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201)
제201화. 마주하는 것 (1)
“어! 안녕!”
평소와 같이 촬영장에 온 도현은 갑작스럽게 어깨에 걸쳐진 팔에 잠시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 나서야 중심을 되찾은 도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가,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콜린?”
“응, 오랜만이지!”
그가 도현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로 환하게 웃으며 유쾌하게 말했다. 도현이 풀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콜린은 다른 밴드 멤버보다 좀 더 후반에 등장했기 때문에, 촬영장에 나오는 날이 적었다.
그래서 콜린을 보는 게 그의 말대로 꽤 오랜만이었다.
콜린은 도현의 어깨에 팔 한쪽을 올린 채 묻지도 않은 것을 떠들어댔다. 촬영장에 나오지 않은 시간 동안 기타 특훈을 했다며, 연주하는 걸 보면 깜짝 놀랄 거라고 말하는 그에 도현이 기대하겠다고 하자, 되레 놀라서는 기대는 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한참을 도현의 발걸음에 맞춰 걸으며 이것저것 조잘거리던 콜린은 저 멀리서 오는 주디스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다시 또 주디스와 넉살 좋게 떠드는 콜린을 잠시 본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어? 왔구나! 이리 와! 여기 있는 옷 가져가서 입으면 돼.”
익숙하게 스태프가 건네준 옷을 받은 도현이 탈의실로 들어갔다. 분장실에서 분장까지 다 마치고 나왔을 때는, 밴드부원 모두가 모여 있었다.
이렇게 다 모인 게 오랜만이라 신이 났는지 아이들은 평소보다 텐션이 높아 보였다. 도현은 와르르 웃는 친구들을 따라 검은 눈을 둥글게 휘었다. 다정한 낯으로 웃는 얼굴은 아이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그래서 내가….”
신나게 떠드는 콜린의 말을 듣는데, 갑자기 머리에 가벼운 통증이 느껴졌다.
며칠 전부터 머리를 콕콕 찌르는 것 같은 감각이 들 때가 있었다. 도현의 눈썹이 찌푸려졌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이 다시 닿았을 때는 본래의 태연한 낯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촬영을 곧 시작할 테니 준비하라는 스티브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잡념을 치웠다.
* * *
“…하아.”
“바닥에 누우면 더러워, 캣.”
“더러우니까 내가 등으로 청소해주는 거잖아.”
창고를 뒤져 가져온 의자에 앉은 주디스가 한심한 눈으로 루카를 쳐다보았다.
주디스가 의자 등받이를 양팔로 안고 몸을 기댔다. 그러자 소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주디스가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바닥에 누운 길고양이 하나, 어설프게 기타 줄을 딩가딩가 치고 있는 커다란 애 하나, 이제는 지정석이 된 드럼 의자에 앉아서 게임기를 뿅뿅거리는 폐인 하나.
속았다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너무 늦은 뒤였다. 주디스가 푸우, 숨을 내쉬며 턱을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을 한 거 같아.
속으로 중얼거린 주디스가 꿉꿉한 공기에 환기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창문으로 걸어갔다.
카메라가 주디스의 걸음을 따라가고 스태프들이 바닥에 누워 있던 루카를 부축해 한쪽으로 고이 치워두었다.
루카를 옮긴 스태프가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리고.
드르륵!
휘익!
무언가 주디스의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주디스가 어리둥절한 낯으로 눈을 끔뻑였다. 안경이 살짝 비뚤게 내려앉고-
“컷! 오케이!”
컷 사인이 울렸다.
“휴우-”
주디스가 숨을 내뱉었다.
공이 그렇게 가까이 지나간 건 아니지만, 순간 깜짝 놀랐다. 그래도 몇 번이나 공이 어느 쪽으로 날아갈지 스티브 감독이 알려주었기 때문에 문제없이 해당 장면의 촬영이 끝났다.
