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62)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62화(162/199)
용사의 기억 (6)
* * *
“여기도 오랜만이군.”
연못이 있는 한정식 정자.
몇 년 전 은밀한 계약이 맺어졌던 그곳에서, 같은 자리에 두 남자가 마주 앉았다.
로만 엔터테인먼트, 노중만 대표와 C&J 미디어그룹의 진규일 총괄대표다.
이제 전략기획본부장에서 대표로 올라선 진규일이 턱을 쓸었다.
“인기 많은 장소라고 들었습니다. 저도 꽤 자주 오곤 했었죠.”
“그 친구랑 계약한 것도 여기, 바로 이 자리였거든. 어떻게든 데려오려고 애를 썼었지.”
노 대표가 말하는 ‘그 친구’가 누구인지는 두 사람 모두가 잘 알았다.
차를 따른 진규일이 찻잔을 내밀었다.
“축하드립니다. 의리는 있는데 욕심은 없는 친구라, 당분간은 나가지 않을 겁니다.”
“그야 본인 자유지, 진 대표야말로 축하해요. 본부장 직함을 3년도 안 돼서 뗐군.”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진규일이 겸손하게 말을 받았다. 몇 차례 차와 술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회동의 본 목적이 흘러나왔다.
“인수가 가능하겠습니까?”
노중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률은 낮아요. 만에 하나, 이걸 풀어서 주가가 폭락해도 공정위에서 개입할 테니까.”
“로만이 아니라 우리 C&J라면?”
“그럼 더 큰 견제가 들어오겠지. 탈 없이 먹기엔 덩어리가 너무 커.”
노중만이 책상에 올려놓은 USB 칩을 바라보며, 진규일은 미간을 좁혔다.
“칼을 뽑을 적기이긴 한데······.”
저 칩 속, 2테라를 꽉 채운 자료들이야말로 DG를 무너뜨릴 마지막 카드였다.
과거··· 한창 박건과 백하니를 둘러싼 파파라치들이 기승을 부릴 시절, 돌연 DG의 차인혁 본부장이 자취를 감췄다.
퇴직금을 받고 은퇴했다, 변동근에게 팽을 당한 거다,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당했을 것이다······.
무성한 소문 중, 노중만은 유일한 진실 한 가지를 알았다.
‘···알아서 처리하쇼. 이렇게 쓸 생각으로 모은 건 아니었지만.’
어느 날 밤, 돌연 그를 찾아온 차인혁은 이 USB를 건네고 비틀대며 사라졌다.
얻어맞은 것처럼 행색이 엉망이었는데, 누구한테 당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노중만은 술잔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 조이너스는 방관자에 불과하니, 필시 DG와의 전면전이 될 거라고.”
“변동근과 청산할 빚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서로가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으니까. 난 이 판을 정상화시키고 싶었고, 그놈은 내 존재가 왕국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긴, 저도 들었습니다. 악성계약에 묶인 연예인들을 일일이 접촉해서 도움을 주셨었죠.”
로만의 첫 출범부터, 몸집을 키워 나가는 동안 얼마나 부침이 많았던가.
DG와 맞서기 위해 모아 왔던 자료에 차인혁의 USB까지 더해지자 확실한 칼이 되었다.
거기에 지금 저 공룡은 탄생 이래 가장 약해진 상태. 관건은, 손 안의 칼자루를 어떻게 휘두르냐는 것이다.
“박 배우가 없어서 아쉽군요. 그 친구가 있었으면 또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냈을 텐데.”
새로 바꾼 무테안경을 추켜올리며, 진규일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 역시 칩 속의 내용들을 모두 확인했다.
아직껏 폭로가 터지지 않은 아티스트들의 마약 및 불법도박에, 변동근이 빼돌려 온 탈세와 이중장부의 증거까지 들어 있었다.
필시 차인혁도 제 보스를 믿지 못한 것이리라. 회사를 뒤집어엎을 폭탄을 준비한 걸 보면.
‘저걸 터뜨린다면 주식은 폭락하겠지만······.’
그들은 군인이 아닌 사업가다. 돈을 바다에 뿌리는 게 아니라, 하나라도 긁어모아 곳간으로 가져올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
노중만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랬겠지요. 반씩 나눠서 인수해라, 뭐 이런 얘길 했을지도 모르고.”
반쯤 농담으로 한 얘기였었는데, 진규일은 다른 생각을 떠올린 것 같았다.
턱을 괸 채 한동안 말이 없더니, 갑자기 몸을 기울이고 물었다.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진규일의 눈동자에, 사업가스러운 빛이 스쳤다.
“너무 큰 파이라면, 입을 늘리면 되죠.”
*
<고드: 분노의 파수꾼>이 천만을 넘었다.
개봉 6주, 다른 천만 영화들과 비교해 봐도 심상치 않은 페이스다.
