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30)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30화(130/199)
저마다의 행성에서 (4)
* * *
한밤중, 어슴푸레한 병실.
개인실에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퍼져나간다.
“언제까지 잠들어 있을까요?”
“내일 아침까지는 푹 잘 거랍니다. 이후로도 절대 안정을 취하라더군요.”
진지유가 누운 침대 앞, 건과 나란히 서 있던 은희욱 작가는 무거운 숨을 토했다.
“말이 좋아 안정이지, 이런 상황에서······.”
흩어진 단발머리 속, 흰 얼굴이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났다. 한참을 뒤척이던 환자는 진정제를 맞고서야 비로소 잠들었다.
‘아니, 왜 못 들어가요! 우리가 언니 진짜 가족이나 마찬가진데!’
스케줄 때문에 뒤늦게 달려온 ‘포 퀸즈’ 멤버들은 환자를 자극하면 안 된다는 말에 복도에서 엉엉 울다가 돌아갔다.
자정이 지나 병실을 지키는 사람은 진지유를 데려온 박건 본인, 그리고 본래부터 친분이 있던 은희욱뿐이다.
“작가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건의 물음에, 은희욱은 쓰게 웃었다.
“알고 있었죠, 어쩔 방도가 없었을 뿐. 이럴 줄 알았더라면 회사고 이미지고 상관 말고 기사를 띄우라고 했을 겁니다.”
본인도 다 알지는 못한다며, 은희욱이 조심스레 꺼낸 이야기는 예상과 같았다.
진지유를 괴롭히는 것은 다름 아닌 가족.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피를 나눈 모두였다.
놀랍지도 않은 사연이다. 아역모델로 데뷔한 이후··· 아이돌로 대성하기까지, 벌어오는 돈을 흥청망청 쓰며 친척과 사돈들까지 성공한 한 사람에게 기생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엔 유독 연예인, 특히 아이돌들의 악성 계약이 많았던 시대였죠. ‘파이브 퀸즈’는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불공정계약의 피해자였습니다.”
“진지유 씨가 리더로 있었다던?”
은희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POP 엔터. 온갖 방송을 돌며 지유가 아득바득 성공시킨 그 그룹의 소속사 대표가 천하의 악질이었죠. 문제는 지유의 부모님이 그자와 이면계약을 맺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면계약이라면······.
은희욱의 표정에 경멸이 스쳤다.
“아티스트한테 돌아가야 할 수익을, 지급 전에 본인들이 먼저 가로챘습니다. 딸이 정산을 받은 금액은 금액대로 가져갔고요. 지유가 그룹을 탈퇴하겠다고 했을 때, 조 대표 편을 들던 사람이 지유의 부모님이었으니까요.”
문득 예전에 들었던 무용담이 기억났다.
로만 초창기, 노중만 대표가 법정공방도 불사하며 악덕 소속사들을 무너뜨리고 혹사당하던 아티스트들을 회사로 데려왔다고.
‘파이브 퀸즈’가 ‘포 퀸즈’로, 탑 아이돌이 배우로 전향한 데엔 그러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건은 잠시 고민했다.
‘끝을 못 낸 이유가 있었군. 핏줄이 얽히면 일이 복잡해지니까.’
전면전이라면 차라리 편하다.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던, 그와 주변 사람들을 해치려던 차인혁은 같은 폭력으로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료의 가족은? 대신 갚아 줄 금액도 아니고, 직접 나서서 해결하기엔 더 마땅찮다.
‘여긴 철왕국이 아닌 현대니. 걸맞은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꼭 철왕국이 아니더라도, 평범한 삶을 사는 현대인들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자식의 이름을 팔아서 빚을 진 가족들과 그 가족을 잘라내지 못하는 딸···
연예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흘러가는 기사로만 접했을 터다.
법적 제제가 불가능한지 묻자, 은희욱 작가는 주먹을 꽉 쥐며 답했다.
“애초에 스토킹 관련 법령 자체가 멍청해요. 생판 모르는 사람이 따라다녀도 제대로 처벌이 안 되는데, 가족관계까지 엮이면 범죄행위 규정이 더 협소해지거든요. 접근금지 불이행으로 신고해 봐야 벌금만 내면 그만이니······.”
드라마 쫑파티 때, 윤발25가 데려왔던 여성 스트리머도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돈과 명예도 문제지만··· 더 큰 족쇄는 개인이 감내해야 할 고통이다.
접근금지가처분까지 받아낸 걸 보면, 아마 데뷔 이후 십수 년을 시달렸을 것이다. 공황장애와 불안장애, 우울증으로 팀을 탈퇴한 것도 부채감으로 남았을 것이고.
―처음 뵙겠습니다. 진지유라고 해요.
