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79)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79화(179/199)
천상의 끝에서 (4)
* * *
철왕국의 상공,
드높은 천상으로 가는 구름길.
누군가 봤으면 기괴한 광경이라 평했으리라.
성검을 땅에 박은 용사가 서 있고, 그 바로 옆을 성녀가 어쩔 줄 모르고 지킨다.
쓰러진 천사들의 중간에는 적광의 대천사, 아스루엘이 자리했다. 거대한 빛의 날개를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며.
침묵을 깬 것은 용사 고드였다.
“···설마, 악마를 창조한 거냐?”
-창조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일종의 실험이자 발굴이지.
“뭐야?”
-가운데땅의 가장 끄트머리··· 버려진 오지 중 어두운 힘이 넘실거리는 곳이 있었다. 대천사 중 누군가는 그 땅을 불태웠고, 또 누군가는 타락한 생물들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스스로의 존재마저 흐려져 가며, 세계의 존속을 위해.
소름끼치는 진실이 이어졌다. 파랗게 질린 성녀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불타는 지옥······.”
아스루엘은 긍정에 가까운 몸짓을 취했다.
-그렇다. 그곳이 마경, 그리고 불타는 지옥의 첫 태동이었지. 외계에서 빌려온 힘을 조금씩··· 하지만 꾸준히 불어넣자 일대의 생물들은 금세 탈피를 시작했다. 우리에겐 하찮은 수준이었지만, 평화에 취한 인간들은 위협하고도 남을 정도로.
“완전히 미쳤군. 인간의 신앙심을 살리기 위해 악마를 만들어?”
고드가 씹어뱉듯 뇌까렸다. 어떤 창조주도··· 아니, 창조주라도 해선 안 될 일이다.
수천 년, 혹은 더 오랜 기간 동안 일부러 인간과 악마의 싸움을 조장했다는 것 아닌가?
-무엇이 문제지?
“······뭐라고?”
-무엇이 문제냐 물었다. 세계의 거대한 규율에 따라, 우리가 인간을 직접 해한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나약한 몸으로 악마와 대적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했지.
문득 아스루엘이 장갑 낀 손을 뻗었다. 용사와 성녀 모두가 익히 아는, 검붉은 기운이 대천사의 손끝에 맺혔다.
고드는 이를 악물었다.
“네놈, 그 힘······.”
-합기 역시 천상의 권능이다. 인간들이 우연히 발굴한 힘이라 여겼던가?
태연한 공명이, 돌연 용사에게로 집중됐다.
-그리고 차원을 넘은 방랑자여. 그대야말로 드높은 천상을 적대할 이유가 없을 텐데.
“개소리. 너희가 날 잡아와 놓고 적대할 이유가 없다고?”
-선택받았을 뿐이다. 이 차원의 염원과 네 영혼의 파장이 일치했으므로.
자신이 기억을 잃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일까. 저 대천사는 더 이상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아스루엘이 두 손을 들자 흰 날개가 천사의 몸을 조금 더 띄웠다.
-이 세계의 진원(震源)은 훼손되었다. 대적자를 만들었지만, 정작 그 대적자를 대적할 인간 쪽의 용사가 없었지. 다른 차원에서 누군가를 데려오자는 대책은 그래서 착안되었다.
“······.”
-시공의 오비엘이 온 힘을 쏟아 차원에 균열을 만들었고, 망각의 타리엘은 기억의 비술을 창조했다. 소환된 용사가 수천 번을 죽더라도 마지막 대악마까지 처치할 수 있도록··· 이성과 정신이 붕괴되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지금은 사라졌을, 오래 전의 이름들이 대천사의 말 속에서 발음되고 사라진다.
‘그러고 보니, 처음 이 세계에 온 건······.’
수많은 죽음은 기억을 부식시킨다. 그 전역식 날 아침, 어떤 일이 있었던가?
고드가 기억을 되짚을 때, 아스루엘의 두건이 돌연 성녀를 향했다.
-아리아 리버롯.
“······예.”
