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78)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78화(178/199)
천상의 끝에서 (3)
* * *
“컷, 오케이! 오오케이!”
메가폰에서 연신 울리는 피터 숀의 목소리를 신호로, 전투씬이 끝났다.
동시에 제국군 반군 할 것 없이 평원에 아무렇게나 주저앉는다.
“야, 진짜 힘들었네.”
“새삼 끔찍하구만. 중세 사람들은 이런 전쟁을 몇 번이나 했다는 거 아냐?”
“아이고, 지금 옛날 인간들 걱정할 때야? 아직 큰 게 몇 번이나 남았다는데.”
퍼질러 앉은, 혹은 아예 드러누워 버린 엑스트라들은 투구도 채 못 벗고 한탄을 주고받는다.
그 말마따나, 오늘의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 촬영은 끝나지 않았다.
스탭과 배우를 갈아넣는 촬영으로 악명 높은, 피터 숀이 멈춘 이유는 하나. 더 이상 찍어 봐야 효율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부상자가 있나?”
“스물 아래··· 전부 경미한 정도입니다. 팀닥터들이 붙어서 케어하고 있고요.”
이 정도 규모에, 이만한 호흡이면 한두 군데 멍 안 드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예상보다 적은 숫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피터 숀의 표정은 못내 아쉽다.
“아쉽군. 해가 질 때까지, 롱 테이크로 쭉 끌었으면 기막힌 놈이 나왔을 텐데.”
옆에서 생수병의 물을 머리에 붓던,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촬영감독이 질색을 했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그러다가 누구 뼈다귀라도 부러지면 어떡하려고?”
아예 프로 스턴트맨들이라면 모를까, 일반인 엑스트라가 많은 상황에선 촬영 호흡이 지나치게 길어지다가 사고가 난다.
실제 배우들도 에너지 소모가 큰 액션신 촬영은 버거워한다. 그 증거로, 여태 강철 같은 체력을 보여주던 박건도 주저앉아 있지 않은가.
“···저건 지친 게 아니라, 그냥 배역에서 못 빠져나온 거 아닌가?”
스탭 한 명이 중얼거렸다. 박건 주변엔 한국의 동료들, 매니저와 다른 배우들이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그럴 만도 해요. 진짜 피에 미친 망나니인 줄 알았다니까.”
“원래도 메소드가 따로 없잖아. 빨리 씌고 빨리 빠져나온다 뿐이지,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칼잡이 같은 배우야.”
마지막 스탭의 감탄처럼, 방금 찍은 씬을 모니터링하던 배우들 사이에서도 탄성이 나온다.
-여기서 멈춰라, 더는 용납할 수 없다.
돌연 등장한 2미터짜리 거한, 에디 롱의 대사에 이어 박건이 돌진하자 다들 박수를 쳤다.
“이게 오늘의 하이라이트지!”
“에디, 왜 이렇게 대사를 잘 치나? 박이랑 같이 잡히는 첫 씬이라고 준비 좀 했어?”
거인 및 거구의 악역 전문 배우, 에디 롱이 거대한 가슴을 폈다.
“당연하지. 분노의 파수꾼을 내가 몇 번이나 봤는데, 어제 밤새 대사만 연습했다고.”
“뭔 소리야, 몇 줄 되지도 않잖아!”
에디 롱이 능글맞게 받아치자 폭소가 터져나왔다. 환호 속, 모니터링 중이던 진지유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오빠, 괜찮아요?”
“예. 문제없습니다.”
짧게 대답한 형의 옆, 미간을 좁힌 박선도 한 마디 거들었다.
“다친 데는 없고? 안색이 안 좋아.”
“괜찮아, 조금 피곤해서 그래.”
서희도와 나머지 한국인 동료들도 염려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를 아는 이들이라면 경악할 소리였지만, 이곳은 한국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뉴질랜드다.
거기다··· 이번 작품에 박건이 쏟는 에너지는 역대급으로 어마어마한 터.
숨쉴 틈 없는 주연배우의 일정과는 별개로, 차마 좀 쉬라는 말을 꺼낼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은 좀 더 쉬어요. 뭐라도 먹고, 푹 쉬었다가 내일 촬영 들어가야죠! 형 지금 얼굴이 삼 년 굶은 늑대 같다고요.”
