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92)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92화(192/199)
[외전] 배우 백하니 (1)* * *
눈처럼 흰 침대 위.
설산의 여왕처럼, 시트 속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여배우의 눈이 문득 떠졌다.
긴 속눈썹이 몇 번 깜빡거린 뒤, 풀려 있던 동공이 초점을 찾는다. 꿈결 속에서 연예계의 스타로 복귀할 시간이다.
배우, 백하니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몇 시지?”
대답할 사람은 없다. 애당초 이 넓은 아파트, 38평짜리 공간에 그녀 이외의 생명체는 반려동물조차 들이지 않았으므로.
청소부터 전자제품의 제어까지, 집안일을 도맡는 인공지능 로봇만 대꾸한다.
-오전 07시 22분입니다.
시간은 여유롭다 못해 남아돈다. 푹 자려고 해도, 스케줄이 있든 없든 7시 30분만 되면 떠지는 눈꺼풀이 원망스러울 때가 많다.
그녀에게서 답이 없자 인공지능이 스케줄을 읊기 시작했다.
-백하니 씨, 아침입니다. 오늘 등록된 일정은 11시의 인터뷰와 15시의 드라마 촬영, 그리고 중요 일정으로 20시의 가족 모임······.
“됐어. 나도 알아.”
대꾸한 백하니는 고개를 돌렸다. 베개 옆, 새로 데려온 점박이 캣봇(로봇 고양이)이 앞발을 핥고 있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이 어루만지자 캣봇이 기분 좋게 고롱거리는 소리를 낸다. 체온 없는 동료에게, 무심한 목소리가 떨어진다.
“너도 아는구나. 그렇게 해야 살아남는다고.”
집의 주인, 최근 가장 잘나가는 여배우의 인간 불신은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다.
불신? 아니, 사실상 혐오에 가깝다. 떠들썩한 파티보다는 혼자가 편하고, 인간과 교류할 바엔 기계를 들이고 마는 것이다.
-하니 씨, 고양이라도 키워 보면 어때? 반려동물이 그렇게 평정심에 좋대.
-저 우울증 아닌데요.
-아니, 하니 씨가 우울증이라는 게 아니라······.
-피디님도 그 기사 믿으세요? 제가 정신과 약 안 먹어서 이수련이랑 싸웠다는?
대본이 그나마 잘 빠져서 나가 봤더니, 미팅 자리에서 PD란 인간은 헛소리나 늘어놓았다.
나머지 제작진들도 입을 다문 채 지켜보는 와중, 그녀는 그 길로 이자카야를 나와 택시를 탔다.
“하, 쓸데없이 눈치는 좋아서······.”
데뷔 7년차.
여배우 백하니는, 어제도 또 싸웠다.
[백하니··· 이수련과 마찰, 촬영장에서 들렸다는 불협화음의 정체?] [더 치트, 또다시 내부 문제? 주연 여배우들의 ‘치맛바람’ 전쟁] [또다시 ‘불화설’ 휩싸인 더 치트··· 제작진도 배우들도 무응답] [종영 앞둔 더 치트, 불화설에도 시청률은 고공행진··· 마의 15% 벽 뚫나]소문은 본래 발이 더럽게도 빠르다. 이 바닥의 소문들은 더더욱.
어제 저녁 벌인 드잡이질이, 채 하룻밤도 지나기 전에 기사로 올라왔다.
당연히 커뮤니티도 불탔다. 잘 나가는 MBS의 인기 드라마, 종영을 앞둔 로맨스릴러 촬영장에서 싸움이 난 것이다.
거기다 당사자는 최정상의 주가를 달리는 여배우 두 명. 호사가들이 물고 뜯을 구석은 넘친다.
“아주 신들이 나셨네.”
중얼거리며, 백하니는 들여다보던 스마트폰을 던져 버렸다. 잠을 설친 뒷목이 뻐근했다.