―박건입니다.
―꼭 나오고 싶어서 따라왔어요. 요즘 서울의 개, 보는 드라마 중 최고로 팬이거든요.
맨 처음 드라마 촬영장에서, 살갑게 손을 내밀며 생글거리던 얼굴이 침대 위의 핏기 없는 얼굴과 겹쳐졌다.
백하니가 누구에게나 까칠하다면, 진지유는 누구에게나 친절해서 연예인 같다고 했던가.
3세대 걸그룹 센터, 해체 직전 그룹을 살려낸 소녀가장, 한 아이가 횡포에서 도망쳐 탑 배우로 올라서기까지··· 얼마나 노력을 쏟았을지는 쉽게 짐작하기도 어려우리라.
“전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가 돌아서자 옆에 서 있던 은희욱이 흠칫했다.
“···혹시 뭐, 찾아가서 집기라도 때려 부수시려는 건 아니죠?”
“제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일어났던 환자가 다시 기절하겠네요.”
“그건 그렇긴 한데, 맞는 말을 박 배우님한테 들으니까 뭔가 느낌이······.”
은희욱 작가가 어쩐지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으나, 건은 개의치 않았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칸에 갈 준비도 해야 해서요.”
“아, 흑의사제 초청 건이요.”
“예. 그리고 이미 많이 늦었습니다.”
“뭐가 말입니까?”
건은 잠시 텀을 두었다.
“관계의 회복엔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골이 너무 깊게 파였다면, 넘어올 수 없도록 울타리라도 쳐야 합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뭐가 됐든 해 봐야죠.”
잠시 감은 눈앞에, 수백 번을 구했지만 결국 구하지 못했던 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잠든 진지유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할 수 있는 건 모두.”
이 세계에서도, 용사는 쓰러진 동료를 지나치지 않는다.
“작가님, 그런데 KBC 쪽에도 혹시 인맥이 있습니까? CP나 PD, 작가님이라면 더 좋고요.”
“KBC요?”
은희욱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모르셨구나. 거기 국장이 저희 삼촌이에요.”
*
아무리 단속해도, 흐르는 물살을 틀어막는 데엔 한계가 있다.
결국 하루 만에 몇 개의 기사가 떴다.
[아이돌 출신 탑스타 B씨··· 알고 보니 빚쟁이에 시달리는 처지?] [가족들이 대신 빌린 돈, 추정 ‘100억 원대’ 이상··· 여배우의 말 못할 속사정]···헤드라인부터 악의적이다.
그나마 이니셜을 B씨니 C씨니 해 놨다지만, 아이돌 출신 탑스타가 얼마나 되겠나. 활동 중인 이들로 후보를 좁히면 대충이나마 추정 가능하다.
홍보팀 직원들이 필사적으로 막았으나, 이미 기사 댓글과 커뮤니티로 B씨의 정체에 대한 유추가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공 팀장님, 저 기레기 새끼들 입 좀 못 닫아요? 그냥 내가 나가서 한 마디 해?”
“필립 씨까지 왜 이래, 일단 진정 좀 해요!”
한 식구, 그것도 모두에게 친절하던 대표 배우의 스캔들이다.
로만의 모두가 분개했다. 회사에 들른 최필립은 홍보실에서 한참이나 머물렀고, 대표실에서는 전혀 의외의 사람이 울화통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어, 진짜!”
노중만 대표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백하니를 바라보았다.
회사의 또 다른 탑 여배우, 진지유와 앙숙으로 소문난 대표선수는 갑자기 들어와 그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걔는 뭐, 자선사업가래요? 부모한테 못 퍼주면 죽는 병 걸렸대? 그럼 그냥 은퇴하고 평생 봉사활동만 하지, 연기는 왜 해?”
“어쩔 수 없어. 워낙 어릴 적부터 당해서, 내가 데려올 때도 문제가 많았거든.”
백하니는 붉은 입술을 신경질적으로 잘근거렸다.
“대표님도 그래요. 회사 수장이면 저런 식충이들은 바로바로 쳐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말했잖아, 가족관계는 법으로도 어렵다고.”
“그놈의 가족은, 개뿔!”
결국 예전의 성질머리가 터져나왔다. 뭐 던질 게 없나, 희번득대며 주위를 둘러보던 백하니의 눈빛이 겨우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럼 어떡할 건데요. 가서 그 작자들 머리라도 잡아뜯으라고 해요, 평생 등골만 쪽쪽 빨리다가 폐쇄병동 입원하고 싶은 거 아니면.”
노 대표는 어깨를 으쓱였다.
“난 네가 화를 내는 게 더 이상한데.”
“···뭐라고요?”
