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43)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43화(43/199)
폭풍우를 헤치고 (2)
* * *
두 시간째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스탭이 손을 흔들었다.
“이장미 씨랑 연락 됐습니다!”
꼬박 하루, 잠수를 탔던 주연 배우가 전화를 받았다. 한상윤 PD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래, 오늘 촬영 온대?”
“예, 아무렇지 않게 지금 지하철이시라고, 곧 도착하신다던데요.”
촬영 펑크는 안 내는 프로의식은 대단하나,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겠나. 보나마나 속이 다 곪아터졌을 것이다.
“오늘 촬영은 또 어쩌나······.”
신음하는 한상윤의 뒤로, 시커먼 그림자가 휙 지나갔다.
*
이장미는 지하철에서 내렸다.
“···미친 새끼들, 부재중을 몇 개를 찍는 거야.”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들 연락이 계속 와서 핸드폰을 꺼 뒀던 참이었다. 모르는 전화를 끊자마자 반가운 이름이 떴다.
[내사랑영이]-야, 이장미! 폰은 왜 꺼 놨어!
“쏘리, 기자들 전화가 계속 와서.”
-···너 괜찮아? 지금 어디야?
걱정과 분노로 그득하던 목소리가 대번에 풀이 죽는다.
“안 괜찮을 게 뭐 있냐, 오늘도 촬영 있어서 현장 가고 있어.”
절친 김서영은 그녀의 성격을 잘 안다. 고작 평범한 직장인 한 명쯤, 이 바닥에서 처절하도록 무력하다는 것도.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김서영이 애써 활기찬 목소리를 냈다.
-촬영장 분위기는?
“돌아가시게 좋지. 이번 영화, 잘 될 거야.”
-그래, 고생 좀 실컷 해. 언제 적 연기파 이장미냐? 그간 지방 극단에서 꿀만 빠느라 연기 감도 다 잃었겠구만.
“지랄, 내가 너냐.”
뭐는 어쨌네, 뭐는 어쨌네, 시시콜콜한 몇 마디가 더 오가다가, 이내 말이 끊겼다.
-···뭐 해줄 수 있는 게 없네. 내가 서울이었으면 그 개자식한테 돌이라도 던지는데.
“해 주긴 뭘 해. 그러다 경찰서 간다.”
-까짓 거 가면 되지, 그 새끼가 너한테 한 짓만 생각하면 아직도······.
“됐어. 나 촬영장 다 왔으니까 끊어.”
-야, 이장미! 이따 전화해! 촬영 끝나면 오늘 밤에 꼭 해, 알았어?
전화를 끊으며, 이장미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상한 짓이라도 할까 봐 그러나, 진짜.”
웃음은 몇 발짝 옮기기 전에 사라졌다. 얇은 입술이 바람 앞의 풀잎처럼 떨린다.
올라온 기사들은 이미 봤다. 댓글은 안 보고 닫았지만, 뭐라고 달렸을지야 뻔하다.
“신나게들 물고 뜯고 있겠지.”
황만동, 그놈이 다시 일을 키울 리는 없다. 그녀에게 앙심을 품은 옛 동료거나··· 이장미를 통해 로만을 저격하려는 누군가일 것이다.
원하는 것은 뻔하다.
배우의 훼손, 더하여 영화의 몰락.
“···개새끼들. 찌를 거면 나만 찌르던가.”
이제 겨우 절반, 아직 촬영도 안 끝난 영화에 똥물이 튀었다.
안 그래도 위태위태한 작품이었다. 이번 기사가 그 축을 더 흔들 것이고.
하차는··· 안 된다. 알량한 오만이 아니라, 그녀가 빠져 버리면 주연을 맡을 배우가 없다.
‘이렇게 가다간, 또 예전처럼······.’
맞아. 네가 문제야.
언젠가부터 다시 들러붙은, 구원회의 교주가 귓속에 속삭인다.
장미야, 그러길래 뭐랬어. 눈 딱 감고 황 대표 말대로 하면 좋았잖아.
“···입 닥쳐.”
극단도 망할 일 없었을 거고, 동료들도 그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봐, 이번에도 너 때문에 모두가 괴로워지는 모습을.
···맞는 말이다. 이 영화는 박건의 눈부신 커리어 중, 이장미라는 얼룩이 묻은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김률 감독은 또다시 실패할 것이며, 그 원흉인 몹쓸 년은······.
자기혐오가 최악의 상상으로 달려나갈 때, 뱃속에서 소리가 났다.
ㅡ꼬르륵.
이장미는 픽 웃어버렸다. 시간을 보니 벌써 네 시가 넘어 있었다.
“그 와중에 배는 고프네, 살아 보겠다고.”
그만둘 땐 그만두더라도, 밥이라도 먹고 당당하게 말하자.