-너희 성녀는 대를 이어, 차원을 잇는 통로이자 용사를 데려오는 매개의 역할을 수행했다. 영적 파장이 맞는 자들, 정의감과 희생정신으로 뭉친 고결한 이들을 용사로서 소환했지. 기억의 비술에 왜 금이 갔는지는······.
“잠깐, 그럼 전대의 용사는?”
쑥, 성검이 소리없이 뽑혀나왔다. 한 발 나선 고드가 다시 물었다.
“너희의 말에 따르면, 수천 년 동안이나 이 웃기지도 않은 의식이 반복됐다. 그렇다면 전대의 용사와 성녀들은? 그들은 어디로 갔나?”
아리아의 시선도 대천사에게 향했다. 아스루엘은 간단히 답했다.
-알려줄 수 없다.
“뭐라고?”
-다섯 번째 대악마, 아스메라우스를 죽이면 용사는 원래의 차원으로 돌아간다. 세상은 일시적인 평화를 얻고, 철왕국은 다시금 부흥할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한가?
“내가 떠나면? 성녀는 어떻게 되지?”
이번에는 답이 없었다. 이야기의 장본인, 아리아 역시 예상한 일이라는 듯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 속의 답은 명확하다. 용사는 귀환하고, 남은 성녀는 국가의 재건에 힘쓰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겠지.
대천사들이 지운 기억으로, 어떤 영광도 보상도 얻지 못하고··· 존재했다는 사실마저 지워지고 말 것이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고드는 눈을 감았다. 이제 닳고 희미해진, 박건의 자아가 불현듯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무엇을 위해 싸웠나.
처음에는 세계를 구하려 싸웠고, 그 후에는 가족에게 돌아가려 싸웠으며··· 언제부턴가는 반쯤 미친 채 악마들의 학살만을 거듭했다.
‘꼭 저 자식들처럼.’
그래서 잊고 있었다. 귀환이고 절대자고,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거대한 음모가 그를 부른 이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박열호와 한영주의 아들.
박건은 불의를 앞에 두고 도망친 적이 없었다.
투콰쾅―!
다음 순간, 벼락같이 휘두른 성검이 대천사의 목을 노린다.
그러나 칼날은 반구형 장막에 막혔다. 순식간에 공간을 좁힌 용사에게, 아스루엘은 보이지 않는 얼굴을 돌렸다.
-무슨 짓이지? 충분히 이해했을 텐데?
“안 되겠어.”
-······?
지근거리까지 접근했음에도 대천사의 두건 속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저 속에 아른거리는 것은··· 추악하게 존재를 영위해 온 괴물의 그림자뿐이다.
“귀환 전에, 너희 비둘기부터 때려잡아야겠다.
-대체 그 비둘기란 것이······.
뭐라고 말하려던 대천사가 손을 올렸다. 동시에 검붉게 타오르는 성검이 장막을 찢어발기며 날아들었다.
칼날은 흰 건틀릿에 붙잡혔지만, 아스루엘은 놀란 기색이었다. 당혹스러움에 가까운 파장이 적광을 타고 일렁였다.
-천상의 막에 흠조차 내지 못해야 할 텐데··· 합기를 발전시켰나?
“그럼, 그간 놀고만 있었을까.”
애써 코웃음을 치지만, 용사의 얼굴은 조금씩 일그러진다.
손을 직접 맞대 보니 알 수 있다. 이 세계의 절대자는, 저들이 만든 악마 나부랭이와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하다.
“······큭.”
적광의 아스루엘, 그가 강림한 곳엔 공기마저 숨을 죽인다 했던가. 검을 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압력이 몸을 짓누른다.
파앙!
아스루엘이 팔을 내젓자 그는 대포알처럼 날아가 흰 땅에 처박혔다.
비틀비틀 일어서며, 고드는 성력을 끌어올리려는 성녀에게 거칠게 고함쳤다.
“끼어들지 마!”
“하지만······.”
혼자 덤빈다면 이방인의 만용쯤이겠으나, 성녀까지 합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그와 달리 성녀는 앞으로도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가 아닌가.
