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83)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83화(83/199)
언더독의 반란 (3)
* * *
거대한 크레인이 들어오고 사다리차를 닮은 살수차가 은행 건물을 감싸듯 포진한다.
블록버스터 영화 급의 화재 촬영 준비를 굽어보며, 건은 감탄했다.
‘처음인데, 이 정도 스케일은.’
전인우 PD와 촬영감독, AD 등 스탭들은 전부 방독면을 착용한 채 모여들어 있다.
현대의 CG 기술이 아무리 발전했다 한들 실제 불만큼 리얼함을 주기란 불가능한 법.
그래서 전 PD는 세트장 공사에 착수할 때부터 이번 씬을 준비해 왔다고 했다.
일제의 손에 개설된, 조선인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친일파와 왜인들의 주머니를 불렸던 상징적인 건물을 불태워 무너뜨리기 위해.
‘원래 특수효과 전문 스튜디오에서 촬영해야 한다곤 하지만······.’
실제 세트장을 태우는 것과 스튜디오에서 촬영해 효과를 입히는 것, 어느 쪽이 더 잘 뽑힐지는 안 찍어도 알 수 있다.
그나마 배우 보호 차원에서 불길과 연기 일부는 CG로 처리한다는 것 같았다. 조금 전에는 촬영감독이 찾아와 신신당부를 했다.
“컷이 나오면 바로 뛰어나오셔야 합니다. 이게, 스튜디오가 아니라서 유독가스를 빼낼 덕트를 설치할 수가 없었어요. 특히 아래쪽 공기는 안 들이마시게 조심해 주십쇼.”
건은 선선히 끄덕였다. 불이 났을 때의 대처 방법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한테도 배웠다.
철왕국에서야··· 소방 훈련이 필요가 없었고.
불과 물, 땅과 바람의 4원소 모두에 면역을 지녔던 것이 용사의 육체다.
대악마를 잡아 ‘격’의 상승을 이루고 나서는 먹지 않아도 살고, 물속에서도 숨을 쉬는 등 인간의 육신을 초월하지 않았었나.
‘아티팩트 몇 가지만 가지고 나왔으면 여기 배우들 전부를 보호했을 텐데.’
경계병의 브로치, 축복이 깃든 머리장식, 옛 요정 군주의 케이프. 전부 회차 초반부에 가지고 다니던 물건들이다.
그가 아닌, 그의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용사님, 제발 말 좀 들어요. 목숨 잔뜩 있는 머저리처럼 굴지 말랬죠?
―동료가 더 중요합니다. 절 믿고 와 준 사람들을 다치게 둘 수 없어요.
―그게 아니라고요. 용사님이 아닌 나머지, 우리들은 그냥 소모품이라고 생각해요. 이 빌어먹을 세계를 떠나고 싶으면 제발 비정해지란 말이야!
진귀한 아티팩트를 동료들에게 넘기다가, 그 광경을 본 성녀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녀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두 번째 대악마, 세 번째 대악마를 참살하면서 뼈에 사무치도록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위험을 동반한 블록버스터 촬영인 탓일까, 카메라가 이쪽을 찍고 있지 않은데도 손끝이 벌써부터 찌릿찌릿하다.
모처럼 확연한 합기(合気)의 흔적이자, 이 촬영이 기억을 되살릴 것이라는 증거다.
“꺅, 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그를 현실로 되돌렸다.
저 안쪽, 촬영팀이 들어간 경성은행 내부에서는 벌써 살벌한 연기판이 벌어지고 있다.
“살고 싶거든 움직이지 마라.”
“누, 누구십니까······?”
“우리는 천황 폐하의 명을 받들어, 우매하고 미개한 너희 요보(ヨボ : 조선인을 일컫는 멸칭)들을 계도하러 온 황국의 검이다.”
한창 업무가 진행되던 은행 안에서, 별안간 인질극이 벌어진다.
정체불명의 흑의인들이 입구를 봉쇄하고 행원과 손님들에게 칼을 들이댄 것이다.
