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86)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86화(186/199)
밝혀지는 비밀 (4)
건은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주신의 서’ 속 황제, 맥클레인 자바스런티의 얼굴이었다.
그다음은 뒤쪽의 배우들··· 더 뒤편에는 촬영감독들과 스탭들이 보였다.
언제 기억이 흐릿했던가? 싶을 만큼 평소와 같은 현장의 풍경이었다.
저 모두가, 멈춰 있는 것만 제외한다면.
“맥클레인.”
시험 삼아 불러 봤지만,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와 대사를 주고받던 헐리우드의 노배우는 돌처럼 굳어 있었다.
건은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벌린 맥클레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환상은 아닌데.’
용사의 오감은 이곳이 현실이라고, 철왕국의 환영이나 꿈이 아니라고 말한다.
허나 바람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태풍의 눈 속,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다.
그는 즉각 결론을 내렸다.
‘차원의 틈새가 벌어졌군. 이쪽과 저쪽, 세계끼리 연결된 거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마지막 기억을 되찾은 지금은 알 수 있다.
다섯 번째 대악마,
아스메라우스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 다섯이란 숫자는 미끼였을 터. 네 번째 순서, 베리알까지가 대천사들이 안배한 용사의 시련이자 하나의 여정이었을 것이다.
-용사여, 스스로를 믿는가?
-무슨 소리냐?
-너의 믿음이 실존함을, 네가 믿는 것들을 믿는가? 그렇지 않다면······.
-헛소리, 그만 죽어라.
-크흐흐···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
-나는, 진실이다.
안개가 사라진 머릿속에, 오만의 고르존과 나눴던 대화가 뒤늦게 떠올랐다.
당시에는 그저 현혹시키기 위한 말들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일종의 메시지였다. 다른 차원으로 끌려온 후배에게 보내는.
-하나만 묻지.
-용사여, 나는 몇 번째인가?
-아직··· 때가 도래하지 않았군.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지던 대악마, 1회차가 지나자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던 그의 적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간다.
-빛을 경계하라.
-성녀는 알고 있다.
모데움과 발몬, 베리알 역시 어느 시대엔가 소환되었던 용사였을 것이다.
그들 또한 박건 자신처럼 악마들과 싸웠을 것이고, 필요가 다한 뒤 모종의 과정을 거쳐 대악마로 변했을 터다.
베리알을 처치하자마자 하늘에서 내려오던 천사들을 생각하자 소름이 돋았다.
존재하지도 않는 아스메라우스를 쫓는다는 명목으로, 그대로 드높은 천상까지 끌려갔더라면······.
“···빌어먹을 자식들.”
악문 잇새로 욕설이 새어나온다. 한 세계를 지켜야 할, 신에 준하는 힘을 가지는 이들이 어찌 저리도 추악하단 말인가.
마지막 순간, 성녀가 손을 쓰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당했을지도 모른다.
‘뭘 한 거지?’
모든 기억이 되살아난 지금도, 그 순간은 정확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스루엘의 속박이 부서졌고, 대천사들의 빛무리가 일제히 흩어지면서······.
눈을 떠 보니 지구였다. 군복을 입은 얼굴들이 그를 내려다보는 가운데, 누구인지 모를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젠가, 다시.
마법이었나, 아니면 금지된 비술? 그를 다시 보낸 것이 성녀라면, 저쪽 세상에 남겨진 그녀는 어떻게 된 건가?
현실감이 상념들을 몰아낸다. 고개를 한 번 떨친 뒤, 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은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할 때였다.
‘내가 전이됐던 것처럼, 저쪽에서 문을 열고 오는 것도 가능하다면······.’
대천사들의 말에 따르면, 이미 철왕국이 있는 저쪽 차원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생명을 다해 가는 세계와 도주한 용사. 헌데 그런 상황에서, 만약 놈들이 이쪽의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면?
“···전쟁이 벌어지겠군.”
존재를 지속시키기 위한 절대자들의 욕망은 지겹도록 경험한 바 있다. 더불어 목적을 위해 어떤 악행까지 불사하는지도.
건이 감았던 눈을 뜨자, 검붉은 기운이 주먹부터 팔뚝까지 감싸며 타올랐다.
만에 하나··· 그 망할 비둘기들이 정말로 넘어올 경우, 예전에 진 빚을 이자까지 쳐서 갚아 줄 작정이었다.
