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35)
제35화. 투쟁 (15)
“그, 그럼 저는 탈락이라는 소린가요?”
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리며 물어왔다.
한 손으로 턱을 감싸 쥔 리암에게선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맥에게는 그 침묵이 긍정의 표시로 느껴졌다.
맥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노력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노력이 부족하진 않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력했다.
책을 살 수가 없어 구질구질하게 서점을 기웃거렸고, 연기를 배울 수가 없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강의를 찾아 들었다.
2차 심사까지 합격하고, 메일로 보내진 대본을 손때가 묻다 못해 너덜거릴 때까지 보았다.
지금 해내지 못하면 꺾여버릴 것 같아서 더 독하게 노력했다.
그랬는데.
‘고작 이미지 때문에?’
자괴감이 들었고, 이어 억울함이 치고 올라왔다.
이대로 떨어질 순 없었다.
“좀 더,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들풀이 아니라 화초같이 보일 수 있도록 만들게요. 할 수 있어요. 기회를 주세요.”
맥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리암은 여전히 요지부동인 것 같았다. 다급하게 리암의 옆에 앉은 로잔나를 보았지만, 곤란한 미소를 얼굴에 띠고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조바심이 난 맥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 유, 유 역할 오디션을 볼 수 있을까요?”
“음… 미안한 일이지만, 유 역할은 이미 정해졌어요. 제 옆에 앉은 작은 신사분이 그 역할의 주인이시죠.”
“아…. 이미 정해, 졌다고요.”
맥의 눈이 단정하게 앉아 있는 도현에게로 향했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 하얀 뺨과 맑은 눈동자.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 코트.
어느 모로 보나 유 역할을 맡기엔 너무 귀하게 자란 것 같은 외양이었다.
‘나는 이미지가 맞지 않아서 안 된다고 했으면서!’
맥의 이가 바득- 갈렸다.
대체 뭐 때문에 저 애만 특별한 걸까?
맥의 마음이 검게 응어리졌다.
“그럼, 연기는 잘 봤습니다. 오디션 결과는 다음 주중에 연락드릴 예정입니다. 수고하셨어요.”
로잔나의 말에 맥이 애써 웃음 지었다.
“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깊게 허리를 숙인 맥이 문고리를 돌렸다.
탁-
문이 닫히고.
문을 등진 채 서 있는 맥의 얼굴은 갈 곳을 잃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 * *
장장 네 시간에 걸친 오디션이 끝나고.
낮과 달리 지친 기색이 역력한 세 사람이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다.
“이제…. 어떤 사람이 좋을지 정해야죠.”
로잔나의 말에 리암이 한탄했다.
“결국 바이올린 연주가 가능한 지원자는 없었지.”
“네. 우대라고 써놓긴 했지만…. 확률상 어려운 일이었으니까요. 물론 가능한 지원자가 있긴 했지만… 음.”
그들은 동시에 보는 사람마저 수치스러웠던 연기를 떠올렸다. 로잔나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어차피 기대하지 않은 일이니까요. 그럼 이 문제는 넘기고…. 혹시 괜찮다 싶었던 후보가 있나요? 저는 첫 번째 지원자가 꽤 괜찮았어요. 이름이…. 아, 할리 하펜. 할리 하펜이요. 이 친구가 이사야 이미지에 잘 어울리더라고요. 연기력도 나쁘지 않고.”
로잔나의 말에 1번 지원자를 떠올린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사랑받고 자란 태가 난 지원자는 이사야의 이미지에 잘 어울렸다. 연기도 조금 어색한 부분은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로잔나의 말을 듣던 리암이 도현에게 물었다.
“너는 마음에 드는 지원자가 있었어?”
그 말에 도현이 잠시 침묵했다.
멋있는 연기를 하는 사람은 많았다. 도현이 감탄하고 본 지원자도 있었다. 실제로 오늘 참관을 통해 도현은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유독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22번 지원자요.”
도현의 대답에 리암과 로잔나의 얼굴이 굳었다.
“22번? 그 들풀?”
“들풀… 네. 아무튼 그 지원자요.”
로잔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연기는 잘하더라고요. 이미지만 잘 맞았더라면 바로 합격이었을 텐데 말이죠.”