“일본인들은 나가고, 조선인들은 남아라. 도망치는 자가 있다면 귀와 혀를 잘라 본보기로 삼겠다.”
잠시간의 신분 탐색이 이뤄진 뒤, 값비싼 비단 기모노에 게다를 신은 일본인 고객들이 안전하게 바깥으로 내보내진다.
불안에 찬 눈으로 덜덜 떠는 조선인들만 안쪽에 남아 손발이 묶인다.
흑의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처음 은행 안에서 총을 발포했던 사내―이동수―가 어린아이를 지목하며 냉엄히 선언한다.
“그리고 넌, 나가서 목이 터지도록 외쳐라. 백정탈이 이곳으로 오지 않는다면 1각(15분)에 한 명씩 조선인의 목이 떨어질 것이라고.”
말과 함께, 이동수가 두건을 벗자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뺨부터 입까지 가로지르는 긴 검상. 눈썹 위부터 세로로 난 흉터 속에는 새파란 의안이 박혀 지독한 위화감을 자아낸다.
여태 큰 비중이 없던 이동수의 연기력은 극의 중반부부터 폭발한다. 진규일 본부장이 C&J에서 조현아와 함께 뽑아 온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시간이 됐군. 네놈, 나와라.”
그리고 1각 후, 미친 사무라이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킨다.
지목당한 조선인 아낙은 공포에 질려 발버둥 치지만, 흑의인 두 명은 아랑곳 않고 그녀를 끌고 나온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집에 아이가, 우리 남편과 아이들이······!”
“우선 한 명.”
무자비한 목소리와 함께, 피가 비산한다.
.
.
.
황우회 회주이자 성씨를 버린 사무라이, 슈헤이 역할의 이동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눌렀다.
짜릿하다.
이미 상당 부분 몰입한 배역으로도, 배역을 뒤집어쓴 채 동료를 기다리는 배우로서도.
요즘은 하루하루가 재미있었다. 비록 중반부터 얼굴을 비추는 역할이지만, 주연과 찍는 씬이 없어도 구경하는 것만으로 흥미로웠으니까.
이제 잠시 후, 은행의 천장을 부수며 떨어져 내려올 박건 때문이다.
‘뭐 저런 형이 다 있나 싶었는데.’
3층 높이를 와이어 없이 달려가거나, 말도 안 되는 파쿠르 동작들이야 백번 양보해 그럴 수 있다 치자.
명실상부한 촬영장의 넘버 원이,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액션 특강까지 해 준다.
‘···거의 박건의 액션스쿨이었지. 배우고 엑스트라고 진짜 칼잡이로 만들어 버리는.’
생각보다 엄청난 몸치였던, 도종우 무술감독마저 포기한 독립군 대장 역할의 오민우를 지도해 줄 때는 이게 사람이 맞나 싶었다.
‘근력에 비해 순발력과 근육협응도가 낮아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걷다가 뛰고, 그러다가 방망이를 휘두른다고 생각하십시오. 노리는 곳은 무조건 제 머리입니다.’
‘저, 그러다 배우님이 다치시면······.’
‘괜찮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맞출 테니까요.’
그리하여 경성에 등장한 독립투사끼리의 신-구 대결이 멋지게 찍혀 나왔었다.
이동수 자신이야 촬영 전에 조선검술 특훈도 받았고, 몸을 잘 쓰기 위해 한동안 기계체조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저 포인트 레슨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누구보다 잘 안다.
연기든 액션이든, 홀로 잘하는 것과 타인을 이끄는 것은 다른 영역이기에.
“당신들, 군부 출신이죠?”
그리고··· 또 한 명의 로만 에이스가 그의 앞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다.
*
황우회의 경성은행 인질극이 벌어진 날.
송이설은 우연히 볼일을 보러 들렀다가, 사건에 휘말려 인질이 되고 만다.
―···아는 얼굴이군. 넌 나가도 좋다.
물심양면으로 일제를 지원 중인, 송별학 대감의 손녀임을 알아본 황우회 단원이 내쫓지만 송이설은 물러서지 않는다.
