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74)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74화(174/199)
가자, 뉴질랜드로 (7)
* * *
거친 잡초들이 우거진 평원 끝,
자연이 만들어 낸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산맥 밑에 순백의 성이 있다.
이 세트, 뉴질랜드의 태양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성이야말로 제작진의 노력이 물씬 들어간 산물이다.
3개월 하고도 24일.
피터 숀 감독은 일부 촬영을 미니어처로 대신하면서까지 막판 세트 완공에 자원을 쏟아부었다.
저 칼드윈 아이라스― 미친 황제가 들어앉은 제국의 요새이며, 동시에 이도가 가야 할 최종목적지인 만큼 더욱 공을 들인 것이다.
-아이라스의 빛나는 영광 뒤에는 은을 캐는 난쟁이가 있었다네. 무너지지 않는 순백의 방벽을 요정들이 축복했다네. 고마움에 인간은 두 종족을 세상의 끝으로 쫓아내었지.
음유시인의 흘러간 노래처럼, 제국의 역사를 담은 백색 성벽 위에 두 배우가 섰다.
미친 황제, 칼드윈 역의 노배우와 그를 참할 젊은 방랑자다.
“참 잘 만들었죠? 정말로 난쟁이가 캐고, 요정들이 축복한 성채라고 해도 믿을 법합니다.”
맥클레인 자바스런티의 말에, 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보기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부분들도 있더군요.”
“진짜보다 더? 이런 성을 많이 봤나요?”
“예전부터 관심이 있어서, 유럽의 관광지를 많이 다녀 봤습니다.”
“하긴, 독일과 루마니아··· 당장 영국만 가도 괜찮은 녀석들이 많아요. 나도 젊었을 적에는 더 유려한 성곽을 찾아 루마니아와 벨기에를 전전했지. 햄릿의 주연을 맡았을 즈음이었을 거예요.”
극에서는 미친 황제, 평상시에는 소탈한 성격의 노배우에게 촬영장의 스탭들 대부분이 놀랐다.
저 릭 미하엘과 제임슨 오버베야 헐리우드의 대표적 말썽쟁이 콤비라지만, 최근까지도 파파라치 카메라를 부숴 버렸다던 노인장이 의외로 젠틀했던 것이다.
맥클레인은 빙그레 웃었다.
“내가 젊은 시절, 성과 호수와 용사의 전설을 좋아했다고 하면 다들 놀라더군요. 그런 낭만에도 관심이 있었냐고.”
“낭만 말입니까?”
“그래요, 낭만. 아무것도 모르는 얘기지. 중세의 삶은 낭만이니 감상이니 하는 것과 거리가 멀어요. 그 세계는 하루하루가 사느냐 죽느냐의 투쟁이었던 걸, 박도 알겠지만요.”
옛이야기가 잠시나마 그를 과거로 데려간 걸까.
젊은 시절, 온갖 전설적인 액션 활극을 찍었던 노배우의 눈빛에 번득이는 예기가 어린다.
그리고 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지구의 중세는 조금 달랐겠지만.’
도열한 기마병과 빛을 반사하는 창날들, 울려퍼지는 뿔피리와 왕의 깃발··· 수천의 말발굽이 진격하며 피워올리는 흙먼지.
그런 것들이 얼마나 무용한 영광인지는, 수십 년을 직접 싸웠던 장본인이 가장 잘 안다.
-죽여, 모조리 찔러 죽여라!
-악마들이 온다! 북을 치고 기사단의 뿔피리를 높이··· 크헉!
그것은 낭만이 아니다. 피와 살점이 튀는 혈전이며, 적에게 검을 박지 않으면 내 목이 뜯겨나가는 아수라의 한복판이다.
용사 일대기는 허상일 뿐. 용사가 승리를 거뒀다는 고리타분한 전설 속, 얼마나 많은 목숨이 죽어 나뒹굴었겠는가?
“그래서 이 작품을 선택했습니다.”
건은 까마득한 아래를 굽어보면서 말했다. 마찬가지로, 밑을 보던 맥클레인이 물었다.
“그래서라면······.”
“잔혹하고 척박한, 이 모든 이야기가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세계를 구원하려는 자는 스스로를 구할 수 없기 마련이더군요.”
작중, 방랑자 이도는 지독한 고독과 옛 기억 속 망령들에 시달린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마물을 학살하고 제국군을 섬멸하면서도,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숨길 수 없는 회한이 숨어 있다.
마치··· 회차가 계속될수록 삭막하고 무감각해져 가던 어느 왕국의 용사처럼.