‘설령,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아직도 세계는 멈춰 있었다. 건이 소품용 장검이나마 옛날처럼 둘러멨을 때였다.
“용사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용사님.
아리아 리버롯, 철왕국의 성녀는 늘 그렇게 그를 부르곤 했다.
-왜 부릅니까?
-그렇게까지 착하게 살 필요 없다구요. 아니, 본인 팔이 날아가는데 병사 한 명 살리겠다고 거길 뛰어들어요?
-어차피 성녀님이 재생시켜 주시잖습니까.
철왕국 전이 초기. 이제 막 오만의 고르존에게 도전하던 시절이었다.
초보 용사는 첫 번째 대악마 직전까지 가는 것도 힘겨웠다.
부상당한 그의 위로 몸을 굽힌 채, 신성력을 집중하던 성녀는 대뜸 인상을 썼다.
-···죽은 사람은 저도 어떻게 못 해요. 그보다 무슨 철인이냐고요. 고통도 뻔히 느끼면서, 뭐 그렇게 아픈 걸 모르는 사람처럼······.
-아프죠.
-······?
-그래서 구하려고 하는 겁니다. 내가 나서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은 더 괴로울 걸 아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윤기가 흐르던, 백금발이 신경질적으로 찰랑였다.
그러나 그 속의 눈은 묘한 온기를 담고 있었다.
-말이라도 못 하면, 진짜.
이후··· 수많은 싸움을 거듭하면서, 이성은 마모되고 본능만 남는 와중에도 성녀는 그의 뒤를 충실히 지켰다.
때로는 함께 죽을 때도, 이따금씩은 그를 구하고 희생할 때도 있었지만 하는 말은 늘 같았다.
-성녀님! 이봐요, 아리아!
-···이름으로, 콜록. 부르지 말라고 했죠.
-왜 이런 짓을 한 겁니까. 나 대신 뛰어들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푸흡, 어떻게 그래요.
-뭐라고요?
대(對) 발몬 전.
21회차 시도였던가. 반신이 폭사당한 채로, 성녀는 피 섞인 기침을 토하며 웃었다.
-나도 얘기했잖아요. 매 순간, 당신은 한 발짝이라도 더 나가야 한다고.
-······.
-그래야, 이 지독한 굴레를 끊을 수 있어요.
이제 알 수 있다. 아니, 확신할 수도 있다.
회귀 전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은, 박건 혼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시간들을······.’
죽음, 싸움, 그리고 또다시 죽음.
절망과 분노··· 체념으로 얼룩진 철왕국에서의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평범한 특수부대원을 용사로 바꿔 놓기 충분했다.
지구로 귀환한 뒤, 한 적조차 없던 연기가 가능했던 이유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무수한 시간 속, 생사를 넘나들며 벌여 온 사투가 영혼 속 깊이 각인되었기에.
그 긴 세월 동안 인간 박건―용사 고드를 미치지 않게 해 준 존재가, 지금 눈앞에 서 있었다.
“···아리아? 어떻게······?”
여전히 시간은 멈춘 채였지만, 돌연 나타난 백금발의 성녀는 짓궂게 미소지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했었잖아요. 조금 늦긴 했지만.”
그제야 목소리가 떠올랐다. 대천사들의 빛무리가 부서지면서, 차원의 틈새로 밀려나가는 그에게 들려왔던 전언이었다.
언젠가, 다시.
영원히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옛 동료는, 용사의 감정마저 뒤흔들어 놓았다. 건은 흐려지는 눈앞을 문지르고 물었다.
“어떻게 온 겁니까. 아니, 그보다 이곳은 현실··· 지구가 맞습니까?”
성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금은 용사님이 매번 보던 철왕국의 환상도 아니고, 저 역시 기억 속에만 남겨진 망령이 아니랍니다. 차원의 흐름이 뒤섞이며 잠시 두 세계선 속 시간이 맞닿았을 뿐. 잠시 후면 이분들도 원래대로 돌아갈 거예요.”
피터 숀도, 맥클레인 자바스런티도, 함께 연기하던 다른 배우들도 아직껏 그대로였다.
건은 멈춰 버린 이쪽 세계의 동료들을 둘러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두 세계선 속 시간이 맞닿았다면, 지금 철왕국은······.”
“멈춰 있죠, 이곳처럼.”
성녀의 말투는 예전과 똑같았다. 높지도 낮지도 않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지만 성가(聖歌)를 읊듯 매끄러웠다.
놀랄 새도 없이 다음 말이 흘러나왔다.