여기서 죽든, 도박을 성공하든, 홀로 승부를 거는 쪽이 옳은 것이다.
-이제 알겠어. 극성에 이른 합기를, 여러 번 중첩시켜 위력을 강화했군.
이제 새카맣게 변한 성검을 보며, 아스루엘이 흥미롭다는 듯 평했다.
그 말대로다. 불화의 모데움을 쓰러뜨린 이후, 그는 연구를 거듭했다. 대악마들은 그 권능만큼이나 회피와 방어에 능하다.
저 단단한 마기의 벽을 깨부수려면··· 극에 달한 쾌검, 그리고 한 점에 응축된 파괴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너희, 천상의 존재들에게 인간이란 어떤 의미지?”
-무가치한 질문이다.
두어 마디를 나누면서도, 고드의 오감은 대천사를 맹렬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약점은··· 없다. 세 번째 대악마, 분노의 발몬은 가늠이라도 됐지만 저놈은 존재 자체를 인식하기조차 어렵다.
단 하나, 가능성이 있다면······.
‘놈이 날 벌레로 본다는 거지. 잘난 방어막이 찢어지고 난 지금까지도.’
아스루엘, 놈은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 기껏 차원을 이동시켜 온 용사를 내칠 리도 없다. 지금껏 처치한 대악마의 머릿수가 아까워서라도.
파직, 빠드득! 합기가 잔뜩 응축된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는 와중, 용사의 몸이 순간 땅 위에서 사라졌다.
섬전검(閃電劍).
첫째부터 셋째까지, 강력한 대악마들의 머리를 수도 없이 날렸던 기술이자 고드 자신이 가장 즐겨 쓰는 필살기다.
그리고 대천사 아스루엘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용사여, 너희의 시간은 유한하다.
형체가 나타난 곳은 상공. 자취를 감췄던 고드가 홀로그램처럼 생겨나며, 검게 불타는 성검이 대천사의 정수리로 떨어져내렸다.
찰나의 시간··· 한껏 가속한 고드의 귀에 또렷한 공명이 들려왔다.
-지상으로 내려가라. 모든 대악마를 처치한 순간, 나와 형제들을 다시 볼 것이다.
거기서, 시야가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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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왕국 변경,
왕성이 보이지 않는 곳.
거대한 분화구 가운데 박힌 채, 고드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까운 들에서는 소가 풀을 뜯었고 먼 곳에서 양치기의 피리소리가 들렸다.
처음 구름길을 오르던 왕성과는 제법 떨어진, 어느 농가의 초지였다.
“···그 미친 칼은 뭡니까? 성검이랑은 비교도 안 되던데.”
그의 옆, 비교적 온전한 꼴로 앉아 있던 성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성직자라고, 냅다 지상으로 꽂아버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천상의 검이에요. 세 대천사들은 모두 한 자루씩 가지고 있죠.”
“쇠붙이 따위가 아니잖습니까, 이쪽은 칼밖에 안 줘 놓고서.”
고드는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아스루엘이 백열하는 검을 휘두른 순간, 공간이 말 그대로 하늘째 쪼개지며 둘로 나뉘었다.
그 기류에 휩싸인 것만으로 그는 지상까지 속절없이 낙하했다. 죽일 생각으로 휘둘렀다면 입자 단위로 쪼개졌으리라.
“냉병기 시대에 미사일을 퍼붓는 건 반칙이지.”
“미사일요?”
“상대가 안 된다는 얘깁니다.”
대꾸한 고드는 몸을 일으켰다. 합기를 둘러 강화하기도 했고, 상대에게 살의가 없다 보니 따로 다친 곳은 없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다가온 성녀가 그의 손을 낚아챘다.
“미사일이고 뭐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당신 미쳤어요? 천사를 베고, 아스루엘님에게까지 칼을······.”
“뭐 어떻습니까. 아까는 날 도와서 같이 싸우려고 하더니.”
“동료잖아요!”
