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87)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87화(187/199)
밝혀지는 비밀 (5)
* * *
세계는 위태롭다.
기댈 수 있는 존재는 용사뿐.
만약 다섯 대악마를 물리치지 못한다면, 대륙은 쪼개지고 인간들은 멸망해 예전의 무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생소한 이야기는 아니다. 전이된 뒤, 철왕국의 거리에서 음유시인들이 부르던 노래를 그도 익히 들었기에.
-용사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 세상을 구해 주십시오!
-점술가 할매가 그랬습니다! 저 악마 놈들이 점점 세력을 넓혀서, 이곳 왕성 앞까지 오게 되면 세상이 무너진다고요!
-이제 틀렸어··· 우린 끝이라고······.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딱히 두려움은 없었다. 만약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 한들 그는 똑같이 싸웠을 것이다.
사람들을 위해서, 또 이 세계를 위해서.
그렇기에 수많은 죽음을 넘었었는데, 갑자기 세계가 무너진다는 건······.
“용사가 악마를 물리치지 못하면 땅이 쪼개지고 하늘이 내려앉는다. 그건 음유시인들의 괴담 아니었습니까?”
“괴담은 아니죠. 완전히 일리 없는 헛소리도 아니고.”
성녀의 답엔 망설임이 없었다. 건은 미간을 좁혔다.
“그럼 설마, 정말로 대악마들을 시간 내에 처치하지 못해서······.”
“아뇨. 저 때문이에요.”
“예?”
“용사님을 이 세계로 돌려보낸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요?”
건은 기억을 더듬었다.
천사들이 내려와 그를 데려가려고 했고, 허공에 묶인 찰나 성녀가 눈을 깜빡였고··· 그 이후 빛무리가 부서져나갔다.
눈을 뜨니 이미 지구에 와 있었다.
“마지막 수신호, 아직 기억납니다. 성녀님이 한 게 아닙니까?”
“맞아요. 제가 보냈죠.”
“그런데 저쪽 세계가 왜 무너진다는······.”
성녀, 아리아 리버롯은 대답 대신 멈춰 버린 세트장을 둘러보았다. 이 세계의 하나하나를 모두 눈에 담으려는 듯이.
“용사님을 저쪽 세계로 데려온 건, 차원이동과 관련된 비술이에요. 파장이 맞는 이를 강제로 전이시키는 금단의 마법이었죠.”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내 동의도 없이 끌려갔었으니까.”
“···데려올 때가 그랬는데, 보낼 때라고 달라지겠어요?”
건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날 보내느라 희생을 감수했군요.”
“그렇게 볼 필요 없어요. 제 전 대··· 그리고 그 전 대에 걸쳐, 수많은 용사들을 이쪽으로 소환했던 대가기도 하니까.”
“대가?”
성녀는 숨을 한 차례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금단의 비술엔 늘 대가가 따라요. 대천사, 저 어마어마한 권능의 존재들조차 거대한 순리를 거역할 수는 없었죠.”
아스루엘, 마테카엘, 프라우리엘··· 세 대천사는 사실상 신에 준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조차 다가올 멸망을 막지 못했단 말인가?
건은 묵묵히 옛 동료의 말을 기다렸다.
“몇 번··· 아니, 어쩌면 수십 차례에 걸쳐 이세계인을 소환하는 동안, 차원의 틈새엔 막을 수 없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용사님을 전이시킬 때가 거의 한계에 가까웠으니까. 그런데도 아스루엘은 더 기다릴 수 없다며 의식을 강행시켰죠.”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그가 도착했을 때, 이미 철왕국은 침몰을 앞둔 난파선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지금 저쪽 세상은 어떻게 된 겁니까. 혹시 이쪽 세계의 시간이 멈춘 것도······.”
“맞아요. 용사님을 돌려보낸 뒤, 성공 여부를 확인할 새도 없이 차원이 열렸어요. 대천사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외계의 적들이 나타났고, 결국 세 대천사는 시간을 정지시켰어요.”
외계의 적. 대악마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차원과 행성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포식자들에 대해선 이미 들은 바 있었다.