결국 분장도 안 지운 서희도가 나섰다. 동료들에게 떠밀려 일어나는 와중, 박건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정신을 지치게 만든,
옛 기억이 떠오르는 중이었다.
*
다시, 철왕국.
드높은 천상으로 이르는 구름길.
신앙 없는 자가 발을 디디면 까마득한 아래로 추락한다고 알려진 그곳.
허나 ‘길’이라는 말과 달리, 구름길은 사실 엄청나게 넓고 경사진 에스컬레이터와 같다.
희고 넓으며 군데군데 구름이 낀 그곳에, 오늘은 흰 날개들이 널브러져 있다.
―······.
천사의 피는 인간의 그것보다 한층 붉고 끈끈하다. 새빨간 잼처럼 검신에 들러붙은 피딱지를 보며, 고드는 성검을 허공에 털었다.
휙, 촤아악!
검신에 들러붙던 배덕의 흔적이 흰 땅에 뿌려진다. 신임 용사를 저지하려 달려들던 천사들이 치른 대가였다.
―내려가라, 인간. 허락된 곳이 아니다.
불과 십여 분 전.
구름길을 어느 정도 올랐을 때, 두건을 쓴 평천사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고드는, 앞을 막는 신성한 존재들에게 망설이지도 않고 검을 뿌렸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삼십여 체가 넘는 천사들이 날갯죽지며 어깨가 찢겨 나뒹굴었고, 손상이 큰 개체들은 흰 재가 되어 소멸했다.
“······.”
용사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참상을 돌아보지도 않는다. 걸음을 옮기는 고드의 뒤에서, 양 날개가 날아간 천사가 고개를 들었다.
-멈춰라.
고드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더는 나아갈 수 없다.
천사들은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목을 통하지 않는 신비로운 울림이나, 용사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냉소일 뿐이다.
“나아갈 수 없다, 용납할 수 없다, 너희는 그런 소리밖에 못 하나?”
-무슨······.
“과연 비둘기들이야. 그 꼴이 되어서도 이러니저러니 입방아를 찧는 게.”
냉소한 용사는 다시 구름길을 오른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천사는 용사의 뒤, 백금발이 아름다운 여자 동료를 돌아보며 명한다.
-성녀여, 무얼 하는가? 어서 용사를 막아라.
“···죄송한데, 댁들이 저보다 세거든요? 누구더러 막으라 마라야?”
성녀, 아리아 리버롯의 대꾸에 천사는 한동안 말을 멈췄다. 신실한 신의 종이 이런 망나니였던 줄 미처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오만하군.
폭발하는 붉은 광채와 함께, 대천사가 나타났다.
“옆을 조······.”
성녀가 뭐라고 소리쳤지만, 순간적으로 귀가 먹먹해지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적광의 아스루엘.
드높은 천상 위 일좌(一座)이며 가장 엄격하다고 알려진 대천사.
놈은 지상에 몸을 드러날 때도 저런 식으로 나타난다. 다만 철왕국에 현현할 때와 달리, 지금의 폭발은 공격을 위해서라는 것이 다르다.
투콰쾅―!
우측, 상단.
그가 성검을 뽑아들자마자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전신을 타격했다.
존재 자체를 후려치는 대천사의 권능은 막강하다. 합기까지 극성으로 끌어올렸지만, 폭음과 함께 몸이 밀려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일렀군. 강한 줄은 알았는데.’
날아가는 도중에도 검을 고쳐쥐며, 고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정상적인 수련을 쌓은 뒤, 적어도 세 번째 대악마 발몬을 잡을 정도만 되었더라도 육신이 버텨 줬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회차의 초반. 권능과 경험은 여전하나 육체가 따라가질 못한다.
-용사, 고드여.
천둥처럼 우렁우렁대는, 귀가 아닌 머릿속을 파고드는 듯한 공명이 울려퍼졌다.
세 대천사들··· 아스루엘과 마테카엘, 프라우리엘은 모두가 저런 식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성검의 칼끝을 천상으로 돌리다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질문한 아스루엘은 성녀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등 뒤에서 살아 있는 것처럼 일렁거리는 빛의 날개가 잠시 길어졌다.