건을 유심히 보던 맥클레인은 허옇게 올라온 수염을 쓸었다.
“우리가 맞붙을 때가 기대되네요. 근 삼 년··· 아니, 오 년 동안 한 선택 중에 최고의 선택이었지 싶어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국이나 외국이나 씬을 순서대로 찍는 것은 감독의 취향 차이지만, 피터 숀도 후반부 장면을 미리 당겨 찍는 것을 선호치 않았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그럴 필요 있나? 이봐, 벤. 일정표 좀 가져와 봐! 아니, 한 달 뒤 말고 내일 당장 찍을 놈으로!’
덕분에 황제와 황녀, 주인공 이도가 만나며 폭풍처럼 이야기가 전개되는 ‘순백의 성’ 내 장면은 아직 찍지 않은 상태다.
오늘 오후쯤이려나··· 중얼거리던 맥클레인이 문득 말했다.
“한국에는 좋은 배우들이 많이 있나요?”
“물론입니다. 그만큼 좋은 작품들도 많고요.”
“뭐··· 일전에는 나쁘지 않았는데, 요즘은 영 아쉽더군. 너무 오래 산 탓인지, 이 안쪽이 늙어 버린 기분이랄까요. 영화든 희곡이든 어지간한 놈이 아니면 만족할 수가 없으니까.”
맥클레인은 사십 살 가까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중한 어조의 영어를 구사했다.
가슴 한쪽을 장난스럽게 가리키더니, 돌연 표정을 바꿨다.
“그래도 흑의사제는 놀라웠어요. 그 신실한 불신자의 연기를 내 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내 에이전트가 모처럼 고마워졌지 뭡니까.”
“과찬이십니다.”
노배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과찬이 아니에요. 기본은 메소드, 거기에 본인만의 고유한 연기 체계를 혼합한 것 같은데··· 몰입도 해제도 아주 빨라요. 평생 당신만큼 신기한 연기자는 몇 명 못 봤습니다.”
“이미 해 본 경험이니까요.”
“무엇을, 연기를?”
성벽 위의 이야기엔 끝이 다가왔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청력에 발소리가 들려오고, 용사의 감각이 그것이 조연출임을 파악한다.
‘뒤쪽에 다른 스탭이 하나··· 촬영 시간인가? 우릴 찾으러 다니는 중이군.’
이내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걸어왔다. 나부끼는 사자의 깃발에 시선을 보내며, 건은 동년배일지 모를 동료에게 답했다.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
내용은 쾌속하게 흘러간다.
황녀와 황제의 모호한 부녀관계가 조망되고, 얼핏 아이라스 가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듯한 군단사령관 게일도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게일 : (불 꺼진 방, 몸에 새긴 문신을 내려다보며)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조금만, 조금만 더 견디면······.
특히, 저마다의 속내를 감춘 황제-황녀-군단사령관의 저녁 만찬 씬은 박건이 없음에도 스탭들을 감탄시키기에 충분했다.
칼드윈 : (무표정하게) 한층 성과가 늘었군, 군단장.
게일 : 과찬이십니다, 폐하. 전장에서 숱한 마물들을 베어넘기던 차, 우연에 기연이 겹치며 새로운 기예를 터득하게 되었지요.
레이웬 : (순진한 미소를 머금고) 어머, 군단장님은 요 몇 달간 남부 전선에 계시지 않았었나요? 거긴 마물이 아닌 반군만 설친다던데··· 무슨 일로 가셨을지 궁금하군요.
주변 측근은 물론, 황제의 측근들까지 잠시나마 속여넘기며 자리를 이탈했던 군단장.
그 비밀이 황녀의 입에서 흘러나오지만, 군단장 게일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친다.
게일 : (능글맞게 입꼬리를 올리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황녀님? 저는 내내 북부에 있었습니다.
레이웬 :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게일 : (말을 끊으며) 황녀님이야말로 호위기사들을 함락된 요새로 보낸다는 소문이 도는데, 섣부른 권력욕으로 폐하의 안계(眼界)를 벗어나려 드심이 안타깝습니다.
레이웬 : ···아무리 군단장님이라도 이 이상의 무례는 용서치 못해요.
게일 : 이런, 이런, 제가 돌봐 드리던 그 어린 소녀가 어느덧 이렇게 성장하였군요. 이제 제법 군주의 품격이 느껴지십니다.
한 명은 사실상 황제 다음가는 전권보유자, 다른 한 명은 황제의 피를 물려받은 친딸이다.
