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29)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29화(129/199)
저마다의 행성에서 (3)
* * *
화로 속 불꽃이 타들어간다.
잿불의 신전.
대악마들이 가운데땅을 침공하기 전, 먼 옛날부터 존재했다던 토지신의 신전이다.
무수한 세월의 유수가 침식시킨 기둥들. 어두운 회랑 한복판에서, 용사와 성녀는 불길을 지켜보며 앉아 있다.
“정말로, 여기에 있을까요?”
먼저 입을 뗀 것은 긴 금발을 땋아내린 성녀, 아리아 리버롯이다.
흘끗 옆을 본 용사, 한때 박건이었으나 이 세계에서 고드가 된 사내가 대꾸한다.
“찾아봐야죠. 예언의 눈이 여길 향했으니, 기둥을 다 뒤집어엎으면 뭔가 나올 겁니다.”
“···이럴 때는 도굴꾼이 따로 없네요. 평소엔 온갖 착한 척은 다 하더니.”
그들이 이곳에 온 것은 어떤 추위도 버텨내게 해 준다는 아티팩트, 잿불의 신전에 묻혀 있다는 ‘흑철 심장’을 찾기 위해서다.
용사행의 진척은 이제 다섯 중 하나. 첫 번째 대악마, 오만의 고르존은 쓰러졌으나 불화의 모데움은 건재하다.
모데움이 있는 대륙 최북단, 빙하지대로 가기 전에 놈과 상극인 무구들을 모아야 한다.
“상관없습니다, 한 명의 희생이라도 줄일 수만 있다면. 아마 저 옛 교단 사람들도 기꺼이 신물을 내줬을 테니까요.”
아직 인격이 마모되지 않았던 시절, 용사는 가능한 한 희생을 막기 위해 애썼다. 정작 본인은 수십 번 죽어 회귀하였음에도.
아리아가 긴 나뭇가지로 화로를 뒤적였다.
“아직도 몰라요? 모두를 살릴 순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근데 왜 또 속 터지는 소릴 하냐고요. 순진하게 굴면 우리 용사님, 하면서 저 밖 사람들이 칭찬이라도 해 줄 줄 알았어요?”
“그런 기대는 안 했는데요.”
화로에서 불티가 날려 둘의 얼굴을 밝혔다. 본인이 신을 모시면서, 이 성녀는 신앙과 희생만 나오면 염증이 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럼 문제. 칼을 내리치면 대악마를 죽일 수 있는데, 대신 붙잡힌 파티의 동료도 죽어요. 용사님은 어떡할 거예요?”
“동료부터 구해야죠. 악마는 다음에도 잡을 수 있으니까.”
아리아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 남은 대악마를 대비해서?”
“그것도 있지만··· 저를 믿고 여기까지 온 이들이잖습니까. 성녀님의 목숨과 나머지 대악마를 저울에 올린다면, 저는 고민 없이 성녀님을 데리고 도망칠 겁니다.”
실로 모범적인 답변이었으나, 성녀는 어쩐지 마음에 안 드는 듯 도톰한 입술을 비죽거렸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2황자한테도 두 번이나 연속 져 놓고.”
“혼잣말이 좀 크신데요.”
“아, 제가 말한 게 아니라 입이 멋대로··· 어렸을 때 쌍둥이 자매를 잃어버렸거든요.”
“···그게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있죠, 생각만 하면 아직까지 화가 나니까. 용사님 같은 인간들을 봐도 그렇고.”
대체 왜, 남은 사람들 생각은 안 하고··· 성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멀어져 갔다.
철왕국의 대기가 희미해짐을 느끼며,
건은 눈을 떴다.
“······.”
창문에서는 이미 햇볕이 들어오는 중이었다. 모처럼 본가로 돌아와, 해가 뜰 때까지 실컷 자다가 일어난 것이다.
저 대화의 끝은 수년 뒤, 수많은 영웅들과 군대를 희생시키며 분노의 발몬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맺어졌다.
―용사님, 왜 우리들을··· 크헉!
―이야기가 다르지 않소이까! 이대로라면 당신들을 뺀 모두는 전멸이외다!