“네. 그리고 합을 맞춰 연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리암의 물음에 도현이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재밌을 거 같아서요?”
“그게 무슨 뜻인데?”
“말 그대로요. 같이 연기하면 즐거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왜?”
둘의 대화가 빙빙 돌았다.
왜냐니.
도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연기를 많이 좋아한다고 느꼈어요.”
뜬금없어 보이는 말은 리암에게 완벽한 대답이었다.
“흠. 그래… 그렇단 말이지.”
혼자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젓다가 갑자기 끄덕이고 기묘하게 웃다가 찡그렸다. 그 요상꾸리한 모습에 로잔나가 리암의 곁에서 조금 떨어져 앉았다.
도현과 눈이 마주친 로잔나가 살짝 어색하게 웃었다.
그 후로 한 시간가량 지원자 한 명 한 명의 프로필을 보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올 때와 다르게 하늘이 어둑해져 있었다.
“시간이 많이 늦어졌네. 더 늦기 전에 집에 가라. 네가 한 이야긴 잘 참고하도록 할 테니까.”
리암의 말에 도현이 창밖을 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의견을 나누고 싶긴 했지만, 너무 늦으면 엄마가 걱정할 게 분명했다.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프로필을 열중해서 보고 있던 로잔나가 고개를 들었다.
“집엔 어떻게 가요? 제가 데려다줄까요?”
“괜찮아요. 엄마가 데리러 오시기로 했어요.”
“어머니가 오신다고?”
“네.”
리암이 볼펜으로 턱을 툭툭 쳤다.
“흠, 인사드리러 가야 하나.”
도현이 제가 보고 있던 프로필 용지를 한쪽으로 모아 깔끔하게 정리하며 말했다.
“바쁘시잖아요. 어차피 조만간 만나기로 했으니 그때 인사해요.”
로잔나에게 종이 뭉치를 건넨 도현이 의자에 걸쳤던 코트를 꿰어 입었다.
“엄마한텐 제가 말씀드릴게요.”
물 흐르듯이 말하는 도현에 리암이 수긍하곤 일으켰던 몸을 다시 늘어트렸다. 한동안 잠은 죽어서 자야 하나 싶을 정도로 리암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로잔나와도 인사를 나눈 도현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계약서라니…. 조금 신기한 기분이네.’
촬영이 성큼 앞으로 다가온 것 같아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핸드폰을 켜서 엄마한테 연락하자 타워에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현은 전화를 종료하고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음료수라도 마시잔 생각에 자판기 쪽으로 걸어갔다.
자판기는 복도 끝 구석에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덜컹.
도현이 허리를 숙여 음료수를 꺼냈다. 손에 잡힌 캔은 생각보다 시원했다.
문득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야.”
멀뚱.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도현이 음료수 캔을 땄다. 한 모금 마시려는데 시선이 더욱 강렬해졌다.
뭐지? 입가에 가져다 댔던 음료수를 내린 도현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부른 거예요?”
“하!”
그가 차갑게 비소했다.
도현은 22번 지원자가 왜 이리 적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맥이 입가에 웃음기를 지우곤 말했다.
“좋냐?”
“네?”
“좋냐고. 돈으로 자리 꿰차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물으려던 차였다. 도현을 매서운 눈으로 보던 맥이 비아냥거렸다.
“좋겠네. 누구는 뭣도 없어도 돈으로 주연 자리를 얻고. 나같이 가난한 새끼는 평생 가도 못 앉을 자리에 앉고.”
맥은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이미지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탈락시키려던 감독이, 마찬가지로 이미지가 맞지 않는 애를 떡하니 주연 자리에 앉혀 놓았다.
돈이나 인맥으로 그 자리에 앉은 거라면 한낱 아역 배우가 감독과 같이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는 것도 이해가 갔다.
‘불공평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었다.
자신을 깎아내리기 바쁜 부모님 밑에서 크고 싶어서 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세상은 그에게 가혹하기만 했다.
그 모든 부조리함이 눈앞의 소년 때문인 것 같았다.
“저도 오디션을 보고 합격한 거예요.”
“웃기지 마. 오디션은 네가 아니라 네 부모님이 봤겠지.”
도현이 입을 다물곤 맥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맥은 자신이 정곡을 찌른 것이라 생각했다.
