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58)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58화(158/199)
용사의 기억 (2)
* * *
아리아 리버롯.
철왕국의 21대 성녀.
그녀에 대해서는 수많은 설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드높은 천상이 직접 점지했다는 둥, 몰락한 옛 왕족의 먼 후계라는 둥,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둥.
하지만, 정작 본인에게 물어보면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예?
-내가 어디 길바닥에서 성녀가 됐든, 교회의 딸 출신이든 알 거 없잖아요. 용사님은 그냥 저 개자식들만 죽여버리면 돼요.
당시에는 말 못할 가정사가 있겠거니 싶어서 넘어갔었으나, 후에 알게 되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 마경 한복판에 고립되어, 죽음을 눈앞에 뒀을 때조차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더불어, 저 천상의 대천사들에게 어떤 신탁을 받았었는지도.
‘그러고 보면 이상했지. 전대 성녀, 전대 용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는 것이.’
성녀뿐만이 아니다.
분명 수십 년이 넘도록 대악마의 군세가 침공했다고 하건만, 전대 성녀와 용사에 대해서는 이 세계의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마치··· 하나같이 기억을 잃은 것처럼.
-너도 똑같은 꼴이 될 거다. 용사라는 자들 모두가 그랬어, 빛과 영광에 파묻혀, 영원한 망각 속을 떠돌 운명일지어니······!
되짚어 보면 여러 단서들이 있었다.
이제는 잊혀진 협곡 속 마을, 웬 노인이 그의 성검을 보자마자 광인처럼 발작한 것.
전쟁 초기, 악마군을 막았다던 북쪽의 석벽에 새겨진 합기의 흔적.
그리고 반복되는 회귀 끝에 폭주했을 때, 잠식된 그에게 외쳐 대던 성녀의 목소리까지.
-정신 차려요, 고드! 당신 세상으로 돌아간다면서! 여기서 포기하면 아무것도 안 돼. 차라리 다시 시작하란 말이야!
스크린 속에서는 또 다른 고드가 상처투성이 검을 휘두르고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자신의 영화를 앞에 두고, 건은 눈을 감았다.
‘다시 시작하라고, 그렇게 말했었지.’
지난 3년간, 수많은 작품들로 철왕국의 ‘고드’와 동화율을 높인 탓일까.
꿈이라는 매개가 없음에도, 사라졌던 기억들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그 때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인지한 순간 사고는 확장된다. 여태까지 잊고 있던, 어쩌면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던 가능성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구로 돌아왔을 때, 잃어버린 기억에 모종의 원인이 있었다면?
저쪽 세계에서 튕겨져 나온 반향··· 또는 거듭되는 회귀로 인한 인간성의 침식이 아닌, 누군가 고의로 기억에 손을 댄 거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가 있긴 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강력한 동료이자 모든 회차에 함께한 원정대의 멤버로서.
-잊는다. 천사를 보면, 잊게 돼.
건은 기억한다. 외마디처럼 부르짖은 노인이 쓰러졌을 때, 흔들리던 성녀의 눈동자를.
그날 밤 악마군이 협곡으로 진격해 왔다. 그는 발몬의 세 후작을 베면서 옆을 보았다.
눈부신 금발, 빛으로 빚은 듯 흰 피부, 교단의 성물인 십자가에서 뿜어지는 압도적인 신성력과 회복 마법······.
용사를 철왕국으로 소환시킨, 교단의 1인자이자 드높은 천상의 가장 신실한 종.
성녀는, 무엇을 감추고 있었는가?
*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시사회장을 빠져나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잘 만든 영화의 공통점은 두 가지다.
관객들이 화장실을 참게 하거나, 아예 갈 생각도 들게 하지 않거나.
<고드: 분노의 파수꾼>은, 둘 모두에 해당했다.
―모두에게 알려라, 고드가 돌아왔다고.
―말도 안 돼! 그게 대체 누군데?
―파멸이지. 움직이는 죽음이다.
그윈 레이먼, 맨해튼 배관공 출신의 영화감독이 쌓은 서사는 쉬지 않고 달린다.
싱가포르와 튀르키예, 대륙들을 넘나들며 조직원을 사냥하던 고드는 마침내 ‘엔도’의 간부급들과 조우하게 된다.
