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warrior turns into a million-dollar actor RAW novel - Chapter (98)
전직 용사는 천만배우-98화(98/199)
고래싸움의 승자 (6)
* * *
지잉, 지잉―
휴대폰 알람이 시끄럽게 울린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간. 회색 침대에 새까만 머리카락이 부채처럼 펼쳐져 있다.
방의 주인, 널브러진 여배우는 전날 과음의 여파로 골골대는 중이다.
“두두야, 알람 꺼 줘.”
백하니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지만, 소리는 오히려 더 커진다. 머리맡을 더듬어 가져와 보니 알람이 아니라 전화다.
[귀찮은데받아야됨]긴 손가락이 잠금을 풀자, 유준일 실장의 실실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하니, 어제 암살당했다며?
“···시끄러워요.”
-그러니까 진지유랑 술로 왜 붙어? 걔는 웬만한 엔터 대표들도 다 보내는 앤데. 본부장님이 괜히 걔 있을 때 회식 피하겠냐고.
“······.”
어제 얘길 누구한테 들은 건지, 아주 신이 바짝 나서 놀려먹는다.
가녀린 주먹이 파들파들 떨리는 와중에도 유 실장은 신명나게 약을 올렸다.
-아이고, 술 냄새가 여기까지 풍긴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응? 와인 한 잔에도 골골대는 백하찮 씨가 드라마 종방연을······.
“끊어요, 차단도 할 거야. 나중에 나 보면 풀어달라고 하든가.”
-야, 야! 잠깐만!
끊어 버리자 바로 전화가 온다. 유준일의 번호를 싹 차단하고, 메신저까지 차단하자 비로소 휴대폰이 잠잠해졌다.
어차피 넘치는 게 매니저요, 팀장이다. 정 급하면 누군가가 연락해 올 터였다.
“···진짜, 말도 안 돼.”
슬슬, 어제의 기억이 돌아온다.
회식 장소로 섭외된 곳은 촬영장 근처의 대형 고깃집이었다. 1층부터 4층까지, 전세를 낸 스탭들이 소갈비를 굽기 시작했다.
‘어머, 여기가 주연 테이블이구나.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생글생글 웃는 도둑고양이가 PD와 촬감, 그녀와 박건이 있는 테이블로 접근한 것은.
어제 못 푼 화병이 다시 돋는다. 백하니는 끼고 자는 대형 캐릭터 쿠션을 퍽퍽 때렸다.
“열받아, 무슨 술을 그렇게 잘 퍼먹냐고!”
본래 그녀는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체질적으로 잘 받지도 않고, 한 잔 마시면 얼굴이 붉어지는데 숙취까지 심하다.
그래서 종방연은 물론이고, 제작사 미팅에서도 웬만해선 입에 대질 않는데······.
‘언니. 한잔 받으실래요? 이런 날 주연이 술 안 마시면 시청률 안 나온다는데. 아, 제가 다 마실 거니까 괜찮으려나?’
저 영악한 계집애가, 눈웃음을 살살 치며 속을 긁는 통에 넘어가고 말았다.
‘너보단 잘 마실 것 같은데?’
‘에이,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죠. 나이 많다고 잘 마시나.’
‘따라. 소주 말고 소맥으로.’
유준일이 봤다면 뜯어말렸겠지만, 신입 로드는 그녀가 지독한 ‘알쓰’임을 몰랐다.
박건이 희한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기어이 소속사 여배우들끼리의 술배틀이 열리고 만 것이다.
결과는 처참했다.
‘마셔라, 마셔라. 우리 배우님들 최고다! 영 작가도 한잔 해, 어··· 오늘 안 왔었다고?’
코가 비뚤어지게 마신 전인우 PD가 파트너를 찾고, 만취한 배우들이 매니저에 업혀 나가는데도 진지유는 멀쩡했다.
이래도 안 마셔? 라고 말하는 듯한, 깔보는 눈빛에 오기가 치민 것이 실착이었다.
