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157)
제157화. 로미오와 줄리엣 (12)
“내일 연극이네? 떨리진 않아?”
“떨리진 않아요.”
도현이 설핏 웃었다.
첫 영화 촬영 때도 떤 적이 없던 도현이었다. 이제 와 학교 공연에 떨릴 리가 없었다.
오히려 약간의 기대와 설렘만이 두 눈에 어른거렸다.
잔잔하게 대화를 나누며 저녁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지잉-
도현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서혜나가 관심을 보였다.
“아빠니?”
“음… 아니요. 매독스네요.”
“워커 씨?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그러게요. 전화 좀 받을게요.”
도현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거실로 향했다. 주방은 서혜나가 식기를 정리 중이라 조금 시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전화받았어요.”
– 아, 받았군요.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막 저녁 식사를 끝낸 참이었거든요.”
– 그렇군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답지 않게 망설이는 태도에 도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뭐지?
평소의 매독스의 행동과는 너무 달랐다. 이상한 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목소리도 가라앉아 있었던 것 같았다.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마치 도현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핸드폰을 잡은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매독스의 침묵을 인내하던 도현이, 이내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매독스?”
– 하아… 그게, 듣고 너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냥 운이 안 좋았다고 생각하세요. 미스터 리한테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니까요.
아.
도현은 어떤 강한 예감을 받았다.
별로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도현은 인내하지 못하고 그에게 물어본 것을 짧게 후회했다.
그러나 듣지 않는다고 회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도현의 불안은 매독스의 말을 통해 실체화되어 다가왔다. 마음의 준비를 할 새조차 없었다.
– 이번 영화는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미스터 리.
쿵.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소리였다.
도현이 느릿하게 심호흡을 했다.
몇 번 숨을 고르니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 미스터 리?
“왜요? 무슨 이유로요?”
목소리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나왔다. 그래서인지 매독스는 조금 안심한 것 같았다.
그가 한결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 감독 측에서는 미스터 리를 원했지만… 제작사 측에서 의견 마찰이 조금 있었습니다. 캐스팅을 제작사와 감독이 결정한다는 건 말씀드렸죠? 원래 협상에서 주연을 캐스팅하는 권리를 감독에게 넘겨 주었는데, 제작사 측에서 말을 바꿔서 일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제작사 측에서 제가 주연을 맡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나요?”
– …네, 그렇습니다.
“감독님은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 데이비스 감독은 미스터 리를 주연으로 원한다고 의사를 밝혔는데, 제작사 측이 워낙 완고했습니다.
그는 이런 소식을 어린 배우에게 전하는 게 퍽 어려운 모양이었다. 도현은 그가 에둘러 말한 뜻을 바로 이해했다.
자신이 이 영화의 주연이 되어야 한다며, 열성적으로 말하던 윌리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에 흔들리던 자신도. 끝내 오디션을 포기하던 순간과 손때가 묻을 정도로 너절해진 대본도.
괜찮아.
이건 별일 아니야.
도현은 감정을 누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애썼다. 에드워드도 그렇게 말했다.
영화가 엎어지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고.
도현이 꽤 멀쩡한 투로 말했다.
“그도 결국 동의했나 보네요.”
– 데이비스 감독을 감싸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결국 영화에서 중요한 건 자본이니까요. 그도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 겁니다.
“알고 있어요.”
옅은 한숨이 수화기 너머로 흘러들어왔다.
– 정말 죄송합니다, 미스터 리.
“매독스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 아니요. 좀 더 제작사의 상황을 잘 살펴보고 판단했어야 했습니다. 처음부터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요.
두 번째 문장에서, 도현은 매독스의 죄책감의 원인을 깨달았다.
그는 에이전트 입장에서 미안한 척하고 있었지만, 결국 어린아이의 기대를 저버린 어른으로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공과 사가 철저하고, 기계적일 것 같다는 인상은 결국 인상에 불과했다. 매독스는 생각보다 친절한 어른이었다.
그게 도현의 감정을 자극했다.
깔끔하게 전화를 끊고 마음을 갈무리하면 될 것을,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왜요?”
– 예?
“제작사 측에서는 왜 제가 싫대요?”
– 그… 미스터 리.
곤혹스러운 목소리였다.
