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71)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71화(171/199)
가자, 뉴질랜드로 (4)
* * *
“무슨 비가 이렇게 와?”
“그러니까, 겨울부터 장마라더니··· 종잡을 수가 없구만.”
임시로 친 텐트에서, 스탭 두 명이 툴툴거리면서 뜨거운 차를 홀짝댄다.
벌써 열흘.
이글거리던 늦여름의 햇살이 잠잠해지자마자, 먹구름이 몰려 들어와 비를 쏟아부은 기간이다.
뉴질랜드의 자연은 신이 장난이라도 치듯 변화무쌍하게 볕과 비를 뿌렸다.
잠깐 해가 들더니 또다시 비바람이 몰아치고, 빗줄기가 잦아드나 싶으면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물폭탄이 떨어져내린다.
그 결과, 스탭들을 포함한 ‘주신의 서’ 팀원들은 다음날 예상을 아예 포기하게 되었다.
매트리스에 드러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다른 스탭이 물었다.
“언제 이동이랬지? 뭐 들은 거 없어?”
“몰라. 아직 남섬에서 찍을 게 남았다나 봐.”
더 성질이 뻗치는 건, 이 천둥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이 남섬 위에만 떠 있다는 점이다. 텐트 바깥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스탭이 휴대폰을 던져 버리고 돌아누웠다.
“빌어먹을, 이놈의 드라마는 비 오는 씬이 뭐 이리 많은 거야? 이만하면 다른 데로 이동할 만도 한데.”
다른 스탭들도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촬영 중에 비가 오면 현장의 대응은 둘로 나뉜다.
일단 실내에서 찍는 씬부터 창문을 배제하고 온갖 조명을 이용해 촬영하거나, 비가 온 김에 야외촬영을 끝내거나.
그리고 피터 숀은 그 두 개 모두를 택했다.
‘자, 우리한텐 시간이 없어. 언제 비가 올지 몰라서 걱정했는데, 차라리 잘 됐군. 팀을 나눠서 남섬의 촬영을 다 끝내 버리자고.
실제로 ‘주신의 서’ 속 대륙은 변화무쌍한 기후로 악명이 높았다.
그렇기에 황제가 기거하는 성, 완성된 실내 세트장 안에서 촬영하는 배우들은 별 불만 없이 축축한 환경을 감내했다.
극의 초중반··· 그리고 이도가 황궁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아이라스 가(家)의 인물들은 주로 실내에서 암투를 펼치기 때문이다.
고생인 쪽은, 나가서 구르는 인간들이다.
‘이봐요, 피터. 여기서 이 대본에 있는 액션을 찍는다고? 거기다 비도 오는데?’
촬영감독들의 탄식에도 아랑곳 않고, 피터 숀은 정글처럼 울창하게 자란 숲지로 휘적휘적 걸어들어갔다.
‘원래 비 오는 씬이오.’
‘···벌써 닷새나 밖에서 찍었는데? 소품 갑옷에 물때가 낄 정도라고.’
‘그건 평원이랑 계곡이었잖소. 악령의 숲은 원작에서도 폭우가 쏟아질 때 진입해요. 여기 허가를 받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면 그런 말을 못 할 거요.’
결국 야외촬영을 위해, 우비를 뒤집어쓴 대규모의 인원들이 숲의 한복판까지 들어갔다.
그냥 숲을 통과하는 씬도 아니다. 늪지인지 숲지인지 구별도 안 되는 밀림 속, 주인공 이도를 쫓는 제국군과 온갖 마수들까지 치열한 삼파전을 벌여야 한다.
장비만 해도 수십 종류다.
배우와 스탭, 엑스트라의 헬멧마다 2~3개의 경량 헤드캠이 붙고, 마수 역할을 맡는 스턴트맨들은 적외선 반사 마커가 찍힌 특수제작 수트를 착용한다.
그런 악조건에서 열 시간에서 열두 시간의 촬영이 거듭되면, 프로 중 프로들만 모아 놓았다 한들 지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감독님이 그러시던데.”
모처럼 쓸 만한 소식을 가져온 걸까. 처음 말한 스탭은 반색하며 일어나 앉았다.
“뭐, 드디어 다 접고 일어나겠대?”
“아니. 오늘 하루 푹 쉬래, 이따 새벽부터 동트는 걸 찍어야 된다고.”
“······이런, 젠장.”
*
지휘 캠프.
전기난로 위의 주전자가 물을 끓인다.