은퇴를 선언했던 전설적 배우, 숀 벌룬은 백발의 킬러로 분(扮)해 후배와 맞서고··· 나이가 무색한 액션을 선보이며 장렬히 쓰러진다.
푸쉬익!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총탄이 두개골을 꿰뚫고 피보라를 일으킨다. 권총을 내린 고드는 무심히 걸어가 시체의 손목을 뒤집는다.
―이자는··· 네 줄인가.
엔도의 문양, 급이 오를수록 흰 줄이 늘어나는 검은 뱀은 꼬리를 문 폭력을 상징한다.
그윈 레이먼은 작품 속에서 신화적 상징과 철학을 잘 다루기로 유명한 감독.
이는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외곽을 빙빙 돌며 쓰러지는 킬러들, 눈 쌓인 앙코르와트의 계단을 시지프스처럼 올라가는 ‘등반’ 액션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렇게 고드는 스페인과 캄보디아에서 수백 명의 킬러들을 학살하고, 마침내 맨해튼의 록펠러 센터 최상층까지 이른다.
―기어이 여기까지 왔군.
알리발트 제인 경.
공작의 작위를 지닌, 대대로 왕실에 충성한 거부이자 킬러조직 엔도의 현 수장.
검푸른 새벽하늘을 뒤로한 채, 그는 의장용 레이피어를 비껴 쥐고 묻는다.
―자네의 쇼는 잘 봤어. 전세계의 지부와 지부장들을 살육하고 다녔던데.
―그럴 이유가 있었으니까.
―아, 필리핀의 재앙. 그래, 그 불쌍한 아이들은 나도 안타깝네. 자신들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을 줄 알았겠나?
화려한 의복을 입은 제인 경의 앞으로, 가문의 정예 수행원들이 모여들었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방탄장비에 최신형 화기와 고출력 레이저커터로 무장한, 한 명 한 명이 인간병기급의 전투요원들이다.
―결국 자넨 복수를 하려던 게 아냐. 그저 시리아의 모래바람 속, 거기서 쌓인 증오와 분노를 세상에 퍼뜨리고 싶었을 뿐이지. 적과 자신을 모두 죽임으로써.
고드는 답하지 않는다. 아래로 향한 시선에, 군데군데 찢기고 타 버린 방탄수트가 비친다.
부르튼 입술이 달싹거리며 말을 자아낸다.
―나는······.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어릴 적 디트로이트에서, 군인의 신분으로 참전한 시리아에서, ‘엔도’의 킬러들을 무참히 학살하며 당도한 이곳까지.
아이들의 복수를 위해서도, 세상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무화시키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하나, 삶의 끝에서 손 내밀었던 희망을 지키고 싶었을 뿐.
―마지막 파수꾼이다.
.
.
.
십여 분 뒤, 록펠러 센터 앞.
엄청난 전투력의 전직 특수요원을 잡기 위해, 시는 가용 가능한 병력을 전부 쏟아부었다.
대테러 전담 특수부대, 군, 경이 모두 출동해 입구를 봉쇄하고 하늘엔 헬기마저 난다.
이내 중화기와 헬멧, 마스크로 완전무장한 대테러 전담 요원들이 최루가스를 뿌리며 내부로 잠입하지만 살아 있는 자는 없다.
알리발트 제인 경과 그 수행원들의 잔해가, 수십 토막으로 나눠진 채 홀에 뿌려져 있을 뿐이다.
―······.
저 끝으로, 피 묻은 발자국이 이어져 있다. 흔적을 따라간 요원들은 이내 바람이 몰아치는 센터의 창문 앞에서 서로를 마주본다.
목표물··· 고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세계에 대항하던 괴물은 하늘로 솟았는가. 아니면 저 까마득한 지상으로 추락했는가?
카메라가 아직 어두운 하늘을 잡으며, 암전하는 스크린에 흰 글씨가 떠오른다.
Dum vita est, spes est.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
영화가 끝나고, 시사회가 진행된 관 앞은 한동안 교통 혼잡이 벌어졌다.
“팀장님, 지금 바로 올려야 돼요! 오 분 늦으면 우리 먹을 것도 없어져요!”
“데스크에 연락했어? 종훈이만 있다고? 그 새끼 바로 튀어오라고 해!”
“저기, 알겠는데 좀 나와서 얘기합시다. 난 내가 직접 가서 내야 된다고!”
