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77)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77화(177/199)
천상의 끝에서 (2)
* * *
주신의 서,
제국력 1322년. 에큘레오스 산맥 남동쪽 능선.
동이 트기엔 이른 시각, 군대가 진을 친 구릉지 위쪽으로 몇 명의 인영이 모인다.
“드디어 오늘이군.”
제임슨 오버베··· 극중 반군의 수장으로, 제국군에 가족이 몰살당한 ‘니케르트’가 입을 연다.
장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 있던 노인 검사, 헥탄이 대꾸했다.
“목소리가 떨리는구먼. 외눈의 늑대도 황제와의 전면전은 두려운가?”
“개소리 마쇼, 노인장. 얼마 안 남은 명줄이 당장 끊어지는 수가 있어.”
니케르트가 하얗게 변색된 눈동자를 번뜩이며 쏘아붙인다. 비중 있게 다뤄 온 주연급답게, 배우는 날것 그 자체인 배역과 완전히 동화되었다.
헥탄이 능글맞게 받아쳤다.
“이거, 이거, 우리 대장이 보면 아쉬워할 얘기 아닌가. 거대한 적을 앞두고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내분이라니. 민중의 칼이 수백 년간 무뎌져 부러진 이유가 있었어.”
“누가 대장이라는······.”
“곧 시간이 된다.”
발끈하던 니케르트의 눈동자가 커진다. 분명 소리를 듣지도 못했는데, 시커먼 망토를 두른 사내가 눈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이도!”
눈에 띄게 핼쑥해진 이도가, 손에 쥐고 있던 마물의 목을 바닥에 던졌다.
“감지형 타입이다. 제국군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이 근처만을 서성대고 있더군.”
“북쪽에서 본 녀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래도 칼드윈 아이라스, 미친 폭군이 어떤 수를 쓴 모양입니다.”
뒤이어 나타난 요정왕의 아들, 제린 역의 서희도가 확신을 더하자 늘어서 있던 이들의 낯빛도 침중해진다.
순백의 성··· 카타람에서 황제를 접견한 뒤, 벌써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도가 북부에서 서리 거인들을 무너뜨리고 얼음의 여왕에게 도달할 동안, 헥탄은 반군과 접선해 니케르트와의 공동전선을 설계했다.
제린 역시 떠나버린 요정들에게, 그리고 멸망한 난쟁이의 왕국에까지 원군을 청하러 다녀왔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싸워야 합니다, 아버지!’
‘어리석은 짓이다. 이미 우리 동포들은 마지막 대수림으로 떠났어. 우둔한 난쟁이들도, 현명한 고룡들도 대륙을 등졌다.’
‘그렇기에 힘을 모아야 합니다. 저 칼드윈 아이라스는 자신의 권능에 취해 방심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종족들을 규합해, 저 강력한 방랑자와 진군한다면······.’
‘그 역시 인간일 터. 장생족이 아닌 이들의 횡포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느냐, 더는 우리 동포를 희생시킬 수 없다.’
‘아버지!’
‘돌아가거라.’
결국 요정왕의 원군은 수포로 돌아가고, 긁어모은 병력이라곤 니케르트가 이끄는 반군과 대륙 곳곳에 흩어진 부락민들 일부뿐.
그렇게 해서, 이곳 에큘레오스 산맥에 마침내 두 군대가 진을 쳤다.
제린이 금빛 눈썹을 찌푸렸다.
“땅과 폭포가 타락한 이래, 에큘레오스는 강력한 마물들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아마 황제도 그래서 이곳을 전장으로 선택한 것이겠지요.”
순백의 성··· 가장 깊은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는 이제 모두가 안다.
미친 황제 칼드윈 아이라스는 태양신의 성력을 빨아들여 마물을 지배하는 힘을 얻는 중이었다.
지난번 만남에서, 이도와 황제가 서로 공격하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하다. 이미 의식은 시작됐고, 그 한복판에서 서로가 맞부딪쳐 봐야 좋을 게 없음을 인지한 것이다.
니케르트가 입가를 험악하게 비틀며 물었다.
“다 부숴버리면 될 일 아닌가? 마물이고 제국군이고, 어차피 죽여 없애야 할 놈들이야.”
“병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납니다. 황제가 직접 이끄는 정예병만 십만, 군단사령관 게일의 편대까지 합치면 십이만에 달하는 전력이에요. 언제 덤빌지 모르는 마수들도 계산에 넣어야 하고.”
기세 좋게 나서던 니케르트도 뒤쪽의 병력들을 보고서 입을 다문다.
과감하고 공격적인 성향, 불세출의 재능으로 반군을 이끌어왔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그 제국의 패자다.
한 번의 선택에 반군 수만의 목숨이 달린 상황. 자연히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선제공격엔 불리하지만 발을 빼기엔 유리한 지형입니다. 산맥에 불을 지르며 퇴각한다면 황제도 에큘레오스에서 우릴 쫓지는 못할 겁니다.”
슬그머니 이도의 옆으로 다가온 제린이 몸을 낮추고 속삭인다.
