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63)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63화(163/199)
미완의 원고 (1)
* * *
연예인들이 가는 술집의 조건은 단순하다.
첫째도 보안, 둘째도 보안.
반드시 으슥할 필요는 없지만, 사람의 눈에 띄는 곳이라면 인파가 몰려들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회식자리든 미팅이든, 특히나 사적인 용무가 있을 때는 예약제로 운영되는 프라이빗 바(Bar)나 라운지를 선호한다.
단, 이번에는 좀 달랐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가 보면 알아요.”
“선이한테는 이야기해 둬야······.”
“오늘은 바쁘다고 해요. 매니저가 필요한 자리도 아닌데.”
대꾸한 백하니는 핸들을 휙 꺾었다. 건은 막 온 동생의 문자에 답장을 보냈다.
-납치됨. 목적지는 아직 불명.
한옥들이 밀집한 오르막길을 지나, 백하니의 초록색 머스탱이 멈춘 곳은 은희욱 작가의 거처와 닮은 기와집이었다.
대신 그보다 두 배는 족히 크고, 널찍하고, 으리으리하다는 점이 달랐다.
“내려요, 다 왔으니까.”
먼저 내린 백하니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면서 말했다. 여기가 술집이냐고 묻자 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
“술이 있긴 할걸요. 웬만한 술집보다 많이.”
“······?”
술집이 아니라 지인의 집이었나? 회식 때 두어 번 갔던 다이닝 바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자리의 목적이 다른 모양이었다.
이내 거대한 문이 열리더니 고용인으로 보이는 한복 차림 남자가 그들을 맞았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백하니가 당연하다는 듯 걸어들어가고, 건은 주위를 둘러보며 뒤를 따랐다.
마당에 평상, 잘 정리된 조경까지··· 드라마 속 재벌집 앞마당처럼 꾸며진 뜰을 가로지르자 호젓한 안채가 나왔다.
“올라가시면 됩니다.”
고개를 숙인 고용인이 물러간 뒤, 건은 백하니를 돌아보았다.
“몰라서 묻는 건데, 오늘 일정이 은희욱 작가님 집들이였습니까?”
“은희욱? 그게 누군데요?”
“······.”
그것으로 둘 사이에 별 친분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건이 뭔가 말하려 했을 때, 대청마루 위의 미닫이문이 열렸다.
“은 작가는 나도 잘 알지요. 몇 번 식사도 같이 했고, 좋은 글을 쓰는 후배입니다.”
두 배우의 시선이 위쪽으로 쏠렸다.
개량한복이 은희욱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면, 이쪽은 소품까지 완벽하다.
흰머리가 검은머리보다 많아지기 시작한, 문사 풍의 중년 남성이 쥘부채를 쥐고 웃고 있었다.
“귀한 손님들이 오셨군요.”
*
용류백, 본명은 용준.
직업은 소설가.
판타지소설 ‘냇가를 물들인 피’로 화려하게 데뷔한 뒤, 1세대 환상소설가로서 오랫동안 명성을 떨쳐 왔다.
동시대의 걸출한 작가들이 한둘씩 은퇴하는 와중에도 무협이면 무협, 사극이면 사극, 온갖 장르에서 좋은 작품을 꾸준히 내놓았다.
특히 영화 및 드라마, 게임 시나리오까지 발을 넓히면서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고도 했다.
“···이거 참, 내가 내 소개를 하려니 머쓱합니다. 세계적인 배우 앞에서.”
정작 본인은 그 타이틀들에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지만.
술상을 놓고 앉은 널찍한 안채에서, 정작 술엔 입도 안 대고 있던 백하니가 끼어들었다.
“삼촌 하던 대로 하세요. 원래 그렇게 겸손한 사람 아니잖아요.”
“어허, 무슨 소리냐? 그러다 오해하실라.”
건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실례지만, 두 분은 어떤 사이입니까?”
“예?”
“들은 이야기가 없어서요. 그냥 술자리인 줄 알고 나왔는데 선생님 댁이라 놀랐습니다.”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용류백의 하얗게 센 머리가 아래위로 오르내렸다.
“대충 알겠군. 누굴 닮아서 저러는지, 하니가 원래 말을 좀 빼먹는 경향이 있어요. 나한테도 데려올 사람이 있으니 시간을 내라고만 했거든요.”
“와서 얘기하면 되지, 미팅도 아닌데 미주알고주알 보고해야 하나.”