소맥에 샴페인··· 억지로 몇 병 더 버티자 눈앞이 핑핑 돌았다. 지켜보던 박건이 그녀의 잔을 붙잡을 정도였다.
‘괜찮습니까? 술은 그만 마시고, 바람이라도 쐬고 오시죠.’
‘바람을 왜 쐐요. 나 멀쩡하거든요?’
‘···눈이 다 풀렸는데.’
‘에이, 걱정 마요, 오빠. 천하의 백하니가 이 정도로 취했겠어요? 오늘 우리 회사 넘버 원 가려야 하니까, 얼른 한잔씩 더 주세요.’
거기서 그냥 나갔어야 했는데, 둘이서만 간단히 마시고 가거나. 흘러간 생각이 그녀를 흠칫 놀라게 했다.
남자 연예인이랑은 말도 안 섞는 백하니가, 아무리 취했다지만 소속사 동료와?
아무리 옆에서 밉상이 약을 올려 댔다지만······.
그때,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유준일 실장이 아니라 로드 문성훈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하니 씨! 유 실장님께서, 혹시 괜찮으시면 이번 백정장군 막방 날에 회사에서 같이 보자고 하셔서요. 그날 대표님 허락받고 회사 사람들이랑 종방연도 크게······.
“···다고 해요.”
-예?
“죽었다고 해요, 백하니 잠정 은퇴라고.”
-하니 씨, 그게 무슨 말씀······.
종방연 소리만 들어도 속이 뒤집힌다. 그녀는 전화를 끊어 버리고 배달 앱을 켰다.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를 박스째 시키던 도중, 치를 떠는 절규가 울렸다.
“다음번엔 꼭, 이거 다 먹고 붙는다······!”
*
강남의 모 종합학원.
주말이지만, 억지로 끌려나온 학생들은 하품을 하며 자리로 찾아간다.
남학생 한 명이 이어폰 낀 친구를 툭 쳤다.
“야, 뭐 보냐. 재밌어?”
“백정장군. 요즘 이게 제일 핫해.”
말을 건 남학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거 우리 엄마도 보던데. 걍 전형적인 국뽕 사극 아님?”
“뭐라는 거야, 개명작인데. 어제 밤새 보다가 울었다.”
“큭큭, 드라마 보면서 짜긴 왜 짜. 애냐?”
남학생은 낄낄거리면서도 친구의 이어폰 한쪽을 떼어다 꼈다.
잠시 후, 강사가 들어왔는데도 드라마에 푹 빠져 있던 둘은 한 소리 들었다.
“윤태, 정호. 선생님 봤으면 이어폰 빼야지.”
“쌤, 우리 한국사잖아요! 오늘은 드라마로 시청각수업하면 안 돼요?”
“···갑자기 얘들이 왜 이래?”
35%, 마의 벽을 드디어 넘었다.
이제 10% 초반까지 떨어진, 재기불능의 ‘하이페리온’은 비교 대상조차 못 된다.
남은 것은 지상파와 케이블 모두 침체돼 있던 고층 시청률을, 과연 어디까지 밀어올리느냐다.
-드라마 분석하는 남자, 드분남입니다. 오늘 컨텐츠는 장안의 화제인 백정장군! 이 무서운 인기의 이유를 알아볼 텐데요. 호화로운 배우진? 끝내주는 대본? 다 맞지만 가장 특별한 점은 바로 현실성입니다. 노 국뽕, 예스 고증, 이게 또 요즘 세대를 아우르는 픽이거든요!
모 유튜버가 분석 채널에서 말한 것처럼, 이 드라마에는 소위 ‘국뽕’이라 불리는 요소가 없다.
무능한 자는 무능하며, 악랄한 자는 악랄하다.
약자도 약탈자도 미화되지 않는다. 모두가 알 법한 보편적 상식에 의거해, 신파 없이 풀리는 이야기가 몰입감을 더한다.
-지난주, 극은 이천인이 쫓기는 대목에서 끝났는데요. 제작진이 ‘가장 현실적인’ 결말이라고 밝힌 만큼, 수많은 시청자가 새드 엔딩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과연 장군의 탈을 쓴 백정탈, 이천인과 송이설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
돌아온 일요일.