루카가 메이크업을 받는 동안 짧은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운동장 쪽에 서 있는 콜린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주자, 콜린이 무어라 말하는 듯 손짓 발짓을 하는 게 보였다.
“뭐라는 거야?”
다만, 거리가 좀 있어서 주디스에게는 괴상한 행동을 하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쟤도 좀 이상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주디스가 놀 상대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루카는 메이크업 중이고, 브레디는 자꾸만 눈치를 봐서 좀 불편하고, 도현은…, 응?
“…아, 왜?”
시선을 느낀 도현이 의아한 눈으로 주디스를 쳐다보았다. 주디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잘못 봤나?’
물끄러미 주디스를 응시하는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다. 주디스는 아무래도 저 이상한 안경 때문에 착각을 한 거 같다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도현! 이것 봐!”
누운 채로 얼굴에 공을 올리고 실실 웃는 루카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는 도현을 보며, 주디스는 아까 전 생각을 잊었다.
잠시 후.
이어서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툭.
데구르르.
“방금 뭐가….”
뒤를 돌아본 주디스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방 안에 침묵이 가득 찼다.
“…….”
“…….”
어떻게 해?
나도 몰라!
브레디와 도현, 주디스가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감독이 신호를 보내자, 스태프가 강풍기의 스위치를 눌렀다.
휘잉-
바람이 불며 루카의 보라색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리고 드러난 얼굴에 세 사람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공에 맞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도 얼굴이지만, 표정이 누구 하나 죽일 것같이 살벌했다. 저 예쁜 얼굴을 저렇게 쓸 수도 있구나 싶어서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저기! 혹시 공이 이쪽으로 날아오지 않았어?”
누군가 창문 밖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원래 웃는 상인 얼굴인지, 아니면 성격이 밝은 건지 유쾌한 낯이었지만….
“어… 저기?”
뒤늦게 싸늘하게 얼어붙은 공기를 눈치챈 콜린이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살고 싶으면 도망,”
“이거 말이지?”
주디스가 재빨리 생명 하나를 구하기 위해 콜린의 팔을 잡고 말을 내뱉었지만, 이미 사신은 가까이에 와 있었다. 주디스가 어깨를 움찔했다.
“…난 몰라.”
어느 정도 책임 비중이 있는 주디스가 콜린을 외면하며 은근슬쩍 뒤로 물러섰다. 아직 사태 파악이 덜 된 콜린이 목을 긁적이더니 말했다.
“그으… 볼이 빨간데, 어디 부딪힌 거야?”
“글쎄, 뭐에 맞은 거 같긴 한데.”
브레디가 어떻게 좀 해보라며 도현의 옷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도현이 침통한 낯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만히 있는 하이에나를 건든 시점에서 저 초식 동물의 운명은 결정된 거였다.
뒤늦게 깨달음이 찾아왔는지 콜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 혹시 내가…?”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묻는 콜린에 루카가 대답 없이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오히려 침묵이 원망보다 더한 압박으로 다가왔는지, 콜린이 경황없이 당황한 낯으로 허둥지둥댔다.
“미, 미안해!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진짜 아니야! 공이 화단에 맞고 잘못 날아가서… 정말 미안해!”
“얼마나?”
“어?”
“얼마나 미안한데?”
무언가 굉장히 익숙한 대사였다. 루카의 표정, 팔의 각도, 눈빛까지 모두 완벽했다.
성인 몸의 반절도 오지 않는 초등학생이 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무언가 생각나는 장면에 스태프들은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써야 했다.
“내, 내가 뭐 해줄 수 있는 거 없을까? 나 축구도 잘하고 아는 애들도 많고 과학도 잘하는 편이고….”
소년은 꽤나 눈치가 빨랐다. 자신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본능이 일한 거일 수도 있었다. 그게 정말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미지수였지만.
“엘비.”
“네, 넵!”
기합이 잔뜩 들어간 브레디가 삑사리를 냈지만, 아무도 비웃지 않았다. 루카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종이, 있지?”