―난 조선인이에요, 우리 가문도 대대로 조선인이었고. 당신들 같은 뒤틀린 천황숭배자들과는 달라.
―지금 뭐라고 했지?
―흑의에 황(皇)이라는 글자··· 아마 파벌싸움에서 밀려 쫓겨난 젊은 장교들이겠죠? 군정조직 장악에 실패한 자들이 일부는 숙군되고 일부는 도망쳐 조선에 숨어들었다는 말을 들었어요.
―이 조선인 계집이, 뚫린 입이라고······!
황우회의 단원이 손을 치켜들지만, 그를 저지한 슈헤이가 송이설의 앞에 선다.
뿌리도 목표도··· 그 이상마저 다른, 약탈자와 약탈당한 자가 날붙이처럼 시선을 맞부딪친다.
슈헤이, 이동수의 입에서 원어민만큼이나 능숙한 일어가 흘러나온다.
―청기와 댁 늙은이의 손녀군. 네 할애비는 현실을 깨닫고 우리 앞에 고개를 처박았는데, 어린 계집이라 현실을 모르는 건가?
―현실을 모르는 건 당신들이지.
―어째서?
―몰라서 묻는 걸까. 본토에 설 곳이 없어, 동포들이 침략한 땅으로 숨어들어온 쥐새끼들··· 아니, 버려진 사냥개들이잖아요?
슈헤이의 돌벽 같던 얼굴에 분노가 스친다.
이어, 그가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일본도를 발검하자 송이설의 팔에 붉은 혈선이 생긴다.
―입이 더럽군, 조선인 계집. 이번은 가죽만 베었지만, 다음은 통째로 잘라낼 것이다.
―어디 해 봐요. 일제를 돕는 송별학 대감의 손녀가 사무라이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얘길 들으면, 총독부도 당신들을 잡으려······.
―아악, 살려줘!
송이설이 의연한 기개로 맞서는 순간, 바깥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얼핏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녀의 영민한 눈동자가 빛난다.
‘종로경찰서에서 움직였나? 아니야, 놈들은 백정탈을 잡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협조했을 텐데.’
그 답은 곧 알 수 있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뭉클거리며 내부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불이다! 은행에 불이 났다!
―그놈··· 그놈이다, 백정탈이 온 거야!
*
“1구역, 2구역, 동시에 붙이겠습니다!”
사다리차를 타고 경성은행의 지붕에 붙어, 잔뜩 긴장하고 있던 조연출이 외쳤다.
배우들에게 방염복과 방독면을 씌울 수 없으니 위험은 필수 불가결이라지만, 정말 사고로 이어진다면 고스란히 제작진 책임이다.
‘레전드’ 씬과 참사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지 않나. 이를 아는 모든 스탭들도 방독면을 쓴 채 달려들어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내부의 전인우 PD가 외부의 조연출에게 이어링으로 지시한다.
-시작해, 지금.
곧, 잘 타도록 미리 처리해 둔 은행의 지붕과 외벽에 스탭들이 불을 붙인다.
―큭, 백정탈이 정말로······.
―놈을 들여보내지 마라! 막아!
송이설의 예상처럼, 바깥에는 이미 종로경찰서의 일경들이 출동해 있었다.
물론 황우회를 검거하고 조선인 인질들을 풀어주기 위함이 아니다.
백정탈이 나타난다면 공조해 습격하려 했는데, 갑자기 경성은행 뒤쪽에 불길이 일더니 연막탄까지 날아와 터졌다.
놈이 지른 불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주변이 연기로 자욱해진 상황. 혼란에 빠진 순사들을 번뜩이는 도살용 식칼이 유린한다.
슉, 촤악!
연기 속, 또 한 명의 왜경(倭警)을 참살한 이천인은 곧바로 은행 내부로 돌입한다.
백정탈 뒤의 눈은 시퍼런 귀화로 활활 타오르며 적을 찾는다.
‘금수만도 못한 놈들, 날 끌어내려고 이따위 비겁한 짓을······!’
사색이 되어 그를 찾던 정보원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미친 듯이 달려왔지만 너무 늦었다.
