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75)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75화(75/199)
백정, 이천인 (1)
* * *
일제강점기.
개화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액션 활극 ‘백정의 아들’에는 다섯 명의 주연이 나온다.
조선인 이천인,
조선인 송이설,
혼혈 순사 이치고 타이세이,
총독부의 경무과장 도쿠로 신지,
그리고 조선으로 건너온 총독의 셋째딸, 하세가와 하루카까지.
모진 수탈과 학도병 징집으로 하루하루 곪아 들어가던 조선, 경성의 구석에서 우마(牛馬)를 도살하고 고기를 팔던 푸줏간부터 극은 출발한다.
“······우와.”
이천인의 아버지, 이막쇠 역의 조연배우 김경찬이 잠시나마 몸담을 자신의 가게를 둘러본다.
주렁주렁 매달린 돼지 앞다리들, 짚단 위에 해체돼 놓인 벌건 생고기들은 연출팀 막내가 직접 공수해 온 소품이다.
“어떻게, 식칼들도 다 진짜 같네요.”
“그죠? 양 감독님 디테일은 영화판에서도 알아 준다잖아요, 이번에 거의 출연단가 두 배를 주면서 모셔 왔다던데.”
‘양테일’이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양연태 미술감독은 짧은 시일 안에 엄청난 시대극 세트를 만들어냈다.
조선의 한옥과 서양식 영사관, 전통 일본식 목조 가옥 등등.
당시 조선 곳곳에 들어오던, 서양과 동양의 건축양식이 섞인 가옥들이 양 감독의 손 아래 그대로 재현되었다.
물론 저것들 대부분이 들어가 누우면 외풍이 숭숭 통할 바람벽이다. 그러나 여긴 아파트 분양현장이 아닌 드라마의 세트장.
카메라에 잘 담기고, 전체적인 조형이 훌륭하고, 미감도 마감도 보이는 부분들만 예술로 빠지면 된다.
바로 오늘, 저 저잣거리가 연기와 핏자국으로 얼룩질 것이다.
“포목상 앞쪽 좀 채워줘요! 여기 공간이 너무 휑하게 비어!”
“방물장수, 방물장수님 어디 계세요!”
분장한 엑스트라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트랙이 깔린 동선을 따라 촬영감독과 촬영팀 스탭들이 자리를 잡는다.
이어, 더부룩한 머리에 모자를 푹 눌러쓴 전인우 PD가 쩌렁쩌렁하게 외친다.
“자, 준비들 됐죠? 스탠바이─ 큐!”
그리고 카메라가 처음으로 잡는 것은··· 백정탈을 쓴 박건이 아니다.
푸줏간에서 갈비짝을 썩썩 발라내는 백정 이막쇠, 그의 옆에서 후줄근한 저고리를 입고 눈을 반짝이는 소년이다.
*
‘백정장군’은 극의 초반부, 첫 화의 20여 분을 과거 회상에 할애한다.
이는 사극이 갖는 나름의 특징이다.
물론 현재 시점 주인공이 나오고 중반부가 지나 옛 떡밥이 풀리기도 하나, 유독 어린 시절을 다루는 빈도가 현대극보다 높다.
그렇다면 배우는?
십대 후반만 돼도 어떻게 비벼 보겠지만··· 아예 꼬맹이 시절이라면 주연들이 나와서 연기하기란 불가능하다.
즉, 이 작품의 첫 삽은 메인 주인공들의 아역이 뜬다는 소리다.
‘진짜, 데려오느라 더럽게 힘들었지.’
강오성 조연출은 코끝이 찡해지는 걸 애써 참았다.
요즘 아역들의 연기력은 성인 연기자들 버금간다. 다만 그놈의 비주얼, 무려 박건의 어린 시절을 연기해야 하는 마스크가 문제였다.
온갖 고생을 해서 들고 간 캐스팅이 다 까였을 때는 전인우 PD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감독님, 여기 이 친구들이 마지막입니다. 나머지는 다 다른 촬영에 들어가 있대요.’
‘어제 다 봤어. 걔들은 안 돼.’
‘예? 오디션 비디오는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은데요, 아역이잖습니까.’
