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408)
제408화. 이방인, 그리고 우리 (15)
드라마가 촬영되는 사극 테마파크는 무척이나 넓었다. 건물만 해도 열 개가 넘었을뿐더러 조금 걸어가면 백성들이 거주하는 저잣거리까지 구현되어 있었다. 차라리 하나의 마을에 가까웠다.
민은우는 그게 신기한지 가는 길 내내 눈동자가 도륵 도륵 굴렀다. 작은 입에서 연신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신기해?”
“넹.”
정신이 팔린 탓에 아까보다 발랄해진 대답이 돌아왔다. 이게 본래 성격인 모양이었다. 귀엽다. 이미 다섯 번이나 되뇐 말을 한 번 더 곱씹었다.
“그쪽에 있는 건물은 포도청이랑 옥사야.”
“포도요?”
“아니, 포도 말고 포도청.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이야. 그리고 옥사는 감옥. 죄인들을 잡아 가두고 죄를 다스리는 곳이었어.”
“우와….”
아이가 눈동자를 반짝였다. 포도청을 꽤 오래 바라보던 아이는 고개를 들어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도현과 맞잡은 손을 흔든 아이가 밝게 말했다.
“이제 가요!”
“구경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지금은 일해야 해요!”
도현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 지었다.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은 채로 다정히 걸었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따라가던 도현의 매니저, 경찬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를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가 무척이나 부드러운 기색을 띠고 있었다.
아이를 저렇게 좋아했던가?
지금껏 경찬호가 봐온 도현과는 괴리감 있는 모습이 의아스러웠다.
가벼운 미소를 띤 얼굴과 부드러운 말씨를 보면 친절하고 호의적인 성격 같았지만,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 그게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늘 친절한 소년은, 그가 아는 한 먼저 사적인 선을 넘는 일이 없으니까.
적당한 선을 그어놓고 한 발짝 물러서서 상대를 관찰한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퍽 냉정하고, 개인주의적인 성격이었다. 하얀 낯에 떠오른 미소에 주의가 쏠린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초면인 상대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모습은 상당히 낯설었다. 먼저 손을 잡은 것도 그랬다.
도현이 자기 영역이 꽤 확실한 편이었다. 허락하지 않은 존재가 그 안에 무례하게 발을 딛는 걸 싫어했고, 반대로 남의 영역에 마음대로 침범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이렇게 단숨에 호의를 보이는 건 신주하 같이 대단한 배우를 만났을 때나….
…배우?
경찬호의 시선이 아이에게 닿았다가, 도현에게 닿았다. 검은 눈동자가 설렘으로 들떠 있었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배우라고 다 좋아하는 애는 아닌데?’
배우로서의 도현은 기준이 상당히 높았다. 도현이 눈을 반짝인 배우는 지금껏 딱 두 명이었다. 신주하와 강이든. 둘 다 연기력으로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배우였다.
경찬호는 말간 낯빛을 한 아이를 의뭉스레 응시했다. 저 애가 그 두 명의 급일 리는 없고, 특이점이라고 한다면, 도현의 아역이라는 부분이 전부….
“…….”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 그런 이유로 저렇게 굴고 있을 리가….
“…있네.”
생각해보면 도현이 누군가의 아역은 해본 적 있어도, 누군가 도현의 아역을 한 적은 없었다. 당연했다. 도현이 너무 어리니까. 그래서 의식하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저기서 촬영했던 드라마가….”
도현이 가이드를 자처하며 이것저것 설명해주고 있었다. 경찬호는 훈훈한 광경을 보며 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진실을 깨닫자, 저 상냥함이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늑대가 할머니 옷을 입고 빨간 모자를 속이는… 아, 아니야.
경찬호는 빠르게 불순한 생각을 지워냈다. 그럼에도 그 이미지는 그의 머릿속에 남아서 둥둥 떠다녔다.
* * *
“형이 엄마 역할을 할 거야. 연습해본 적 있지? 그대로 하면 돼.”
“네!”
아이가 양팔을 옆구리에 딱 붙여서 반듯이 섰다. 기합이 빡 들어간 모습에 도현이 웃음을 흘렸다.
“시작해보자. 대답 안 해도 되니까, 속으로 다섯까지 센 다음에 준비되면 시작해.”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속으로 숫자를 센 민은우는 기억하고 있는 대사를 뱉었다.
“어마마마!”
도현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조마조마한 눈으로 아들을 보고 있던 여성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 부르지 말거라.”
듣기 좋다고 생각했던 목소리에서 한기가 풀풀 풍겼다. 온기가 싹 가신 태도에 민은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이의 동요는 연기 도중뿐만 아니라, 장면을 마무리한 후 한 번 더 일어났다.