본 사람들의 입소문, 영화평론가들의 극찬, 전미 박스오피스 1위라는 자랑거리에 더해, 주연 배우가 앓아누웠다는 뉴스는 사람들을 너나 할 것 없이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덕분에 서울은 물론, 지방의 크고 작은 상영관들이 모처럼 활발하게 불을 밝혔다.
[국내 영화관··· 모처럼의 활성화, 전미 박스오피스 1위의 지원사격] [“오, 고드!” 액션의 거장, 샘 하우어는 어째서 탄식하였나] [전미 박스오피스 3주 1위··· 주연배우 박건에게 돌아가는 개런티는?]관계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저쪽 제작진이 얼마를 쓸어 담았을지 예상하곤 했다.
정확한 계약 조건을 알 수는 없지만, 러닝 개런티라 가정할 때 배우가 가져갈 금액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이리라.
거기에 고드 카드, 고드 장난감 총, 고드 의류 등 굿즈도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상태.
최근 로만 엔터테인먼트가 팝 스토어까지 성수에 오픈한 것으로 볼 때, ‘걸어다니는 1인 기업’이라는 명성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일요일 낮.
“안녕하세요, 라쿤건님!”
“오랜만에 뵈어요. 열혈민주님, 총매니저님은··· 아, 저기 오시네요.”
원년멤버 한지영을 포함해, 박건의 팬카페 ‘열혈건이’의 스탭들이 모였다.
오늘 모인 이들은 네 명. 본래는 다섯이지만, 부산에 있는 한 명은 노트북 속 화상캠을 이용해 스탭 회의에 참석했다.
“요즘 카페 몸집이 많이 커졌어요.”
“지역별로 오프도 활발하고요. 이럴 때일수록 분위기를 잘 잡아야 돼요, 타팬덤이랑 다르다는 걸 보여 줘야죠.”
“아, 소속사 배우들 연합 밥차. 이것도 총대랑 규모 정해서 깔끔하게 처리합시다. 너무 과하지만 않게요.”
십여 분쯤 카페 현안에 대해 벌어지던 토론은 곧 끝났다.
왜냐하면, 얘기할 게 없었으니까.
“······.”
정기 모임이니 모였는데 딱히 안건이랄 게 없다. 배우가 작품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 여론전이 필요하지도 않다.
안티?
거대해진 열혈건이의 팬덤만으로도 웬만한 싸움은 끝장낸다.
악플?
전세계의 팬들이 몰려드는 통에 박건의 기사엔 한국어를 찾기가 힘들 정도다.
그래서 스탭들은 요 몇 주간 단톡으로 하던 일, 즉 사담을 시작했다.
“유튜브 보셨어요? 어젯밤에 올라온 거.”
“에이, 언니. 당연히 봤죠. 저 폰까지 바꿨잖아요. 로만 연예인들 유튜브 전부 구독하는데, 혹시나 알람 안 뜰까 봐서.”
왕언니로 통하는, 가장 나이 많은 스탭이 흐뭇하게 휴대폰을 꺼냈다.
“전생체험이라니, 조금 뜬금없긴 해도 좋더라고요. 지난번 팬미팅 이후에 처음 올린 오피셜 활동이라 그런가.”
“아, 최필립 배우랑 케미 장난 아니었죠. 다른 동료들하고도 많이 찍어줬으면 좋겠는데······.”
한지영도 아쉬운 목소리를 흘린다. 병문안 기사가 한창 화제가 된 뒤, 두문불출하던 박건이 모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등장한 곳은 최필립 유튜브.
박건과 최필립, 매니저들까지 최면술사에게 전생체험을 하는 콘텐츠였다.
-뭐야, 이 사람 왜 이렇게 멀쩡해?
-전문가님, 뭐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저희 형 전생이 얼마나 스펙타클했는데!
-모, 모르겠습니다. 정신력이 강해서 그런가, 이런 분들이 간혹 있긴 하지만······.
놀라는 주변 사람들과 평온한 얼굴의 박건, 땀을 뻘뻘 흘리는 최면술사까지, 실로 난장판이었지만 팬들은 환호했다.
“아무튼,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다행이에요. 몸도 많이 좋아진 모양이고.”
“그러니까요. 몇 년이고 푹 쉬어도 되니까, 작품보다 몸이랑 멘탈 먼저 회복했으면 좋겠어요.”
“말이 나와서 말이지, 데뷔 때부터 거의 혹사였잖아요. 작품 사이에 텀도 없었고, 분량도 제일 많으니 지치고도 남죠.”
스탭들도 결국 팬이다. 올해 말까지는 쉬어야 한다느니, 그냥 CF만 찍으면서 몸값을 올려도 황송하다느니··· 팬심 그득한 담화가 오가는 도중, 누군가가 불현듯 찬물을 끼얹었다.
“근데··· 안 쉴 거 같지 않아요?”
이내 울적한 끄덕거림이 퍼져나갔다.