‘얼굴이 다르잖아, 얼굴이! 최소한 저놈이 자알 커서 박건이 됐겠구나, 정도는 싶어야 할 거 아냐!’
결국 대본리딩 직전까지 발에 땀 나게 뛰다가, 가까스로 섭외해 온 것이 저기 있는 성지호다. 이미 타 작품과 계약 직전이었던 걸 무지막지한 개런티로 홀려 넘긴 케이스랄까.
“아버지, 도와드릴 일 없어요?”
“아, 저기서 칼을 좀 갈아 다오. 다 짠 고리도 가게 뒤로 옮겨 주고.”
“예!”
과연 데뷔 8년차 아역답다.
발성 좋고 연기력 탄탄하고, 무엇보다 마스크가 제법 유니크한 맛이 있다.
박건과 비교하면야 아쉽지만, 애초에 어떤 아역을 데려와도 완벽할 순 없다. 소위 ‘얼굴 천재’라며 추앙받던 연예인들조차 시상식에서 박건 옆자리는 피한다고들 하지 않나.
“자, 고기 사십쇼!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는 맛, 소랑 말에 돼지까지 있습니다!”
아버지 대신 호객행위를 하는, 능청스러운 연기도 제법 괜찮게 해낸다.
“컷, 오케이!”
다른 각도에서 한 번 더 촬영한 뒤 오케이가 떨어졌다. 첫 촬영, 그것도 첫 씬이 까다로운 전인우에게 한 방에 통과됐으니 느낌이 좋다.
‘역시 고생한 보람이 있어.’
강오성 조연출은 조연과 대화를 나누는 성지호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제 손으로 데려온 배우가 활약하는 것을 싫어할 AD는 없다. 저 정도 싹수라면, 주연을 몇 개 더 맡다가 포스트 박건으로······.
“잘 하는데요. 저도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어, 박 배우님!”
어느 새 강오성의 옆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박건이 와서 서 있다.
패랭이갓은 등 뒤로 넘기고, 백정탈은 가슴에서 달랑거리는 모습이 지금 막 개화기에서 넘어온 시간여행자처럼 보인다.
강오성은 같은 배역을 맡은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하던 생각을 싹 지웠다.
“지호야, 넌 그냥 제 1의 성지호로 가자. 포스트 박건 같은 거 욕심내지 말고.”
“예?”
“아, 박 배우님께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저 녀석 팔자가 왠지 기구해 보여서요.”
“······?”
배우와 감독, 엑스트라와 스탭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첫 삽이 성공적으로 흙을 뿌렸다.
*
성지호, 14세.
첫 작품은 이동룡 감독의 ‘우리형’.
무려 6살이라는 나이에 데뷔해, 영화의 신 스틸러로 인기를 끈 뒤 탄탄대로를 밟아 왔다.
아역 출신 중에서도 손꼽히는 연기력에 출중한 마스크까지 갖춘, 사고만 안 친다면 톱 배우로 성장하리라 기대를 모으는 유망주다.
벌써 메이저 기획사에 들어가 전담 로드가 붙어서 따라다닐 만큼.
“지호야,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일찍부터 나왔는데 피곤하지는 않아?”
“응, 완전 쌩쌩해.”
로드매니저는 못내 걱정스레 덧붙였다.
“다음 씬이 밤이니까 더 쉬어도 돼. 어머님께서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나 지금 촬영하는 것도 아니잖아. 현장 구경 중이니까 엄마 전화 오면 그냥 바꿔 줘.”
성인에게도 가혹한 드라마 제작 환경이다. 전인우 PD가 합리적인 감독이라지만, 혹여 아역이 혹사당할까 주변 어른들은 걱정이 많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관심은 다르다.
부모님의 염려와 서울에서 충남을 오가는 강행군은 떠오르지도 않을 만큼, 아역배우 성지호는 지금 사랑에 빠져 있었다.
백하니? 그 누나는 한 씬을 찍더니 자기 차로 가서 나오지를 않는다.
숨이 멎도록 예쁜 건 맞지만 다가가기 어렵달까, 저도 모르게 한기가 든다고 할까.
‘같이 연기하는 씬이 없어서 다행이다. 대사 절면 진짜 목 졸릴 것 같아.’