오늘은 20부작 ‘백정장군’, 대망의 마지막 회가 방영되는 날이다.
그래서일까, 광고도 유독 길다. 치즈 접시와 와인이 세팅된 거실. 박열호가 방금 뜬 기사를 아내에게 읽어준다.
“여보, 어제 최고시청률이 36%였다네. 방송가 기자 양반들도 오늘은 무조건 더 높을 거라고 예상하는 모양이야.”
모처럼 오붓한, 부부만의 감상 시간이다. 손재주 좋은 작은아들은 뭘 뚝딱뚝딱 만지더니 영화관 버금가는 홈시어터를 만들어 놨다.
덕분에 집에서도 언제든 쾌적하게 출연작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럼요, 애들이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이런 날 같이 봤으면 더 좋았을걸······.”
“돈 많이 든 작품이라잖아, 회사 사람들이랑 봐야지. 지난번엔 변휘승 군인가? 그 친구랑도 한번 봤고. 건이랑 선이 아니었으면 언제 또 배우랑 드라마를 보겠어.”
남편의 다독거림에, 한영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운 마음에 한 말일 뿐. 작품을 몇 개 찍자, 이제 그들도 막방 당일 배우와 매니저가 얼마나 바쁜지 잘 안다.
거기다 오늘은 무려 500억짜리 대작의 마무리 아닌가? 듣기론 소속사에서 상영회 후 종방연까지 한다는 것 같았다.
이내 광고가 끝나고 검은 화면이 걷혔다. 한영주와 와인잔을 부딪친 박열호가 중얼거렸다.
“저쪽도 한창 바쁘겠구만.”
*
전직 소방관의 예측대로, 로만 엔터테인먼트는 일요일임에도 북적였다.
특히 일일 상영관이 된, 최근 한 층을 통째로 터서 확장한 라운지는 외부 손님들까지 들어와 정신이 없었다.
“누나, 좀 절루 가 봐요. 이 자리 제가 먼저 와서 잡았는데.”
“네가 비켜. 살은 왜 이렇게 찐 거야?”
“저 사무라이 한다고 8키로 뺐잖아요. 내내 못 먹다가 나흘 연속 폭식했어요.”
C&J의 배우, 얼굴이 달덩이처럼 반질거리는 이동수가 싱글벙글 웃는다. 대충 봐도 어제 먹은 야식이 덜 빠진 모양새다.
한숨을 푹푹 쉬던 조현아의 눈에 쭈뼛거리는 외부인이 들어왔다.
“···민우야, 넌 왜 또 쭈구리 행세야? 이리 와서 그냥 앉으면 되잖아.”
“저, 제가 다른 엔터 방문이 처음이라······.”
한쪽에는 조현아와 이동수, 초대받아 온 오민우가, 그 옆에는 전인우 PD와 영도은 작가가 자리를 잡는다.
“오, 여기 좋구만. 매일 CVN 편집실에만 박혀 있다가 대형 엔터 오니까 공기부터가 달라.”
“감독님,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욕먹어요. 진 본부장님 귀에라도······.”
“에이, 거기선 절대 안 하죠. 누가 잘릴 일 있습니까?”
오늘은 막방이 끝나고 로만 내에서 파티가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덕분에 방송국에서 보던 작감도, 각자 감상하던 타 회사 배우들도 한데 모였다.
어차피 대성공한 드라마, 최종화 시청률이 얼마나 나오든 축하 파티가 가능한 것이다.
맨 뒤는 엔터 내부 관계자들의 자리다. 공기형 팀장과 유준일 실장, 몇몇 안면 있는 팀장들 옆에서 진지유가 박건에게 속닥거린다.
“오빠, 몇 퍼센트 보세요?”
“잘 모르겠습니다. 작품을 몇 개 찍어도 그쪽으론 감이 없어서.”
“저는 딱 알겠던데요? 최소 38%, 최대 41%. 틀리면 다음 번 작품에 나갈게요. 특출 말고 무조건 여주로.”
