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23)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23화(23/199)
표류하는 시나리오 (1)
* * *
시선들이 돌아왔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박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업무 관련 연락은 선이가 맡아 줘서, 요즘은 모바일 게임만 하고 있어요.”
“게임? 그런 것도 해?”
“할 수 있죠, 피디님! 대기시간 짬짬이 돌리면 시간도 잘 가요. 무슨 게임 하는데요?”
“그냥 이것저것 합니다. 결제를 안 하면 플레이타임 제한이 있어서요.”
“어, 그럼 하트런? 아님 RPG 종류?”
“한두 개가 아니라······.”
박건은 아예 스마트폰을 건넸다. 깔린 게임 목록을 본 서희도가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마왕성 정벌, 악마사냥꾼 아카데미, 6용사 연대기··· 형, 이런 쪽 취향이었어요?”
은희욱 작가도 목을 길게 빼고 거들었다.
“죄다 판타지들이네요. 요즘 이런 장르물이 인기긴 한가 봐요. 감우찬 감독도 최근에 하나 냈던데, 한국식 SF라면서 200억 꽂았더라고요.”
“그렇습니까? 드라마나 영화로는 CG 비용 때문에 어려운 줄 알았는데요.”
“에이, 그것도 옛말이죠. OTT 씬 커지고부터는 웬만한 투자금액은 다 땡겨요. 언제였더라? 나한테도 악마 어쩌고 하는 시나리오 들어왔었는데.”
“악마요?”
“네. 아마 그게··· 드라마는 아니고 영화였을 거예요. 오컬트는 별로라 패스했죠.”
나종모 PD가 물었다.
“판타지도 아니고 오컬트? 감독이 누구였길래?”
“그건 잘 기억 안 나요. 아무튼 시나리오는 재밌더라고요, 주인공 사제가 악마들이랑 피 튀기면서 싸우는 게.”
“희도 씨가 기억 못 하면 네임밸류 떨어지는 감독이었겠네. 그런 오컬트는 해 봐야 관객도 얼마 못 들어. 품은 품대로 낭비하고, 잘못 찍으면 감독이나 배우나 커리어만 망치는 거야.”
나종모 PD가 확정적인 어조로 말했으나, 박건은 서희도를 돌아봤다.
“혹시 그 시나리오, 저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서희도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어어, 들어온 지 좀 된 대본이라··· 일단 매니저 형한테 물어는 볼게요. 아마 뒤져 보면 어디 처박혀 있긴 할 거예요.”
“부탁드립니다. 관심이 좀 가서요.”
“그런 비주류 오컬트에요? 건이 형 찾는 피디들이 방송국에 깔렸을 텐데?”
“그래요, 지금 박건 씨 주가가 완전 고점 목전인데. 그런 거 말고 안전한 로맨스로 가지 그래? 저기 어디냐, MBS랑 우리 드라마국 기대작만 차례로 출연해도 연타석 홈런은 예약이야.”
“악마가 나온다잖습니까.”
“······응?”
무덤덤한 목소리였으나, 그 안에는 어딘지 소름 돋는 단호함이 있었다.
기억력 좋은 나 PD는 박건의 저 모습을 어디서 봤는지 떠올려냈다.
‘저거, 그 때랑 똑같네. 오디션 보다가 눈 돌아서 제작진 책상까지 왔을 때.’
싸해진 분위기 속, 애처로이 주변을 돌아보던 서희도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박건이 무심히 말을 맺었다.
“그럼 읽어는 봐야죠. 예의상이라도.”
*
박건이 화장실을 간 뒤, 라운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어휴, 갑자기 최승이 나온 줄 알았네. 피디님도 그 생각 했죠?”
서희도의 말을 나종모 PD가 받았다.
“말도 마, 희도 씨. 난 저거 두 번째 봤잖아. 건이 씨가 정색할 때마다 심장이 벌렁벌렁해.”
“하는 게임도 악마 관련, 관심 있는 시나리오도 오컬트, 이쯤 되면 판타지 매니아 아니에요?”
“전생에 천사였을 수도 있지. 그래서 악마라면 치를 떠는 거야.”
은희욱 작가가 반론을 제기했다.
“거 피디님, 천사는 좀··· 너무 박 배우랑 이미지가 안 맞지 않습니까? 악마 때려잡는 사냥꾼이라면 모를까.”
“됐어. 나한테만큼은 천사야.”
박건이 한다는 게임을 그새 깔아 보던 서희도가 관심을 보였다.
“왜요? 둘이 또 뭐 있어요?”
“국장님이 2박 3일 휴가 때렸거든. 내일 와이프랑 유럽 출국이야.”
“와, 또 피디님 혼자서만!”
“억울하면 월급쟁이 하십쇼, 서희도 배우님.”
*
큰범 스튜디오.
사무실에는 세 명이 앉아 있었다. 태종범 대표와 김률 감독에 조연출까지, 동네 중국집에서 시킨 요리들을 놓고 둘러앉았다.
김이 나는 중화음식들을 앞에 두고도 분위기는 장례식장처럼 침울했다.
‘진짜, 먹을 거 시켜서까지 왜들 저러나.’
눈치를 보던 조연출이 한 젓가락 그득 집은 면발을 소리 안 나게 밀어넣었다.
