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25)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25화(25/199)
표류하는 시나리오 (3)
* * *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큰범 대표 태종범입니다.”
“시나리오를 쓴 감독 김률입니다.”
“동생이 운전해 줘서 편하게 왔습니다. 박건이라고 합니다.”
통성명이 오간 뒤, 태종범 대표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실례지만, ‘흑의사제’ 시나리오는 어쩌다가 보게 되셨습니까? 저희가 로만 쪽으로는 보낸 적이 없어서, 연락을 받고 놀랐거든요.”
박건은 자기 매니저와 잠깐 눈빛을 교환하곤 대답했다.
“서희도 배우에게 들어왔던 시나리오를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전 소속사가 없습니다.”
“어··· 예? 소속사가 없으시다고요?”
“예.”
태 대표의 표정이 변했다. 생명의 위기를 느낀 조연출이 황망히 끼어들었다.
“그, 기사에는 배우님이 로만 소속이라고······.”
옆에 앉아 있던 매니저가 웃으며 정정했다.
“아, 오보가 몇 개 떴던 적이 있어서요. 아직 안 내려간 걸 보셨나 보다.”
대형 엔터 소속 배우를 주연에 세워, 투자부터 오디션까지 달달하게 빨아먹으려던 상상은 초장부터 물 건너갔다.
‘···이러면 나가린데.’
로만이라는 백그라운드가 없으면 그냥 잘생기고 포텐 있는 신인 배우일 뿐이다. 작품 내적으론 몰라도 외적으론 마이너스에 가깝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싹싹한 인상의 매니저가 재빨리 나섰다.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서울의 개’ 때도 배우 케어엔 문제없었고, 계약이나 일정도 차질 없이 진행됐거든요.”
“이게··· 그런 문제가 아니라. 참, 말하기 민망한데 이번 영화는 제작비가 빠듯해요. 시나리온 좋은데 유독 투자사들이 안 붙었다니까. 그래서 배우 파워에 기대야 하는 상황······.”
자본주의 짙은 태 대표의 부언을 김률 감독이 끊었다.
“여기 오디션 보는 자립니다. 영화제작 미팅 현장이 아니라.”
“김 감독, 또 뭘 그렇게 얘기해?”
“할 일부터 하고 생각하잔 겁니다. 박건 배우님. 연기 볼 수 있겠습니까?”
“예. 준비해 왔습니다.”
몇 초 만에 불청객이 됐다는 걸 알 텐데, 신인답지 않게 담대한 태도다.
기죽거나 불편한 기색도 없이 앞의 커피만 홀짝대고 있다. 어차피 다른 러브콜들이 많으니 이런 영화쯤은 쉽게 보는 건가?
커피잔을 내려놓은 박건이 덧붙였다.
“아, 그리고 하나만 더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어떤?”
“카메라 한 대만 세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명은 필요 없고, 장비만 실제 촬영용이면 됩니다.”
배우들 중엔 실전처럼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몰입을 못 하는 부류가 있다.
대형 기대작들은 아예 마케팅용 오디션 영상을 따로 찍기도 하니, 남겨서 나쁠 것도 없다.
김률 감독이 끄덕이자 조연출이 재빨리 사무실에서 나갔다.
“거, 그냥 대충 하지······.”
태 대표가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째 배우보다 더 초조해 보이는 매니저만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형, 시나리오 줄까?”
“아니. 다 외웠어.”
꽤 자신 있는 태도였지만, 김률 감독은 마음속 기대감을 다소 내렸다.
매니저가 아까부터 들고 있던 시나리오가 빳빳한 새 종이임을 본 것이다.
‘깨끗한 시나리오는 청순한 연기력.’
백 퍼센트 맞아떨어지는 공식은 아니지만, 경험상 플러스보다는 마이너스가 많았다.
그래도 무를 수는 없다. 이 배우가 안 되면 꼼짝없이 C&J 카드들을 써야 할 판이다.
오디션 성의는 둘째 치고, 적어도 ‘서울의 개’에서 본 박건의 연기력은 유호준과 비교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여기다 설치할까요? 소파 때문에 단독 앵글은 안 될 것 같고··· 이쪽으로 줌 당겨서 찍으면 얼추 나오겠는데요.”
“그게 좋겠어. 메이킹 들어갈 것도 아니고, 카메라만 있으면 된다고 하시니까.”
그래도 명색이 제작사인지라 금세 촬영 장비들이 세팅됐다.
