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Child Actor to a World Star RAW novel - Chapter (465)
제465화. 겨우내 웅크린 (23)
여전히 하늘은 환한데, 피부에 닿아오는 햇빛이 더없이 차갑게 느껴졌다. 도현은 무의식적으로 제 팔을 쓸어내렸다. 그럼에도 추위가 가시는 일은 없었다.
소년은 외곽에서 도로로 이어지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흰 눈이 신발 아래서 녹아내릴 때마다 생각의 파편이 이리저리 튀었다. 혼란은 잠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이올린 소리가 아슴아슴하게 멀어지고, 붉은 핏방울 대신 하얀 거리가 눈앞에 가득 들어찼다.
도현은 긴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자, 모자 아래로 언뜻 보이는 검은 눈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우울과 혼란이 사라진 두 눈은 삭풍이 부는 겨울처럼 사늘했다.
상관없어.
왜 거기에 있었는지, 왜 오래되지 않은 생화를 새로운 것으로 바꾸었는지, 왜 검은 옷을 입고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그러한 것들은 전부 상관없는 일이다.
정희운과는 달랐다. 도현은 그를 시기하고 원망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에게 책임이 없음을 인정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조금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았겠지.
도현은 정말로 원치 않는 것을 제 울타리 안에 들여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겨울바람의 물결이 멈추었다. 완전한 고요에 휩싸여, 도현은 작게 읊조렸다. 저 여자는 아니야. 겨울바람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검푸른 빛깔을 띠었다.
저 여자는 아니야, 확신하듯 한 번 더 말하고 나니 머리가 완전히 맑게 개었다. 얼음으로 만든 동상처럼 비인간적인 낯이 순식간에 열넷의 소년의 것으로 바뀌었다. 평소의 상태로 돌아온 도현은 의식적으로 검게 달라붙는 잔해를 털어내었다.
분노도, 동요도, 상심도 필요하지 않다. 그 모든 감정은 그 여자에겐 사치였다. 설령 그녀가 후회한다고 해도, 한참 늦은 위선은 어떠한 의미도 없다. 역겨운 자기 위로에 불과했다.
형이 양부모에게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는 건 불가항력이다. 도현의 삶에 형이 처음으로 온기를 드리웠듯, 형의 삶에 처음으로 따뜻한 손길을 내준 건 그들이었으니. 한겨울에 마주한 온기가 화인처럼 남아 그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건 당연했다.
하지만 도현은 아니다.
도현은 형이되, 형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 얄팍했던 온기를 지워버리는 것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을 되돌려받을 수 없는지 영영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 도현만큼은 선명히 인지했다.
당신은 그를 잃었어.
다시 택시를 잡은 도현이 향한 곳은 집이 아니라 소속사였다. 택시를 잡을 때 타이밍 좋게 소속사에게서 올 수 있냐는 연락을 받았던 것도 이유 중 하나이지만, 무엇보다 집에 가면 또다시 미국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였다.
“어, 수업은 어쩌고 벌써 왔….”
경찬호의 말끝이 애매하게 흐려졌다.
도현은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잘 아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각 잡힌 옷보다는 편안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의 옷을, 너무 어두운 색감보다는 밝은 색감을 즐겨 입었다. 입가에 항상 머무르는 은은한 미소도 그 일환이었다.
경찬호는 그것을 도현의 프로페셔널함으로 받아들였다. 이미지 관리도 연예인의 숙명이니까. 그러나 오늘의 도현은 완전히 그 반대였다.
온통 까맣고, 우중충했다.
검은 옷, 검은 모자, 그리고 웃음기가 없는 얼굴. 자다가 일어나서 보면 저승사자로 착각할 법한 음울한 분위기가 주위에 넘실대고 있었다.
“오늘 학교 안 갔어요.”
“안 갔다고? 어… 쉬는 날, 그런 건가?”
“아니요. 병결 처리했어요.”
“어디 아파!?”