역 앞에 편의점이 있었다. 그녀는 라면을 하나 사고, 고민 끝에 핫바도 샀다.
‘지금 잔고가, 육만사천 원이니까······.’
보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멍하니 앉아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다가, 이장미는 깜빡 졸음에 빠졌다.
“어서 오세요.”
알바생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린다. 얼핏 감탄 같기도 하다. 우와, 혹시··· 맞죠? 사인 좀 해 주실 수······.
“이장미 씨.”
“예, 네!”
퍼뜩 깨어난 그녀는 깜짝 놀랐다. 눈앞에는 편의점 음식들이 잔뜩 쌓여 있고, 익숙한 미남이 마주 앉아 이쪽을 보는 중이었다.
“박건 씨··· 여긴 어떻게?”
“지나가다 들렀습니다. 유리창에 보여서요.”
이 편의점 안쪽엔 창문이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뻔뻔하게 하니 오히려 웃길 지경이다.
“같이 좀 먹겠습니다.”
“아, 예, 그러세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찾으러 온 건 아니니까.”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이어, 살벌한 먹방이 시작됐다. 삼각김밥 세 개를 순식간에 먹어치운 박건이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이장미 씨는 지금까지 몇 번 실패했습니까?”
몇 번은 무슨, 두 손을 다 써도 셀 수 없다.
“어··· 오디션은 백 번 넘게 떨어졌고요. 붙고도 기회를 못 잡은 건 이십 번 정도, 자잘하게 망한 걸 다 합치면 그 두 배는 되겠네요.”
“제 반도 안 되는군요.”
“뭐라고요?”
“아니, 반의 반의 반의 반도.”
잠이 확 깨면서, 성질이 올라왔다. 이장미는 발끈하려는 스스로를 간신히 눌렀다.
“저기, 지금 제 상태가 별로 안 좋거든요? 놀리시려면 다른 때······.”
“사람이 죽는 걸 봤습니다.”
이장미의 입술이 열린 채 굳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여러 명이 죽는 걸 계속. 구한 적도 있고··· 못 구한 적도, 그러다가 구하지 않은 적도 있었죠.”
이장미가 아무 말 못 하는 사이, 박건은 다음 김밥 포장을 뜯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무뎌졌습니다. 전장 한복판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죠. 사람의 목숨쯤, 이런 포장처럼 까서 버리는 쓰레기나 다름없는 세계였으니까.”
“군대 시절 이야기인가요?”
박건은 대답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겐 연기가 소중합니다. 우리 촬영장은 특히나.”
이장미는 예전을 떠올렸다. 다니던 연영과를 휴학하고, 고향의 물류센터와 독서실에서 꼬박 20시간씩 일했다.
남자들도 소화하기 힘든 일정이었지만 그렇게 목돈을 만들어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오디션 갑질에 극단 연출가의 노예놀음, 눈 뜨고 코 베인 월세 사기 등 온갖 횡포를 다 겪다가, 당시 중소 기획사 대표였던 황만동을 만났다.
‘장미야, 넌 내가 책임지고 키워 줄게. 딱 삼 년만 마스크 좀 활용하자.’
몇 달의 실랑이 끝에, 황만동은 결국 이장미를 관계자들 접대 자리로 보냈다.
‘이거 놔요, 놓으라고, 미친 새끼야!’
참으려 했지만, 모 필름 본부장이라는 자의 손이 허벅지 사이로 들어올 때는 참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맥주병을 휘둘러 그놈 머리를 깨 버렸다.
그 뒤로는 뻔한 일의 연속이었다.
소속사는 공중 분해되고, 몸담고 있던 극단은 찢어지고, 당시의 트라우마로 심각한 우울증과 자학충동에 시달리는.
연기가 달라진 것은 그즈음이었다. 평소에도 배역에 몰입해서, 내가 아닌 누군가로. 그래야만 현실을 더 오래 잊을 수 있으니까.
영화 오디션인 척하면서 베드신만 찍으려는 싸구려 포르노, 웹드라마 감독이랍시고 여배우들을 첩처럼 대하는 미친놈들이 얼마나 많던가?
거기 비하면··· 여기는 진짜 촬영장이다.
“···저도 그래요. 다들 연기도 잘하고, 스탭이나 배우들도 하나같이 착하셔서.”
박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끄덕였다.
“아직 무너지긴 이릅니다. 우리 영화, 망하기엔 장애물들이 너무 많아요.”
“장애물들?”
“일단 제가 있죠. 이장미 씨가 있고, 훌륭한 감독에 좋은 배우들도 있습니다. 과거 이력 따위로 발목 잡히지 않을 만큼.”
아무렇지 않게 말한 박건은 사제복 소매를 펄럭거려 보였다.
“보시다시피 뭐, 제가 누구처럼 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남들보다 힘 좀 세고 액션 잘 찍는 게 전부지만요.”