대표실 탁자에 둘러앉은 그대로, 박건에게만 포커스를 맞춘 미들 앵글이다.
잡히는 샷을 확인한 조연출이 사인을 보내자 김률 감독이 큐를 외쳤다.
“레디, 큐!”
*
‘흑의사제’는 오컬트 스릴러다.
주인공 서요한은 낮에는 물류센터에서, 밤에는 술집에서 일하며 구마 의뢰를 받는다.
인간들을 해치는 악마나 잡귀, 못된 영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그러던 도중 서울 변두리에서 신흥 종교 ‘구원회’가 퍼져나가고,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끔찍한 살인이 벌어진다.
누가 봐도 악마적 소행의 흔적이 역력한 범행현장에 한국 바티칸 지부도 움직이지만, 요한은 더 큰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감지한다.
이처럼 다채로운 캐릭터들, 대담하고 역동적인 시나리오가 주인을 못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소화가 어렵다.
빙의, 다중인격, 절제와 폭발이 무수하게 거듭되는 캐릭터에, 표현해야 할 주인공의 감정이 복잡하고 까다롭다.
인기 아이돌 멤버를 은근슬쩍 끼워 넣고, PPL 떡칠만 하면 수익이 나던 시대는 지났다.
대중들의 눈은 높아졌고 평론가들의 혀도 덩달아 날카로워졌다.
대형 기대작들도 자주 고꾸라지는 요즘의 영화판에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며 새로운 필모에 도전하고픈 배우는 드문 법이다.
거기다 김률은 충무로에서도 유명한 불행의 아이콘이 아니던가?
‘차라리 못 해라. 잘라 버리게.’
‘제발 잘 해라. 배우 내정만은 안 돼.’
제작사 대표와 감독이 저마다의 바람을 안고 지켜보는 가운데, 박건은 침묵했다.
“······.”
말 그대로 침묵이다.
큐 사인이 떨어졌는데도 아무 말 없이 허공의 한 점만 쳐다볼 뿐이다.
‘뭐야, 까먹었나?’
오디션장에 와서 연습한 대사를 잊었다면 프로 실격 수준이다.
긴장해서 잠깐 절어도 좋지 않게 볼 판에, 고작 오디션 자리에서 통으로 까먹는다? 실제 촬영에서는 NG를 수천 번 반복할 확률이 높다.
“혹시 대본이 필요하면······.”
보다 못한 김률 감독이 입을 연 순간, 박건의 얼굴 근육이 움직였다.
부르르 떨리던 뺨이 경련하고, 관자놀이에 굵은 핏줄이 솟았다.
잠시 후엔 팔과 목, 허리를 포함한 사지가 제멋대로 뒤틀린다. 마치 거대한 손이 구체관절인형을 억지로 잡아 꺾는 것처럼.
“······.”
김률은 터지려는 경약을 억눌렀다.
저 씬은 S21 #3. 강력한 악마가 들어와, 서요한이 몸을 빼앗기지 않으려 싸우는 장면이다.
‘저긴 분명··· 세세한 디렉팅이 없었을 텐데.’
수백 번이나 수정한 시나리오였기에 안다. 저기엔 ‘서요한, 대사 없이 악마와 싸운다’, 저 한 줄만 적혀 있었을 것이다.
한 대의 카메라만 촬영하는 가운데, 그 간단한 내레이션이 하이라이트로 펼쳐졌다.
수십 초쯤 흘렀을까. 간질발작 환자처럼 극심하게 꺾이던 몸이 돌연 멈춘다.
불룩불룩 튀어나오던 이마의 혈관들도 흥건한 땀만 남기고 모두 들어간다.
박건··· 아니, 서요한의 몸을 탈취한 어떤 존재가 입을 열었다.
“사제여, 네 두려움이 보이는구나.”
김률 감독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까 들었던 낮은 목소리가 아니다. 더 높고 칼칼한, 쇠를 긁는 듯한 음성이 다시 말했다.
“두려울 만도 하지. 그 가냘프고 안쓰러운 믿음을 들켜 버렸으니.”
고통으로 일그러진 눈빛이 허공을 흘러 태종범 대표에게로 박힌다.
얼굴 위쪽은 사제의 것이지만, 금방이라도 웃을 듯 씰룩대는 입가는 사특하고 교활한 악마 그 자체다.
‘경찰··· 경찰을 불러야 돼.’
태 대표는 입을 뻐끔거렸다. 목소리만 나왔으면 욕을 했을 텐데, 말라붙은 입에서는 바람소리만 쉭쉭 샜다.