박건은 옆자리의 동료를 돌아보았다. 스케줄도 아닌데, 선글라스를 걸친 진지유가 보일 듯 말 듯 눈웃음을 짓는다.
‘백정장군’에 특별출연한 날··· 그 술자리가 끝난 뒤부터 묘하게 텐션이 높다.
“저는 37%로 가겠습니다. 지유 씨 스케줄에 지장을 줄 순 없죠.”
“뭐, 그래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걔는 제대로 보냈으니까.”
“······예?”
“와, 시작해요!”
이내 극이 시작된다. 라운지의 100인치짜리 벽걸이 TV에, ‘백정탈’ 식구들의 운명이 차례차례 지나간다.
―가거라, 설아. 할애비는 여기까지다. 여인이 아닌 당당한 한 명의 독립투사로, 일제와 맞서 조선을 바꾸려무나.
―할아버지, 제발··· 안 돼요, 같이······.
―천운이 따른다면 만주와 연해주에서 지원군이 올 게다. 어서 가라!
칼을 뽑아든 송별한 대감은 손녀딸을 위해 희생한다. 가짜 매국노를 자청하며 언더커버로 활약해 온, 사대부 출신 거인(巨人)의 최후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온다.
눈물을 삼키며 탄약을 장전하는 송이설의 씬이 끝나고, 경성독립군 대장 이정녕이 나타난다.
―백정탈, 이천인은 우리가 쫓아낸 나와 여러분의 동포요. 누명을 쓰고 죽은 백정의 자식이, 오직 복수를 위해 서방에서 돌아와 왜인들을 단죄하고 있소이다.
남씨네 도살장. 경성에서 살아가는 거의 모든 조선인들을 불러모은 자리다.
한 팔이 잘리고 얼굴엔 죽음의 빛이 드리워져 있지만, 이정녕의 안색은 어느 때보다 맑다.
―나는 오늘 죽을 것이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대장!
―하지만 후회는 없소. 마음을 나누고, 등을 맞댄 전우들과 함께 싸웠으니까. 다만··· 저승길 노자를 챙기기 전, 같은 핏줄에게 이토록 매몰찼던 내 죄를 씻고 싶군.
두려움과 망설임, 흥분이 섞인 공기가 지켜보는 이들 사이를 감돈다.
이정녕, 한쪽뿐인 손으로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좌중에게 보인다. 이천인이 써 왔던 구릿빛의 ‘백정탈’이 불빛 아래 드러난다.
―영광스러운 밤이 될 거요, 조선의 혼을 위한.
화면이 바뀌고, 경성의 밤거리.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울려퍼지는 와중, 완전무장한 헌병과 순사들이 갈팡질팡한다.
―백정탈이 나타났다!
―여기가 아냐, 종로서 쪽이다! 그쪽에서 지원요청이 들어오고 있어!
―말도 안 돼. 외곽에서 불길이 인다는데, 백정탈의 몸이 몇 개나 된단 말인가?
분명 부상당했을 터인데, 산개해 들어오는 보고에 지휘체계는 혼란에 빠진다. 조장의 노란 띠를 두른 헌병이 더듬거리며 말한다.
―설마, 정말로 인간이 아니었던 건······.
―멍청한 소리. 이천인은 갈기갈기 찢겨 죽을 것이다. 놈을 따르는 조선인 가축들과 함께.
섬뜩한 음성이 끼어든다. 헌병들이 돌아보자, 검은 옷을 입은 칼잡이들 다섯 명이 광장으로 모여들고 있다.
이천인에게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지만, 황우회의 핵심 인물들은 복수귀가 되어 죽음 끄트머리에서 돌아왔다.
―······.
몸 곳곳을 붕대로 묶은 사무라이들에게서 짙은 피 냄새가 훅 끼친다. 그들이 쓴 가면을 본 몇몇 순사가 숨을 들이켰다.
까만 뿔에 시뻘건 얼굴, 누런 송곳니를 길게 빼문 오니(おに)가 말한다.
―놈을 찾아라, 황국의 신민들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