“잘하는데?”
단단한 얼음 껍질이 깨져나간 것처럼 매정하던 눈매가 가는 호선을 그렸다. 이중인격이 아닐까 싶을 만큼 급격한 변화였다. 아이는 잠시 적응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이다가, 뒤늦게 굳은 어깨를 사르르 풀었다.
“정말 잘했어요?”
“응, 좋았어.”
“헤헤.”
아이는 볼 우물이 생길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도현은 기세를 몰아 사근사근히 물었다.
“그런데 형이 은우한테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알려줄 수 있을까?”
이미 칭찬에 마음이 사르르 풀려버린 아이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저 할 수 있어요!”
“정말? 고마워, 은우야.”
…부업으로 어린이집 하나?
아이 돌보기만 몇 년 한 사람처럼 능숙했다. 도현이 델마 아카데미에서 도서부로 활동하며 갈고닦은 실력임을 알 리 없는 두 어른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러는 사이, 도현이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은우는 처음에 어마마마를 부를 때 무슨 생각을 했어?”
“어마마마를 봐서 좋아!”
“은우는 어마마마를 본 게 왜 좋을까? 방금 은우 연기할 때 되게 반갑게 말했잖아. 왜 그렇게 반가웠어?”
“어마마마가 저를 보러 와서요!”
“그래? 어마마마가 은우를 자주 보러 와?”
“어….”
해맑게 대답하던 은우가 주춤했다.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아이가 우물쭈물 말했다.
“…자주 왔어요?”
“자주 왔어?”
도현이 되묻자 고개를 휙휙 내저은 아이가 황급히 정정했다.
“아니요! 자주 안 왔어요!”
“자주 안 왔어?”
“네, 자주 안 왔어요. 그래서 오랜만에 봐서 기뻤어요.”
“그럼 은우는 어마마마가 오랜만에 은우를 보러 와서 기쁜 상태였겠구나. 그렇지?”
“네!”
“이걸 기억한 상태에서 다시 해볼까?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할 거야. 대본을 머릿속에서 지워. 생각할 건 딱 두 개야. 너는 어마마마를 좋아하고,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어마마마가 찾아와서 기쁘다는 것.”
도현은 전문적인 연기 선생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보다 유명할 수는 있어도, 학생을 가르치고, 이론을 전달하고, 체계적으로 학습시키는 건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도현이 해줄 수 있는 건 조금 다른 부분이었다.
“다섯 세고 시작하는 거야.”
“으, 으허….”
이상한 소리를 낸 아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입 모양으로 수를 세는 게 보였다.
조금은 느린 오 초 뒤, 장면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마마마!”
도현은 부러 길게 침묵했다. 가만히 쳐다보는 것에 당황하던 아이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슬그머니 그를 불렀다.
“형…?”
“은우야, 네가 생각할 건 두 개뿐이야. 그런데 지금 다른 생각 했지?”
아이의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자 도현이 싱긋 웃었다.
“괜찮아. 다시 해보는 거야. 자, 숫자 다섯 세고.”
“으에.”
이상한 소리를 낸 아이가 허둥대자 도현은 대신 카운트를 세주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울리자 희게 질렸던 아이는 모르겠단 심정이 되어 냅다 질렀다.
“어마마마!”
그 후로 반복이었다. 처음엔 당황해서 연기를 중단하거나 대사를 까먹던 아이는 어느 순간 제가 뭘 하든 상대가 받아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의 어휘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기이한 감각이었다. 물살을 따라 유유히 흘러가는 것 같으면서, 손을 마주 잡고 빙글빙글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은우의 눈이 반짝였다.
‘재밌어!’
몇 번의 반복이 이어졌다. 그럴수록 옆에서 지켜보던 여성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어마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난치시는 거지요? 네?”
여성이 눈을 끔뻑였다.
“어마마마, 무어라 말씀 좀 해주세요. 어마마마! 어마마마!”
연기 같지 않았다.
어색하다는 게 아니었다. 즉흥 연주를 듣는 것처럼, 무언가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생동감이 느껴졌다. 그녀가 막 그런 감상을 떠올렸을 때였다. 도현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해보니까 어때?”
“재밌었어요!”
홍조가 올라온 어린아이의 뺨 위로 햇살이 내렸다.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저도 모르게 미소 지은 도현이 생각했다.
‘성공한 것 같네.’
은우의 연기를 보고 도현이 느꼈던 것은, 딱 한 가지의 감상이었다. 연습 많이 했구나.