성녀님은 어떻게 빠져나온 겁니까? 눈빛에서 의문을 읽었는지, 성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제가 흘려보낸 의식의 일부예요. 용사님의 흔적을 따라, 차원을 표류하다가 마침내 이곳까지 당도했고. 마지막으로 전할 말이 있었거든요.”
침묵이 흘렀다. 돌고 돌아 옛 동료와 마주했건만, 예나 지금이나 그의 힘으로는 성녀를 구원할 수 없었다.
건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
성녀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반문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었다.
“정의롭고 싶었고, 사람을 돕고 싶었죠. 그래서 철왕국에 소환됐을 때··· 내심 기뻤습니다. 어리고 미숙한 신념이나마 답을 얻은 것 같아서.”
첫 죽음 이후, 용사 고드를 움직였던 동력은 바로 인간이었다.
저쪽 세상에서 기다리는 가족, 이쪽 세상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민중들, 그리고 바로 옆에서 함께 싸우는 동료들이 있었기에―
“그래서 미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막과 대수림, 마경을 수백 번 넘나드는 동안에도 하나만 생각했죠. 반드시 당신을, 그리고 이 세계를 구해내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용사님.”
“덕분에 많은 걸 배웠습니다. 이곳에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을 만큼.”
성녀는 말없이 손을 허공에 저었다. 그러자 금빛 가루가 날며 사람의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귀준 실장.
-······어, 예?
-박선 매니저 친형입니다. 내 동생한테 한 상습적 괴롭힘, 폭언, 구타에 대해 사과하세요.
지구로 귀환한 첫날, 로만 엔터테인먼트로 찾아가 오귀준을 만났던 일.
-이겁니다, 바로 이거예요! 안 그렇습니까, 은 작가님?
-촬영감독님, 잘 찍혔어요? 무술감독님, 진짜 돌아가신 거 아니죠? 나 보다가 소름이 돋아서 일어나 버렸다니까. -배우님은 꼭 뜨실 겁니다. 오늘 촬영분 방영될 날만 기다릴게요.
나종모 PD와 은희욱 작가, 수많은 보조출연자들과 처음으로 만났던 ‘서울의 개’.
-궁금한 게 있는데, 이장미 씨는 지금까지 몇 번 실패했습니까?
-오디션은 백 번 넘게 떨어졌고요. 붙고도 기회를 못 잡은 건 이십 번 정도, 자잘하게 망한 걸 다 합치면 그 두 배는 되겠네요.
-제 반도 안 되는군요.
-뭐라고요?
-아니, 반의 반의 반의 반도.
충무로에서 버림받은 감독과 현실의 벽에 막혀 꿈을 접었던 배우들.
그들로 외인구단을 결성해, 실패할 거라던 세상에게 보기 좋게 한 방을 먹여 준 ‘흑의사제’.
그 뒤에도 ‘회색도시 팀장님’과 다큐멘터리 ‘불의 길’, 첫 사극이었던 ‘백정과 장군’에 이어 ‘망나니 회귀자가 돌아왔다’까지······.
빠르게 흘러가던 영상들은 ‘주신의 서’ 촬영장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하얀 빛이 되어 흩어졌다.
생긋 미소 지은 성녀가 말했다.
“여기서도 용사가 따로 없으시네요. 좋은 동료들도 변함없이 잘 모으시고.”
건은 어깨를 으쓱였다.
“배운 게 어디 가겠습니까.”
“배우라고 했나? 음유시인이나 재담꾼보다 흥미로운 직업 같던데요. 매번 다른 사람이 되어 인생을 살아간다는 게.”
“철왕국 시절이 도움이 많이 됐죠. 수십 년을 살아왔으니까.”
“미안해요. 저 때문에······.”
“그래서 고맙다는 얘길 하고 싶었습니다.”
굳었던 성녀의 표정에 의아함이 번졌다. 건은 두 손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지구로 돌아오고 나서, 제 인생은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예전에는 지키지 못했던 동료를 지킬 수 있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엔 수많은 방법이 있더군요.”