황우회(皇祐會). 그 사무라이의 잔당들이 이런 짓까지 꾸밀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삐걱, 턱.
닫힌 문을 밀치며 돌입한 내부.
그러나 연기만 자욱할 뿐 인기척은 없다. 황우회의 습격을 대비하던 이천인의 눈이 부릅떠진다.
저 안쪽, 책상을 치운 빈터에 조선인 십수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
지붕을 태운 불길이 내부로 밀려들지만, 이천인은 미동도 없이 서 있다.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황우회는 그를 놀리기라도 하듯, 인질 전원을 참수하고 떠났다. 불을 질러 혼란을 유발한다는 작전은 처음부터 실패였던 것이다.
애초에 저들은 조선인 모두를 죽일 작정이었기에.
―음, 으읍······.
그때, 저 안쪽에서 미약한 신음이 들린다. 고개를 돌린 이천인은 입과 눈이 가려진 채 쓰러져 있는 송이설을 발견한다.
―송이설!
딱 여기까지.
조선인 인질은 모두 죽었으나, 피를 흘리고 유독가스에 질식한 송이설을 구해 자신의 아지트로 데려가는 백정탈이 이 씬의 하이라이트다.
박건이 입구로 돌입하기 몇 초 전,
방염복에 방독면으로 완전무장한 촬영감독이 배우의 옆에서 클로즈업 샷을 찍고, 전인우 PD도 바깥의 스탭들에게 오더를 보냈다.
-오케이, 살수차 바로 물 틀어!
촤아아아―
대형 살수차에서 어마어마한 물이 쏟아져 불길을 잡는다. 이만하면 안쪽 그림도 잘 나왔고, 바깥쪽에 불길이 옮겨붙은 곳도 없다.
이제 박건이 백하니를 들쳐 업고 나오면 촬영은 원 테이크로 종료된다. 전인우를 포함한 현장 스탭들이 가슴을 쓸어내릴 때였다.
천장을 본 누군가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어, 저기 위에······!”
그 순간, 백하니의 머리 위로 그을린 서까래가 떨어져내렸다. 하필 이음매 부분이 타들어가다가 물에 젖자 힘을 잃고 빠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서응서 촬영감독은 렌즈 속에서 배우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어쩐지, 감이 안 좋더라니.’
박건은 현장 스탭이 소리를 지르기 전부터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리 큰 서까래는 아니지만 저 높이, 저 무게로 떨어진다면 최소한 골절이다. 행여 머리를 맞으면 뇌진탕 내지 뇌출혈이 일 것이고.
어느 쪽이든, 그가 있는 현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빠직, 파지직ㅡ!
다행히, 철왕국과 그를 이어 주는 카메라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순식간에 합기가 퍼져나가며 눈앞에 새빨간 실선들이 그어진다.
용사의 힘을 끌어올렸을 때의 첫 변화, 신체근력이 무지막지하게 향상됐다는 신호다.
‘이 세계로 돌아와서 쓰는 건 처음이지만······.’
일 초를 수백 등분한 시간이 흘러간다.
반 호흡에 발밑을 박차고, 한 호흡에 백하니의 앞에 도착한다. 초인적인 각력에 박살난 바닥의 목재파편들이 채 떨어지기도 전이다.
서까래를 부술까, 데리고 피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의심받을 일은 적은 편이 좋다.
그는 달려나간 속도 그대로 백하니를 안아들며 반대쪽 벽까지 날아가 충돌했다.
우지끈, 쿠당탕!
“······.”
그 자리의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전인우 PD마저 넋이 나간 와중, 서응서 촬영감독만이 거의 본능에 가까운 직업정신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추락한 널빤지 밑에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배우는··· 배우들은?
저 끝의 벽 앞에서, 충격을 몸으로 흡수한 박건이 백하니를 안은 채 주저앉아 있다.
몇 번이나 구르느라 허술하게 묶었던 재갈과 안대는 풀려나갔다.
영문을 몰라 커진 눈동자를 마주보며, 박건은 한때 수없이 했던 질문을 입에 담았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