산천초목의 벗, 요정왕의 아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말. 그러나 전황은 좋지 못하다.
헥탄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거든다.
“세인들은 겁쟁이라 하겠지만, 전사는 물러설 곳도 알아야 하네. 어쩌면 여기가 우리의 마지막 자리가 될지도 몰라.”
지난 몇 주간, 제국군과 반군은 수없는 난전을 펼치며 이곳까지 흘러왔다.
무장도, 숫자도, 기본적인 무력조차 밀리는 상황에서 열 배가 넘는 상대와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이도 일행의 힘이었다.
이도가 단독으로 펼친 게릴라, 거기다 제린과 헥탄들이 기병대를 이끌고 두들겨 댄 덕에 제국군이 입은 피해 역시 상당했다.
그러나 절대적인 병력 차이로 점차 전선이 밀려났고, 후퇴를 거듭한 끝에 에큘레오스에서 맞서게 된 것이다.
거기에, 요정족들에게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이 산맥 밑에는 더 거대한 위험이 있다. 인간들의 싸움에 놈이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이봐, 당신이 결정하쇼. 좋으니 싫으니 해도 우릴 여기까지 이끌었으니까. 나와 내 병사들은 선택을 따르겠어.”
니케르트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하지만, 이도에게선 답이 없다.
무감정하고 건조한, 흡사 예전의 자신이 떠오르는 눈빛으로 검고 흰 준봉들을 바라볼 뿐이다.
‘선택이라.’
승산은··· 극히 적다.
지금까지는 그 자신의 무력을 활용해 어찌어찌 버텨 왔지만, 쏟아지는 해일을 작은 둑으로 언제까지나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싸울 수는 있다. 허나, 대부분이 죽을 터.’
수백, 수천의 마물을 죽여 온 눈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들을 훑는다.
제린, 헥탄, 니케르트, 그리고 부관과 병사들.
한 명이라도 더 살리려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 이도는 황제에 버금가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인간의 생명쯤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심지어 그것이 자신이라도.
“우리는 싸운다.”
그 한 마디에, 사람들의 눈빛이 바뀐다.
“개전은 동이 틀 무렵. 태양을 등지고 놈들의 서북쪽부터 친다. 기량 낮은 병사라면 잠시나마 당황케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병력을 나누나, 아니면 다 함께?”
이도는 니케르트를 돌아보았다.
“주력 병력은 정면을, 나머지는 제린과 헥탄이 반씩 나눠 좌우를 맡는다.”
“군단사령관 게일은? 부대를 일부 나눠 후위를 칠 수도 있어.”
“상정 범위 안이다. 적의 군단장보다는 마수들의 움직임을 경계하는 편이 좋아.”
헥탄과 제린도 고개를 끄덕인다.
벌써 제국군과 수없는 교전을 벌인 바다. 기본적으로 편제된 바가 있어, 이도의 지휘에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다.
부관들의 수를 세던 니케르트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내가 본대를 맡으면 당신은? 또 별동대를 운용하는 건가?”
“아니.”
즉답한 이도는, 서쪽 하늘을 올려다본다.
“홀로 움직인다. 황제가 있는 곳까지.”
*
개전開戰.
마침내 싸움의 새벽이 밝았다.
고지에 반군이 올라서고, 아래쪽 분지에 황제의 대군이 도열한다.
지금까지 촬영한 씬 중 가장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으며, 데려온 엑스트라만 수백 명에 이르는 대규모 중의 대규모 컷이다.
“······.”
온도가 낮은 고원지대건만, 갑옷을 걸친 이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공기는 후끈하다.
일부분은 CG로 메운다지만 확실한 실감을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하다.
다행히 현지 주민들이 선뜻 출연에 협조한 탓에, 인력에 들어가는 비용은 감소한 상황. 그 제작비는 디테일한 소품과 무장으로 치환되었다.
“스탠바이― 큐!”
맨 처음 외치는 이, 현실을 가상으로 바꾸는 슛은 감독의 몫이다.
큐를 외친 피터 숀도, 카메라를 잡은 촬영감독들도, 촬영용 드론을 조종하는 모든 스탭들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긴장한다.
그러나······.
‘싸울 만··· 아니, 할 만하겠는데.’
가장 긴장될, 작품 속의 모든 배우와 엑스트라들은 고양감에 휩싸여 있다.
어쩌면 가벼운 각성 상태라고도 볼 수 있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엄청난 자원이 재소모되리라는 불안감?
결코 NG를 내면 안 된다는 부담?
그런 것은 머리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웅장한 뉴질랜드의 자연, 철컥거리는 쇳소리, 실제 전쟁 같은 긴장감이 일개 엑스트라들에게도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배역과 배우, 연기와 현실은 일시적이나마 하나가 된다.
“검을 들어라!”
그 팽팽한 긴장감의 끈을, 해골 투구를 쓴 반군의 수장이 잘라버린다.
“검을 들고, 적을 보아라! 오늘 이 땅은 비겁한 자들의 피로 목을 축일 것이다! 영광스러운 죽음의 끝, 민중의 신이 우리를 축복할지어니!”
