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193)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193화(193/199)
[외전] 배우 백하니 (2)* * *
한남동의 5성급 호텔.
VVIP들에게만 허락된, 프라이빗 라운지가 오늘은 통으로 마감되었다.
본래는 대관할 수 없는 곳이지만, 오너 일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초를 밝힌 긴 테이블 위. 둘러앉은 일가족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간다.
“···그래서, 언제 온다고 했지?”
“곧 도착할 거예요. 자기 말은 지키는 애니까.”
상석의 중년 사내가 입을 떼자, 왼쪽에 앉은 여자가 말을 받는다.
누가 봐도 눈이 확 뜨이는 미인이다. 분명 말투로는 부인 같건만, 좌우로 둘러앉은 아들딸들과도 나이차이가 얼마 나 보이지 않는다.
“시간약속에 늦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 언제쯤이나 철이 들는지.”
백하니의 아버지, 백서관이 중얼거린다. 오른쪽 자리에서 스테이크를 썰던 큰오빠 백훈이 무심하게 거들었다.
“그래도 마음을 많이 열었잖습니까. 예전에는 가족식사에 나오지도 않았으니까요.”
“글쎄, 그냥 자기 연예인 생활에 흠집 날까 기어나오는 거 아냐?”
“그러게. 그러면 칭찬해 줘야지. 우리 하니가 프로의식을 함양하다니.”
서열상 큰오빠의 바로 아래, 쌍둥이 자매 백란과 백희도 이야기를 나눈다.
본인이 들었다면 당장 와인잔이 날아왔을 내용이나, 이들은 태연하기만 하다.
“이번에 들어간 작품이··· 더 치트? 시청률 15%를 넘겼다던데. 확실히 재능은 있던 모양이에요.”
“영화도 두 개나 천만을 넘겼고. 요즘은 모임 사람들도 하니 얘길 하더라.”
“어, 오빠한테도? 내 친구들도 사인 좀 받아 달라던데, 동생이랑 연락 안 하고 산다니까 믿질 않는 거 있지. 연예인이랑 가족들 사이 나쁜 것도 옛날 일 아니냐면서.”
자식들과 부인이 막내딸 칭찬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와중, 말없이 고기만 씹던 백서관이 입을 열었다.
“들어온다더냐?”
“네?”
“그 애가 집으로 들어온다는 말을 했는지, 그걸 묻는 게다.”
“글쎄요, 그런 말은 없던데요? 자기 발로 나간 애가 굳이 올 것 같지도 않고.”
그때, 저 멀리서부터 라운지 바닥을 찍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와이드팬츠에 킬힐, 셋업수트 차림의 백하니가 라운지 입구에서 등장했다.
“······.”
원래부터 비주얼이 좋은 가족이라지만, 현업 여배우에 비할 바는 아니다.
촬영장에서 바로 온 덕에 헤어며 메이크업까지 풀인 상태. 막내를 훑어본 언니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러게, 이럴 때 타이밍은 잘 맞춰.”
언니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빈 자리에 백을 집어던진 백하니는 다리를 꼬고 앉는다.
자신은 물론이고 부모님 쪽에도 인사가 없자, 백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늦었구나.”
“응.”
“촬영이 있었던 게냐?”
“뭐, 그것도 그렇고. 차가 좀 막혀서.”
근 일 년 가까이 못 본 가족치곤 대화 속 냉기가 뚝뚝 흐른다. 백하니의 양어머니, 서현숙이 품위 있는 어조로 끼어든다.
“요즘 또 하니가 잘 나가잖니. 매일매일 촬영 때문에 바빴을 거야, 그렇지?”
“그래도 모임은 일찍 와야지. 아빠가 약속 늦는 거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
“그러게. 자기 스케줄만 스케줄인가.”
쌍둥이 언니들이 한 마디씩 보탠 뒤, 백하니는 그제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앵무새 세트도 와 있었네?”
“···뭐?”
“야,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미안. 오랜만에 봐도 똑같아서.”
앵무새가 봤더라도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임은 알았을 것이다.
또다시 발끈하려는 동생들을 백훈이 말렸다.
“좋은 날에 왜들 그러냐. 하니 너도, 아버지 생신인데 오늘만큼은······.”
“어휴, 여기도 앵무새야. 아빤지 오빤지 구분이 안 가게.”
“백하니.”
“왜. 나 이럴 거 알고 불렀잖아?”
휙 쏘아붙인 백하니는 상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와중에도 아버지 백서관은 새 접시에 담긴 스테이크를 써는 중이었다.
한 조각을 썰고, 입에 넣어서 씹고···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르고서야 백서관의 입이 열렸다.
“기사를 봤다.”
백하니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 개소리 얘길 할 거면······.”
“동료 머리채까지 잡았다던데, 집안 망신을 시키려고 뛰쳐나갔더냐?”
“저기요, 백 사장님.”
백서관의 미간에도 미세한 균열이 간다. 중견기업의 대표지만, 사장이나 대표보다 회장님 소리를 좋아하는 평소 품성 탓이다.