연기는 표현 예술이다. 그 부분에서 연기의 모순된 점이 드러났다.
연습하고 고민할수록 정교해진다. 하지만 생동감과 생명력은 줄어들게 된다. 연습을 많이 하면 강렬한 인상이 줄어들고, 그렇다고 연습하지 않으면 어설프고. 말 그대로 모순이었다.
도현은 그래서 카메라 앞에 서기 전까진 종이가 헐 정도로 대본을 보고, 분석했다. 모든 지문을 외워버릴 정도로 연습했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 선 순간 그 모든 연습을 지워버렸다.
‘예전엔 그럴 필요 없었지만.’
완전히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서 연기했던 과거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순간 도현은 연기하는 게 아니라 그 인물 자체가 되어버리는 거였으니까. 저 딜레마 자체가 성립이 안 되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까.’
나름의 차선책이었다.
생각을 마친 도현이 은우를 보며 말했다.
“지금 느꼈던 감정, 감각을 기억하면 전보다 연기하기 쉬울 거야.”
얼추 마무리되어가는 분위기에 여성이 얼른 끼어들어서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봐주실 줄은 몰랐는데….”
“아니에요. 덕분에 저도 재밌었어요.”
“그래도… 정말 감사합니다.”
같은 배역이라지만 은우와 도현은 천지 차이였다. 고작 몇 줄 나오는 게 전부인 은우와 도현은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도현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성심껏 도와주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성격까지 좋구나.’
감탄한 여성이 은우를 저렇게 키우고 말겠다고 다짐할 때였다. 덥석 도현의 손을 잡은 은우가 팔을 흔들어댔다.
“한 번 더 하고 싶어요!”
“아이고, 은우야. 선배님한테 그렇게 조르면 안 되지!”
화들짝 놀란 여성이 다급히 아이를 말리자, 도현이 그녀를 제지했다.
“하하, 괜찮아요. 그럼 한 번만 더 해볼까, 은우야?”
“넹!”
해맑게 웃는 아들의 모습에 그녀는 힘없이 손을 내렸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싶다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확실한 건, 학원 엄마들을 만나면 꺼낼 도현의 미담만 산더미처럼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 *
“도현이 네가 가르치는 것까지 잘할 줄은 몰랐어.”
“네? 저 띄워주셔도 은우 연기는 보고 갈 거예요.”
“…그런 거 아니거든. 그리고, 오늘 돌아갈 생각은 있었던 건 맞아?”
“형, 무슨 소리예요. 학생은 학교에 가야죠.”
뻔뻔한 표정만 보면 개근상 받은 모범생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온갖 이유를 대며 등교를 삼 일이나 지체한 장본인의 당당한 발언에 경찬호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뒤늦게 반박하려고 했지만, 도현이 갑자기 앞으로 튀어 나가며 불발되었다. 뭔가 싶어서 보니, 반대쪽에서 어린아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긴 옷자락이 발에 밟힐랑 말랑했다.
“조심해야지!”
황급히 달려간 도현이 타박하자, 배시시 웃은 아이가 양팔을 좌우로 들어 보였다. 옷차림을 자랑하는 모양새라서 도현은 놀랐던 것도 잊고 픽 웃고 말았다.
“저….”
낯선 목소리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도현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살짝 틀었다. 화랑 옷을 입은 남자 배우였다.
“이거, 애가 떨어트렸더라고.”
“아, 감사합니다. 은우야, 이거 봐. 뛰니까 물건도 떨어트리잖아. 다음부터 뛰면 되겠어, 안 되겠어?”
“안 돼영!”
대답은 잘한다.
도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금 물건을 주워준 이에게 감사를 표하자,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의 시선이 은우와 도현에게 번갈아 닿았다.
“음, 그런데 둘이 원래 아는 사이야?”
“오늘 처음 봤어요. 그래도 제 아역을 맡아줄 친구라서 그런가, 친밀하게 느껴지네요.”
호의를 베푼 사람이니 도현은 꽤 성의 있게 대답해주었다. 그러나 대답을 듣고도 궁금한 게 남아있었는지 남자는 미적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의아하게 묻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덥썩 물었다.
“저번에 그, 정희운은 아는 사이 맞지?”
“네, 희운이랑 아는 사이세요?”
“아, 하하,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근데 희운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친한가 보네.”
내내 친절하게 응수하던 도현의 입매가 조금 내려갔다.
이 사람 뭐지.
처음 본 사이인데 며칠은 만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런데 스몰토크 느낌이 아니라, 무언가를 유도하고 있는 거 같았다.
…기자인가?
도현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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