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54)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54화(154/199)
여름의 수확제 (4)
* * *
잠깐의 휴식시간.
NBS 스튜디오 카페테리아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던 조연출이 눈치를 봤다.
리사 에이블은 굵직한 시가를 손가락 사이에 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놈의 시가, 연기 한번 독하네.’
‘이쪽 바닥’이라 불리는 방송계에서, 미국과 한국은 다른 점도 있지만 닮은 점도 많다.
바로 스타 작가, 스타 프로듀서 등 히트제조기 연출자들이 갖는 권력이다.
제시 매킨토니 쇼나 리드맨 쇼 같은 명문 토크쇼는 물론, SNL의 메인 작가쯤 되면 브로드웨이에 끼치는 영향력이 보통을 넘어선다.
그래서 조연출은 그 시가 끄라고 발광하는 대신, 기침을 삼키며 물었다.
“저, 리사. 오늘 미팅은 어떠셨어요?”
“미팅?”
초점 없던 동공이 깜빡였다. 방금 했던 제작회의가 중반을 넘어서며, 리사는 쭉 저 상태였다.
“예, 고드라던 그 배우요. 아이디어가 괜찮긴 한데··· 좀 엉뚱하달까, 생방송에서 사고는 안 칠지 걱정되더라고요.”
“그 정도면 칠 만하지.”
“······예?”
별안간 리사가 몸을 돌렸다. 새파란 눈동자 속에는 시즌이 거듭되며 사라진 열정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조니 류 이후로 이렇게 섹시한 동양인은 난생 처음이야. 안토니오 라데로사··· 아니, 잘만 하면 척 제임슨 급의 대박이 터지겠어. 세상에, 그렇게 쿨한 유머감각이라니!”
조연출은 질린 눈으로 리사를 쳐다보았다.
‘···이 인간도 제정신은 아냐.’
토비 리-리사 에이블 콤비는 SNL 시즌 1 때부터 흥행을 이끌어 왔던 개국공신이다.
시즌 3엔 리사가 떠났고, 시즌 4엔 토비가 지휘봉을 놓았지만 결국 시즌 5에서 모이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재미’ 때문이었다.
-그 빌어먹을 두 명을 데려와! 원하는 만큼 돈··· 아니,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해 준다고! 와서 그 빌어먹을 코미디만 계속하라고 해!
저 콤비 중 하나라도 사라지는 순간 쇼의 재미는 곤두박질친다.
현 NBS의 CEO가 핏대를 올리면서 소리친 일화가 있을 정도니, 두 연출자의 감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리사가······.’
조연출은 잠시 아까를 떠올렸다.
이번 회차 호스트, 한국 이름으로 박이라던 배우의 컨셉 미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는 인종차별에 국가 풍자, 온갖 매운맛이 그득한 대본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대본 뭉치를 쓱쓱 넘기더니, 펜을 달라고 해서 중간중간 의견을 더했다.
‘이건 이렇게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어음··· 괜찮겠어요? 촬영장에 와이어 설치는 좀 어려울 텐데······.’
프로듀서 토비 리가 난색을 표했으나, 박건은 제작진이 가장 좋아할 소리를 했다.
‘문제없습니다. 아크로바틱은 장기라서요.’
거기서 추가한 아이디어들이 리사의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었다.
“분명히 몇 개는 싫다고,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면서 뺄 줄 알았단 말이지. 배우란 작자들이 하나같이 그랬었잖아. 기억나?”
“예, 대부분요.”
“근데 저 남자는 진짜야. 쇼가 시작하면 더 미칠 거라고. 역사적으로,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눈빛의 코미디언들이······.”
한참을 중얼거리던 리사는 멍한 표정으로 발코니를 걸어나갔다.
보나마나 가까운 미팅 룸 문을 걸어 잠그고 작업에 착수할 것이다. 조연출은 입맛을 다시며 담배 한 대를 더 꺼냈다.
“하여간 방송쟁이들,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
NBS의 스튜디오를 나오면서, 그윈 레이먼도 비슷한 것을 물었다.
“혹시 미쳤소?”
“정신병력은 없습니다만.”
“이 친구, 오랜만에 봐도 유머감각은 흉측하군. 물어본 내가 잘못이야.”
깔끔하게 포기한 레이먼은 그나마 말이 통하는 진지유로 목표를 돌렸다.
“진, 당신 동료는 나사가 살짝 나간 게 분명해. 아니지, 배우니까 극본에도 소질이 있는 건가?”
