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26)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26화(26/199)
표류하는 시나리오 (4)
* * *
“한 PD.”
사무실 소파에, 얼빠진 얼굴로 널브러져 있던 태종범 대표가 웅얼거렸다.
“예?”
“이 바닥에서 배우 장사하면서, 미친놈들은 볼 만큼 봤다고 생각했거든? 배우들 연기라 해봐야 더 놀랄 것도 없다고.”
“예.”
“근데 생각이 달라졌어. 저건 배우가 아니라 또라이야, 쌩또라이.”
촬영된 영상을 노트북으로 옮겨 좌우 음향을 조절하던 조연출이 혀를 찼다.
“그런 분이 로만이 아니라고 하자마자 표정이 달라지세요? 배우랑 매니저가 무던한 사람들이라 다행이지, 그걸로 계약 틀어졌으면······.”
“내가 저 정도일 줄 알았나! 원래 프로 씬은 그런 거야. 김 감독 봐, 자기가 꽂히니까 아주 신줏단지처럼 모시잖아.”
오디션 이후, 김률 감독의 태도는 극적으로 달라졌다.
태 대표와 조연출, 밖에 있는 직원들까지 정신이 사나워질 정도로 사무실을 빙빙 돌더니, 시나리오를 손봐야겠다며 나가 버렸다.
“그나저나 어쩌나. 이제부터 다른 출연자들 섭외하려면 죽어날 텐데.”
“이 영상만 있으면 잘 한다는 배우들 우글우글 붙을 것 같은데요?”
“붙지. 근데 걔들 개런티가 문제지. 잘난 놈 옆엔 잘난 놈만 붙는 법인데, 저 연기랑 맞짱 뜰 만한 인간들이 싼값에 오겠어?”
이제 주연 한 명이 섭외됐을 뿐이다. 김률 감독이 나머지 배역들은 생각이 있다고 했지만, 제작사 입장에서 염려가 안 될 수가 없다.
“그래서 박건 배우가 확 깎았잖아요. 계약금도 신인 급으로, 나머지 출연료는 전부 러닝개런티로 받겠다니까 한숨 덜었죠, 뭐.”
“그치, 그랬지. C&J 놈들은 돈 댄 만큼 다시 떼어 갔을 거고······.”
중얼거리던 태 대표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예, 정 팀장님. 저 태종범입니다. 그 ‘흑의사제’ 시나리오 말인데··· 감독 의사가 워낙 확고해서 설득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언제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다른 얘기 나누시지요, 예, 예.”
내용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C&J픽쳐스 정 팀장, 사무실에 두어 차례 방문했던 깐깐한 인상의 남자일 것이다.
이제 C&J과의 거래는 완전히 끝났다.
대기업 배급사한테서 당기려던 투자금이 날아갔지만, 태 대표는 후련한 얼굴이었다.
“차라리 잘 된 걸 수도 있어.”
“왜요, 김 감독님이 저렇게 좋아하셔서요?”
조연출을 돌아본 태종범은 손가락을 비비며 히죽 웃었다.
“아니. 우리한테 더 떨어지잖아. 투자사만 구하면 망할 놈의 C&J한테 코 꿰인 것보다 열 배는 더 남겨 먹을걸?”
“······.”
결국 돈이야말로 이 바닥의 알파요, 오메가다.
공룡이 먹다 남은 잔반 대신 직접 밥상을 차려 먹을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시나리오 때문에 겪은 고초며 노고쯤은 단번에 보상받는다.
떨떠름하게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는 조연출을 태 대표가 들들 볶았다.
“야, 한기훈이! 지금 한가하게 있을 때야? 얼른 김률이 데리고 오디션 공고부터 내야지!”
“대표님이 영상 뽑으라면서요. 이걸로 배우랑 투자사 구하신다고······.”
“편집 그깟 게 뭐 필요하다고! 우리는 박건 씨만 있으면 돼, 떡고물 대신 불똥 떨어지기 전에 당장 갖고 나가!”
노트북을 챙겨 대표실을 나오면서, 조연출은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진짜, 내가 꼭 한 번은 엎는다.’
*
돌아오는 차 안, 핸들을 잡은 박선이 걱정스레 물었다.
“형, 괜찮겠어?”
“뭐가?”