연일 이어지는 악천후 속에서, 피터 숀은 오히려 잘 됐다는 기색이었다.
“이런 걸 보면 운이 좋아. 장마가 안 오면 살수차라도 빌려서 쏟아부으려고 했는데, 딱 알맞게 비가 와 주는군.”
과거부터 손발을 맞춰 온, 모자 쓴 조감독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일부러 우기를 잡으신 건 아니고요?”
“뉴질랜드에 그런 게 있었나? 아무튼, 어설프게 VFX(Visual Effects)를 갖다 쓰는 것보단 이쪽이 훨씬 낫지. 사람이 고생하면 돈이 덜 들고 실감이 난단 말이야.”
“어휴, 그러니까 감독님이랑 작업 한번 하면 배우고 스탭이고 도망가서 안 오죠.”
피터 숀은 어깨를 으쓱했다. 비가 오는데도 우의는 고사하고 모자조차 안 쓰고 다녀, 옛 원주민 행색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돈은 많이 남잖아, 상도 받고.”
그는 효율과 낭만의 중간에 있는 감독이다. 필요한 곳에서는 CG를 과감하게 사용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조리 수작업을 고수한다.
‘주신의 서’ 속에서도 비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젖은 땅과 잎, 특유의 습도를 그려내기에 최적의 환경이 갖춰진 것이다.
그때, 텐트 한쪽이 열리며 메인 촬영감독이 비 맞은 생쥐 꼴로 들어왔다.
“어후, 무슨 비가 돌덩이 같네. 우의 위로 맞아도 멍이 들 것 같다니까.”
세계 최고의 OTT 플랫폼이 돈을 대는, 초대형 기획이니만큼 스탭들의 규모도 초대형이다.
웅장한 세계관을 담아내는 고정 카메라만 열 대가 넘고, 배우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따라붙는 카메라맨이 무려 세 팀이다.
조감독이 뜨거운 차를 건네며 물었다.
“이제 들어오셨어요?”
“응. 잠깐 팀원들 텐트 좀 도느라.”
우의를 벗는 촬영감독에게, 피터 숀이 물었다.
“분위기는 어떤가?”
“어떻겠어, 침울하지. 저놈의 비 때문에 다들 지쳐가는 중이라고.”
“해가 떠도 지치는 건 마찬가지야. 떠내려갈 정도도 아닌데 뭘.”
감독이 이따위 소릴 하면, 커버하는 건 조감독의 일이다.
조감독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찍을 때는 다들 힘이 넘치던데요. 배우들 쪽 텐션이 좋아서 그런가, 헐리우드 3인방도 생각보다 까다롭지 않고요.”
“아, 맞아. 릭 미하엘··· 그 말썽쟁이가 그렇게 얌전한 건 처음 봤어. 맥클레인 때문인가?”
촬영감독이 손가락을 튕기자, 이번엔 피터 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닐걸. 그냥 본인만큼 신기한 인간이 나타나서 자극을 받은 모양이야.”
“박건 말이군.”
제작회의부터 촬영 전 미팅, 지휘본부의 이야기 때마다 가장 많이 나온 이름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무술감독에 버금가는 디렉션으로 스턴트맨들을 리드하고, 언제 어디서 카메라를 들이대도 NG를 내지 않는다.
그것만 해도 잔뼈 굵은 헐리우드의 스탭들을 놀래키기 충분한데, 야지에 나가 2박 3일씩 촬영을 할 때면 더 새로운 재주까지 발휘한다.
“···난 진짜, 아직도 모르겠다니까. 연기를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어느 부대에서 오지전문 탐험가를 한 명 데려와 붙여 둔 건지. 얼굴을 보면 배우가 맞긴 한데······.”
촬영감독의 혼잣말에 감탄과 의아함이 섞인다.
몇 차례나 나갔던 야숙, 특히 테아나우 인근의 숲에서는 현지인 사냥꾼이 따로 없었다.
부싯돌로 불을 피우고, 가져온 식량으로 스튜를 끓이고, 나뭇잎을 덧대 거처를 만드는 솜씨에 전문가가 감탄할 정도였다.
‘이거, 내가 할 일이 없는데요? 이미 교육을 하고 데려온 거 아닙니까?
‘그런 말은 안 했는데··· 박, 오기 전에 생존전문가, 뭐 이런 거였습니까?’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박건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하곤 했다.
‘몇 년 전까지 군인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한국에서 온 배우들은 하나같이 촬영장의 활력소를 맡는다.