“······.”
“성녀님이 절 소환하지 않았더라면, 그 모든 것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철왕국으로 떠났던 용사행이 삶을 바꾼 셈이죠.”
호수처럼 새파란 눈이, 선명한 물기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얼른 고개를 돌린 성녀는 흰 팔로 눈가를 문질렀다.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성녀가 뭔가를 말하려 할 때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아래쪽을 향했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차츰 빛으로 화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집중하려는 듯, 잠시 이마를 찌푸리던 성녀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시간이 없어요. 육체를 떠난 의식은 금방 길을 잃거든요.”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원래라면 다시 멈춘 세계에 갇혀서, 차원의 균열이 닫히기만을 기다리겠지만······.”
이제 성녀의 오른쪽 팔은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단언했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천사들에게 끌려가 빛의 감옥에 갇히게 되겠죠. 그래서 저는 마지막 모험을 할 거예요.”
“모험?”
“네. 언젠가 균열이 닫히고 아스루엘과 대천사들이 멈춘 시간을 풀 때, 지금 온 통로로 의식과 육체를 함께 전이시킬 생각이에요.”
건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게 가능합니까? 아니,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지금은 어려워요. 이미 차원의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모돼서, 여기까지도 오지 못할 뻔했거든요. 두 세계의 시간축이 다르다지만··· 아마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건은 눈앞의 성녀를 보았다.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전우이자, 어떤 애정을 주고받았던 상대이자, 그를 이곳에 있게 해 준 은인이 사라지고 있었다.
“종종, 편지를 받곤 합니다.”
“편지?”
“잘 보고 있다고, 제 모습을 보며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편지를. 덕분에 삶이 행복해졌다는 이야기도 수없이 들었죠.”
“···용사님.”
“지금껏 고생해 오신 부모님, 제게 헌신적이었던 동생, 소중한 옛 친구들··· 과분한 사랑을 보내 주는 모든 이들까지.”
전직 용사의 손, 지금은 명실상부한 천만 배우의 손이 성녀의 손이 있는 자리를 쥐었다.
고드―박건은 빛을 향해 이야기했다.
“성녀님 덕분에, 그들에게 보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용사행은 실패하지 않았어요.”
성녀가 환히 웃은 순간, 흩어지던 빛이 가속화되며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건은 눈부신 입자 속에서 목청껏 외쳤다.
“아리아!”
-이제야 제 이름을 부르시는군요.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형체가 흩어진 듯, 목소리는 먼 곳에서 들려왔다.
달려가려 했으나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건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동료의 마지막 말을 들었다.
-언젠가, 꼭 찾아가겠습니다.
빛이 흩날렸다. 처음 차가운 돌바닥에서 눈을 떴을 때처럼, 웃음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리고 지금 모습. 잘 어울리시네요.
*
“···뭐지?”
‘주신의 서’ 메인 촬영감독은 눈을 깜빡거렸다.
분명 방금까지 카메라를 잡고 있었는데, 긴 잠에서 깬 것처럼 몸이 뻐근했다.
옆을 보니 다른 촬영감독들도 비슷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에릭, 자네도 느꼈나?”
“어어··· 그래, 이거 말이지?”
“거 참 기분이 묘한데. 단체로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촬영감독 중 한 명이 문득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박은? 방금까지 여기 있었는데······.”
“저기 있잖나.”
어느 새 옆으로 온 맥클레인이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도 원로배우를 향해 돌아갔다.
주름진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햇볕이 들어오는 왕좌 앞에 박건이 서 있었다.
“······.”
방금 전 시간이 멈춘 기분은 뭐였는지, 어떻게 이 자리의 모두가 함께 느낀 것인지, 주연 배우는 왜 저곳에 혼자 있는지······.
수많은 의문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고개를 반쯤 숙인 검은 망토의 사내만 바라볼 뿐이었다.
영겁처럼 느껴지는 몇 초가 지나고, 마침내 박건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모두들.”
비로소 용사의 업을 놓은,
배우의 목소리가 촬영장을 울린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