“그냥 쥬라고 부르세요. 저희 회사에 진이라는 동생이 있어서 헷갈린다니까요.”
“쥬? 동물원을 말하는 거요?”
“···말을 말아야지.”
모자챙을 푹 내린 진지유가 옆에서 걷고 있는 건에게 물었다.
“오빠는 어땠어요? 괜찮았어요?”
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은 한국에서 안 해 보기도 했고요.”
이야기가 예상보다 길어지긴 했지만, 미팅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리사 에이블은 그의 코드에 완전히 빠진 것 같았다. 처음엔 ‘뭐라는 거야?’ 하는 얼굴로 수정안을 듣다가, 나중에는 본인이 먼저 새로운 컨셉을 제시하며 아이디어를 냈다.
‘그냥 더 웃길 것 같은 상황을 낸 건데.’
아무리 유쾌한 헐리우드라지만, 배우들 콧대가 높은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리사는 물론, 함께 미팅에 참여한 토비 리도 연방 박수를 치며 긍정적인 리액션을 보냈다.
‘이봐요, 레이먼 감독님. 당신은 운이 좋은 줄 알아야 돼. 이 배우가 칸이 아니라 에미상에 참석했다면 지금쯤 우리 크루로 영입됐을 테니까.’
‘꿈이 크군. 저 친구가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대성해도 네 쇼엔 고정될 일 없을걸.’
현 감독과 프로듀서의 실랑이 속, 리허설 때 보자는 인사와 함께 자리는 끝났다.
날짜는 이번 일요일··· 생방송 세 시간 전까지만 도착하면 된다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젠 뭐 하죠?”
NBS 빌딩 앞.
한쪽 손을 치켜든 박선이 물었다. 레이먼은 바삐 오가는 뉴욕의 버스들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난 작업실로 갈 거요. 구경도 다 했으니 할 일을 해야지, 저기 주연 배우에게 혼이 나고 싶지 않으면.”
박선이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아, 영화! 감독님, 혹시 개봉 일자는 언제쯤으로 예상하세요? 한국에도 기다리는 팬들이 엄청 많아요.”
“안심하시오. 더위가 가시기 전일 테니까.”
레이먼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셋 다, 관광이라도 하시오. 멋대가리 없는 도시지만 왔으니 놀다 가야지.”
“뉴욕은 처음이라··· 뭐가 재미있어요?”
“다 별로요. 뭐, 정 모르겠으면 내가 잠깐 가이드를······.”
“제가 알아요!”
일행들은 깜짝 놀라 뒤쪽을 돌아보았다. 주먹을 불끈 쥔 진지유가 걸어오고 있었다.
“뉴욕은 자주 놀러왔거든요. 여긴 완전 앞마당이니까, 감독님은 일 보러 가셔도 될 것 같아요. 얼른 우리 영화 개봉해야죠.”
그윈 레이먼은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단번에 파악한 눈치였다.
로만의 두 배우를 번갈아 보더니, 히죽 웃으면서 한 손을 들어올렸다.
“가이드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있을 수가 없군. 즐거운 시간들 되시오.”
그러더니 정말로 노란 택시 하나를 잡아서 가 버렸다.
남겨진 셋은 서로의 얼굴만 빤히 봤다. 모자를 벗어, 청바지 뒷주머니에 구겨 넣은 진지유가 활달하게 말했다.
“그럼, 놀아볼까요?”
*
진지유는 뉴욕을 제집처럼 잘 알았다. 작품이 없을 때는 매번 해외로 나갔다더니, 뉴욕에도 많이 와 본 모양이었다.
첫 행선지는 브로드웨이. 웨스트 42번가부터 53번가까지, 비스듬한 길을 누비며 이 극장과 저 극장을 소개해 주었다.
“아, 아메리칸 스튜어트는 끝났네요. 여긴 표가 없어요.”
“흐어엉, 보고 싶었는데······.”
무료정보지의 공연 일정을 확인해 보던 진지유가 말하자 박선이 울상을 지었다.
건은 화려한 무대분장을 한 무용수들의 포스터를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다른 뮤지컬도 있지 않나?”
“그래도 유명하잖아! 나 대학 다닐 때 홍세찬 배우님이랑 정이라 배우님이 공연했는데, 그 원작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괜찮아요. 여긴 뭘 봐도 오리지널 공연이니까.”