그렇다면 조현아? 이쪽은 더더욱 아니다. 열네 살짜리의 눈에는 띠동갑이 훌쩍 넘는 이모뻘보다 평범한 중학생 쪽이 이성으로 느껴진다.
성지호를 사로잡은 이는,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이 아니라 ‘이천인’의 어른 역. 박건이다.
“박 배우님, 이번 씬도 잘 해 줘요. 덕분에 마음 푹 놓고 있다니까.”
“촬영감독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말도 안 돼요. 내 이름이?”
“예. 드라마판에서 제일 잘 찍는 서응서 감독님, 하면 저희 회사에서도 다들 끄덕입니다. 못 믿겠으면 선이한테 물어보시죠.”
“하핫핫! 이거 참, 그런 말 들으면 또 대충 찍고는 못 넘어가지!”
긴장감이라곤 없이 촬감과 시시덕거리더니, 큐가 들어가자마자 사람이 변한다.
눈빛과 발성, 말투며 몸가짐, 심지어 내쉬는 호흡마저 방금까지 농담을 주고받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다.
변한다··· 바뀐다? 어떤 표현도 저 앞에서는 조악해진다. 저건 그냥 차가운 분노로 심장을 불태우는 백정의 아들, 이천인이다.
‘진짜, 그냥 개 멋있어.’
나이가 어리다지만 배우는 배우다. 부모님과 함께 ‘흑의사제’를 관람한 순간부터 팬이 됐는데, 오늘 와서 보니 히어로영화 주인공이 따로 없다.
“박 배우님, 위험하다니까요!”
“내일은 지붕 추격씬도 있지 않습니까. 밟아 보면 대충 느낌이 옵니다.”
“아니, 그래도 와이어 하나 없이······.”
거기다 스턴트 씬.
본인이 찍을 차례가 아닌데도 무슨 타잔처럼 세트장 지붕을 타고 다니며, 위험하거나 약한 곳을 귀신같이 짚어내 미술팀에 전달한다.
“아, 저기가 꺼졌었구만! 고마워요, 박건 씨 아니었으면 와이어 달고 뛰었어도 다칠 뻔 했어.”
“괜찮습니다. 원래 높은 데를 좋아해서요.”
싱글벙글하는 미술감독에게 자세한 디렉션을 주고는 또 훌쩍 사라진다.
박건은 감독 겸 배우 겸 스탭이다··· 저 말이 과장 없는 진짜였을 줄이야, 직접 보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으리라.
성지호는 패딩에 손을 쑤셔넣은 채 현장을 두리번거렸다.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 게, 아마 지금도 어딘가에서 스탭들을 도와서······.
“안녕.”
바로 귀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식겁하며 돌아보자 찾던 사람이 서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선배는 네 쪽이 선배지. 나 연기한 지 얼마 안 됐어.”
“아, 맞다.”
하도 임팩트가 커서, 저 사람이 이제 배우 2년차란 것을 자주 잊는다.
춥지도 않은지, 재킷이나 패딩도 없이 두루마기만 입은 박건이 빙긋 웃었다.
“리딩 때 보고 오랜만이네. 온 건 봤는데, 할 일들이 좀 있어서 인사밖에 못 했어.”
“아니에요, 저도 바빠 보이셔서······.”
그 ‘할 일’을 쭉 지켜본 입장에서는 그저 입이 벌어질 따름이다.
“아무튼 잘 부탁한다. 좀 있으면 같이 나오는 씬이잖아, 우리.”
“예, 영광입니다!”
성지호는 바짝 긴장해 외쳤다. 엄밀히 말하면 함께 카메라에 잡히진 않지만, 어린 이천인이 성년 이천인으로 바뀌는 장면이다.
전인우 PD는 1화 중반쯤 나올 이 씬을 꼭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찍기를 원했다.
“아이고, 여기 천인 씨가 두 분이네. 벌써 호흡 맞추시는 거예요?”
“예. 과거의 저랑 친해지던 중이었습니다.”
지나가던 조명감독의 농담을 태연히 받아친 박건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잘 해 보자, 지호야.”
“예, 선배님.”
“선배 아니라니까. 그냥 형이라고 불러.”