백하니가 투덜거렸지만,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해야죠.”
“보통은 그렇지. 삼촌이 매번 말하잖냐, 하니 너는 중요한 내용을 너무 자주 생략해.”
“···아주 죽들이 잘 맞네.”
작은 웃음이 지나가고, 술도 한 순배 돌았다. 자신의 잔을 비운 용류백이 말했다.
“정말로 피가 섞인 삼촌은 아니고,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입니다. 인연이 좀 있어서··· 갓난아기 때부터 돌봐 줬었죠.”
“그 얘긴 굳이 왜······.”
끼어드는 백하니를 한 손으로 막아내는 것이, 과연 제법 가까운 사이 같았다.
“궁금하다고 하시잖냐. 초면인데 소개는 해야 손님이 당황하지 않으시지.”
비공식 백부··· 혹은 대부라는 소리군.
납득한 건은 황금빛 물결이 찰랑대는 도자기 잔을 내려다보았다. 직접 담근 전통주라는데, 끝맛이 깔끔하고 향이 독특했다.
두 배우를 차례로 본 용류백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이제 그 이유라는 걸 들어나 보자꾸나. 바쁘신 분을 왜 여기까지 모셔 온 거냐?”
백하니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시나리오 좀 골라 주세요.”
“······?”
산전수전 다 겪었을, 중견 작가가 듣기에도 뜬금없는 소리였다. 용류백이 되묻기도 전에 다음 요구사항이 흘러나왔다.
“용사, 악마, 그 두 개가 같이 들어가면 더 좋아요. 퓨전 사극 느낌이나 판타지도 상관은 없고, 대신 당장 들어갈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로. 꼭 한국에서 안 만들어도 되지만, 판권 가지고 장난 안 칠 사람이어야 돼요.”
동료는 자신의 작품 취향을 다 꿰고 있었다. 건이 빤히 쳐다보자 백하니는 시선을 피했다.
“왜요, 작품 때문에 골병까지 들었다는 소리 듣고 나도 좀 찾아봤어요. 대체 뭘 찍고 싶어서 저러나 하고.”
“골병은 안 들었습니다.”
“아프다면서요? 까짓 거 뭐, 찍는 작품으로 자아실현을 한다는데 도와 줄 수도 있지.”
“저는 자아를 실현하려고 연기하는 게······.”
길어지는 입씨름을 용류백이 잘랐다.
“잠깐만. 그러니까 작품이 필요하다는 얘기냐? 아직 영상화되지 않은?”
“네. 웬만한 시나리오는 다 아시잖아요. 요 몇 년 사이에 나온 것들이면 전부.”
눈을 깜빡이는 건에게, 백하니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삼촌이 워낙 활자를 좋아하시거든요. 그쪽만큼은 아니어도, 나오는 시나리오들은 전부 다 받아서 읽고 수집하곤 하세요. 한 번 읽은 이야기는 다 기억하시기도 하고.”
“그래, 다 늙어서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다고 매번 구박했었지.”
“그건 자꾸 옛날 일로 놀리니까··· 아니, 다섯 살 때 일을 왜 아직까지 말하는 건데요?”
이야기를 듣자하니, 용류백은 알아주는 ‘서사 덕후’인 모양이었다.
본인이 쓰는 소설뿐 아닌, 다른 작가들이 쓴 소설부터 시나리오까지 전부 모으는 수집광 겸 이야기광이라고도 했다.
어느 새 진중해진 얼굴로, 용류백은 들고 있던 쥘부채를 내려놓았다.
“이제 알겠습니다. 다음 시나리오를 고르고 계셨다고요?”
“예. 급하게 들어갈 생각은 아니었지만요.”
“그랬다면 하니가 이렇게 끌고 오지도 않았을 테지만··· 어쨌든, 박 배우님과 딱 맞는 작품을 찾아야 한다는 건 알겠습니다.”
다 이해한다는 듯, 희미하게 웃은 소설가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말하는 게 조금 늦었지만, 연기하신 작품은 전부 보았습니다. 각본가의 시점에서 가장 충격을 받았던 건 흑의사제였지요. 잠시나마 영화라는 것을 잊었을 정도니까요.”
“과찬이십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다른 작품들을 모두 보았을 때, 박 배우님의 가장 무서운 점은 서사를 자기 것으로 집어삼키는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본능적으로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이야기만을 골랐는지도 모르고.”