‘야, 방금 뭐라고 했어!’
‘똑바로 하라고 했다. 왜?’
‘너, 내가 선배에 언니······.’
‘그건 관심 없고. 직원한테 지랄할 거면 안 보이는 데서 해, 내 앞에서 설치지 말고.’
사태의 발단은 이수련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다. 평소 오던 이가 독감에 걸려 급히 다른 사람이 왔고, 이수련은 촬영 내내 짜증을 냈다.
립 색깔이 뭐냐, 이걸 치크(Cheek)라고 한 거냐,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더니 급기야 사과하라며 무릎까지 꿇렸다.
보다 못한 백하니가 한 마디 했고, 이수련이 삿대질로 응수하면서 싸움이 벌어졌다.
“왜 괜한 사람 끌어들여서 기싸움을 걸어. 덤비려면 나한테 직접 덤빌 것이지.”
남 일에 신경 안 쓰는 성격이라지만, 이수련은 DG와 함께 기획사계의 양대산맥ㅡ 조이너스 소속 배우다.
대본 리딩 때부터 이쪽을 견제하는 티를 팍팍 내더니, 긁어도 반응이 없으니 애꿎은 직원에게 행패를 부린 것이다.
머리를 올려 묶은 백하니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잡티 하나 없이 투명한, 별명에 어울리는 흰 얼굴이 거울 속에서 그녀를 마주 봤다.
“···오늘은 운수가 사납네.”
*
두 시간 뒤, 로만 엔터테인먼트 본부장실.
“······.”
이성철 본부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의 사고뭉치를 쳐다보았다.
다리를 꼰 채, 그야말로 안하무인의 자세로 소파에 기댄 여배우가 뭘 보냐는 듯 물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응.”
“이상하네, 아닐 텐데.”
“아니긴 뭐가 아냐! 여기도 골치, 저기도 골치, 안 묻힌 데가 없는데!”
시시때때로 자리를 비우는 대표 대신, 소속사 연예인들의 관리는 본부장의 몫이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이성철 본부장이 불을 뿜는데도 백하니는 태연했다.
“본부장님, 그건 검댕 같은 거예요. 이쪽 일 하다 보면 안 묻는 게 이상한. 다 아시는 분이 왜 그러세요?”
“···됐고, 이유나 말해 봐.”
“무슨 이유요.”
“이수련이 머리채를 왜 잡았냐고. 그렇게까진 안 했잖아.”
백하니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걔가 먼저 덤벼서요.”
“아니, 그러니까 자초지종을 얘기해 보라고. 유 실장한테도 말하기 싫다고 돌려보냈다면서.”
이 본부장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빠졌다. 이쯤 되면 아무리 천하의 개망나니라도 묵비권 행사가 어려워진다.
신경질적으로 다리를 꼰 백하니는 전자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코디를 쥐잡듯이 잡잖아요. 삿대질에 쌍욕에, 나중 가선 무릎까지 꿇리던데. 그 꼬락서니 보기 싫어서 한 마디 했어요.”
“그쪽 스탭이랑은 알 바 아니잖아. 폭로든 신고든 당한 사람이 하게 내버려 뒀어야지.”
피식, 짧게 웃은 백하니가 말했다.
“그거, 저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스탭이 아니라 나한테 시비 건 거라고요. 괜한 코디 갈궈서 이쪽 기분 잡치려고.”
“······.”
이성철 본부장은 침음을 삼켰다. 단순한 기싸움인 줄 알았더니 발단부터 입맛이 쓰다.
결국 덩치가 문제다.
로만 엔터테인먼트가 선두주자들을 바짝 따라갈수록 견제도 심해진다.
이수련의 소속사 조이너스와 쌍벽을 이루는, 지저분한 소문들로 악명 높은 DG에서는 여론전까지 수차례 오간 바 있었다.
‘더블 캐스팅이라 좀 걱정했는데, 막판에 이런 불상사가······.’