―이미 저자는 용사가 아니오, 악마를 상대하다 악마가 된 괴물일 뿐. 거룩하신 아스루엘이시여, 저희를 축복하소서······.
종종··· 아니, 꽤 많은 순간 철왕국의 환상은 그가 가야 할 곳을 제시한다.
하필 진지유의 일이 터진 날 밤, 옛 동료의 꿈을 꾼 것은 우연일까?
“그럴 리가 없지.”
반드시 작품만이 기억을 되찾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작품이 끝날 때 그랬고, 또 시상식에서 그랬던 것처럼.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첫 번째 특별출연인데. 두 번째도 그랬고.’
아무것도 없던 무명 시절, 은희욱 작가의 추천 하나로 흔쾌히 나와 주었던 사람이다.
이를테면 회사의 첫 전우랄까. 정작 작품을 같이 한 것은 백하니나 최필립 등 다른 배우들이지만, 그래도 각별할 수밖에 없다.
“어, 형. 일어났어?”
거실로 나가자, 박선이 큼지막한 캐리어를 몇 개나 펼쳐 놓고 있었다.
꽃무니 반바지에 비치타월, 큼지막한 야자수가 그려진 트로피칼 티셔츠도 언뜻 보였다.
“웬 짐?”
“우리 조금 있으면 칸 가잖아, 준비해야지!”
“거긴 그냥 작은 도시 아니었나?”
박선은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냐, 이번 기회에 근처 관광을 싹 돌아야지. 형도 해외여행 가 본 적 없잖아, 소호에서 쇼핑도 하고 옷도 사고··· 미리 도착해서 니스 해변 산책로도 걷는 거야. 거기서 보는 바닷가 풍광이 진짜 미쳤대.”
영화제가 개최되는 니스는 활처럼 휘어진 해변가로 유명했지만, 그보다 더 깎아지른 절경이 철왕국에는 수없이 많았다.
건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야자수 속옷을 집어 소파에 걸쳐 놓았다.
“잘 싸고 있어, 형은 어디 좀 다녀올게.”
또다시 짐 더미에 코를 박은 박선이 물었다.
“응? 일정 없는 거 아니었어?”
“어제까진 없었는데, 출국 전에 처리할 일이 좀 생겨서.”
*
진지유의 화장품 CF 촬영장.
관계자들과 함께, 찍힌 필름을 확인하던 감독의 표정에 만족감이 번진다.
“오케이, 톤 잘 잡히고 색감도 딱이고··· 오늘 촬영도 금방 끝나겠는데?”
스케줄을 한두 번 펑크냈다고 세상이 뒤집어지진 않는다.
애초에 ‘급 있는’ 탑스타들은 알게 모르게, 심지어 대놓고 횡포와 강짜를 부리기도 한다. 컨디션 난조로 일정이 잠깐 멈춘 정도로는 흠이 안 된다.
대행사 팀장도 한 마디 거든다.
“확실히 진지유는 진지유네요. 컨디션 안 좋다길래 화면발 잘 안 잡힐까 걱정했는데.”
“아이고··· 그걸 믿어? 그냥 뭔 일이 있어서 스케줄 올스탑한 거겠지. 연예인들 아프다는 핑계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런 스타일은 아닌 것 같던데······.”
사전미팅에서 한 번, 오늘 한 번 봤지만 모델의 분위기는 확실히 달랐다.
눈썰미 좋은 대행사 팀장의 표정이 미묘해졌지만, 감독이 그렇다는데 더 말할 수도 없다. 어쨌든 현장의 전권은 메가폰 쥔 자에게 있는 것이다.
“자, 다음 바로 가겠습니다!”
수많은 조명과 반사판이 향한 곳, 스튜디오 중앙에서 진지유가 연기를 이어나간다.
*
“아이코, 좋다. 역시 눕는 게 최고야.”
잠시 쉬는 시간. 대기실 소파에서 진지유가 축 늘어졌다.
사고를 친 연예인을 위해, 정 팀장 대신 직접 따라온 유준일 실장이 걱정스레 물었다.
“너 괜찮아?”
진지유의 한쪽 눈이 반짝 떠졌다.
“응, 말짱해.”
