로 쓰는 법이 없어요. 떴다는 건 해결할 일이 있다는 거야.”
“···그건 또 어디서 나온 말이래요?”
*
로만 엔터테인먼트 최고층, 14층 대표실에 두 사람이 마주앉았다.
최근 디퓨저를 바꿨는지, 평소 나던 향과 다소 다른 나무의 향취가 풍긴다. 암회색 양복의 노중만이 무표정하게 칭찬했다.
“소식은 듣고 있었지. 고생 많았어.”
“감사합니다.”
건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른 배우들만큼 친해지진 않았지만, 이 사내와도 전보다야 훨씬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우선 말투.
존대가 살짝 섞인 경어체에서, 이제는 완전히 평어로 바뀌었다. 말씀을 편하게 하라며 배우 쪽이 먼저 청한 탓이다.
“이제 좀 쉬겠군. 아니지, 바로 칸에 간다고 했었나?”
“몇 주는 유예가 있습니다. 패션위크 이후 서유럽에 테러리스트가 판쳐서, 이례적으로 영화제 개막을 늦췄다고 합니다.”
“조심해. 국제정세가 심상찮아, 나보다 경험 많은 사람한테 충고하기도 우습지만.”
“알겠습니다.”
예전엔 불필요한 대화가 아예 없었다면, 지금은 나름 안부 비슷한 것이 오간다.
소파에 등을 기댄 노중만이 물었다.
“그래서, 다음 행보는?”
“칸에 다녀와서 정할 것 같습니다. 드라마 방영이 끝나고부터 시나리오들을 읽고 있는데, 영화나 드라마나 느낌이 오는 게 없어서요.”
“이 본부장이 예능을 밀던데. 아버님 임팩트가 워낙 컸어서, 가족들이 같이 나오는 편안한 프로그램도 좋을 것 같다고.”
이 이야기도 동생을 통해 들은 바 있다. 건은 선선히 끄덕였다.
“긍정적으로 의논해 보겠습니다.”
작품을 고르는 데만 까다롭지, 광고나 예능 같은 것은 크게 가리지 않는다.
실제로 대부분의 CF는 박선이 유 실장, 공 팀장과 상의해 결정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노중만이 찻잔을 들었다.
“덕분에 마음이 좀 편해지는군. 아침부터 골치가 아프던 참인데.”
“진지유 배우 일입니까?”
노중만의 눈썹 끄트머리가 살짝 올라갔다.
“귀신이 따로 없군.”
“올라오면서 잠깐 들었습니다. 기사는 안 떴는데, 다들 같은 얘길 하고 있던데요.”
“스케줄 펑크 틀어막는 정도야, 악의적인 파파라치들 입단속 하는 게 아니니까. 문제는 이 상황이 길어질 경우지.”
건은 고개를 기울였다. 요 며칠, 눈에 띄게 연락이 뜸했던 진지유의 소식은 회사로 오고서야 들을 수 있었다.
평소엔 그렇게 활발하던 사람이, 몸이 안 좋다면서 예정된 촬영들을 다 취소했다는 거였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다음에 다시 걸어 주십시오······.
톡은 계속 1이 사라지지 않고, 혹시나 해서 걸었던 전화도 받지 않는다. 지인들 중 연락이 가장 빠르던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노중만 대표는 그가 묻기를, 정확히는 동료에게 관심을 가지길 기다렸던 것 같았다.
건조한 어조의 정보들이 흘러나왔다.
“지유가 왜 전 소속사를 나와서, 우리 회사로 왔는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그럴 거야. 본인이 조용히 넘어가길 원해서, 기사에서도 많이 안 다뤘으니까.”
기사? 문득, ‘흑의사제’ 때 이장미의 소속사 분쟁이 떠올랐다.
그 당시에도 동료 연예인의 정보를 찾아보진 않았지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겠거니 짐작은 하고 있었다.
“불공정 계약 문제였습니까? 아니면 그쪽 대표와······.”
노중만 대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DG와 정면승부를 할 때조차 사무적이던 눈빛 속에,희미한 분노가 엿보였다.
“가족 때문이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