제임슨 오버베, 니케르트 역으로 분한 마흔두 살의 헐리우드 스타는 왜 자신이 캐스팅되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일부러 볕에 태우고, 살을 빼 초췌해진 몸으로도 눈에서는 불꽃이 튄다. ‘주신의 서’ 속에서 오직 민중을 위해 한평생을 싸워 온, 투쟁의 화신이 말 위에서 병사들을 독려한다.
“전군, 진격하라!”
부우우우―
반군이 쓰는, 거대한 뿔피리가 울려퍼지자 부관들도 검을 휘두르며 외친다.
“싸워라, 물러서지 말고 싸워라!”
“자유를 위해!”
“민중이여! 해방에 영광 있으리!”
기병의 말발굽 소리와 보병의 달리는 소리, 지상을 짓밟는 인간들의 발소리가 고원을 메운다.
번쩍, 빛이 터져나오며 제국군 쪽에서 불덩이들이 날아들지만 푸르스름한 막에 막혀 사라진다.
제국군 마법사들의 공세를, 제린이 쳐둔 보호방벽이 막아낸 것이다.
첫 공세가 무위로 돌아가고 다음 마법이 준비될 때쯤,
“젠장, 눈이······!”
“앞이 안 보여! 방패를 들어올려!”
반군의 등 뒤에서 터져나온 빛이 제국군의 시야를 어지럽힌다.
그 틈을 타 달려온 기마병들이 충돌하고, 이내 두 군대는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백병전으로 돌입한다.
“죽어라, 변절자!”
전장은 포악하다.
제국군 한 명이 반군의 등에 칼을 꽂자, 또 다른 반군이 나타나 도끼로 적을 난도질한다.
“누가 변절자라는 거냐, 제국의 개··· 크헉!”
살육의 흥분에 취해, 의기양양하게 외치던 반군은 또 다른 적에게 절명한다.
목이 날아가고, 흉골이 뚫리고, 피 분수가 쏟아지는 전장의 한가운데.
높이 나는 드론 캠이 한 지점을 포착한다.
퍼버버벙―!
전장의 서북쪽.
검을 휘둘렀다고는 믿을 수 없는 파공성이 오싹하게 터진다. 이어 무시무시한 기파가 제국군 십여 명을 날려보낸다.
그 중앙에 있는 것은,
거대한 대검을 뽑아든 이도다.
“막아, 놈을 막아라!”
“고작 혼자일 뿐이다! 물러서면 베겠다!”
여기저기서 제국군 장교들이 소리치지만 무용지물이다.
넝마주이가 된 망토를 걸친 채, 보이는 제국군을 모조리 베어넘기며 질주하건만 저 전진을 막을 수는 없다.
막기는커녕 보라, 앞에 있는 이들이 인간 소용돌이가 되어 날아오르고 있지 않나.
“악, 으아아아악!”
“도망쳐, 괴물이다!”
전의는 경외로, 또 공포로 변한다.
작품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도 주의를 거듭해야 하는 씬이다.
제국군 병사로 분한 스턴트맨들이 와이어에 매달린 채 여기저기로 날아가고, 행여 사고라도 날세라 다른 엑스트라들도 몸을 피한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전술이군.’
일직선으로 뚫고 온 전장의 가운데, 잠시 멈춘 건은 회상한다.
과거에도 이렇게 일자무식한 전술을 쓰긴 했었다. 가공할 무력의 개인은 본대와 동등한 역할을 수행하는 법이므로.
단, 그때 악마를 찢어발겼다면 지금은 엑스트라들과 합을 맞추는 것이 다를 뿐이다.
“물러서라, 물러서! 저 간격에 다가가지 마라!”
“방패병, 마법사들이 올 때까지 포위망만 갖추고 조금씩 후퇴해!”
얼마나 많은 이를 베었을까. 결국 다른 명령이 하달됐는지, 방사형으로 길이 뚫린다.
중세의 기사들이 방진을 부수던 랜스 차징을 혼자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황제는······.”
다시금 이도의 배역을 뒤집어쓰고, 건은 고개를 든다.
저 멀리서 펄럭이는 황제의 사자기는 아까 전보다 한층 가까워졌다. 마치 다가올 수 있으면 도달해 보라는 듯이.
“네가 그 방랑자로군.”
그리고 마침내, 이 미친 돌진을 막아낼 수문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쿠쾅!
쌍도끼가 바닥을 찍으며 큼지막한 크레이터를 만들어낸다.
회색 눈에 적색 머리카락, 2미터에 가까운 거한은 먼지를 흩어 버리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멈춰라, 더는 용납할 수 없다.”
이도는 표정 없이 목을 우두둑 꺾으며 대검을 등 뒤에 걸쳤다.
극한의 쾌검술을 전개하기 전, 작품 초반부터 등장했던 특유의 자세다.
“미안하지만······.”
드높은 천상으로 오르는 길, 앞을 막던 천사들에게 했던 말이 차원을 넘어 흘러나온다.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