백하니는 불손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덜 떨어진 년이랑 묶지 마세요. 동료는 무슨 동료야, 연기도 더럽게 못하는 애한테.”
“동업자정신이 부족하구나.”
“그건 원래부터 없었고. 아빠가 뒤통수 친 삼촌들을 하도 많이 봐서.”
보고 배운 게 도둑질이거든요. 기어이 한 마디 덧붙인 백하니는 폭탄을 터뜨렸다.
“아무튼, 이제 저 찾지 마세요.”
“뭐라고?”
“못 들었어, 오빠? 나 찾지 말라고. 이제 아빠 생신이고 가족 모임이고 안 올 거야. 할머니는 알아서 찾아뵐 테니까, 괜히 그 핑계로 불러낼 생각 말고.”
“야,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축하해 드려도 모자랄 판에!”
쌍둥이 언니 백란이 눈을 부라리는 것도, 큰오빠가 아버지처럼 긴 한숨을 내쉬는 것도 익숙하다.
백하니는 테이블에 둘러앉은 가족들을 한심한 눈빛으로 둘러보았다.
“여보, 굽기는 입에 맞으세요? 오늘 주방 컨디션이 평소랑 조금 달라서······.”
“나쁘지 않아. 주 셰프가 독감이라더군.”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풍경이다. 눈 밖의 자식들을 철저히 방치하는 아버지,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젊은 양어머니.
“오빠가 뭐라고 좀 해봐! 오냐오냐만 하니까 쟤가 막 나가잖아!”
“작은언니가 말 잘했네. 쟤는 오늘도 시비 걸려고 온 거라니까.”
“잠자코 좀 기다리거라. 아버지가 아무 말씀도 안 하고 계시잖니.”
한참 나이를 먹고도 막냇동생을 질투하는 쌍둥이 언니. 흡사 꼭두각시처럼, 사업을 물려받으며 가장(家長)의 페르소나에 물들어 버린 큰오빠까지.
‘···지긋지긋해.’
백하니의 입매에 실소가 맺힌다.
여태 아버지의 통제욕에 얼마나 시달렸던가. 어린 시절, 학교를 다녀오면 보모에게 감시를 받으며 공부해야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관심도 없던 전략기획실로 인턴쉽을 준비하라기에 참지 못하고 폭발했으니까.
반항한 결과는 철저한 배제. 백서관이 만든 작은 왕국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녀를 지켜준 이는 누구도 없었다.
“···지금 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면 없는 일이 되겠냐고.”
이를 악문 혼잣말에, 가족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백하니는 백을 둘러메고 일어섰다.
“계속 그렇게 살아. 아빠가 하라는 대로, 떨어지는 떡고물 주워먹으면서. 그나마 오빠는 부사장 소리라도 듣지, 언니들은 평생 비서만 하다가 유산 좀 받고 은퇴하게 될걸.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오빠 들러리인 거, 니들도 잘 알잖아.”
“뭐, 무슨······.”
쌍둥이는 화도 채 못 내고 부들부들 떨었다. 싸늘한 눈초리가 옆으로 옮겨 갔다.
“새엄마··· 아니, 새언니. 표정관리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이젠 볼 일도 없을 텐데, 괜히 스트레스 받아서 주름살 늘어날라.”
“······.”
서현숙의 고운 얼굴이 구겨지는 사이, 부녀(父女)는 서로를 마주봤다.
깊이 파인 골은 세월의 풍화 속에 더더욱 깊어진다. 백서관이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백하니는 냉정하게 대화를 끝냈다.
“이상한 인터뷰들 하지 마요. 고소할 거니까.”
*
“크, 역시 이 맛이야.”
로만 엔터테인먼트 사옥.
오늘은 주요 인사들이 많이도 모였다. 최필립에 구신승, 거기에 홍보실을 들러 공기형 팀장과 함께 나온 진지유까지.
각자의 매니저에 A&R팀 직원들도 몇 명 둘러앉아, 때 아닌 워크샵 분위기다. 커피를 쭉 들이킨 유준일 실장이 물었다.
“그럼, 일단 여기 모인 인원들은 다 간다는 거죠? 벌써 사흘 뒤가 워크숍 당일인데.”
“난 못 가. 그날 충남까지 가야 돼서.”
한 손을 든 최필립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럼 필립이랑··· 또 결원이 누구야?”
“백하니, 걔도 안 가겠지. 촬영 아닐 때 그런 데 끼는 거 봤어?”
“그건 당연한 소리고. 본부장님은 아예 말도 안 꺼냈다더라, 또 난리칠까 봐.”
사흘 뒤, 회사의 친목도모 겸 대형 워크숍이 열린다. 스케줄을 확인하던 진지유도 덧붙였다.
“하니 언니가 사람 많은 거 싫어하잖아요. 아마 안 올 거예요.”