하아. 도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미간을 찌푸리는 맥을 지나쳐 걸었다.
무시당했음을 깨달은 맥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맥이 거칠게 도현의 팔을 잡아챘다.
텅!
하필 음료수를 든 손이라서, 한 입도 먹지 않은 캔이 벽에 날아가 부딪히고 데구르르 굴렀다. 내용물이 흘러나오자 단내가 확 끼쳤다.
의도한 일이 아니었는지 맥의 어깨가 조금 움찔했지만, 이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왜 사람을 무시하고 가는데?”
“전 이미 말했어요. 오디션 보고 합격했다고.”
도현이 차갑게 일갈하며 팔을 떼어 냈다.
“그걸 믿으라고?”
“믿지 말든가요. 상관없으니까.”
도현이 홱 시선을 거두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거침없이 걷던 도현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러고선 살짝 돌아서서 말했다.
“음료수는 그쪽이 치워요.”
맥이 인상을 구기든 말든, 도현은 멀어져 시야에서 사라졌다.
“…망할!”
맥이 욕을 짓씹었다.
자기가 진짜 정당하게 합격이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맥이 어이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맥의 시야에 엎어진 음료수 캔이 보였다.
빌어먹을.
맥이 마른세수를 했다.
* * *
“기분 좋다….”
진이 햇빛에 늘어진 고양이처럼 골골댔다.
덕분에 도현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체할 텐데….”
“아, 됐어, 됐어. 엄마는, 하암… 모르니까 괜찮아.”
니콜라스가 졸음기 그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모르는 게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도현도 이 시간이 꽤나 평화로웠던 탓이었다.
도현이 잔디밭에 앉아 몸을 비스듬히 뒤로 기대고 있었고, 쭉 뻗은 다리는 진과 니콜라스가 각각 베개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싸우고, 화해하고, 사고 치고, 벌받고, 집에 놀러 가면서 세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장난기가 많고 불같은 니콜라스와 만사태평하고 여유로운 진, 차분하고 조용한 도현은 궁합이 잘 맞았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시간을 붙어 다녔다.
오늘도 평소와 같은 일상이었다. 점심을 먹고 뭐 하고 놀지 얘기하는데, 전날 늦게 잤다던 진이 갑작스럽게 낮잠을 제안했다.
공놀이를 하고 싶다며 툴툴대던 니콜라스는 한번 자리에 눕더니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양쪽 다리가 눌려 옴짝달싹 못 하는 꼴이었지만, 뜨뜻하게 전해져 오는 온기가 나쁘지 않았다. 도현이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잔디밭에 나와 있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오늘따라 공기가 따스한 탓인지, 옹기종기 모인 여러 무리가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한쪽에서 누군가 기타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간단한 선율이었지만 듣기 좋았다.
“아, 도현. 오늘 학교 끝나고 뭐 해?”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고 있던 진이 물었다.
“엄마랑 어딜 좀 갈 것 같아.”
“어딜?”
“영화 계약서 사인하러?”
“어?”
진이 감았던 눈을 떴다. 눈이 부신지 눈가를 찡그리기에 손을 펴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계약서?”
“응. 이제 촬영하니까.”
“와….”
진이 잠시 감탄했다.
“그러니까 너 되게 어른 같아 보여.”
진이 코를 찡그리며 말하자 도현이 잘게 웃었다.
“그런 건 엄마가 알아서 해주시는걸.”
“그래도…. 아, 신기하다. 내 친구가 영화를 찍다니.”
“…나도 내가 영화를 찍게 될 줄은 몰랐어.”
도현의 진심 어린 대답에 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유리알 같은 갈색 눈동자가 도현에게 향했다.
“촬영할 때 구경하러 가도 돼?”
“음. 리암한테 물어볼게.”
“그래. 니키, 너도 같이….”
진이 말을 멈추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머리카락이 사부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얘 자네? 언제부터 잤어?”
“한참 전부터?”
“허! 낮잠은 싫다더니.”
진이 손가락으로 니콜라스의 볼을 쿡 찔렀다. 잠깐 뒤척일 뿐 깨어나지 않자,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 채로 소곤소곤 말했다.
“이따 촬영장에 같이 갈 건지 물어보자.”
“그래.”
혹여 깰세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날씨가 좋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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