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69)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69화(169/199)
가자, 뉴질랜드로 (2)
* * *
제국에는 전설이 있다.
아이라스 가(家)가 세운 카타무트라가 번영할 시절··· 아직 전란의 불길이 드리우지 않았을 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그는 먼 곳에서 올 것이다.
미친 폭군이 날뛰고 외세의 적들이 침략했을 때, 다른 세계의 전사가 홀연히 나타나 이 땅을 구해낼 것이라는.
타락한 빛과 날뛰는 어둠 속에서,
한 자루 흑색 검을 들고.
그 이야기는, 적어도 지금 제국의 변방에서 벌어지는 일과는 관계없었다.
“비켜, 버러지 같은 것아!”
경장갑을 입은 병사가 거칠게 창대를 휘둘러 노인을 후려쳤다.
맞은 노인은 잠깐 나가떨어졌다가, 이마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병사의 발에 매달렸다.
“아이고, 나으리! 제 딸년은 안 됩니다! 작년에도 공물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저리 꺼져, 황제께서 민간의 경계를 강화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네 딸도 전진기지 막사에서 보초를 담당하게 될 거야.”
“저 애가 무슨 보초를 선다는 말입니까요!”
휙, 이번에는 창대가 아닌 창날이 노인의 목을 겨눈다. 병사는 살기등등한 어조로 뇌까렸다.
“이봐, 감히 칙령을 거부하는 거냐?”
대륙의 태양은 뜨겁다. 이글거리는 폭염 속에서, 주변에 둘러선 주민들이 서로의 눈치를 본다.
눈앞의 놈은 일개 병사일 뿐. 제국의 검인 혈기사들이 올 리 없는 변두리지만, 붉은 사자가 그려진 저 깃발은 절대적이다.
적어도 대륙에 사는 사람이라면, 황제―아이라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
“제인, 안 돼!”
결국 지켜보던 병사들이 개입하고, 처녀를 우악스러운 손들이 들쳐 메었다.
쫓아가려던 노인이 다른 병사들에게 걷어차여 나뒹굴 때였다.
별안간, 허공에 실선이 그어졌다.
“······.”
정적은 짧았다.
다음 순간 투구 쓴 머리통이 떨어져 굴렀다. 처음 노인을 창대로 위협하던 자였다.
“제기랄, 퍼즌!”
“적이다! 방어 대형으로!”
변두리에서 촌로들이나 괴롭힌다고 하지만, 그래도 철저한 훈련을 받은 제국의 병사들이다.
당장 대형을 갖추며 물러서는 네 명의 앞으로, 새카만 망토가 모습을 드러냈다.
“웬 놈이냐, 정체를 밝혀라!”
무슨 수를 썼는지, 검도 안 뽑고 동료의 목을 날려 버린 적이다.
함부로 달려들지 않고 소리부터 치던 병사들은 눈을 깜빡거렸다. 망토에 달린 후드를 벗은 상대의 머리색은 칠흑처럼 검었다.
“흑발······?”
제국민들의 머리색은 대부분 갈색이나 어두컴컴한 금발이다.
빛을 뿌릴 듯 선명한 백금발은 황제, 아이라스 가문의 증표. 헌데 눈앞의 사내는 그들이 생전 본 적도 없는 흑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내 이름은 이도다.”
무심히 대꾸하는 사내의 뺨에서, 오래된 검상이 꿈틀거린다.
그제야 몇몇 사람들은 검은 망토에 모래가 묻어 있음을 깨닫는다. 마치 바다 저편··· 먼 대륙에서 건너온 것처럼 말이다.
사내는 악취를 맡은 양, 콧등을 한 차례 찡그리고 이어 말했다.
“준비해라. 초소의 병력을 몰살시킨 마수들이 곧 들이닥칠 거다. 추악한 썩은 내가 여기까지 풍겨.”
“초소······.”
병사들은 서로를 마주 봤다. 방금 눈앞에서 황제의 병사를 죽여 놓고, 뻔뻔하게도 마수를 운운하고 있지 않은가.
