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61)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61화(161/199)
용사의 기억 (5)
* * *
JNBC 사옥.
국장실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이 인간들 봐라, 좀 유명한 양반은 싹 다 찾아갔다 왔네. 국회의원들도 이렇게는 안 하겠구만.”
혀를 차는 김백동 국장의 말을, 나종모 PD가 흐뭇한 표정으로 받았다.
“그런 정치인들보다 사람 마음을 더 샀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건이 씨가요.”
자기들 딴에는 비공개로 갔다지만, ‘박건 사단’의 릴레이 병문안은 결국 기사화되어 이슈를 끄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건이 한 번이라도 출연한 작품의 배우부터 관계자들까지 모두 찾아가 얼굴을 비추지 않았나.
각박한 세상에 흔치 않은 미담이라느니, 덕을 쌓으면 복을 받는다느니, 기자들이 신이 나서 기사를 써 대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언제 봤다고 우리 건이 씨야? 넌 또 저기 왜 안 갔어, CP가 코앞이라고 아주 마음이 떴지. 제일 중요한 배우한테 코빼기도 안 비추고?”
“아니, 그때 촬영 중이었다니까요! 당연히 나중에 따로 찾아갔죠. 상투 틀어 준 감독이랑 배우가 어디 보통 사인가.”
김백동의 눈가가 가늘어진다.
이 녀석의 단점이라면 충무로 출신다운 고집이다. 그 고집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는 대박을 치고, 조금 엇나가는 순간 폭삭 망해 버린다.
그런 놈이 ‘서울의 개’와 ‘망회돌’을 거치면서 꽤 단단해졌는지, 최근 들어간 수목극에서는 박건 없이도 쾌조의 성적을 자랑하고 있었다.
“박건이가 대단하긴 하지. 앉아 엮이나 서서 엮이나, 스쳐지나간 양반들까지 다 잘 됐잖아.”
“그죠. 덕분에 국장님 혈압도 좀 낮아졌고요.”
“내 혈압이 뭐, 자식아?”
한 대 쥐어박을 듯 손을 올리면서도, 김백동 국장은 머쓱한 표정이 된다. 기차화통을 삶아 먹은 그의 고함소리가 근래 작아진 건 사실이다.
나종모 PD가 은근한 목소리로 구슬렸다.
“아니, 맞잖습니까. 당장 서희도만 해도 어지간한 주연급으로 성장했죠. 김률 감독이야 말할 것도 없고··· 변휘승 좀 보십쇼. 건이 씨랑 호흡 한번 맞추더니 완전히 부활했어요.”
“하긴, 그놈 은퇴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걸 보면··· 의사가 따로 없다니까. 죽어가는 퇴물을 데려다놔도 살려낼 기세야.”
실제로도 그렇다. ‘서울의 개’ 이후 서희도는 연기력 논란을 보란 듯 박살내며 날아올랐고, 변휘승은 거짓말처럼 이미지를 회복했다.
비교적 비중이 적었던 권유리는 CF 퀸으로 광고를 휩쓸며, ‘백정장군’의 조연들도 저마다 주조연을 꿰차 잘 나가는 중이다.
이만하면 작품 로또가 아니라 인간 로또 수준이라고 할 만 했다.
‘반면, 잘못 걸리면 하나같이 나락을 갔지. 음해하려던 놈들도 그렇고.’
바로 이틀 전. 그는 오래된 친구, 은희욱 작가와 술자리를 가졌다. 주로 도마에 오른 화제는 DG의 위기론이었다.
‘주주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아요. 변동근이 연신 악수만 두고 있어서, 이대로라면 조만간 정말로 무슨 일이 날 것 같습니다.’
‘그 변동근이?’
‘네. 몇 년간 차인혁의 스카우팅 및 콘셉트 운영에 너무 많이 의지했던 모양이에요. 고질적인 아티스트 핸들링 문제도 있고······.’
한국의 양대 기획사. 초거대 공룡이라고 불리던 DG는 꾸준히 내리막길을 탔다.
대표 배우들의 마약 및 인성 논란, 소속 아이돌들의 음주운전과 스캔들, 거기에 최근 연이은 아티스트들의 흥행 부진까지.
워낙 체급이 커 한동안은 버텼지만, 다른 혁신이 없다면 곤란할 거라는 예상이었다.
은희욱 작가는 거기에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 시작이 어디였는지, 아마 변동근도 잘 알 겁니다. 지금쯤 박건을 괜히 물어뜯었다고, 집 떠난 개를 원망하고 있겠죠.’
이번에도 ‘박건 만능론’이라고 치부하기엔 당장 기은서의 꼴부터가 말이 아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엇나갔던 화제를 김백동이 되돌렸다.
“그나저나, 그 친구는 어디가 아프다는 거야? 영화 촬영 때문에 남미도 갔다더니, 뭐 지역 풍토병 같은 건가?”
“제가 볼 때는 상사병입니다.”
“푸흡!”
김백동은 기어이 마시던 생수를 뿜고 말았다.
“상사병? 그 박건이?”
나종모 PD는 진지하게 끄덕였다.