-거기에··· 있어선 안 될 자까지 있군. 아리아 리버롯, 용사의 광증에 오염되었는가?
아리아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보호하듯 걸어나온 고드가 코웃음을 쳤다.
“무슨 짓이라고 했나, 아스루엘? 네 거짓말을 밝혀내려 구름길을 오르고 있었지.”
-나는 너와 만난 적이 없다. 소환 후 현현한 천사는 마테카엘이었······.
“연기하지 마라, 빨간 비둘기.”
말을 끊은 고드는 성검을 짚었다. 빛나는 검신이 구름처럼 생긴 바닥에 쑥 박혀들어갔다.
“내가 회귀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벌써 수백 번이 넘게 대악마를 잡고, 악마군과 싸우고, 네놈과도 몇 차례 만났으니 말이야.”
대천사는 침묵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대뜸 공격해 오거나 다른 변명을 하지도 않았다.
몇 초 뒤 흘러나온 공명은 나지막했다.
-실수가 있었군.
실수··· 불길한 울림의 단어가 감도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성녀가 체념한 듯 눈을 감았을 때였다.
-기억의 비술이 깨지다니, 어떤 초월자라도 흘러가는 세계를 멈출 수는 없는가.
뜻 모를 말이 흘러나왔다. 이내 아스루엘의 공명에 가벼운 의문이 섞였다.
-용사여, 네 세계의 시초를 기억하는가?
“잡소리가 길군. 대답부터 해라.”
-경외하며 들어라, 필멸자들이 감히 상상하지 못할 이야기일지니.
합기를 다시 끌어올렸지만, 아스루엘은 당장 싸우려는 것 같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내색하진 않았으나, 방금 전의 일격으로 흘러들어온 기운을 아직 모두 못 흩어 버렸던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처럼, 천사들 역시 모든 기억이 있을 터. 이번 회차에 끝을 봐야 해.’
고드가 이를 악무는 와중에도 아스루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철왕국··· 저 지상의 국가에도 수많은 이름들이 있었지. 몇 세기에 한 차례씩, 단생족의 흥망성쇠는 부질없고도 공연하다.
“뭘 말하고 싶은 거냐?”
-우리는 외세로부터 인간을 지켜 왔다.
“헛소리를······.”
아스루엘은 개의치 않고 공명을 이었다.
-먼 옛날, 이 세계에는 혼돈만이 존재했다. 위대하신 에바무리엘께서 홀로 오롯하여 드높은 천상을 만들었고, 그 씨앗이 지상에 떨어져 작고 하찮은 생명들이 되었다.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성녀, 아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이 인간의 시초, 작은 손들.”
-그래, 너희의 경전에 적힌 진실이지. 저 에바무리엘과 우리, 대천사들은 세계의 번영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인간의 신앙이 우리에게 더 큰 힘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용사와 성녀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 힘을 바탕으로, 수천 년··· 아니, 너희가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외신의 침략을 막아냈다. 장막 뒤의 약탈자들, 차원을 넘는 괴물들, 하나의 우주 정도는 금세 먹어치울 포식자들이 호시탐탐 이 세계를 넘봤으니까.
흘러간 이야기가 중간지에 도착했다. 아스루엘의 공명에 노기가 서린 것은 그 때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느꼈다. 너희가 오만해졌음을, 마땅히 경배해야 할 천상의 씨앗들이 더 이상 신실하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 표면적으로나마 세계는 평화로웠고··· 위대하신 에바무리엘은 외신과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로 점차 약해져 갔다. 수많은 대천사들이 다치고 소멸하는 사이, 인간들은 신을 잊은 채 눈부신 번영을 맞았다.
“설마······.”
어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아스루엘 역시 그가 생각한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몇몇 천사들은 생각했다. 저 작은 미물들에게도 대적자가 필요하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친 성녀가 스스로의 입을 막았다. 아스루엘의 두건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어째서 말이 안 되지? 억겁의 세월 동안 외신과 싸워 왔는데, 그 비호를 받는 인간들은 평화로워야 하는가? 늑대를 쫓는 것이 양치기의 역할이라면, 양의 역할은 젖과 고기를······.
눈이 멀도록 새하얀 평원 위, 적광의 대천사는 두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끊겼던 말이 무심히 이어졌다.
-무한히 공급하는 것일지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