“거짓말,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수작이다!”
“믿지 않는다면야··· 내가 틀렸을 수도 있겠지. 네놈들 꼴을 보니, 황제의 폭정이나 사람을 먹는 괴물들이나 똑같아 보이니까.”
“이놈, 황제 폐하를 모욕하는 것이냐!”
선두의 병사가 분개해 외친 순간, 사내가 한 발을 내디뎠다.
―푸확!
아무도 반응하지 못한다.
아니, 반응할 수조차 없다. 등에 가로로 멘 칼집에서 거대한 대검을 꺼내, 비스듬히 내리긋는 절단의 궤적에.
근처를 둘러싼 카메라들, 모자 쓴 촬영감독이 쥔 최신식 렌즈에는 배우가 휘두른 참격이 고스란히 잡혔을 것이다.
“커, 허어······.”
깔끔하게 잘려나간 가슴팍에서, 피 분수가 솟구치며 주변으로 튀었다.
대륙 공용 제국검술과 다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쾌검··· 베인 자조차 죽는 순간까지 알아차리지 못할 속도다.
이어 학살이 벌어졌다. 빛살 세 번이 더 그어지고, 섬광이 일 때마다 피보라 속에서 병사들이 쓰러졌다.
사내의 대검이 다시 검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거무튀튀한 형체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노인이 무릎을 꿇자, 끌려가던 딸과 마을 사람들도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어디의 뉘신지 모르겠지만 정말 고맙습니다. 이놈들은 근처의 전진 초소에 있는 제국군인데, 몇 년간 우리를 수탈해 왔습니다.”
“태양신께서 도와주신 게지! 주신이여, 당신의 은총에 영광을······.”
“신을 찾지 마시오.”
냉정한 음성이 말을 잘랐다. 저마다 법석을 떨던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이 됐지만,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신성모독을 이어갔다.
“부르지도 말고, 우러르지도 마시오. 지옥을 묵인하는 절대자는 악마와 다름없으니. 이 땅에 신이 있다면 악신일 테지.”
제국의 황제가 실질적인 공포라면, 대륙 유일신인 주신··· 태양신 카루소를 모독하는 것은 그야말로 미친 행위다.
방랑자 사내는 발치에 죽어 넘어진 병사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니 어리숙한 찬양은 그만두고, 살 방도를 찾으시오. 관병이 없으니 곧 마수들이 이곳까지 들이닥칠 거요.”
“어, 어떻게 말입니까! 저희는 마수들과 싸울 힘이 없습니다!”
“도망치시오.”
간단하게 말한 사내는 황금빛 풀들이 넘실대는 평원 저편을 가리켰다.
“남쪽은 자살행위요. 느린바람 평원을 건너기 전에 추격자들이나 마수들에게 따라잡힐 테니. 차라리 제국령 깊숙이 들어가는 편이 낫소.”
“그럼 당신은요?”
“······?”
“어디로 갈 거냐고요. 우리는 제국 안쪽으로 보내 놓고선, 계속 이 변두리만 돌면서 마물 사냥이나 할 거예요?”
방금 전, 끌려갈 뻔한 처녀가 당돌한 질문을 내놓는다. 이 배역을 맡은 이도 최근 주가가 높아진 세르비아의 미녀 스타다.
다른 세계의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방랑자―이도는 선언했다.
“수도, 순백의 성으로 갈 거요.”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쓰러진 시체의 팔이 움찔 경련한다. 피에 젖은 목초가 불어온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황제를 만나러.”
*
문화와 인종, 심지어 사는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맛있는 음식과 위대한 발명품, 처음 접하는 경이로움 앞의 반응이 그렇다.
“와, 뭘 어떻게 한 거예요?”
“나도 못 봤죠. 사람이 무슨 수로 그만큼 빨리 움직이지? 아무리 가볍게 만든 소품이라도······.”
“소품이라니! 감독님이 캘리포니아의 장인한테까지 가서 만들어 온 놈인데, 날만 안 서 있지 묵직하다고!”