사실, 도현은 몰라서 물은 게 아니었다. 왜 매독스가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는지, 뭉뚱그려서 설명했는지까지도 알고 있었다.
원작 소설에서 주인공은 동양인이 아닌, 라틴계 미국인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다분히 비이성적인 행동이었다.
“제가 동양인이라서죠?”
답은 빠르게 돌아오지 않았다. 도현은 부러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괜찮아요, 매독스. 처음부터 말해 주셨잖아요. 벽은 높고 넓을 거라고, 여기는 할리우드고 저는 동양인이라고요. 솔직히 말해주세요.”
– …네, 맞습니다.
알고 있었는데, 막상 확답을 들으니 말문이 막혔다.
충격을 갈무리한 도현이 물었다.
“제작사 측에 동양인을 혐오하는 레이시스트가 있었나요?”
직설적인 말에 매독스는 잠시 당황한 듯 침묵하다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 그냥 다 말씀드리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그 점이 아예 없었다고는 못 하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도현은 차분히 그의 말을 들었다.
– 좀 더, 상업적인 측면에서의 문제입니다. 동양인 아이를 주연으로 세웠을 때와 백인 아이를 주연을 세웠을 때의 흥행을 이유로 들더군요. [The Wanderer>가 상업 영화 못지않은 흥행 기록을 만들었다지만, 그건 기본적으로 독립 영화였죠. 하지만 이 영화는 상업 영화입니다. 흥행성을 따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 사실, 읽어봤으니 알고 있겠지만 원작에서 주인공의 인종이 동양인이 아니기도 했고요.
도현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제작사의 요구는 나름대로 합당한 면이 있었다.
– 다 알게 되었으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 데이비스 감독이 어쩔 수 없었다고 한 건 잊어주세요. 개소리니까요. 솔직히 이건… 우리 측에게 굉장히 무례한 일입니다. 제작사 측과 제대로 협의하지 않고 캐스팅을 한 개자, 아니, 데이비스 감독의 잘못이죠.
매독스도 이 일에 많이 분노하고 있는지, 거친 말이 이따금 튀어나왔다.
도현의 침묵을 무엇으로 이해했는지, 달래듯이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
– 두 번째로 잘못한 사람은 저고요. 이건 미스터 리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으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디션과 영화는 아깝게 되었지만… 더 좋은 기회가 생길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들 거고요.
정중한 척 말하고 있지만, 살살 달래는 게 뻔히 보였다. 그가 저자세로 나올수록 도현은 차분해졌다.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알았어요.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 괜찮은 겁니까?
“네. 그래도 지금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다음에… 다시 통화해요.”
– 편할 때 연락해 주세요. 이번 일은 그냥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시고요.
거듭 당부하던 매독스가 전화를 끊었다. 도현은 통화 기록이 남은 화면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응시하다가, 화면을 껐다.
마침, 설거지를 마친 서혜나가 주방에서 나왔다.
“도현아, 워커 씨가 뭐라고 하셨니?”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별일 아니었어요. 영화 진행 상황을 알려 주시려고 전화하셨더라고요. 저 먼저 방에 올라가 볼게요. 내일 연극 준비를 마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지극히 태연한 얼굴에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 서혜나가 그러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평소처럼 계단을 올라가, 방으로 향했다.
탁.
문을 닫은 도현이 자연스럽게 문을 잠갔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적막이 찾아왔다.
도현의 얼굴은 여전히 여상했다.
“별일 아니야.”
아까 전부터 계속 반복해서 했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말하고 보니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그 에드워드조차, 몇 번이고 영화가 엎어질 위기를 겪었다고 했다. 그러니 이런 일쯤은 도현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솔직히, 욕심이 과했다.
처음부터 영화의 주연을, 오디션 없이 맡으려고 한 것부터가 너무 욕심을 부렸던 거다. 과욕의 대가라고 생각하면 된다.
억울할 일도 아니었다. 몰랐던 것도 아니니까.
애초에 매독스가 경고했었다.
힘들 거라고, 벽을 넘어야 할 거라고.
그때 뭐라고 했던가.
아주 당당하게, 부수면 허물어지고 넘어가면 의미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아야 하는데….