회사 내 다른 배우들이었으면 큰 신경을 안 썼을 것이다. 어차피 홍보실이 발에 불나게 뛰며 치고받을 문제니까.
골치가 아픈 이유는 딱 하나, 하필 싸우고 돌아온 딸내미가 백하니라는 점이다.
“하니야.”
“네.”
“백하니.”
“말씀을 하세요, 불렀으면.”
“조금만 참으면 안 되겠냐? 똑같이 싸워도 욕은 우리가 더 많이 먹어. 뜨는 기사만 봐도······.”
“본부장님.”
말을 자른 백하니가 못박았다.
“그럴 거면 저 은퇴했어요. 한참 전에.”
“······.”
이성철 본부장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건 심지어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이다.
악덕 소속사들과 진흙탕 싸움을 벌였던 타 배우들과 달리, 백하니의 스카우트는 손쉽게 진행됐다.
-백 배우님, 왜 로만인 겁니까? 저희가 다 맞춰 드릴 수 있다니까요!
기존 소속사가 제시한 파격적인 조건들도 소용없었다. 온갖 프리미엄을 마다하고 로만에 들어오며, 백하니는 한 가지 조건만을 제시했다.
-착한 척은 못 해요.
-······?
-수익분배엔 별 관심 없고요. 알아서 작품 찍고 회사로 돈 벌어올 테니까, 어디 가서 착한 척 하라고 시키지만 마세요.
계약 테이블로 나왔던 로만 측 관계자들은 멍하니 서로를 마주 봤다.
그 ‘착한 척 시키지 말기’ 조항이 무슨 의미였는지는, 몇 달 뒤에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백하니가 유소년 야구단 투수였다는 사실도.
‘저거, 저놈의 성질머리······.’
데뷔 때부터 백하니는 유니크한 마스크와 놀라운 연기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쌈닭 기질로 포털을 장식하며 홍보실의 절규를 불러왔다.
-제가 그쪽 후배도 아닌데 왜 인사를 가요. 명절에 친척들도 안 본 지 오래거든요?
-야, 너 말 다 했어!
-안 했어요. 촬영 끝나고 뒷풀이랍시고 여배우들 좀 모으지 마요. 확 터뜨려서 촬영장 식구들 다 같이 실직시키기 싫으면.
할 말은 절대 안 참는 지랄맞은 성격에, 싸움을 걸어오면 피하지도 않는다.
방귀 좀 뀐다는 공중파 PD든, 군기 잡기로 유명한 중년 여배우든 예외는 없다.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쏟아내는 폭언에 당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이다.
백하니를 초기부터 담당했던 유준일 실장은 치를 떨며 공표했다.
-쟤요? 내가 백하니 맡고 나서부터 5키로가 빠졌어. 살아있는 다이어트 보조제라니까.
그렇다고 찾는 데가 없느냐, 그 반대다. 20대 여배우 중 백하니를 대체할 자원은 세 손가락도 꼽기 어려웠으니까.
자연스레 팬덤이 커졌고, 극성 안티들도 늘어났다. 모 연예지의 편집장은 백하니에 대해 제법 그럴듯한 순위표를 제시했다.
싸움 잘 하는 여배우 1위,
안티가 극성맞은 여배우 1위,
기자들이 싫어하는 여배우 1위.
이 본부장은 체념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하니야. 난 사람들이 네 진가를 알았으면 좋겠다, 응? 네가 성질은 더러워도 기은서나 오예지처럼 진짜 또라이는 아니잖니.”
“욕 같아서 기분 더러워요.”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야. 네가 조금만 얌전해지면 악플이 배는 줄어들걸.”
백하니는 코웃음을 쳤다.
“실컷 쓰라고 해요, 걔들은 교통사고가 나도 절 욕할걸요. 평소에 매니저한테 지랄해서 밤잠 설치게 한 죄라면서.”