“!”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콜린을 제외한 아이들의 얼굴에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밴드부 마지막 멤버가 스스로 굴러 들어왔다.
* * *
“도현! 어디 가?”
홀로 일어나 어딘가로 가는 도현에게 바닥에 앉아서 콜린이 가져온 카드 게임을 하던 루카가 물었다.
“같이 게임하자, 이거 재밌어!”
도현은 잠시 고민하는 듯 멈춰 섰다가, 곧 고개를 휘휘 저었다. 멀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루카에 도현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서 좀 쉬려고.”
“저기?”
왜 굳이 사람들이 많이 없는 외진 곳으로 가는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한번 카드 게임을 할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대답하려는 순간 머리가 찌릿하고 아파와서 도현은 입 안을 살짝 깨물었다. 루카가 이상함을 느끼기 전에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두 번 거절하자 루카도 재차 권유할 생각은 없는지 잘 쉬다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카드 게임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근처 의자에 앉아 몸을 늘어트리고 있던 헤레이즈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도현을 따라갈지, 그냥 여기서 쉴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몸을 축 늘어트렸다.
아이들에게서 멀어진 도현이 조금 외진 곳에 가서 창틀에 팔을 기댔다.
쏴아-
선선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자,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정처 없이 휘날렸다. 도현은 스태프가 이따 보면 놀라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창문을 닫거나 하진 않았다.
바닷속에 노을이 잠겨 있었다. 촬영지인 산타 모니카 아카데미는 해변가에 있는 작은 둔덕에 위치해서,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면 곧바로 파도가 치는 걸 볼 수 있었다.
얼굴에 노을이 아롱지며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도현은 가만히 파도를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두통의 원인은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지.’
도현의 눈에 조소의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영혼이 합쳐져 건강한 육체를 가지게 된 것과 별개로, 과거 자주 앓았던 탓인지 아니면 그저 정신적인 부분이 문제인 건지,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어김없이 두통이 일었다.
이토록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빠가 미국에 오고 일주일이 흘렀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지난 일주일이었다.
아빠가 공항에 도착한 날.
집으로 돌아가 셋이서 단란하게 저녁 식사를 할 때, 도현은 생각했던 것을 입 밖으로 꺼내고자 했다.
그러나 나오는 건 다른 말이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왜지?
도현은 당혹스러웠다.
분명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말하려고 할 때면 목구멍에 무언가 막힌 듯이 턱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별로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래도 첫날이니까.
꼭 첫날부터 얘기할 필요는 없으니, 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게 하루, 이틀, 일주일까지 길어지기 전에는.
도현은 슬슬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소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입매를 꾹 다물어 일자로 만들고 있던 도현이 별안간 얼굴 근육에 힘을 풀었다.
“…아니야.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홀로 작게 중얼거렸다.
변명조의 말이었지만, 도현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가만히 바다를 보며 떠올리려고 애썼다.
종업식 날, 공원에서 느꼈던 그 순간의 감정을.
잔디밭 위에 펼쳐서 조금은 울퉁불퉁했던 돗자리의 감각과 친구들이 떠들던 목소리, 목을 스치던 바람과 정수리 위로 떨어지던 햇살.
아무런 걱정과 불안조차 없이 그저 평온하기만 했던 순간.
하얗게 밀려왔다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를 보고 있다 보면, 그때처럼 모든 불편한 감정들이 쓸려 내려갈 거 같았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 아빠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만 말하면 되는 거니까.
도현은 불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달라졌어.’
처음 병원에서 나왔을 때, 친구들과 떨어지는 것을 상상만 해도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속이 울렁거렸다. 지금 와서는 왜 겨우 그것 가지고 벼랑 끝에 몰린 것처럼 두려워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작년에 비하면 도현은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좋았다. 내면적인 부분도 그렇고, 외면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봐.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토할 것 같지는 않잖아.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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