“예, 들어보니 증상이 딱 상사병이에요. 세상 강철 같던 사람이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고, 그렇게 좋아하던 밥도 안 먹는다니까요.”
“···인마, 그쯤 되는 배우가 무슨 상사병이야. 세계의 거장들이 찾고 있을 텐데.”
“그래서 더 공허할 수도 있죠. 걸어다니는 기업이 돼도 사람 마음은 못 바꾸잖습니까.”
모처럼 듣는 후배의 진중한 목소리에, 김백동 국장의 미간도 좁혀졌다.
“어쩔 수 없군. 그 친구 좋아하는 게 뭔지 좀 알아와 봐, 노 대표 앞으로 뭐라도 보내 놓게.”
“이미 국장님보다 잘 벌 텐데요. 숨만 쉬어도 건물이 두 개, 세 개······.”
“그래도 마음이 중요하지! 다음 작품으로 우리 드라마 들어올 줄 누가 알아!”
나종모 PD는 귀를 후비며 대꾸했다.
“제가 그 짓을 몇 년 해 봤는데, 기대 접으십쇼. 그냥 CP 달고 제걸 선배나 받치겠습니다.”
“망할 놈. 누가 달게 해 준대?”
*
“그렇게 돌아왔어.”
“그럼, 연락이 끊어졌던 것도······.”
“일어나 보니 몇 시간밖에 안 지나 있더라. 부대에서는 난리가 났었지만.”
형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박선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꿈이라기엔 지나치리만치 자세한 ‘전생담’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농담이나 장난이 아냐. 형은 나를 믿고 진짜 이야기를 털어놓은 거야.’
박선은 고개를 들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긴 이야기를 쏟아 놓은, 칸의 슈퍼스타는 담담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소설 같은 이야기다.
전역식 날 아침에 꿈을 꿨고, 그 속에서 다른 차원으로 소환되었다는 것이.
어디 그뿐인가. 저 철왕국이라는 곳에서, 형은 수많은 죽음을 넘나들었다고 했다.
동료들을 모으고, 악마군을 참살하고, 성녀에게 등을 맡기며.
그 역시 쉽게 믿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껏 형이 보여준 모습이 없었다면.
‘카메라가 돌아갈 때, 잊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돌아왔다고 하니까······.’
예전, 유튜브 프로그램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꿈속에서의 체험으로 비상한 기억력이나 전혀 몰랐던 상식을 얻은 이들이었는데, 어떤 면에서는 형의 증상과 흡사했다.
혼란 속에서, 박건의 동생이자 박열호와 한영주의 아들인 박선은 생각한다.
‘···어디서부터 달랐었지?’
처음부터.
답은 쏘아진 총알처럼 명확했다. 오귀준 팀장을 쫓아낸 뒤, 데뷔작에서는 엑스트라들마저 리드하는 액션 연출을 보여줬다.
‘회도팀’ 직후, DG와의 전면전 때는 경찰도 못 잡은 파파라치를 누군가 잡았고··· ‘백정장군’에서는 크게 다칠 뻔한 백하니를 구했다.
아무리 특수부대 출신이라곤 하나 불가능한 이야기 아닌가. 수많은 삶, 그만큼의 죽음을 경험한 철왕국의 용사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처음에 형 같지 않았던 거구나. 엄마랑 아빠도 그 얘길 하셨었어.”
박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그냥 넘어가 준 걸 알아. 티를 안 내려고 했는데, 현실로 돌아오는 게 쉽지 않더라. 너랑 부모님 덕분에 적응을 빨리 했지.”
“왜 얘기 안 했어. 혼자 숨기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냥 다 털어놨어도······.”
“기회가 없었어. 쉽게 믿을 이야기도 아니고, 너도 쭉 바빴으니까.”
빙긋 웃는 형을 바라보며, 박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얼핏 무뚝뚝하게 들리지만··· 그 안에는 깊은 애정이 담긴 걸 이제는 안다.
입대 전의 박건과 전역 후의 박건이, 본질적으론 달라진 것 없는 형인 것처럼.
와락.
갑자기 동생이 끌어안자, 박건은 살짝 놀란 표정이 됐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
“···힘들었지?”
“괜찮아. 다 끝난 일인걸.”
“그래도··· 형은 그 동안 수십 년을 살았던 거잖아. 심지어 깨어나지도 못하고······.”
결국 박선이 눈물을 보인 후, 형제는 한동안 많은 대화를 나눴다.
꿈(이지만 현실처럼 느껴지는)속 세상 속에서 만난 동료와 적들, 대악마들과의 전투, 타락한 귀족들과 수상한 천사들까지.
“그래서 흑의사제에 꽂혔었구나. 하필 악마가 나오는 오컬트라서.”
“아무래도 그랬지. 백정장군이나 망회돌, 최근에 찍은 고드에서도 배역마다 공통점이 있었어.”
박선은 뒤늦게 입을 떡 벌렸다.
“와, 근데 진짜 신기하다. 어떻게 형이 썼던 이름이 시나리오에 그대로 있지?”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배우를 하게 된 것도, 지금 이 작품들을 촬영해 온 것도.”