현지에서 공연되는 작품을 그대로 들여오면 내한 공연이나 오리지널 공연, 우리말로 번역해 올리면 라이선스 공연이라고 한다.
뮤지컬엔 별 조예가 없는 그도 알 만한 작품들 이름이 몇 개나 보였다.
“이장미 씨가 좋아했겠는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올 걸 그랬습니다.”
진지유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안 그래도 같이 한번 왔었어요. 지지난달이었나? 둘이 오프 브로드웨이(Off-Broadway)부터 소호까지 쭉 돌면서 쇼핑도 했어요.”
“둘이 아는 사이였습니까?”
“네. 오빠 SNS 댓글 달다가 친해져서, 팔로우하고 자주 봤어요. 둘이 찍은 사진 제 피드에도 자주 올렸는데······.”
자기 계정도 안 보는 사람이 남의 SNS를 구경할 리가 없다. 건은 가늘어진 진지유의 눈초리를 애써 모른 척했다.
“오래 해외에 있었잖습니까. 요즘은 인스타를 잘 못 봤죠.”
“어? 좋아요는 눌렀던데요?”
눈치를 보던 박선이 슬그머니 고백했다.
“진 배우님, 그거 저예요. 고드 촬영 시작하고 나선 거의 저만 관리해서······.”
“···댓글도요?”
“네, 그래서 이모티콘만 다는데······.”
나라 잃은 표정이 된 진지유의 양쪽에, 두 형제가 경호원처럼 붙어 섰다.
“SNS가 무슨 상관입니까. 모처럼 나왔으니 재밌게 놀다가 들어가죠.”
“그럼, 그럼. 공연이나 쭉 돌아요. 괜찮은 배우가 있으면 스카웃도 할 겸.”
“됐어요, 이 형제 사기단!”
뉴욕에 온 첫날은 브로드웨이에 오른 극들을 밤까지 보다가 미리 예약한 호텔에 짐을 풀었다.
다음날도 실컷 놀고, 매일매일 관광과 쇼핑을 하면서 지내다 보니 시간은 금방 갔다.
그리고 어느덧 일요일.
SNL의 방영일이자 촬영 당일이 되었다.
*
매튜 딜리너이.
방년 43세, 뉴욕의 모 은행에서 일하는 그는 SNL의 골수팬을 자부했다.
그야말로 혁신이었던 시즌 1부터 시작해 포맷이 완벽히 자리잡힌 시즌 2, 작가와 프로듀서가 번갈아 떠나며 휘청였던 시즌 3과 4까지.
마침내 SNL이 시즌 5를 맞이한 지금··· 아직 남은 팬심으로 본방은 사수하고 있었지만, 매 회마다 불만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요즘 나오는 호스트들은 뭐 이리 밍숭맹숭해? 새롭지 않을 거면 재미라도 있던가. 맨날 똑같은 말장난에 되잖은 슬랩스틱, 망가지지도 않을 거면서 크루들이랑 호흡은 또 얼마나 구린지······.”
최근 만나기 시작한 여자친구, 벨라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예전엔 재밌었지. 국장인지 사장인지 바뀐 이후로 쭉 내리막이라니까.”
“그래. 이번엔 또 무슨··· 칸? 거기서 상을 탄 외국인 배우가 호스트라던데.”
“맙소사, 배우? 안 봐도 망했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밤 10시가 되어 가자 두 명은 TV 앞 소파로 모였다.
이러나저러나 일요일 밤의 유일한 즐거움 아닌가. 욕을 해도 내가 한다는 마음가짐은 동서양 시청자가 똑같은 것이다.
-가장 완벽한 쇼, SNL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크루 리더의 소개와 함께, 백밴드의 브라스가 울려퍼지며 막이 올랐다.
그리고 등장한 호스트의 비주얼에, 커플은 자세를 약간 고쳐 앉았다.
“···박이라고 했지? 배우가 아니라 모델인가?”
“머리만 검은 것 같은데, 동양인의 이목구비가 아니잖아. 분명히 피가 섞였을 거야.”
“자기, 방금 멘트 완전 썩었어! 인종차별주의자 같았다고.”
벨라가 질색하며 쿠션을 집어던졌지만 매튜는 어깨를 으쓱했다.
둘이 그러거나 말거나, TV에서는 풀 수트 차림의 호스트가 성큼성큼 걸어나오고 있었다.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크루석을 휘둘러보던 박건의 입이 열렸다.
-나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