“배역은 찰떡인데 쉬는 시간이 없잖아. 드라마 끝난 지 이제 겨우 사흘째고··· 화제성 때문이면 좀 쉬어도 돼.”
“한 것도 없는데 뭐. 그리고 연기는 최대한 많이 할수록 좋아.”
당장 주머니가 빈궁한 것도 아니다. 나종모 PD가 개런티를 잘 쳐 준 덕에, ‘서울의 개’에서 받은 출연료만 해도 꽤 된다.
박선의 둥그런 눈이 더 둥그레졌다.
“연기를 많이? 왜?”
건은 잠시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너도 느꼈을지 모르지만, 전역 이후로 기억이 들쭉날쭉해. 가벼운 기억상실증처럼.”
“기억상실증······!”
박선은 급히 핸들을 틀어 차를 길가에 댔다.
“얼마나 됐어, 증상은? 병원엔 가 본 거야?”
“별거 아냐. 그냥 입대 전, 이쪽 세상에 있을 때 기억들만 좀 흐릿한 게 다야.”
박선은 숫제 자기 형이 피를 철철 흘리는 것처럼 건을 구석구석 살폈다.
“다른 데는? 또 아픈 데는 없고?”
건은 씩 웃으며 관자놀이를 톡 쳤다.
“아팠으면 드라마 못 찍지. 여기 말곤 멀쩡해.”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고백에, 박선은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전과 달라진 형이 알고 보니 기억상실증이라면 놀랄 만도 했다.
“전역 날 부대에서 머릴 좀 부딪쳤거든.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 뻔해서 말 안 했으니까, 그냥 모른 척해줘.”
“당연하지. 엄마 알면 난리나. 당장 대학병원 데려가서 사흘 밤낮으로 형 검진시킬걸.”
아버지가 손을 잃고 명예퇴직한 뒤, 어머니는 부쩍 가족의 걱정이 늘었다.
아끼는 아들들 중 하나가 군대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하면 밤잠마저 설칠지 모른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때면 기억이 돌아오는 기분이더라고. 너랑 은 작가님 덕분이지.”
“형 이런 거, 승아 누나랑 영호 형도 알아?”
“걔들은 몰라. 너한테만 얘기한 거야.”
실제로는 기억이 아닌 권능의 일부였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야 없었다.
차라리 기억상실을 고치기 위한 문화치료 프로그램이라 소개하는 쪽이 편하다.
나름대로 이해했는지, 박선은 고개를 명치에 닿을 정도로 열심히 끄덕댔다.
“형, 내가 죽어도 제작비 따올게.”
“제작비?”
“응. 우리 때문에 투자사 떨어진 것 같던데··· 아니다, 형은 신경 쓰지 말고 작품만 준비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크랭크인 들어가게 해볼 테니까.”
건은 두 시간 전을 회상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견적이 나왔다. 영세한 제작사. 열악한 촬영 환경. 악조건 속에서 오랫동안 표류한 시나리오.
동생의 말처럼, 대표란 작자는 소속사가 로만이 아니라고 하자 급격히 식는 눈치였다.
‘유명 배우 이름값이 필요했나?’
뒤늦게 철왕국에 두고 온 금은보화들이 떠올랐다.
ㅡ무엇이든, 얼마든지 골라 십시오! 전부 용사님의 것입니다!
왕실의 보물창고로 그를 데려간 서기관이 외쳤다.
활짝 열린 문 안에는 라수스의 경갑, 핏빛 무지개, 환관의 목걸이 등 귀중한 보물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물론 건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회귀하면 빈손일 뿐더러, 이 빌어먹을 세계는 ‘템빨’이 아닌 다른 것이 중요했다.
성검과 아공간 주머니, 근력을 보정해 주는 반지를 빼면 합기를 극성으로 익힌 육체만이 대악마를 죽일 수 있는 무기였다.
“영화 제작비가 얼마나 하지?”
“어··· 요즘 큰 건 백억에서 삼백억? 규모가 좀 작은 상업영화도 제대로 찍으려면 삼십억부터 시작일 거야.”
‘서울의 개’에서 책정해 준 출연료는 회차당 팔십만 원. 우수리 떼고 계좌에 박힌 금액은 총 천이백만 원 정도다.