“처음 보는 사이에, 얼마나 만났다고?”
성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고드는 붙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성녀님, 기억이 어디까지 있습니까?”
먼지투성이 백금발 속, 흰 얼굴에 고통스러운 고뇌가 어렸다.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거리던 성녀는 결국 시선을 피했다.
“말할 수 없어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답답한지 가슴의 경갑을 주먹으로 쾅쾅 치던 성녀는 심호흡을 내쉬었다.
“정말로 말할 수가 없다고요. 기억의 비술은 풀렸지만 다른 금제는 여전해요. 입 밖으로 낼 수도 없고, 내는 순간 많은 것이 어긋날 거예요.”
고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다음 질문. 내가 원래 세계로 갈 수 있는 법, 악마를 잡는 것 외에도 있습니까?”
“몰라요.”
이번에는 즉답이 나왔다. 그가 삐딱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아리아는 다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정말로 몰라요! 차원의 틈새로 파장을··· 그러니까 성력을 보내서 거기 감응하는 사람을 찾았을 뿐이에요.”
“데려오는 법만 알지, 돌려보내는 법만 모른다?”
“네. 다섯 번째 악마, 아스메라우스를 처치하면 대천사들이 내려오고 차원의 균열이 다시 열린다는 이야기만 들었어요.”
이 역시, 확실치 않은 내용이다. 애초 수천 년이나 인간을 기만해 온 존재들이 아닌가.
성녀 역시 거대한 체스판의 말일 뿐, 정작 다섯 대악마를 모두 처치하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안 갈 수가 없군.”
지금껏 그래 온 것처럼, 용사는 또다시 성검을 허리춤에 꽂아넣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렸다. 수백 번의 죽음을 함께한, 최초의 동료가 체념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만의 고르존, 불화의 모데움, 분노의 발몬, 죄악의 베리알, 공허의 아스메라우스.”
“······.”
“처음 약속대로, 나는 저 모든 대악마를 처치할 겁니다.”
성녀의 흰 손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돌아선 고드는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높은 천상, 저 음험한 대천사들과 이 세계가 감춘 비밀을 알아내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지구로 귀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봐요, 용사님.”
“아리아 리버롯, 신실한 천상의 종이여. 나는 당신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등 뒤에 있음에도 성녀가 고개를 떨구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함께 싸운 동료이자, 이 세계로 와서 처음 사귄 친구라면 믿을 수 있겠죠. 앞으로도 뒤를 맡기겠지만······.”
고드는 반쯤 뒤를 돌아보았다. 각자의 비밀을 숨긴, 두 쌍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언젠가, 선택의 순간에 올바른 결정을 내리리라 믿습니다.”
그것이 누군가를 향한 배신일지라도.
*
“와, 이거 진짜 미쳤네.”
박건의 팬카페.
‘열혈건이’ 1기 멤버이자, 이제 엄연한 개국공신인 부매니저 한지영은 스마트폰을 보며 탄성을 올렸다.
동네가 같아, 자주 놀러오는 다른 부매니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왜? 촬영장 새 움짤 떴어?”
“아니, 팬카페에 오빠가 연재하는 소설 있잖아, 어제 두 편이 연달아 올라왔는데··· 진짜, 무슨 판타지 소설 뺨쳐.”
박건이 직접 연재하는 ‘철왕국 이야기’는 팬이라면 누구나 안다.
기사화도 몇 번 되었고, 배우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라며 인터뷰에서 언급했기 때문이다.
부매니저가 입맛을 다시며 제 휴대폰을 켰다.
“아, 나도 다시 달려야겠다. 하도 감질나서 묵혀 놨었거든.”
“당장 봐, 언니! 이게 요즘 본 소설들 중 제일 재밌다니까? 이러다 우리 배우가 각본에 주연까지 맡으면······.”
신나게 행복회로를 굴리던 한지영이 돌연 말을 멈췄다. 왜, 또? 동료의 물음에, 그녀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중얼거렸다.
“근데 거기, 뉴질랜드 촬영이 벌써 끝났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