“김 감독.”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태종범 대표가 불렀다.
“예.”
“생각은 좀 해 봤나?”
“예, 결정을 지었습니다.”
“어, 그럼 드디어······.”
태종범 대표가 반색했지만, 김률 감독은 기대를 무참히 바스라뜨렸다.
“생각할 필요 없다는 게 결론입니다. 투자사 입김으로 배우 꽂을 거면 전 안 찍습니다.”
“아니, 대체 왜 그러는데!”
태 대표의 침방울이 폭발했다. 조연출이 얼른 탕수육 접시를 옆으로 치웠다.
“김 감독. 수십 번을 말했잖아. 이 시나리오, 더 붙들고 있어 봐야 붙을 투자사 없어. 귀곡령 망한 뒤로 한국 오컬트는 죽었다니까. 이쪽 장르 찍을 거면 태국 가거나 웰플릭스 들어가야 돼. OTT 씬 씹어먹을 거야?”
“그건 영화가 개판이었으니 그렇죠. 귀곡령은 헐리우드에서 냈어도 만 명도 못 끌었을 겁니다.”
김률 감독의 말이 이어질수록 태 대표의 이마에 패인 주름도 깊어졌다.
“열혈목사 강종구였나요? 작년에 YTS에서 했던 수목극은 반응이 괜찮았어요. 좋은 배우들 캐스팅해서, 입소문만 좀 돌면······.”
“그러니까 그 좋은 배우가 없잖아!”
조연출은 조용히 한쪽 귀를 막았고, 김률 감독은 아무렇지 않게 나무젓가락을 뜯었다.
“얘는 이래서 안 된다고 하고, 쟤는 저래서 싫다고 하고, 그게 벌써 일 년이야. 김 감독, 우리 처지에 S급 배우는 못 따와. 주호연이 한 회에 얼마씩 받아간 줄 알아?”
김률 감독의 시나리오, ‘흑의사제’는 일 년이 넘게 수렁에 빠져 있었다.
물론 좋은 투자사를 못 만나서 떠돌아다니는 시나리오는 이 바닥에 수두룩하다.
이유는 당연히 돈, 그놈의 돈 때문이다.
독립영화라도 구색 맞춰 한 편을 찍으려면 삼억 원부터 시작에, 장르영화라면 시작 단가가 다섯 배로 뛴다.
제작과 투자에 배급까지 겸하는, 소위 공룡 엔터 소속이 아니라면 투자사를 구해야 한다.
배우? 감독 이름값 아니면 돈으로 불러야 하는데, ‘큰범 스튜디오’는 겨우 자릴 잡은 소형 제작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태종범 대표의 속을 끓이는 건, 저 고민을 다 해결해 줄 엔젤 투자사가 나타났음에도 감독이 발을 뺀다는 거다.
“김 감독, 그만 고집 부리고 C&J에 맡기자. 주연 하나에 조연 하나, 딱 이렇게만 그쪽이 원하는 대로 해 주면 투자금은 다 받쳐 준다잖아. 거기서 내민 카드가 누구였지?”
입 안의 것을 꿀꺽 삼킨 조연출이 재빨리 대답했다.
“강균모에 서예주요.”
“어, 걔들이 뭐가 달려. 이미지가 모자라, 연기력이 부족해. 엄연히 프로들 아냐.”
돌부처마냥 눈을 감고 있던 김률 감독이 즉답했다.
“연기력 달리고요. 이미지도 다릅니다. 강균모 스펙트럼으로는 이 배역 소화 못 해요.”
“김 감독, 좋은 면을 좀······.”
“서예주도 마찬가지예요. 두 배우 필모 다 보고 하는 얘깁니다.”
“근데 안 쓰면 돈을 안 댄다잖아. 우리 자금이랑 자잘한 투자금들 다 모아 봐야 3억이야. 때깔 나오게 찍으려면 최소 30억은 필요하다며?”
돈 이야기가 나오자 전세가 뒤바뀌었다. 김률 감독이 다소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대중들 대상으로 크라우드 펀딩이라도······.”
“뭘 보고 후원을 해, 우리 스튜디오? 아니면 독립영화 하나 찍은, 이제 처음으로 장르영화 입봉하는 신인 감독 이름값?”
대답은 없었다. 태종범 대표는 답답하다는 듯 담뱃갑을 꺼내 탁자를 두드렸다.
“김 감독 실력은 내가 잘 알아. 이번 시나리오 잘 빠진 것도 알고. 그래서 일 년을 매달려 있었던 거 아냐. 다른 작품들도 젖혀 놓고.”
“······.”
“근데 배우가 없어. 돈도 없고. 가끔은 차선이 나을 수도 있는 법이야. 강균모 말고 차도운, 서예주 말고 백하니 나온다고 아카데미급 영화가 막 쓰레기로 변해? 좋은 이야기는 우선 관객들한테 보여주고 봐야지.”
뱃사람처럼 까맣게 탄, 김률 감독의 단단하던 표정에 균열이 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조연출과 대표의 눈빛이 오갔다.
‘먹혔나?’
‘그런 것 같죠?’
‘추임새 준비해. 이럴 때 몰아쳐야 돼.’
결국 김률 감독은 어두운 낯빛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 한 대만 태우고 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