평론가들의 동향, 대중의 분위기를 보지 않더라도 압도되는 작품이 있다.
심지어 상영관 조명이 켜지기도 전에 기립박수가 나오는 영화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관객들이 박수를 보내는 와중, 발 빠른 기자 몇몇은 휴대폰을 잡고 뛰어나갔다.
조금 더 인맥이 넓은 이들은 눈에 불을 켜고 이 자리에 온 셀럽들을 찾았다.
“이장미 배우, 이장미 배우 어디 갔어요? 아까까지 여기 있었잖아요.”
“몰라요. 저기 최필립은 있네, 자신 있으면 가서 인터뷰 따 보든가.”
타 매거진 기자가 힐끔 보며 말하자 이장미를 찾던 기자가 찔끔했다.
특히나 기자들에게 까칠한 최필립의 성격을 익히 아는 탓이다. 거기다 보라,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중얼대고 있다.
“거 참, 비슷한 걸론 절대 안 되겠는데. 이 기회에 액션은 접을까? 아니, 오히려 일이 년 배워서 국내를 싹 쓸어먹으면······.”
그러는 한편, 저쪽에서는 서희도와 변휘승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보통 시사회에 온 연예인들은 일정이 끝나면 빠져나가지만, 이들은 정반대다.
“아니, 그러니까 그 상징은 시지프스보다 오디세이아 쪽에 가깝다니까? 희도 씨한테 물어보쇼, 영화블로거란 사람들이 왜 이렇게 소양이 얕아. 그윈 레이먼 그 양반이 원래 변태적인 상징을 이중으로 잘 꼬는······.”
“우와! 쩔었어요! 장난 아니었다고, 개봉하면 우리 멤버들이랑 회사 사람들도 다 데려와서 볼 거라고 기사 내주세요!”
둘 다 인터뷰라기보다 자기 할 말만 하는 것에 가깝지만, 아무튼 얼굴까지 상기된 채 소감 토론에 열을 올린다.
비슷한 장면들이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백정장군’ 쪽 배우들 앞에서는 아예 노트북을 켠 기자들이 인터뷰를 받아 적는 중이다.
“···난리가 났군. 시사회가 아니라 무슨 시상식장이 따로 없어.”
팀장급 기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손은 부지런히 노트북 자판 위를 날아다닌다. 언뜻 보인 기사 꼭지도 독하기 짝이 없다.
[<고드: 분노의 파수꾼> 기존 액션영화를 향해 밀어닥친, 박건이라는 재앙의······.]완벽히 압도했다.
그 역시 ‘킬 쏜’의 팬임을 자부하는 액션영화 마니아기에 알 수 있다.
서사, 구성, 색채와 연출 등 영상미. 그리고 결정적인 액션의 퀄리티에 있어서, 마스터피스에 가까운 괴물이 탄생하고 말았다.
그것도 독립영화 출신 감독과 액션 조연으로 데뷔한 배우의 사이에서.
미리 작성한 기사를 업로드한 뒤, 그는 불현듯 잊고 있던 의문을 떠올렸다.
‘···그런데 박건은? 나가는 것도 못 봤는데 어딜 간 거야?’
*
지하 6층, 주차장.
정장 차림의 젊은 남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내려 주차장을 가로지른다.
한 손에는 묵직한 가방을, 다른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있는 박선의 모습이다.
“여기랬는데······.”
땀투성이가 되어 넓은 주차장을 헤매던 중, 박선의 눈동자가 커진다.
저 멀리, 6F라고 적힌 기둥 뒤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던 것이다.
“형!”
누군가가 들려줬을 꽃다발은, 길게 뻗은 다리 옆에 덩그러니 눕혀져 있다.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던 박건은 동생을 보고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선아.”
길고 섬세한 눈가에 지친 기색이 묻어난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일정이 많든 적든 팬과 지인들이 있으면 자리를 지키던 형이다.
더군다나 오늘은 주인공 아닌가. 밀려드는 걱정에 박선의 목소리가 절로 커졌다.
“괜찮아, 형. 여긴 아무도 없으니까. 어디 아픈 거면 구급차부터 불러서······.”
“기억이 났어.”
“응?”
막 번호를 누르려던 박선의 손이 멈췄다. 세팅이 풀려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예전의 형을 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잊어버린 것들이, 꽤 많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