“언제였더라, 진지유 앞으로 에어컨 광고가 갔다고 촬영을 다 때려치우지 않았었나? 그때 이 본부장 명패가 처음으로 부서졌었지.”
두 사람이 한솥밥을 먹던 초기, 신경전이 극에 달했을 때의 일이다. 백하니는 한 방 맞은 표정으로 눈을 내리깐 채 투덜거렸다.
“그건 나한테 온 거였고. 대표님이 괜히 걔 밀어준다고 뺏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 냉장고랑 화장품 오퍼가 너였지, 서원에어컨은 진지유 쪽이 맞아.”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아서.”
노중만은 손을 저어 화제를 되돌렸다.
“그래서, 여기 온 이유는?”
“처신 좀 똑바로 시키라고요. 괜히 호구처럼 굴어서 회사 이미지, 몇 있지도 않은 여배우 이미지까지 같이 까먹지 말고.”
오늘 신고 온 힐도 8센티는 족히 넘는다.
휑하니 돌아선 백하니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대표실을 나갈 때, 아래층에선 보컬 트레이너와 A&R 팀장이 대화하고 있었다.
“이게 뭔 일이야, 회사가 난리도 아니구만.”
“아깐 구 배우도 왔다 갔다면서? 확실히 지유 일이니까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서네.”
A&R 팀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뭐 해, 정작 본인도 해결하기 어려운 일인데. 김연홍 때 기억 안 나? 가족들이 저러면 연예인만 죽어나는 거야.”
가족이 매니저를 맡고, 소속사와 담합해 수익과 지분까지 횡령했던 ‘김연홍 게이트’는 한때 연예계를 뒤집어놓은 뉴스였다.
혀를 차던 보컬 트레이너가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박건 씨는? 둘이 좀 친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글쎄··· 그러고 보니 며칠 보이질 않네. 이런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달려왔을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박건의 ‘전우애’는 로만 직원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특수부대 출신이라서 그런 걸까. 본인은 몰라도 주변 동료들을 끔찍하게 챙기는 이타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여태 소식이 없다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흑의사제’ 때 이장미 스캔들, ‘백정장군’ 직전 학폭 논란을 전부 지켜봤던 A&R 팀장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정말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벌써 뛰고 있는 거 아냐? 그래서 이번 일까지 일주일 만에 처리한다거나······.”
“···설마. 박건 씨가 무슨 슈퍼맨도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동료 가족사는 어렵지.”
“어휴, 역시 그렇겠지?”
*
연못으로 둘러싸인 호젓한 정자.
꽃잎들이 떠 있는 수면이 흔들리고,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려온다.
최고급 한정식 한 상이 멋들어지게 깔린 정자의 마루에, 두 사람이 마주앉았다.
“안녕하십니까.”
마스크와 모자를 벗고, 짧게 고개를 숙이는 청년은 박건이다. 최근 이미지로는 선거에 나가도 지역구 당선은 될 거라는 배우.
그런 젊은이와의 독대가 기꺼운지, 후덕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빙긋 미소지었다.
“나 홍광석입니다. 드디어 만나는군요.”
박건은 눈앞의 정치인과 시선을 맞댔다.
민국당 홍광석, 현 야당 의원이자 비교적 젊은 나이에 재선에 성공한 중진이다.
EBC에서 다큐를 방영할 당시, 소방법 개정안을 국회에 올리겠다며 ‘불의 길’ 열풍에 슬그머니 편승하기도 했다.
실제로 홍광석이 발의한 안은 열렬한 지지 속에 본회의 심의까지 올라가 있었다.
“몇 번 연락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작품 일정이 빠듯해 회신이 늦었습니다.”
“그보다는 우리 쪽과 엮이고 싶지 않았던 거겠죠. 소속사랑 엔터들, 방송국들까지 줄을 대는 마당에 박 배우는 단호해서 신선했어요.”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정계, 재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은 오늘 내일 일도 아니다.
홍광석은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랐다.
“뭐··· 내가 덕분에 득을 봤으니, 고맙다는 인사 정도만 전하려고 했던 거지만요.”
“저는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요, 바로 이런 점이 신선하다는 거야. 그런 사람이 날 보자고 했으니, 함께 할 일이 생겼다고 이해해도 되겠지요?”
상대해 본 정치인은 다른 차원의 귀족들뿐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지체할 시간이 없다. 동료의 안위가 걸린 상황이라면 더더욱.
어떤 압력을 느낀 것일까. 차를 따르던 홍 의원의 손이 문득 멈췄다.
쪼르륵··· 잔을 타고 흘러넘치는 찻물 위에서, 새까만 눈동자가 노회한 정치인을 겨냥한다.
“예, 이번에는 제 의사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