“···아무튼, 기사는 웬만큼 막았어. 제발 종방까지만 별 탈 없이 넘어가 보자.”
“걔가 안 까불면요.”
“야, 백하니!”
호통을 쳐 봐야 들을 위인도 아니다. 백하니는 듣는 둥 마는 둥 시계를 보더니 일어섰다.
“갈게요. 오늘도 촬영이 길어서.”
문이 쌩하니 닫힌 뒤, 본부장실은 폭풍 후의 적막에 휩싸였다.
이성철 본부장은 가늘어지기 시작한 앞머리를 두 손으로 쓸어올렸다.
“쟤는 뭐, 언제 은퇴하려고 저러는 거야?”
*
과천의 대형 세트장.
‘더 치트’는 특수부대와 국정원, 초능력자들이 얽혀 펼치는 휴머니즘 첩보물이다.
작품 속 여주인공, 전 국정원 요원 최시하를 맡은 백하니가 냉담한 어조로 쏘아붙인다.
“왜 왔어요?”
“시하야. 다들 널 기다린다.”
“더 이상 우린 볼 일 없을 거예요. 김 선배도, 예전에 일하던 우리 팀 사람들도. 죄 많은 인간들 긁어모아 봤자 죄밖에 더 짓겠어요?”
힘을 빼고 던지는 대사지만, 그 안의 짙은 허무함은 렌즈 안에서도 절절히 느껴진다.
극의 초반부, 10대 후반으로 시작해 20대와 30대··· 마침내 40대의 주인공 역할까지 소화하는 디테일한 캐릭터 변화는 덤이다.
기에 눌린 남자 배우가 다음 대사를 어물거리는 사이, 백하니는 곧바로 애드립을 이어간다.
“봐요, 아직도 솔직하게 말을 못해. 내가 필요하다고,
“우리 조직이······.”
“그놈의 조직, 조직! 언제까지 구시대의 유물만 찾을 거냐고요. 그 시절, 우리 전우들은 아직도 포화 속에서 지옥불에 타들어가는데!”
여배우의 눈에서 불꽃이 튄다. 나이가 들어 보이기 위해 분장을 붙였건만, 정작 세월의 흐름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배우의 연기력이다.
‘그래, 이거지.’
메가폰을 잡은 ‘더 치트’의 총괄 프로듀서, 안현모 PD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런 애를 두고··· 누구, 이수련이랑 권하원? 걔들 둘로 드라마를 찍느니 방콕살이 석 달을 하고 말지.’
촬영 전, 캐스팅 과정에서 조이너스의 여배우들로 투톱을 세우라는 압박이 있었다.
그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수련까지는 OK, 하지만 권하원한테 최시하를 주면 이 작품은 무조건 나가리라고.
그리고 백하니는, 정체된 시청률을 거의 20% 가까이 끌어올리며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비록 촬영 중간중간 사소한 다툼이 있긴 했지만······.‘
‘뭐, 작품만 안 처박히면 됐지. 덕분에 화제성이랑 시청률도 알뜰하게 빨아먹었고.’
분량만 잘 뽑히면 배우들이 욕을 먹든 탭댄스를 추든 상관없는 것이 방송국 사정 아니던가.
씩 웃은 안현모 PD가 목소리를 높였다.
“컷!”
.
.
.
촬영 일정이 모두 끝난 뒤, 땀범벅이 된 조연출이 달려와 보고했다.
“감독님, 오늘 회식에 이수련이랑 백하니 둘 다 불참이랍니다!”
본인 씬이 끝나기 무섭게, 이수련은 자기 밴을 타고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안현모 PD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물었다.
“이수련이야 또 맞을까 무서웠을 거고··· 백하니는? 원래 얼굴만 비춘다고 안 했었나?”
“아, 중요한 식사 약속이 있었답니다.”
“식사 약속이라면······.”
조연출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요, 무슨 가족모임이라던데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