“···아까부터 식은땀도 흘리는데. 스타일리스트한테 화장만 몇 번이나 고쳤잖아.”
“잠을 못 자서 그래. 촬영장도 덥고, 오늘따라 조명이 좀 세네.”
거짓말이다. 현장을 한두 번 같이 뛴 것도 아니고, 땡볕에서 아이돌 육상예능을 찍을 때조차 진지유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몸이 얼마나 안 좋은 거야? 평소엔 그렇게 건강하던 애가.’
그도 그럴 것이, 진지유는 회사와 연락이 닿자마자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촬영들을 다시 잡았다.
왜 그러냐고 해도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한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1년 미만 단기 모델, 그것도 브랜드 이미지보다 페이 높은 광고만 찾으니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다.
유 실장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지유 너, 어디 바카라 하는 거 아니지?”
“뭔 소리야! 내가 그런 걸 왜 해?”
깔깔대며 팔을 때리는 게, 난 괜찮으니 제발 걱정 말라는 티가 풀풀 난다.
쉬는 시간이 끝나 가서일까. 얼굴에 내려앉았던 피로도 대부분 사라져 있었다.
“···그럼 다행이고. 저녁 일정은 취소할 수 있으니까, 안 되겠으면 얘기해. 그러다 쓰러질까 내가 더 조마조마하다.”
“괜찮다니까, 오빠. 차에서 잠깐 자면······.”
“잠깐 자는 걸로 안 나아집니다.”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 두 사람은 흠칫 놀랐다. 후다닥 일어난 유준일 실장이 기괴한 효과음을 냈다.
“으억, 에에에?”
그들이 앉은 소파 뒤쪽, 오토바이 헬멧을 옆구리에 끼고 서 있는 사람은 박건이었다.
눈을 몇 번 비빈 유 실장이 물었다.
“아니, 박 배우. 진짜 뭔 귀신 출신이에요? 문 열리는 소리도 안 났는데?”
“조용히 열었으니까요.”
“밖에 스탭들은······.”
“몇 명 없던데요. 앞에 매니저님이 계셔서, 그냥 물어보고 찾아왔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몰라도, 묻는 말마다 막힘이 없다.
두 배우를 번갈아 보던 유 실장은 뭔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어··· 그러고 보니 컨셉 회의를 까먹었네. 난 잠깐 감독님이랑 말하고 올 테니, 얘기들 나눠요.”
실장급 매니저의 눈치란 빠르다. 유준일이 재빠르게 자리를 비워 주자, 대기실에는 어색한 침묵이 드리워졌다.
일어나 앉은 진지유가 짐짓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몸이 안 좋다길래. 연락도 안 받아서, 이번엔 제가 약을 좀 사 왔습니다.”
박건은 들고 온 약봉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청심환이니, 박카스니 하는 것들이 언뜻 보였다.
“저 멀쩡해요. 잠깐 그··· 맞아, 감기에 살짝 걸려서, 그날만 열이 있었던 거예요.”
“안 멀쩡해 보입니다. 심박수가 높아졌고 호흡도 불규칙하군요. 체온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그건 아까 조명이 너무 세서······.”
진지유가 뻔한 변명을 시작할 때, 박건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잠시 후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싸움이 벌어졌는지, 희미한 고성도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모르겠어요. 관계자 분들이시려나?”
“그렇다기엔 하는 말이··· 일단 가 봅시다.”
헬멧을 던져 버린 박건이 먼저 나가고, 서둘러 일어난 진지유도 뒤를 따랐다.
“이거 놔! 언제까지 튈 거냐고!”
“그 망할 인간 어디 있어, 당장 나오라고 해!”
촬영장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중년 남자와 여자 세 명이 세팅된 화장품을 마구 쓰러뜨리고 있었고, 감독과 스탭들이 쩔쩔대며 막으려는 중이었다.
“선생님, 대체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긴 왜 그래, 우리 돈은 안 주면서 이딴 광고나 찍고 있다잖아. 댁은 돈 떼먹고 도망친 인간이 잘 먹고 잘 살면 넘어갈 수 있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감독에게 고함치던 사내가 그들이 서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동시에, 나머지 사람들의 시선도 안색이 창백해진 진지유에게 꽂혔다.