지금껏 무수한 PD며 작가, 배우들과 이야기하며 언뜻언뜻 들었던 말들이 중년 소설가의 입에서 형태를 갖추고 유형화되었다.
백하니도 말없이 피 안 섞인 삼촌의 말을 듣고 있었다.
“고독한 인간 백정, 신을 믿지 않는 사제, 추방당한 민족의 투사, 모든 것을 부숨으로써 자신의 세상을 지키려던 파수꾼··· 전부 제 옷처럼 잘 맞는 배역들이라, 지금껏 쌓은 탑을 넘으려면 어지간한 작품으로는 안 될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 잘 맞는 작품을 골랐었죠.”
용류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배우의 역량입니다. 아무튼, 구미가 당길 만한 녀석들을 추려 볼까요?”
*
“우와, 용류백이랑 만났다고요? 그것도 바로 어제?”
다음날, 시나리오가 쌓인 박건 하우스에 새로운 손님이 방문했다.
양손에 값비싼 샴페인을 한 병씩 들고 온 윤발25는 용류백 이야기를 듣자 곧장 눈이 뒤집혔다.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대박, 진짜 용류백이라니! 나 어렸을 때 용 옹(翁) 소설을 진짜 달달 외우면서 컸거든요, 글을 처음 쓴 계기도 그 양반 때문이었는데··· 선이 형도 같이 있었어요?”
목적지도 안 가르쳐 준 백하니의 폭주로, 낙동강 오리알이 됐던 박선이 우울하게 대답했다.
“저는 못 갔어요. 어딘지 몰라서.”
“뭐 어때요, 또 만나자고 하면 되지! 건이 형 불렀을 정도면 팬이라는 소린데. 원래 잘 나가는 배우 옆엔 좋은 작가들이 붙는 거라고요.”
“절 부른 게 아니라, 백하니 씨가 술집이라고 하고 데려간······.”
“우와, 냇물피 양장본! 이거 절판돼서 중고로도 못 구하는 건데!”
그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윤발25가 외쳤다. 소파 뒤쪽에 진열해 놓은 12권짜리 시리즈를 그새 발견한 기색이었다.
‘드릴 게 몇 개 없군요. 심심할 때 읽으면 지루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가 백하니와 떠나기 전, 용류백은 몇 가지 선물을 건넸다.
그날 자리에서 마신 담금주, 자신의 인기작 중 절판된 양장본 시리즈, 거기에 관심을 가질 만한 작가며 감독들의 명단까지.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고심하는 얼굴로 건넨 마지막 종이 뭉치였다.
“근데, 진짜 왜 만난 거예요? 용 옹 소설이 거의 판타지라, 적광의 서나 바오르트의 협곡은 시나리오화가 어려울 텐데··· 냇물피는 한번 게임으로 나왔다가 쫄딱 망했고요.”
“예, 원래는 백하니 씨가 다른 작품들을 추천해 달라고 불렀다는 것 같았습니다.”
윤발25는 심각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하긴, 이제 슬슬 차기작 준비할 때가 됐죠. 쉬는 기간이 길면 하나 떴다고 일 안 하냐면서 오만 인간들이 다 시비를 털어요.”
“그건 상관없지만요. 이야기를 듣다가 관심이 가는 시나리오가 있었습니다.”
“어? 영화요, 아니면 드라마?”
윤발25가 관심을 표하자 옆에 앉아 있던 박선도 궁금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대강의 이야기는 들었지만, 자세한 후일담은 모르는 탓이다.
‘시나리오 몇 개만 받을 줄 알았는데······.’
건은 어젯밤을 회상했다. 과연 용류백의 작품을 보는 안목은 출중했다.
척 봐도 괜찮은 시나리오 몇 개를 건네받고, 특별 양장본도 얼떨결에 챙기고, 술까지 챙겨 일어나려는데 용류백이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군요. 아직 미완성에 스케일도 황당하리만치 크긴 하지만, 박 배우님이라면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하고 자리를 떴던 용류백이 누렇게 빛바랜 종이뭉치를 가져온 순간, 불현듯 등줄기에 소름이 내달렸다.
마치 첫 오디션 때,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서 합기가 돌아왔을 때처럼.
“둘 다 아니었습니다.”
“어, 영화도 드라마도 아니면 원작 소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고요.”
윤발25와 박선의 눈이 둥그레졌다.
어젯밤 본 미완(未完)의 제목을,
그는 짧게 발음했다.
―주신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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