둘의 신경전이 격화될 무렵, 백은의 황좌에 앉아 있던 사내가 한 손을 들어올렸다.
칼드윈 : 그만.
백이십 세가 넘었다고 알려진 황제는 고작 오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외양이다.
게일과 레이웬이 입을 다물자, 권태로운 목소리가 이어진다.
칼드윈 : 왕들의 비석은 깎이고, 옛 요정들이 걸어 준 마법은 희미해졌다. 외세의 침입이 가속화되는··· 이 엄혹한 시기에, 내 왼팔과 오른팔이 서로를 물어뜯어서 되겠느냐?
게일 : 송구하옵니다, 폐하.
레이웬 : 죄송해요, 아버님.
그렇게 갈등이 심화되던 중, 드디어 이도 일행이 제국의 수도에 들어선다.
군중들 : (이리저리 도망치며) 마수다, 마수들이 나타났다!
제국군 병사 1 : (겁에 질린 얼굴로) 이건, 저놈은 이길 수 없어······.
제국군 병사 2 : (문득 어딘가를 가리키며) 잠깐! 저길 봐, 누가 오고 있어!
제국군 병사 1 : 황도에 와 계신다더니, 혹시 군단장님이신가······!
우연의 일치일까. 마침 용의 형상을 한 마수가 다른 마수들을 이끌며 나타나고, 검을 뽑은 이도가 날아오른다.
게일 : (용의 날개를 찢어발기는 이도를 먼발치에서 주시하며) 호오, 저놈이 요즘 유명하다는 마수사냥꾼인가?
결국 이도에게 날개를 잃은 마수는 땅으로 떨어지고, 지상의 마물들은 요정족의 왕자와 노검사가 힘을 합쳐 처치한다.
황제의 병사들은 도망가거나 성 안에 숨어 평민들을 버렸던 상황. 그랬기에 민중들의 환호는 불꽃처럼 끓어오른다.
모여든 사람들 : (우레 같은 목소리로) 방랑자! 방랑자! 우릴 구한 영웅이시다!
그리고 그 순간, 성문이 열리며 황제의 기사가 이도 일행을 성 안으로 초대한다.
좋은 기회라는 듯, 주름투성이 이마를 꿈틀대는 헥탄. 옛 원수를 만난 노검사를 이도가 한 손을 들어 저지한다.
이도 : (무표정하게) 일단 들어간다.
헥탄 : 이보게, 들어간 다음에는? 황제의 목을 날릴 게 아니라면 저 성은 발조차 들여선 안 될 개미지옥이야. 총공세를 허락해 주게.
지켜보던 요정족 왕자, 제린도 앞서 가는 기사에게 들리지 않도록 덧붙인다.
제린 : (드물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황제는 수십 년에 걸쳐, 궁중 마법사들과 자신의 지식으로 옛 요정들이 걸어 둔 마법을 조악하고 악랄하게 변화시켰습니다. 곧바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부담이 큰······.
이도 : 지금 저들은 우릴 해칠 수 없어. 의식이 끝나기 전까지는.
제린 : ······?
이도 : (하늘을 올려다보며) 태양신의 힘이 날로 약해지고 있다. 방금 죽인 용족도 그래서 날아온 거야. 빛이 충분히 모이는 마지막 날까지는, 황제도 그 수하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해.
알 수 없는 말에, 헥탄과 제린은 무심코 서로를 마주보다가 고개를 휙 돌린다.
그렇게 입성한 순백의 섬 카타람.
수백의 정예 제국 기사, 거기에 1군단장과 3군단장, 4군단장까지 모인 거대한 홀에서 이도 일행은 미치광이 폭군을 마주한다.
칼드윈 : (황좌에 앉은 채 아래를 보며) 너희인가, 허락도 없이 마수를 잡은 자들이?
이도 : (대꾸하지 않는다) ······.
칼드윈 : 요정이 하나, 눈빛이 사나운 늙은이가 하나, 어디서 온지도 모를 방랑자가 하나··· 그야말로 짐의 목을 치러 온 관상일지어다.
정적 속, 그 한 마디에 분위기가 칼날처럼 차가워진다.
헥탄 : (이를 갈며) 제기랄, 내가 이럴 줄 알았다고······!
제국의 정예병들과 마법사는 물론, 이곳은 침입자를 공격하고 성 안의 이들을 보호하는 옛 요정 마법까지 걸려 있는 공간.
아무리 이도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기에, 두 일행의 낯빛도 나빠진 순간.
이도 : 네 신을 죽이러 왔다.
폭력적인 선언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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