방금 전의 전투 씬이 끝나고, 박건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칼을 한 번만 보자는 사람, 이거 리얼리티 마술 쇼가 아니냐는 사람, 휴대폰을 꺼내 인증샷을 찍는 사람까지 있다.
카메라를 쥔 메인 촬영감독, 프랑스인 안드레가 자기 일처럼 으스댄다.
“이봐, 친구들. 우리 영화에 출연하면서 저 양반 전작도 안 봤어? 프로의식이 부족하구만.”
“봤죠. 그래서 걱정 하나 안 했잖아요.”
“햐, 어떻게 피주머니만 싹 벨 수 있지? 검술 훈련이 아니라 어디 사무라이를 데려온 거 아냐?”
납치당하는 처녀 역할을 맡은 여배우는 물론, 무술감독과 스턴트맨들까지 눈을 빛내며 방금 전 마술쇼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는다.
“···이건 뭐, 동서고금 막론하고 똑같네. 우리 오디션 때도 저랬다면서?”
“그치. 나종모 PD님이 거의 기절할 뻔하셨다잖아, 그 전설의 욕탕 씬을 연기해서.”
박건의 차력을 상대적으로 많이 본, 서희도와 매니저가 흐뭇하게 쑥덕거린다.
나만 알던 보물을 모두가 보고 감탄하면 이런 기분일까. 이젠 촬영할 때마다 저런 반응이 안 나오면 아쉬울 정도다.
“오후 씬은 끝났습니다. 나머지는 해가 지고 찍는다는군요.”
한참 뒤, 그제야 사람들에게서 풀려난 박건이 한국인 배우들 쪽으로 다가왔다.
서희도는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생수 한 병을 건넸다.
“고생 많았어요, 형. 홍 선배님이랑 나머지 주연들은 내일 도착한다던데, 본격적인 촬영도 그때부터일 거예요.”
워낙 대인원이라, 선발대만 먼저 와서 촬영을 시작하고 다음 주자들은 차례차례 도착한다. 생수를 받아 마신 박건이 물었다.
“고맙습니다. 선이랑 지유 씨는요?”
“어, 아까까지 저기 있었는데··· 더워서 들어갔나?”
서희도가 두리번거리는데, 저만치서 스탭 한 명이 달려왔다.
“박! 잠깐 시간 괜찮아요?”
한국에서 날아온 주연 배우를, 스탭들은 ‘박’과 ‘건’, ‘고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박건이 망토 어깨어림의 걸쇠를 풀며 말했다.
“예. 무슨 일입니까?”
“감독님이 찾아요. 잠깐 천막으로 와 달라는데요?”
*
피터 숀은 ‘영화감독’이라는 단어에 딱 알맞는 분위기의 사내였다.
우람한 풍채에 턱수염을 기른 그는, 산적 같은 인상으로 메가폰을 들고 다니며 현장의 모든 상황을 진두지휘했다.
“잭, 루를 불러서 원탁에 돌아가는 장치를 추가하라고 해! 위쪽에서 내려다봤을 때 엄숙한 느낌이 아예 안 들잖아. 카메라 앵글만 돌릴 거면 소품 팀을 왜 데려왔겠어?”
“감독님, 왕성 세트 귀퉁이가 못 올라가고 있다는데요? 앞쪽 디테일이 많아져서 자재가 부족하답니다.”
“상관없으니까 진행시켜! 최후의 전투 때까지만 조달되면 충분해. 그전까지 부감은 모형 세트에서 따면 그만이라고!”
과연 판타지의 거장은 다르다.
국내 PD 및 감독들, 최근에는 그윈 레이먼과도 함께 작업했지만, 머릿속의 장면을 즉각적으로 펼쳐내는 솜씨는 단연코 제일이었다.
지휘본부로 사용되는 큰 천막에 들어갔을 때, 피터 숀은 책상 위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 소드마스터가 오셨군.”
“그 정도는 아닙니다.”