“혼자서 남자 스탭 일 3인분을 하는 게 힘이 좀 센 정도라고요?”
“사실 그것보다 더 할 수 있습니다. 이상하게 볼까 봐서 참는 거죠.”
“···푸흡.”
“지금 웃으신 것 같은데요.”
“아, 자존심 상해. 본인도 절대 안 웃잖아요.”
“이미지 관리입니다.”
야, 이장미이이이······.
귓가에서 속삭이던 이유원의 목소리가 날아갔다.
···확신은 없지만, 현재가 있다. 그것도 연기 인생 중 가장 센 동료와 함께하는.
삼각김밥을 베어 물며, 이장미는 극단에 출근했던 첫날처럼 씩 웃었다.
“식사나 하세요. 오늘 장난 아닐 거니까.”
*
이장미가 박건과 돌아왔을 때, 스탭들은 기뻐하면서도 걱정했다.
아직 기사가 내려가지 않은 상태다. 주연 배우가 다시 등장한 것은 다행이지만, 사람인 이상 연기력에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
“조금 쉬었다가 갈까요?”
김률 감독이 묻자 이장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오늘이 마지막 씬인데요. 바로 들어가셔도 될 것 같아요, 컨디션도 좋고.”
이장미는 자신이 한 말을 증명했다.
슛이 들어간 지 오 초 만에, 사람들의 걱정을 날려버리는 것으로.
“어째서··· 신성력이······.”
“뭘 망설이시나요, 찌르지 않고? 사제님의 원수가 눈앞에 있잖아요.”
연기의 날은 전혀 무뎌지지 않았다. 아니, 이보다 더 바짝 설 수 없을 정도로 예리해졌다.
“죽어라, 어리석은 그리스도의 종아!”
쇠를 긁는 듯 굵직한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핵심 실마리가 하나 더 풀린다.
이 또한 영화관에서 보는 관객들에게 반전과 충격을 줄 것이다.
“형, 장미 배우님! 이것 좀 보세요!”
폭풍처럼 흘러간 촬영이 잠시 멈출 때, 휴식 중인 두 주연에게 박선이 달려왔다.
“홍보실 공 팀장님이 보내 주셨는데, 우리 쪽에서도 대응 시작했어요. 오즈로스 황 대표 만행부터, 당시 접대 때문에 옷 벗은 영화사랑 엔터 관계자 명단까지 줄줄이 추려서요. 위력에 의한 성추행 미수, 처벌된 판결문도 같이 있어요!”
이장미의 눈이 커졌다.
“그럼 기사들은······.”
“다 내려가는 중이에요. 지금 허위정보 뿌리는 유포자들, 악의적인 댓글들도 싹 강경대응할 거라고 입장문 나왔거든요? 회사 법무팀이 움직이면 금방 꼬리 말고 도망칠 거예요.”
연예계의 싸움은 속도전이다. 체급과 명분, 반응속도가 승패를 좌우한다.
어린애인 줄 알고 시비를 걸었는데, 덩치 큰 놈이 완전무장으로 나타나니 싸움이 될 리 없다.
정신없이 기사를 검색하던 한상윤 PD도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다른 포털도 마찬가집니다, 정정보도랑 우리 쪽 입장문이 스팸기사들 밀어내고 있어요!”
환호가 터져나왔다. 스탭들이 기뻐하고 있는 와중,
―뭔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감독님?”
주저앉은 김률에게 시선이 모였다.
김률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괜찮아요. 땅이 파여 있었나 봅니다.”
*
“감독님, 여기 커피 좀······.”
“쉿, 두고 나가요.”
문을 열고 들어오던 스탭이 한상윤 PD에게 밀려 나간다.
촬영현장 옆에 딸린 사무실 겸 임시본부.
솜이 다 삐져나온 가죽소파에서, 김률은 구겨진 옷처럼 웅크린 채 코를 골고 있었다.
크랭크인 46일 째. 촬영시간을 사정없이 줄여댄 강행군의 여파다.
박건 못잖게 막중한 짐을 진 이를 현장에서 찾으라면, 단연 김률일 것이다.
하루의 일정이 혹독하다는 말로도 다 담지 못할 정도다.
촬영이 끝나면 그날 촬영분을 가편집. 이불도 없이 차에서 쪽잠. 근처 사우나에서 씻고 다시 현장, 촬영, 편집의 반복이다.
보다 못한 태 대표가 전기담요와 겨울 이불을 차로 가져다줘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진작 쓰러졌을 것이다.
스탭들이야 무명 감독의 열정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한상윤 PD는 그 뒤에 있는 것을 안다.
김률은 끝을 낼 생각이다.
예산이 집행됐고 주사위는 던져졌다. 욕과 악마, 자극적인 장면들 탓에 15세 등급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
전체관람가도 아닌 영화를 연말에 던질 수 없으니, 하루라도 더 개봉일을 당기려는 것이다.