박건의 회고를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잠깐 침묵이 흘렀다.
눈을 몇 번 비빈 박선이 물었다.
“그럼 형, 앞으로는 어떡할 거야? 이번 영화로 기억이 또 돌아왔다면서.”
“응, 이제 얼마 안 남은 기분이야.”
“이럴 때야말로 노를 저어야지! 그래도 몸이 우선이니까, 일단 올해는 쉬고 내년 초쯤 시나리오들을 쭉 골라 보자. 분명히 또 그, 팍 하는 작품이 하나쯤은 있을 거야.”
“괜찮아. 더 쉬지 않아도.”
응? 디지털 대본을 찾던 박선이 되물었을 때, 침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선선한 바람이 커튼을 흔드는 와중, 어느 새 일어선 배우가 말했다.
“이젠··· 다 정리됐으니까.”
*
이상철 본부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볕이 쨍쨍한 밖을 한번 보곤, 다시 본부장실 소파를 돌아보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은 안 치는데······.”
요즘, 로만에는 눈을 의심하게 하는 광경들이 부쩍 자주 벌어지고 있었다.
소파의 양쪽 끝에 앉은, 회사의 두 탑 여배우는 약속이라도 한 듯 팔짱을 꼈다.
“······흥.”
콧방귀를 뀌는 건 새하얀 블레이저에 짧은 정장바지를 입은 백하니고,
“본부장님은 계셨네요? 다행이다.”
이건 일정도 없는데 회사에 풀메이크업을 하고 온 진지유다.
환불 이상철 본부장은 두 명을 번갈아 보다가 이마를 짚었다.
“너넨 또 왜 그러냐. 이제 여기서 붙기로 한 거야? 짐 빼고 나가 주랴?”
“···쟤랑은 싸울 일 없거든요? 또 내 배역 뺏어서 주면 모를까.”
“맞아요. 언니랑은 전략적 우호관계를 유지 중이라고요. 하필 대표실 앞에서 마주치긴 했는데.”
바로 몇 분 전, 노중만 대표는 급한 전화를 받고 자리를 비웠다. 그제야 이 본부장의 표정에 알겠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아, 그래서 이리 쳐들어온 거구만?”
팔짱을 끼고 있던 백하니가 짜증스레 대꾸했다.
“그럼 어떡해요. 오늘 오래서 왔더니 쏙 사라지고 없는데.”
“어쩔 수 없어. 회사의 명운이 걸린 일이라.”
“······네?”
알맹이가 크다. 진지유가 잘못 들은 게 아니냐는 듯 되물었고, 백하니의 눈썹도 올라갔다.
“회사에 명운까지? 무슨 일 있어요?”
“DG 건이야.”
두 여배우는 잠깐 서로를 마주봤다.
아직 찌라시나 기사가 퍼지진 않았지만, 회사의 주역쯤 되면 보고 듣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게 본인들과도 무관치 않다면 더더욱.
진지유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 거기. 저한테 져서 체면 좀 구겼죠. 당분간 드라마로는 붙기 싫어졌을 텐데.”
“너한테만 졌니? 시청률 차이는 우리 쪽이 더 났어. KBC 강치욱 PD가 술 먹고 전화했을 정도니까.”
“언니한테 뭐라고 했는데요?”
백하니는 벌레를 쫓는 양 손을 털었다.
“다음부터 배우 잘 쓰라고 하곤 차단했지. 자기가 헛발질해 놓고 왜 난리야.”
구신승, 진지유, 백하니.
이 셋은 최근 들어가는 드라마마다 번갈아 시청률을 견인하며 안방극장을 폭격했다.
15%, 23%, 26%··· 박건이 해외로 도는 동안, 국내 드라마판의 기강을 완전히 잡은 셈이다.
그래서일까. DG의 주가가 한때 폭락한 뒤, 대표 겸 총괄프로듀서 변동근과 경영진의 마찰이 심화된다는 정보가 돌고 있었다.
거기서 노중만 대표가 움직일 일이라면? 보나마나 공룡의 숨통을 죄는 작업이리라.
“대표님은 어쩔 생각이시래요? 아무리 죽을 쑨대도 인수는 쉽지 않을 텐데?”
진지유가 물었지만, 이상철 본부장은 어깨만 으쓱했다.
“곧 알게 될 거야. 우리 배우님들 손에 피 묻힐 일 없으니까 걱정 말고.”
“손 말고 발에는 이미 많이 묻혔는데요. 좀 더 밟는 게 대순가.”
얇은 발목을 까딱거리며, 백하니가 대수롭잖게 말했다. 저 힐에 밟혀 아작 난 작품과 배우들이 한 트럭도 넘는다.
한숨을 쉰 본부장이 물었다.
“그래서, 용건들이 뭐야? 또 박건 씨 문안원정대를 모으나?”
“···저, 제가 언제 모았어요? 전 심지어 같이 가지도 않았다고요.”
“아니면 말고. 너희 메이크업 보니 뭐라도 환불해야 되나 싶다.”
순간 두 여배우의 시선이 마주쳤다.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다음 작품 말인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