“썩 꺼져라, 마귀야!”
“네 신을 찾는가? 간악하고 사특한 거짓 우상을 부르는가?”
“주님, 마귀의 뒤쫓음에서 저희를 보호하시고, 함정과 속임수와 흉악에서 지켜 주시옵소서.”
“피가 흐르는구나! 산양의 목이 찢겨 내걸리고, 음탕한 창녀들이 제 눈을 파내는구나!”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교회에 안전과 자유 주시기를 간구하오니······.”
필사적인 사제의 기도와 흉측한 마귀의 웃음소리가 번갈아 터져나온다.
이대로라면 육체를 빼앗길 것이라 판단한 서요한은 이내 자신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가는 와중에도 악마는 마지막 비웃음을 남긴다.
“형제들이 돌아오고 있다. 신의 종도, 교회의 칼도 되지 못한 반편아, 너는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
정적이 흘렀다.
조연출은 카메라 앞에서 얼어붙었고, 김률 감독은 입을 벌린 채 굳어버렸다.
태종범 대표는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반쯤 엉덩이를 띄운 상태였다.
순식간에 서요한을 벗어 버린 박건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숙였다.
“여기까집니다.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박건의 턱이 살짝 기울어졌다.
“씬은 끝났는데, 다른 장면을 할까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태 대표가 맹렬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이거면 됐어요. 더 보곤 싶은데, 그랬다간 내가 경찰부터 부를 것 같아요.”
“경찰은 왜······.”
“그거야 댁이, 박 배우님이 진짜로 뭐에 씐 것 같으니까! 방금 연기 맞습니까?”
“예. 재미있게 읽은 부분을 골랐습니다.”
“이 땀 난 거 봐요. 두 번 재밌었다간 사람 잡겠네, 대체 어떻게 그런··· 한 PD, 다 찍었어?”
“예. 대표님 도망치려고 일어나시는 것까지요.”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코를 마구 벌름거리던 태 대표가 물었다.
“그··· 실례되는 질문이라면 죄송합니다만, 혹시 집안에 무속인의 피가 흐릅니까? 친지 분들 중 영험한 보살님이 계신다든가요.”
이미 오디션장은 배우에게 찢겼다. 한층 밝아진 표정의 매니저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전혀요. 저희 부모님 두 분 다 신기는 없으십니다.”
“이건 또 뭔 일이래? 둘이 형제였어요?”
“···대표님, 아까 배우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아, 그랬지. 그러고 보니 오늘 복장도 사제복 느낌이시네. 일부러 그렇게 입고 온 거예요?”
“집에 비슷한 옷이 없어서요. 오면서 급하게 한 벌 샀습니다.”
화기애애한 사담이 오가는 도중, 충격을 수습한 김률 감독이 침착하게 물었다.
“박건 씨, S21이었죠? 방금 표정연기부터 시작한 씬. 서요한이 희생자를 구하다가 상처가 나서 위험에 처하는.”
“예. 앞부분은 생략하고 중간부터 했습니다.”
“하나만 묻고 싶습니다. 이 시나리오, 왜 찍고 싶었던 겁니까?”
박건은 대수롭지 않게 시나리오를 들었다.
“우선 오컬트라는 점, 악마가 나온다는 것에 관심이 갔습니다. 주인공이 마냥 신실한 인간상이 아니어서요.”
서요한의 캐릭터는 독특하다.
보통의 오컬트가 스릴러적 요소들, 구마와 빙의 연기로 승부를 보려 하지만, ‘흑의사제’는 드라마적 요소를 집요하리만치 탄탄하게 깔았다.
서요한은 사시사철 사제복을 입고 물류센터로 출근하며, 구마의식을 진행할 때가 아니면 기도문을 읊지 않는다.
유니크한 캐릭터성에, 오컬트 클리셰를 전면으로 비틀어 버린 각본의 재미다.
“그리고 또?”
“악령을 구마하는 사제지만, 실상은 신을 불신하는 냉담자라는 것도 현실성 있게 와 닿았습니다.”
이젠 완전히 돌아온 모습이었지만, 아까의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마의 땀을 닦아낸 김률 감독이 상기된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러니까 왜, 구마사제의 불신(不信)이 현실성 있게 느껴지셨는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태 대표와 조연출도 거의 빨려 들어갈 기세로 집중하고 있었다.
박건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문득 미소 비슷한 것을 머금었다.
“악마를 증오하는 자가, 신을 경애하긴 어려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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