아이라스의 황녀 역할, 진지유라는 여배우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촬영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손을 보탰다.
제법 많은 야외 씬에, 매일같이 분장이며 염색을 소화하는 것도 고역일 텐데 힘들거나 짜증스러운 티 한 번을 내지 않는다.
같이 온 서희도라는 배우는 또 어떤가. 보이그룹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걱정했는데, 염려가 무색할 만큼 완벽한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감독님, 진짜 장난 아니라니까요. 이제 곧 빌보드 차트에도 올라갈 거예요!’
‘알겠으니 알리샤, 눈곱이나 좀 떼고 와요.’
뜬금없이 황후의 배역, 알리샤 료가 따라다니는 소동이 있었지만··· 동서양이 적절히 섞인 제국에 어울리는 배우들이다.
캐스팅 단계, 작품 속 동양인 대부분이 한국 배우임을 걱정한 게 무색할 만큼.
“아무튼, 괜히 중화권 배우를 쓰는 것보다 훨씬 나았어. 좋은 선택이었네.”
“그러니까. 저쪽은 완전히 원 팀 아닌가.”
피터 숀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저쪽, 한국에서 온 일행들은 그가 처음 보는 신뢰로 똘똘 뭉쳐 있었다.
매니저야 동생이라 쳐도, 여배우와 조연··· 특히 과거 헐리우드 경험이 있다던 장년 배우도 무조건적인 믿음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남섬 쪽 촬영은 얼마나 남았나?”
“비가 올수록 늦어지겠지. 정 안 그치면 여기 캠프를 내버려두고 북섬으로 가야 할 수도 있어.”
지휘본부 캠프 밖, 쏟아지는 빗소리는 여전히 잠잠해질 기미가 없다.
콰르릉! 때마침 울려퍼진 천둥에, 조감독은 어깨를 움츠렸고 피터 숀은 미간을 좁혔다.
촬영감독이 두툼한 팔뚝을 쓸며 중얼거렸다.
“첫 삽은 잘 떴고, 사고만 안 나면 좋겠는데······.”
* * *
그날 저녁,
퀸스타운의 숙소.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를 잘라 만든, 불 켜진 3층짜리 오두막에 어둠이 내렸다.
“박 배우님은?”
“안에서 쉬고 계실걸? 이따 또 새벽 촬영 나가셔야 되잖아.”
“하··· 혹시나 탈이라도 날까 걱정되네. 스탭들이야 로테이션을 돈다지만······.”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며, 남섬으로 몰려드는 관광객이 한풀 빠졌다.
근처의 숙소 대부분을 ‘주신의 서’ 촬영팀이 대여한 까닭에, 어딜 가나 낯익은 스탭들을 식당에서 볼 수 있었다.
건은 살짝 열려 있는 창문을 닫았다. 문이 막혔는데도 국내 스탭들의 목소리는 보다 희미해진 채로 귓가까지 들려왔다.
‘확실히, 더 예리해졌군.’
기감이 다르다.
굳이 감각을 넓히거나 예리하게 곤두세우지 않아도, 지금의 그는 팽팽한 활시위처럼 당겨져 있는 상태였다.
“환경 때문인가?”
남섬에 도착하고 난 뒤, 가장 놀랐던 것은 현지의 공기였다.
끝간 데 없이 펼쳐진 평원,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산맥들··· 그리고 피부에 와 닿는 바람이, 신기하리만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맨 처음 철왕국에 전이돼 느꼈던 향수를.
한 몸처럼 가지고 다니는, 피터 숀이 그에게 선물한 대검은 벽에 세워져 있었다.
건은 일어나 검 앞으로 다가갔다.
-나를 뽑아라, 용사여.
그래서일까.
요즘은 큐가 떨어지기 전, 채 카메라가 돌아가기도 전에 환시와 환각이 시시때때로 찾아왔다.
몰입하려 애쓸 필요조차 없다.
고드와 이도,
철왕국과 카타마트라 제국.
악마와 마수, 천사와 태양신.
각본을 보는 순간부터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마치 거울의 양면처럼, 또 결정지어진 짝처럼 그를 잡아끄는 중이었다.
이세계로 떨어진 용사―방랑자는 거대한 검을 들고 발길을 옮긴다. 타락한 지배자, 그 뒤에 있는 더 거룩한 절대자를 향해.
“······.”
건은 손을 말아쥐었다. 어느 때보다 강해진 힘, 이 세계에 허락되지 않은 합기(合氣)가 붉게 요동치며 주먹 안에서 진동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