“제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용사님을 보내고 나서, 지금까지 쭉.”
건은 눈을 깜빡였다.
“날 귀환시킨 건 역시 당신이었군요.”
“네. 그날··· 베리알을 처치하고 나서 하늘이 열렸을 때, 본능적으로 직감했어요.”
“놈들이 우리 뒤통수를 치리란 걸?”
본래는 저쪽의 말투가 훨씬 괄괄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작게 웃은 성녀가 말했다.
“꼭 저처럼 말씀하시네요. 맞아요, 보통 세 대천사가 함께 움직이면 강대한 물리력··· 또는 의견을 합쳐야 할 사안이라는 뜻이니까. 다섯 번째 대악마, 아스메라우스에 대해 아무 정보가 없다는 것도 쭉 의심스러웠고요.”
“그럼, 그 전부터 날 우리 세계로 돌려보낼 수 있던 겁니까?”
“아뇨. 그건 도박이었어요.”
고개를 저은 성녀는 말을 이었다.
“이미 아시겠지만, 저희 세계엔 오래된 비술들이 많았어요. 다른 차원의 용사 후보를 이쪽 차원으로 전이시키는 마법부터··· 망각의 타리엘이 만든 기억의 비술도 그중 하나였죠.”
“기억합니다. 나한테 안 걸렸다던.”
“맞아요. 용사의 정신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대천사들의 충실한 종이 되게 하는 역겨운 족쇄였죠. 용사님이 걸리지 않았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시공의 오비엘이 온 힘을 쏟아 차원에 균열을 만들었고, 망각의 타리엘은 기억의 비술을 창조했다··· 철왕국에서 들었던, 대천사의 웅웅거리는 파장이 불현듯 떠올랐다.
“만에 하나,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용사님이라도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스루엘은 음험한 사기꾼이니까, 마지막 대악마를 잡더라도 약속을 안 지킬 것 같았거든요.”
건은 짐짓 삐딱하게 팔짱을 꼈다.
“성녀님도 그 사기꾼이랑 한편 아니었습니까. 처음부터 다 알고 계셨을 텐데요.”
“···부정하진 않을게요. 용사님을 저 세계로 소환해서, 저들의 목적에 동참시킨 건 저니까. 하지만 항상 생각했어요.”
“뭘 말입니까?”
“제 육체가 불타고 영혼이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용사님만큼은 무사히 원래 세계로 보낼 거라고. 설령 신을 배신하는 한이 있어도.”
두 사람은 불과 몇 발자국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건은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말했다.
“너무 늦었지만, 고마웠습니다.”
성녀는 고개를 모로 꼰 채로 대꾸했다.
“고맙긴요. 잘 사는 사람 납치해 와서 할 짓 못할 짓 다 시켰는데.”
“어쩔 수 없죠. 제가 필요했잖습니까.”
“···진짜, 원래 세계로 돌아와서도 그놈의 성격은 똑같네요. 시간도 꽤 지났을 텐데.”
“사람은 쉽게 안 바뀌거든요.”
동시에 웃어버린 뒤, 두 사람은 촬영장을 걸으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녀는 멈춰버린 촬영장, 그 중에서도 실제처럼 만들어 놓은 세트에 관심을 보였다.
“와, 이건 또 뭐예요? 여기도 악마가 있나?”
“악마가 아니고··· 일종의 연극이죠. 제가 주인공이고, 저기 있는 저 배우가 또 다른 주인공이 되어 대립하는 겁니다.”
“저기 있는 시커먼 것들은?”
“카메라라고, 화면 속에서 우리를 다시 볼 수 있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화면은 또 뭐······.”
빈말로라도 좋은 설명은 아니었지만, 성녀는 나름대로 이쪽 문화를 이해한 것 같았다.
그녀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여기저길 둘러보다가 건이 걸친 망토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옷이 잘 어울리네요. 우리 세계에 있을 때도 이런 망토를 입었는데.”
“어쩌다 보니 또 입게 됐습니다. 칼도 소품이지만 성검이랑 생김새가 비슷해요.”
신기해, 신기해, 연발하며 손을 내밀던 성녀의 표정이 문득 굳었다. 내민 손끝이 건의 망토를 그대로 통과해 버렸던 것이다.
“······.”
건의 눈동자가 커지는 와중, 그녀는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네요.”
“남은 시간이라면······.”
“이제 곧, 저쪽 세계는 무너질 거예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