도현의 시선이 책상에 닿았다. 몇 날 며칠, 읽고 또 읽어서 낡아 보이는 대본과 책상 주변에 가득 붙은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 앞에 걸어간 도현이 대본 옆에 단정히 놓인 공책을 열어보았다. 검은 글씨가 빽빽하게 가득 차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글씨를 담았다.
“하나도 안 괜찮아.”
무의식중에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말을 하고 나서야, 도현은 깨달았다.
눈매가 일그러지고, 검은 눈동자가 풍랑을 만난 배처럼 일렁였다.
도현은 그림을 덧그리듯이, 처음 단어를 배운 아이가 웅얼거리듯이 천천히 한 번 더 말했다.
“안 괜찮아.”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일순 가라앉았다.
…그래.
전혀 괜찮지 않았다.
자신의 노력과 시간과 기대와 설렘이, 불합리한 이유로,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서 쓰레기가 되어버린 건 정말로, 괜찮지 않았다.
도현은 이제야 알았다. 매독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말하는 바를 안다고,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오만하게 자부했으면서, 사실은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은 그냥 무지하고 무모한 어린애일 뿐이었다. 수치스러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연기를 못해서였다면, 주인공을 맡기에 부족해서였다면 이토록 비참한 기분은 아니었을 텐데.
깊은 곳에서 자꾸만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심장은 차가운 호수 밑바닥에 담근 것 같았다.
도현은 책상 앞에 가만히 서서 한참을 생각했다.
매독스는 잘못한 사람은 데이비스 감독이라고 했다. 두 번째로 잘못한 건 자신이고, 도현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정말 그럴까?
냉각수를 들이부은 것처럼 머리가 차가웠다. 냉철한 이성 속에서 도현은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내게 아무런 원인도 없어?
나를 함부로 판단하게 내버려 두었잖아. 쉽게 버릴 수 있는, 누구와도 대체할 수 있는 선택지로 만들었잖아.
도현은 분노의 원인을 깨달았다.
형이었다면,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넘실거리며 뾰족하게 솟은 검은 감정은 자기혐오다. 나는 형의 희생으로 주어진 기회를 이런 식으로밖에 못 쓰는구나.
그로 인해 삶을 얻었는데.
이제는 불완전한 영혼조차 아닌데.
고작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그런 이유 따위가.
별 볼 일 없는 이유로 패배를 경험했다는 게 지나치게 쓰라리게 다가왔다. 어쩌면 처음으로 자존심에 상처 입은 어린 짐승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몰랐다.
도현은 제 과거를 조금씩 더듬어 보았다.
여러 인터뷰가 들어왔음에도 거절했던 것, 프로그램 출연을 기피한 것, 기회가 왔음에도 어떻게 되든 좋다는 식으로 미루고 미루다가 해가 지나서야 에이전시에 가입한 것.
만약 모든 인터뷰에 응답했다면,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췄다면, 에이전시에 조금만 더 일찍 가입했다면 어땠을까?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한 번이라도 절실한 적이 있었나?
매독스는 도현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가 틀렸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게 그의 잘못이었다.
연기 말고 다른 요소로 자신을 판단하게 둔 것이 잘못이었다.
도현은 창문과 책상 할 것 없이, 여기저기 붙은 포스트잇을 하나하나 떼어 냈다. 하나로 모은 포스트잇을 대본 위에 성의 없이 붙였다.
대본을 공책 위에 겹쳐 든 도현이 잠시 그것을 응시했다.
똑똑.
“도현아, 자니?”
“아직이요. 이제 자려고요.”
문이 열리고 서혜나가 들어왔다. 도현은 진짜 막 자려고 했는지, 침대에 올라가는 중이었다. 서혜나가 살짝 웃었다.
꼬물꼬물 기어 올라가 이불을 덮자, 서혜나가 접힌 이불을 펴주었다. 잠시 가슴께에서 두어 번 부드럽게 토닥였다.
“잘 자렴. 좋은 꿈 꾸고.”
“네, 엄마도요.”
일상과 다름없는 굿나잇 인사를 나누고, 서혜나가 불을 끄고 방을 나갔다.
어스름한 달빛이 머리맡을 비췄다. 도현이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방에서 유일하게 달라진 부분은, 구깃하게 접힌 종이로 가득 찬 쓰레기통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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