경찬호가 놀라서 도현을 살펴보았다. 어깨를 약하게 쥔 채 꼼꼼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피부가 창백하긴 한데 그건 날이 추워 그런 거 같고… 일단 겉보기엔 괜찮은데 열이 좀 나나? 모자를 벗겨 온도를 재려고 하자 도현이 손길을 피했다.
“아프진 않아요.”
그럼 왜 병결 처리한 건데?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아무것도 묻지 말란 분위기를 풀풀 내뿜는 모습에 결국 말을 삼켰다. 물론 정말 이대로 둬도 되는가에 대한 고뇌는 존재했다.
도현은 경찬호의 고민에는 관심 없다는 듯, 소파에 가서 앉았다. 피곤한 숨소리가 몇 번 들린 다음에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래서 중요한 소식이란 게 뭔데요?”
“아, 그거.”
도현의 질문이 경찬호의 정신을 환기했다. 그는 결석에 대한 추궁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멋대로 빠질 애는 아니고.’
도현이 어디 그럴 애인가. 소년의 성실함과 책임감은 평균을 넘어선 수준이었다. 솔직히 도현이 멋대로 학교에 빠졌다고 해도 ‘그럴 만한 일이 있겠지’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지난 일 년간 거의 두터운 신뢰를 쌓은 경찬호가 납득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전화로 말해도 되긴 하는데… 웬만하면 직접 말해주고 싶었어.”
“뭐길래 그래요?”
“어제 KBN에서 연락이 왔거든.”
“KBN?”
도현이 되묻자 경찬호가 조금 상기된 기색으로 빠르게 말했다.
“응, 올해 연말 시상식에 와 달라고 부탁하더라!”
도현이 탄식했다.
연말 시상식. 벌써 그럴 시기가 왔구나.
그때 경찬호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건 아직 발표되진 않은 건데… 상 후보에 올랐대. 별일 없으면 수상할, 아니 솔직히 그냥 무조건 수상할 예정이고.”
이건 조금 재밌는 소식이다.
“어떤 상이요?”
도현은 자신이 상 받을 만한 일이 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일단 한창 화제인 ‘왕의 길’은 초반 몇 화짜리의 조연이었는 데다가, 심지어 종영도 안 했다. 그렇다면 가능성 있는 건 ‘구미호뎐’일 텐데….
‘수상은 이든 선배가 하지 않으려나.’
아무리 주연급의 출연이었다고 하나, 그게 로맨스 코미디인 이상 진정한 주연은 강이든일 수밖에 없다. 구미호뎐은 상당한 성과를 냈으니 아마 그가 이번 대상 후보이지 않을까?
도현이 생각에 빠진 사이, 흥분이 조금 잦아든 경찬호가 그의 눈치를 보았다. 약간 자신감을 잃은 기색이었다.
“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 청소년 연기상 후보야.”
“아.”
그게 있었지.
도현은 조금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제 나이를 실감했다. 영혼이 하나가 된 이후로 정희운을 너무 제 동생처럼 예뻐하다 보니, 본래 나이를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정신 차려야지.’
이러다 나중엔 사람들 앞에서 군대 얘기까지 꺼내게 생겼다. 물론 형은 콩쿠르 우승자로서 혜택을 받아 예술 요원으로 근무하긴 했지만. 아무튼 기초 훈련과 예비군 훈련까진 받았으니까.
도현이 자신의 나이를 머리에 박아넣는 사이 경찬호의 오해는 크기를 부풀렸다. 그는 아까의 신난 기색은 치운 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마음에 안 드나.’
어찌 되었든 제 배우가 수상 후보가 되었단 것에 기뻐했는데, 도현의 입장에서는 그리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강이든 배우보다 분량이 적은 것도 아니고 인기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지.’
오히려 화제성은 도현이 더했다.
그런데 나이 하나 때문에 누군가는 대상 후보, 누군가는 청소년 연기상 후보에 오른다. 강이든의 대상은 확실치 않은 사실이긴 했지만, 아마 도현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이상이 없을 시 수상까지 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기분 나쁠 만해.’
다시 생각해보니 그도 억울해졌다. 우리 도현이 뭐가 부족해서? KBN 쪽은 그렇게 융통성이 없나?