성지호는 새삼 박건을 올려다보았다. 반에서 가장 큰 자신보다도 까마득하게 큰 키에, 시대극 복식까지 갖춰 더욱 위풍당당한 인상이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거리를 뒀던 것 같은데, 착각인지 몰라도 유독 그에게는 대본리딩 때부터 편하게 말을 걸지 않았나.
‘···건이 형도 나랑 친해지고 싶었나?’
질풍노도의 나이.
사춘기 소년 소녀들은 작은 계기로도 의욕이 불타오르기 마련이다.
가슴이 힘차게 끓는 것을 느끼며, 성지호는 마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
부여의 밤하늘에 달이 떠올랐다.
단역과 엑스트라 대부분이 빠졌지만, 아직 남은 스탭들은 숨을 죽이고 신호를 기다렸다.
밤의 너울이 짙어지고 몰려든 구름이 초승달을 절반쯤 삼켰을 때, 전인우 PD의 큐가 떨어졌다.
“스탠바이, 큐!”
‘백정과 장군’ 1화의 하이라이트.
경성 변두리에서 작은 푸줏간을 하고 있던 이막쇠의 가게로, 별안간 순사들이 쳐들어온다.
─아이고··· 나으리들, 왜 이러십니까요!
─헌병이 입수한 조선인 독립운동가 명단에서 네놈의 이름이 나왔다. 순순히 따라와 협조해라.
냉정한 경무국 순사의 선포에, 이막쇠는 큰 덩치가 어울리지 않게 손을 비빈다.
─저, 저는 억울합니다. 단 한 번도 그런 곳에는 가 본 적이 없습니다요.
─서에서 심문해 보면 알 일이지. 데려가라!
푸줏간 안쪽, 골방에서 문틈으로 밖을 보는 어린 천인(賤人)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며칠 전, 갓을 쓴 수상한 자들이 아버지를 찾아왔었다. 안방에서 독립, 총포, 고기에 숨겨서···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들렸던 것도 기억난다.
거기다 순사들이 들이닥치기 전, 아버지는 절대로 나오지 말라며 자신을 숨기지 않았던가?
‘혹시, 정말 혹시라도 아버지가······.’
그때, 요란한 소리가 나며 순사들이 나뒹굴고 아버지가 푸줏간 밖으로 튀어나간다.
─도망친다, 잡아!
─놈들과 한패가 분명하다! 놓치지 마!
바깥을 지키던 순사가 달려들지만, 발골용 고기칼이 번득이자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진다.
짐승처럼 거리를 둘러본 이막쇠는 곧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달려가는 백정의 뒤에서, 한 무리의 순사들이 소총을 겨눈다.
─안 돼!
탕, 타당탕!
결국 방문을 열어젖힌 이천인이 외친 순간, 매정한 총성이 허공을 가른다.
화약 연기 속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이막쇠. 아버지를 안고 오열하는 아들을 지켜보던 카메라가 갑자기 방향을 바꾼다.
콰앙, 펑!
극 속의 시간은 삽시간에 십여 년을 건너뛴다.
아까와 같은 거리를, 제복은 같지만 얼굴이 달라진 왜경(倭警)들이 달려간다.
여기저기 해지고 뜯긴 옷에, 몇몇은 의식을 잃었는지 축 늘어져 동료에게 업혀 있다.
─폭탄이다, 놈들에게 폭탄이 있다!
─빌어먹을 조선인 놈들··· 어떻게 경성 한복판에서 폭탄을 구한 거지?
─놈들이 아냐, 내가 봤어. 한 놈이었다고!
이막쇠를 죽인 소총의 화약 연기는 폭탄의 흰 연기로 바뀌고, 물러났던 카메라 앵글은 바람에 실려올라가듯 위쪽을 비춘다.
저잣거리의 모퉁이··· 한때 푸줏간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일본 은행의 지붕 위다.
구름들이 물러가며 오싹한 흰빛을 내뿜는 초승달 아래, 패랭이를 쓴 흰 두루마기가 서 있었다.
─도망쳐라. 울부짖고 후회하며, 너희의 두려움으로부터 달아나 보려무나. 설령 천황이 직접 이곳에 당도한다 한들,
일제에게 수탈당하고 동포에게 천대받아 온,
백정의 탈 속에서 시퍼런 안광이 번득인다.
─결코 네놈들의 땅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