들어온 광고들을 지금부터 죽어라 찍는다 해도 영화 투자비를 대려면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돈엔 별 관심이 없지만, 뒤늦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드워프제 다이아몬드 하나만 가져올걸. 100캐럿 넘는 놈으로.’
불안을 날려 버리려는 듯, 박선은 짐짓 밝은 표정으로 큰소릴 쳤다.
“30억이 커 보이긴 하는데, 이쪽 바닥에선 그렇게 큰돈도 아냐. 형 출연한다고 하면 돈 싸들고 투자하러 올 제작사들 쌔고 쌨어.”
“너무 무리 마. 안 되면 다른 작품 찍으면 되니까.”
“무리라니, 배우가 찍고 싶은 작품 서포트하는 게 매니저 역할이지! 서울의 개 찍을 때는 너무 쉬웠기도 하고··· 형 덕분에 운이 좋았잖아.”
“계속 운이 좋을지도 모르겠는데.”
“응?”
박선이 되물었지만, 건은 대답하는 대신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보낸 문자에 답장이 돌아와 있었다.
[로만 노씨]-레스토랑 ‘정월’, 익일 21시.
*
집에 들어가자 부모님이 저녁을 한 상 가득 차려 놓고 있었다.
식탁에 앉은 한영주가 손짓했다.
“얼른 앉아, 막 먹으려던 참에 잘 왔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건은 식탁 쪽을 흘끔댔다.
“혹시 메뉴가······.”
“우와, 김치찜! 형이 싫어하는 날개 달린 애들 없으니까 빨리 와!”
박열호도 푸근하게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덕분에 요즘은 아빠도 닭 끊었다. 평생 조류독감 걸릴 일은 없어서 좋겠더라.”
“대신 형 입맛이 좀 변해서 문제예요. 밀가루를 너무 좋아해서, 촬영장에서도 간식으로 피자랑 빵만 먹는다니까요.”
“편해서 그래, 편해서.”
차 안에서 간단히 때우기도 좋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철왕국에 이십 년을 체류하며 기름지고 느끼한 요리, 특히 고기랑 빵에 입맛이 완전히 길들여진 탓이다.
식사가 끝나고 거실에서 사과를 먹는 동안, 건은 오늘 있었던 소식을 전했다.
“시나리오 본 김에 오디션까지 보고 왔어요. 이번에는 주연으로 갈 것 같아요.”
“어, 작품을 또 한다고?”
“예. 이번에는 오컬트물이요. 서희도라고, 드라마 같이 찍은 배우가 준 영화예요.”
“잘 됐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거야, 너희 둘 다 똑똑하니까 걱정은 안 한다만. 사람은 모름지기 성실해야 기회를 잡아.”
뿌듯한 눈빛으로 아들들을 보는 박열호와 달리, 어머니 한영주는 걱정이 앞섰다.
“배우랑 매니저는 과로가 심하다던데, 우리 가족은 둘 다 있어서 걱정이네. 힘들진 않겠니?”
“예, 여차하면 선이 없이 움직이면 돼요.”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빠져!”
화들짝 놀란 박선이 손사래를 쳤다.
“형은 워낙 체력이 좋아서 걱정 없어요. 저도 안 뒤처지게, 틈틈이 운동하면서 건강 챙길게요.”
박열호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그래, 그래. 작품도 좋지만 건이는 아직 전역한 지 석 달도 안 지났다. 친구들도 자주 보고, 너희끼리도 놀러다니고 해.”
“그것도 좋죠! 그러고 보니까 우리 가족식사도 제대로 못 했네.”
“그래, 한가할 때는 엄마 모시고 좋은 데서 밥이라도 같이 먹고. 요즘 너희 엄마가 아주 신이 났다. 아파트 계모임 사람들이 건이는 몰라도 한 여사 아들이 배우인 건 다 알아.”
“여보, 괜한 소리 할래요?”
한영주가 매섭게 눈을 흘겼다. 움찔하던 박열호는 아내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할 말을 했다.
“아니, 나는 당신이 좋아하니까··· 건이한테 사인이라도 몇 장 해 달랠라고 그런 거지. 직원 중에도 최승 팬이 많다면서?”
“그건 그냥 한 소리고! 부담스러워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아직 연예인 실감도 안 날 애한테.”
“언제는 티 못 내서 안달이더구먼.”
“밥이나 먹어요, 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