“차라리 그게 나아. 나랑 지유, 둘 다 가는데 걔까지 오면 맥주병 깨질걸.”
최필립의 말에 다들 공감하는 반응이었다. 유 실장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니들은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인 거야?”
“난 그냥 싫어.”
“아니, 하니 걔가 뭘 시키지만 않으면 나름 얌전하거든? 공 팀장님도 알죠? 백하니 평소에 의외로 멀쩡한 거.”
평소 모습보다 기사에 뜨는 경우, 즉 싸움박질을 덮으려 동분서주하는 곳이 홍보실이다.
공기형 홍보팀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저희 쪽은 평소 모습보다 기사 안 터지는 게 더 중요해서······.”
“아무튼 필립이는 이해가 가. 얘도 성질이 거의 벌꿀오소리라, 하니 같은 타입이랑 안 맞을 수도 있지.”
“응, 땡큐.”
로만 초창기, 대부분의 배우들을 관리해 봤기에 할 수 있는 농담이다. 최필립이 히죽 웃는 사이 화제가 진지유에게로 돌아갔다.
“근데 지유랑도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잖아. 한 하늘에 두 태양은 없어서, 뭐 그런 건가?”
진지유는 코를 장난스레 찡그렸다.
“저도 모르겠어요. 성격이 안 맞나, 그 언니는 INTJ라던데.”
“영적 파장이 다를 수 있소.”
눈을 감고 앉아, 지금껏 한 마디도 하지 않던 구신승이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이번 과몰입은 시대극이다. 양수연 팀장이 이마를 짚든 말든, 구신승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람마다 전생이 있고, 그로부터 내려오는 영의 파장이 존재하는 법이오. 백 낭자와 진 낭자는 거기서부터 틀어진 게야.”
“···팀장님, 혹시 요즘 신승이가 사주책 같은 걸 읽습니까?”
“그건 아닌데······.”
“이상한 소설은 좀 뺏어요. 저러다 다음 배역은 역술가로 점찍겠네.”
명배우는 주변의 놀림에 개의치 않는 법이다. 팔짱을 낀 구신승은 꿋꿋하게 제 할 말을 했다.
“또 모르지. 백 낭자의 얼어붙은 호수를 녹여 줄 누군가가 나타날지도. 본래 영웅은 난세에 등장한다고 하지 않소?”
“아니, 그러니까 누굴 따라하는 거냐고!”
*
“···그렇게 됐는데, 우리 백 배우님은 생각 없으시지? 이번 워크숍은 딱 1박인데.”
“알면서 뭘 물어요. 또 본부장님이 데려오라고 한 거면······.”
“아냐, 아냐! 그냥 내가 물어본 거야!”
종방연을 앞둔 방송국의 소회의실. 백하니는 찌푸렸던 미간을 풀며 의자에 기댔다.
손사래를 치던 유준일 실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래, 어제 잠 못 잤냐?”
“왜요. 부었어?”
“많이 붓진 않았는데··· 6mm에 잡히면 살짝 부해 보일 수도 있겠다. 메필 마지막 편 찍는다고 카메라도 많이 왔더구만.”
“괜찮아요. 부어도 이수련보단 작으니까.”
대꾸한 백하니는 한쪽의 거울을 흘끗 봤다. 과연 유 실장의 말대로 상태가 안 좋다.
어젯밤, 그놈의 가족 모임에 다녀오고 난 뒤 한숨도 못 자고 잠을 설친 탓이다.
‘네 탓 아냐? 진작 끝냈어야지.’
마음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그녀는 애써 무시했다.
말이야 옳은 말이다. 한참 전에 뛰쳐나온 본가가 아닌가. 정말로 보기 싫었다면 절연해 버렸으면 그만일 터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엔 작은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그녀가 달라졌듯, 아버지도 조금쯤은 변했으리라는 헛된 기대가.
“됐어, 이제 볼 일도 없을 텐데.”
“응? 누구랑 봐?”
“이수련이요. 촬영은 다 끝났으니까.”
“아, 그렇긴 하지. 조이너스 애들이 워낙 뒤꽁무니로 수를 써 대서··· 이만하면 별일 없이 마친 편이야.”
대충 둘러대자 유준일 실장은 납득했는지 끄덕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
“응, 왜? 지금 하니랑 MBS야.”
여배우들의 불화설에도 불구하고, ‘더 치트’는 20% 가까운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한동안 쏟아지던 자극적인 기사들도 후속으로 보도할 건수가 없자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배우의 속내야 어쨌거나, 작품은 성공했고 커리어엔 한 줄이 더 새겨지게 되었다.
촬영도 끝났으니 한동안 해외에서 지낼까? 유럽에서 한 일 년쯤 푹 쉬다가······.
그녀가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유준일 실장이 벌떡 일어섰다.
“뭐? 회사에 누가 쳐들어왔다고?”
“···누가 쳐들어와요?”
“뭐어어? 대표님 턱을 돌려?”
“······?”
아무래도, 희한한 놈이 나타난 모양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