촬영 내내 편집까지 병행해, 촬영을 마치자마자 며칠 내로 개봉을 때리려고.
‘사람이 이렇게 독할 수가 있나, 정말.’
며칠 전에는 함께 큰범으로 가던 중, 갑자기 정신을 잃기까지 했다.
응급실에서 수액을 맞고 정신을 차린 김률은 촬영부터 찾았다.
‘촬영장··· 지금 몇 시······.’
‘감독님, 아직 밤이에요. 촬영까지 여섯 시간도 더 남았어요.’
음향편집 어쩌고, 중얼거리던 김률은 한상윤의 완고한 만류에 다시 누웠다.
‘태 대표님께는··· 비밀로 해 주십시오.’
숨기는 이유는 뻔하다. 고지를 앞두고, 오랜 파트너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현중 씨, 거기선 더 프레임 안쪽으로······.”
돌아누운 김률이 잠꼬대를 했다. 잠시 후면 촬영 30분 전 알람이 울릴 시간이다.
흘러내린 점퍼를 다시 덮어 주며, 한상윤은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건강 좀 챙기십쇼, 감독님.’
*
“감독님, 안녕하세요.”
“아, 예. 아침은 먹었어요?
“예······?”
지금은 저녁 일곱 시다.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스탭을 뒤로한 채, 김률은 걸어갔다.
‘머리가 조금 아픈데.’
잠을 못 잔 지 얼마나 됐더라···. 하루, 이틀?
···기억이 잘 안 난다. 집중력은 깜빡깜빡 흩어지고, 머릿속엔 촬영분의 가편집만 둥둥 떠다닌다.
어제는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촬영 중이라 받지 못했지만, 차라리 잘 됐다는 못난 생각이 고개를 든다.
걱정만 끼쳐 온 아들놈, 본인조차 확신 없는 이야기를 꺼내 봐야······.
“감독님.”
“아, 박건 씨.”
김률은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어느새 다가온 박건이 웬 물통을 내밀고 있다.
“이게··· 뭐죠?”
“특제 영양 드링크입니다. 오늘 동생한테도 만들어 줬습니다.”
맛은 끔찍했지만 준 성의가 있으니 안 마실 수도 없다. 겨우 다 비웠을 때, 박건이 불쑥 말했다.
“감독님은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을 닮았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면?”
“열정적이고, 고집스럽고,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끝끝내 이겨내며 전진하던 친구였습니다. 불 속에서 타오르는 석탄처럼요.”
“그 친구분도 배우셨습니까?”
“아뇨, 한국인이 아니었습니다.”
말끝에서 씁쓸함이 묻어나온다. 아마도 외국인, 거기다 이젠 볼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김률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과 비교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그 친구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습니다.”
“어떤······?”
박건은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더니, 거기에 누군가 있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숙원을 좇지 않는 인간은 시체나 다름없다.”
등줄기에 짧은 소름이 스친다. 돌아선 박건은 사제복에 가려진 손을 내밀었다.
“저는 그 말을 믿습니다. 감독님은 해낼 수 있을 겁니다.”
“······.”
무저갱처럼 깊고 검은, 두 개의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한다.
박건의 무용담은 익히 듣고 있다. 촬영장 곳곳에서 배우들을 챙기는 것은 물론, 스탭들의 일까지 자기 일처럼 돕는다는 것도.
감독이 해야 할 일을 배우가 한다. 박건이 없었다면 몸을 수십 번 더 갈아넣어도 제작일정을 다 못 맞췄을 것이다.
‘왜, 이 영화에 이만큼이나······.’
사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이번이 마지막일 자신과 달리, 대형기획사 소속에 앞날도 전도유망하다. 한 작품쯤 삐끗해도 다음 대작에 출연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박건은 불평 한마디 않고 달려든다.
마치 이곳, 촬영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자신의 업(業)이라는 것처럼.
‘당신은 내게 무엇을 본 겁니까. 아니, 무엇을 보려 여기 있는 겁니까?’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 전쟁터에서 꺼내 놓기엔 섣부르다.
언젠가 그때가 온다면······.
김률은 애써 아무렇지 않게 손을 맞잡았다.
“그것 참, 죽을 것 같지만 힘을 안 낼 수가 없는 말이군요.”
감독과 배우의 합이, 끝으로 달려간다.
*
그날 밤, 건은 철왕국의 꿈을 꿨다.
들판도 마경도 아닌, 흰 바닷가 어딘가였다. 파도소리가 들렸고··· 그리운 바람이 불었다.
모래를 밟으며 나타난 성녀, 아리아는 전과 다름없는 얼굴로 눈을 휘었다.
ㅡ잘 지내고 있어요, 용사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