“저기 있다, 진지유다!”
스탭들을 밀쳐낸 빚쟁이들이 금세 진지유를 둥그렇게 둘러쌌다. 동료를 등 뒤에 보호하듯 숨긴 박건도 한 발 나섰다.
“같은 회사 배우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기 저, 뒤에 있는 연예인 엄마가 우리 돈 싹 털어서 도망갔어!”
파마머리 여자가 째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사람들의 입이 벌어지는 와중, 나머지 남자들도 한 마디씩 보탰다.
“엄마만 했으면 다행이여, 아빠에 언니, 남동생까지 돈이란 돈은 다 끌었다더구먼.”
“자기 딸이 갚아 줄 거라면서 적반하장으로 삿대질하던데, 그게 몇 달째인 줄 아냐고! 연예인들은 몰라도, 우리 같은 사람들한텐 거금이야!”
“우리들한테만 빌린 것도 아녀, 들어보니 여기저기서 투자금이니 뭐니 잔뜩 당겼다던데, 그렇게 해 놓고 파산신청 때리면 다 해결될 줄 알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받아낼 거여!”
이내 촬영장은 왁자지껄한 성토로 가득 찼다. 함부로 말릴 상황도 아니라, 경찰을 부르려던 조연출도 눈치만 보고 있었다.
“지유야, 넌 뒤에 있어. 일단 우리가······.”
유 실장이 낮게 말했으나, 진지유는 이를 악문 채 물었다.
“···뭐라고 했어요.”
“뭐가 뭐야?”
“그 사람들이, 돈 빌리면서 뭐라고 했냐고요.”
본래 이런 식의 채권추심은 불법이다. 알면서도 직장에 쳐들어와 난동을 피운다는 것은, 어쨌든 채무자들도 막다른 길이란 뜻이다.
파마머리와 사투리가 한 발 빠지고, 처음 감독을 윽박지르던 중년 사내가 대표로 말했다.
“뭐라고 하긴, 자기 딸이 유명한 연예인이니까 금방 갚을 거라고 했지. 애비랑 아들놈은 사업을 한댔고.”
“그거! 다음 작품이 아주 유명한 헐리우드 감독님이니까, 미리 투자만 해 놓으면 두 배씩 불릴 수도 있댔어!”
“거, 금액이 얼마나 되길래······.”
“나는 5억, 저긴 2억, 이쪽은 다 쓸어서 8억.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한 다스는 더 있어.”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저 감독도 작품도, 실제가 아님을 모두가 안다. 연예인의 가족이 아티스트를 팔아넘기는 가장 악질적인 경우기에.
입술이 파랗게 질린 채,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싼 진지유가 상황을 정리했다.
“왜 오셨는지 알겠어요. 일단 지금은 촬영 중이니, 추후 회사로 연락을 주시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듯, 위태로이 휘청대던 진지유의 몸이 기어이 뒤로 넘어갔다.
“어어, 진 배우님!”
“지유야!”
유 실장이 소리치고, 축 늘어진 몸을 받아 안은 박건이 빠르게 지시했다.
“과로에 탈수, 스트레스가 겹쳤습니다. 구급차부터 불러요.”
“말 못 들었어? 구급차 불러, 구급차!”
“좀 비켜요, 사람이 쓰러졌는데 아직도 돈이 문제야?”
누군가는 119를 부르고 또 누군가는 물을 가지러 달려간다. 아수라장이 된 스튜디오에서, 채무자들만 머쓱하게 눈길을 주고받는다.
애당초 정말로 해코지를 할 생각도 없었다. 그냥 분을 못 이겨 찾아왔을 뿐, 아무렴 인기 스타에게 손찌검이라도 했을까.
“큼, 크흠. 일단 돌아들 갑시다.”
“저렇게 몸이 약해서야··· 가족들 빚 갚기 전에 딸내미가 먼저 가겠네.”
“강씨, 부정 타게 뭔 그런 소릴 혀!”
궁시렁대며 촬영장을 빠져나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감독이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오늘도 다 못 찍었네.”
“아, 감독님. 쫌! 사람이 쓰러졌는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