“내가 오케이를 줬는데 그 정도도 못 알아볼까 봐? 독일 검술의 후예니, 소드마스터의 아들이니 하는 인간들보다 당신이 훨씬 강해. 이래봬도 검객들에게 사사받은 몸이라고.”
딱 자른 피터 숀은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앞의 의자에 앉은 건은 실제 작전판처럼 만들어진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원정대의 루트입니까?”
“맞소. 하긴, 그 책의 팬이라면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앞에 있는 지도는, 무려 실제 양피지로 제작된 ‘주신의 서’ 대륙 지도였다.
자타공인 판타지 애호가답게, 피터 숀은 한국으로 날아왔을 때 원작자 강영일과도 마라톤 미팅을 가진 바 있었다.
그리고 ‘빅 팬’을 자처하는 이 덩치 큰 감독에게 강영일은 홀랑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미스터 강은? 한국이 아마··· 지금쯤 한겨울일 텐데.”
“여기 오자마자 동생 편으로 연락이 됐습니다. 잘 지내고 있다고, 기대하고 있겠다더군요.”
이 괴짜 감독은 책 속 지도를 실제로 옮기는 걸로 모자라, 주인공의 경로를 따라 깃펜으로 표시까지 해 두었다.
피터 숀은 옆에 놓인 뉴질랜드 남섬과 북섬의 세부 지도를 쓱 문질렀다.
“빌어먹을, 기대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군. 그 꼬장꼬장한 이탈리아인··· 당신 전작의 감독 이름이 뭐였지?”
“그윈 레이먼 감독입니다.”
“그래요. 비행기를 타기 전엔 그 양반한테까지 연락이 오는 거야,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는지 국제전화로.”
‘고드’를 함께 찍었던 감독은 역시 행동력이 투철했다. 헛웃음을 짓던 피터 숀이 말을 이었다.
“응원이고 뭐고, 난 무조건 해내야 돼. 여기서 그 고드까지 데리고 쪽박을 차면? 보나마나 월트빌 스튜디오, 난쟁이 4부를 찍게 하려던 돈귀신들이 난리를 칠 거거든. 극성맞은 원작 팬들은 또 어떻고··· 젠장!”
‘난쟁이’ 3부작과 얽힌 뒷이야긴 자세히 몰랐기에 건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다행히 피터 숀은 금방 흥분을 가라앉힌 것 같았다.
“남섬의 세트들은 거의 마무리됐어요. 내일이면 2팀도 도착할 거고. 릭과 제임슨, 둘 다 만나 본 적이 있소?”
황제의 군단사령관 역인 릭 미하엘, 반군 수장 역인 제임슨 오버베 모두 헐리우드의 탑스타지만 실제로 마주친 적은 없다.
국내 드라마의 대본 리딩처럼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국적 다른 배우들은 촬영장에서 첫 만남을 갖기가 일쑤인 탓이다.
건은 고개를 저었다.
“보지 못했습니다. 따로 친분도 없고요.”
“뭐··· 나쁘지 않을 거요. 두 사람 다 개인적으로 조금씩 아는데, 스타치곤 덜 쥐어박고 싶은 친구들이거든.”
“그렇습니까.”
동료를 쥐어박을 생각은 본래부터 없었지만, 피터 숀은 희한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더 독특한 건 이쪽이라서. 대체 이렇게 딱 맞는 주인공을 어디서 구한 거지?”
“그런 말을 종종 듣긴 합니다. 제 취향인 작품만 골라서인지도 모르죠.”
“아무래도 좋으니, 앞으로 잘 부탁하겠소. 뉴질랜드의 여름은 길면서도 짧으니까.”
지금은 찬란한 해가 이글거리지만, ‘주신의 서’는 OTT 플랫폼으로도 무려 10부작인 드라마다.
시즌 1과 시즌 2가 따로 없이, 한 번에 풀리기로 계약한 이상 이 계절에 가능한 씬들을 모조리 찍어 둬야 한다.
처음 평원을 밟았을 때의 기분을 떠올리면서, 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늦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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