“···그렇겠죠. 건이 오빠 성격이면.”
“쉬는 동안에도 뭔가 하는 사람이잖아요. 아마 지금쯤 다음 작품 물색 중일걸요, 전작보다 스케일 더 큰 것들로 골라다가.”
“무리는 안 돼, 제발······!”
*
초인종이 울렸다.
먹다 남은 배달음식들을 정리하던 건은 현관으로 나갔다.
바로 몇 분 전, 구신승이 놀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한 참이다. 물건을 놓고 갔나? 싶었지만 인터폰에 뜬 얼굴은 구신승이 아니었다.
-뭐 해요, 안 열고?
“······.”
건은 한숨을 좀 쉬고 대문을 열어주었다. 아파트 현관에 이어, 집 문까지 열자 선글라스를 쓴 백하니가 자기 집처럼 걸어들어왔다.
“들어가도 되죠? 다들 한번씩 들렀다면서요.”
“···이미 들어와 있는데요.”
“아, 기다리다가 지쳐서.”
최근, 그는 노중만 대표가 구해 줬던 오피스텔에서 조금 더 큰 아파트로 이사했다.
집들이다 뭐다 해서 친한 사람들이 다녀가는 동안 백하니만 소식이 없더니, 뒤늦게 주소를 받아 찾아온 모양이었다.
건은 물을 한 잔 따라 건넸다.
“무슨 일입니까? 새 작품 찾는 중이라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백하니는 선글라스를 벗어 블라우스 옷깃에 걸었다.
“잘 사나 놀러와 봤죠. 요즘 그쪽 집들이가 우리 회사에서 유행이라면서요? 공 팀장님도 지난주에 다녀갔다던데.”
“구신승 씨도 방금까지 있었는데, 혹시 오면서 못 봤습니까?”
“봤어요. 귀찮아서 아는 척은 안 했고.”
당당하게 선언한 백하니는 그제야 거실을 둘러보더니 질겁했다.
“···잠깐, 근데 이게 다 뭐예요?”
34평형 아파트의 거실을 포함, 문 열린 방 세 개에는 시나리오 뭉치들로 새하얀 산이 만들어져 있었다.
검고 긴 소파, 이 본부장이 선물한 이태리제 러그, 방금까지 구신승과 점심을 먹은 식탁에도 종이 무더기가 흩어진 채였다.
건은 사실 그대로 대꾸했다.
“요즘 보는 대본입니다.”
“인쇄공장도 아니고, 어떤 미친 작자가 대본을 이만큼 쌓아 놓고 봐요!”
“그래서 이사한 건데요.”
백하니는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뭐라고요?”
“예전 오피스텔은 놓을 곳이 부족해서요. 최대한 많이 들여 놓으려고, 선이한테 얘기해서 주변 아파트 중 한 군데를 골랐습니다.”
“진짜, 제정신 아닌 건 알았지만······.”
건은 어깨를 으쓱했다.
“오래 쉬었잖습니까, 그만큼 빨리 봐야죠.”
<고드: 분노의 파수꾼>이 개봉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어갔다.
여전히 세간의 관심은 들끓었지만, 시사회의 충격은 상당 부분 사라진 뒤였다.
가장 가까운 동생에게 옛 이야기를 털어놓아서일까. 끝이··· 또는 진실이 눈앞에 있음을 느끼면서도 마음은 평온했다.
전직 용사이자 천만 배우로서, 마지막 장을 넘겨야 할 차례가 아닌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십시오. 오늘 중으로 이쪽 구획 절반은 읽어야 해서요.”
다시 시나리오 속에 파묻히려는 그를, 백하니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솔직히 말해 봐요. 아픈 거 아니었죠?”
“아팠습니다.”
“어디가?”
“마음이.”
백하니의 눈동자에 의문이 떠올랐다.
“말도 안 돼. 누구한테 사기라도 당했어요? 건물 사려다가 한 뭐, 10억쯤 날렸으면 내가 해결해 줄······.”
“가까웠던 동료가 있었습니다.”
길게 설명할 것은 없으나, 이제 와서 숨길 이유도 없다. 건은 짧게 덧붙였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날 배신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거든요. 그래서 혼란스러웠습니다.”
“······.”
백하니는 드물게 당황한 것 같았다. 한동안 애꿎은 선글라스 다리만 만지작거리더니, 갑자기 그가 쥔 대본을 확 빼앗았다.
“나가죠. 술이나 마시게.”
“그럽시다. 밥도 상관은 없는데요.”
술을 마시자는 사람이나, 그러자는 사람이나 서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 소리를 낸 백하니가 먼저 시선을 돌리며 작게 투덜댔다.
“···이젠 스캔들은 신경도 안 쓰네.”
“뭐라고 했습니까?”
“들은 거 알아요. 그놈의 시나리오는 놓고 와요, 소개해 줄 데가 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