착잡해진 낯의 경찬호가 눈매를 찡그렸다.
“도현아, 기분 상해도 이해….”
“좋네요.”
“어?”
“네?”
두 사람의 의아한 눈동자가 맞닿았다.
“방금… 뭐라고?”
“좋다고 했는데요…?”
“기분 나쁜 게 아니라?”
“나쁠 게 뭐 있어요.”
쉬이 나온 대답은 진심처럼 보였다. 실내에 있다 보니 더운지 목도리를 끌어 내린 도현이 ‘무슨 문제 있냐’는 표정으로 경찬호를 응시했다.
도리어 답답해진 건 경찬호였다.
“너 정도면 더 좋은 상 받을 만하잖아. 근데 나이 때문에 청소년 연기상을 받는 건데, 안 억울해?”
“저를 너무 띄워주시는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경찬호가 단호히 부정했다.
눈앞에 있는 소년이 대단하다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본인은 부정하는 것 같긴 한데, 당사자를 제외한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경찬호의 진실한 표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도현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조금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억울해요.”
세상에 억울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겨우 그런 걸로 억울할까. 그 정도로 세심했다면 이미 억울함에 짓눌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을걸.
도현이 눈을 깜빡이며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좋은 일이잖아요. 축하 안 해주실 거예요?”
“…네가 이런 애란 걸 알아야 사람들이 그런 이상한 루머를 만들지 않을 텐데.”
작게 한숨을 내쉰 경찬호가 도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도현은 그 말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한층 노곤하게 풀어진 얼굴로 부드럽게 웃었다.
* * *
다음 날, 평소처럼 일어나 하루 더 쉬겠냐는 부모님의 제안을 거절한 후 학교로 향한 도현은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5반을 찾았다.
다행히도 5반에는 정희운이 있었다. 형의 기일이니 학교를 쉴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성실한 성격인 모양이었다. 도현이 5반 뒷문에 나타나자 희운의 짝꿍이 여기 와서 앉으라며 손을 흔들어댔다.
“고마워.”
의자까지 가져다주는 친절함에 웃으며 말하자, 소녀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어디 아프냐고 묻자 얼굴은 더욱 새빨간 토마토가 되었는데, 그녀를 구해준 건 정희운이었다.
“어, 무슨 일이야?”
“그냥 심심해서 놀러 왔어.”
희운이 도현의 주의를 끌어가자 소녀가 안도의 숨을 터트렸다. 희운은 도현의 가벼운 대답에도 금방 수긍했다. 최근 도현이 이런 식으로 나타난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적응해버린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상황이 이상하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가장 이상한 건 그거였다. 이렇게 찾아와 놓고선 희운이 말을 걸기 전까지는 입을 꾹 다물고 구경만 하는 도현의 태도 말이다.
심심하다면서 말의 앞뒤가 다르단 걸 아는지, 모르는지. 도현은 흥미로운 눈초리로 희운이 하는 양을 구경했다. 그러면 희운은 무언가 건실하고 생산적인 행동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숙제하거나, 교과서를 펼쳤다.
이게 대체 뭐지.
희운은 혼란을 느끼면서도 오늘도 문제집을 펼쳤다. 눈앞에서 숫자가 외계어처럼 꼬부랑댔다. 분명 배웠던 거 같은데, 하나도 모르겠다. 그가 버벅대고 있자 도현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식을 여기로 대입하면 돼. 응, 그렇게. 잘하네.”
AMC 만점자의 가르침은 참 유용했다. 요즘 문제집을 풀 때마다 동그라미 개수가 느는 걸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좋은 일 같긴 한데… 아니, 정말 좋은 거 맞나. 희운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다음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현은.
‘모자란 게 뭐지?’
손을 들어 턱을 괴는 척 입가를 가렸다. 웃는 걸 들키면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쉬는 시간마다 허투루 시간을 쓰지 않고 공부하는 걸 보니 걱정이 되면서도, 동시에 흐뭇해졌다.
내 동생이 이렇게 똑똑하다.
어제 하루 동안 몰아쳤던 충격이 모조리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역시, 이게 힐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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